예상하지 못했던 책의 방향

일곱 번째 일지: 2월 8일, 세 번째 대면 모임 준비

by Su

2월 대면 독서모임의 장르는 경제/경영으로 정해졌다. 나를 포함한 일곱 명이 아래 책들을 추천했다.

홍춘욱 작가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 오스카 파리네티 작가의 <세렌디피티>, 코트라의 <2026 한국이 열광할 세계 트렌드>, 헨리 A. 키신저, 에릭 슈밋, 대니얼 허튼로커 공저의 <AI 이후의 세계>, <EBS 다큐 프라임 자본주의>, 얀 칩체이스 작가의 <관찰의 힘>, 김승호 작가의 <돈의 속성>.


이번 달부터는 제비 뽑기가 아닌 투표로 책을 선정하기로 했다. 투표는 익명으로, 중복이 가능하게 했다. 추천된 책들 중에 읽어보고 싶은 책이 여러 권일 수도 있고, 중복이 가능한 와중에도 투표하고 싶지 않은 책이 있을 테니 익명성에 기대 자유롭게 투표하라는 마음이었다. 투표 결과는 헨리 A. 키신저, 에릭 슈밋, 대니얼 허튼로커 공저의 <AI 이후의 세계>로 정해졌다. 개인적으로 투표 결과에 조금 놀랐는데, 사람들이 경제/경영 장르에서는 재테크와 관련된 책에 관심이 더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돈의 속성>이나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0대 사건으로 보는 돈의 역사>처럼 재테크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을 법한 책이 선정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AI 이후의 세계>가 선정된 것을 보고 확실히 많은 사람들이 문명을 바꾸는 새로운 기술인 AI에 대한 관심이 정말 많구나 생각했다. 지금 우리가 궁금한 것은 돈의 기술이 아니라 문명을 바꿀 기술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선정된 뒤 다음 달 독서모임 진행 방식을 공지했다.

1️⃣ 책 추천자가 도서 선정 이유 얘기해 주기

2️⃣ 책 전반에 대한 감상 나누기

3️⃣ 가장 마음에 닿았던 구절 또는 문장 공유하기

4️⃣ 책 내용 OX 퀴즈: 다음 달에 참석해 주실 분들은 책을 읽으시면서 찾은 유용한 지식(책 안에 있는 내용 한정)에 대해서 2개씩 OX로 퀴즈문제를 만들어서 와주세요! 참석자들이 돌아가면서 문제를 내고, 가장 많은 답을 맞힌 분에게 소소한 우승상품을 드릴 예정입니다.

5️⃣ 다음 달 도서 장르 선정


1번부터 3번, 5번 항목은 매달 동일하게 진행되는 내용이고, 4번 항목은 매달 책의 카테고리와 내용에 맞게 바꿔나가는 특별 활동이다. 책을 읽어보진 않았지만, AI기술에 대한 설명과 향후 미래를 어떻게 대처해나가야 할지에 대한 내용일 것이라 짐작했기 때문에 OX퀴즈를 진행하기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가자들 대다수에겐 배경지식이 많지 않은 분야에 대한 책일 테니 (배경지식이 없을 것이란 건 첫 만남 때 각자의 직업에 대해 얘기를 했기 때문에 참가자들의 직업을 바탕으로 추론한 거라 고정관념이 들어있긴 하다. 의외로 개인의 관심분야가 그쪽이라 지식이 많을 수도 있으니까.) OX 퀴즈를 한다고 하면 책에 집중이 안돼서 정신이 아득해질 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퀴즈에 상품이 빠지면 아쉽기도 하고, 소정의 상품이지만 이걸로 독서모임에 애정이 한 스푼이라도 더 생기게 된다면 의미 있고, 작지만 선물을 받으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우승상품을 준비할 예정이다! 파리의 독서모임이라는 특징을 살려서 파리에서 구할 수 있는 책과 관련된 물품을 선물로 줘야지 생각했다. 선물의 1순위 후보는 파리의 한 길거리 서점에서 봤던 책 모양의 배지다. 모비딕, 1984, 폭풍의 언덕처럼 유명한 고전 이름이 책등에 쓰여있고, 책 앞 표지면에는 책 내용을 이미지화한 것과 저자의 이름이 써있다. 이를테면 모비딕 배지는 하늘색에 책등에는 모비딕이 쓰여있고 책 앞 표지면에는 고래 그림과 함께 Herman Melville이 쓰여있다. 이 배지 보자마자 책 덕후 취향 100000% 반영한 디자인이라 홀린 듯이 사고 싶었는데 작고 귀여운 사이즈에 비해 가격이 10유로나 해서 포기했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예쁘고 마음에 쏙 드는데 내 돈 주고 사기엔 조금 비싸다고 생각이 드는 것'을 선물 주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취향이 가득 담긴 무용한 것이면서도 해외 사는 사람들에겐 버겁지 않을 만한 무게의 것을 선물하는 걸 좋아하기 때문에 독서모임 우승상품으로 최적화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면서 'OX퀴즈를 진행하기 알맞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나의 추측이 아주 빗나갔음을 알게 됐다. 경제/경영서라기보단 과학문명철학서에 가까운 책이라 AI에 대한 설명은 20% 정도 되는 느낌이고 책의 대부분은 AI로 야기될 사회문제들에 대한 행동촉구와 이를 설명하기 위한 인류역사설명이 대부분인 책이었다. 오히려 토론을 하기에 적합한 책이라서 참가자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고 싶은 주제를 선정해서 이야기 나누면 좋을 책이었다. 앞으로는 매달 진행되는 특별 활동은 책을 내가 먼저 읽어보고 공지해야 책에 더 적합한 활동을 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것을 깨달은 시점에는 공지를 바꿀 수도 없었는데, 그 이유는 모임 주간을 착각해서 2주 남았다고 생각한 시점에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날짜를 다시 보니 일주일 남은 시점이었다!!!! 책을 벼락치기로 읽고 토론이 더 적합하다고 깨달았을 땐 이미 독서모임 하루 전 날이었기 때문에 재공지하기엔 너무 늦은 시점이었다. 취미로 진행하는 독서모임이지만 기왕 하는 김에 잘하고 싶으니까 앞으론 모임에서 선정된 책을 첫 2주 안에 읽고, 모임이 2주 남은 시점에 활동안내를 할 예정이다.


사실 독서모임이 아니었으면 나는 이 책을 읽어볼 생각을 전혀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찾아보지도 않았을 분야다. 독서모임을 통해 나의 한정적인 관심사를 벗어나 새로운, 그리고 이제는 내 삶과도 깊이 맞닿아 있는 중요한 분야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익숙한 주제 안에서만 생각하고 머무르려 한다. 그러나 우연처럼 찾아온 한 권의 책이 시야를 넓히고,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방향으로 생각과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기도 한다. 이 책이 나에게 그랬다. 지금까지의 관심과 선택이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했던 거대한 세계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래서 책을 덮은 뒤에도 여운이 오래 남았다. 나의 관심사와 상극인 책을 다 읽어냈다는 만족감보다는 (읽었을 뿐 소화하진 못했다.), 앞으로 더 많은 것을 알아가고 싶다는 다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어쩌면 독서모임의 가장 큰 의미는 이렇게 예상하지 못한 변화의 문을 열어준다는 데 있는지도 모르겠다.

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