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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된 노트북으로 뭘 할 수 있는데

by Johnstory

2012년 10월 삼성에서 출시된 NT900X4D 모델을 여전히 사용 중이다.


아내가 결혼 전에 구입해서 애지중지 아끼며 쓰던 노트북을, 내가 은행을 퇴사한 이후로 10년째 사용 중이다. 더불어 노트북은 출고시점 기준으로 13년이 되었다.


내 이직의 역사를 함께 했다.

무려 세 곳의 직장에서 나의 업무를 돕고, 개인적인 일들을 도왔다. 최근 발열이 심해지고 버벅거리는 탓에 강변 테크노마트에 아는 사장님을 찾아가 약간의 손을 봤다. 이전에 비해 쾌적해지긴 했으나 최근에 출시된 제품들에 비할 바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글을 쓰고, 유튜브로 음악을 들으며 문서작업을 하고, 가끔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는 나의 예상가능한 패턴으로는 문제 될 것이 없다. 그럼에도 자꾸 새것을 사고 싶어졌다. 지난 6개월간 새로운 노트북 구입시도를 했으나 몇 번의 우여곡절 끝에 반품을 하고 환불을 받았다. (매우 긴 스토리가 있으나 특정 기업 및 제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이 있어 여기에선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다시 기존의 노트북으로 돌아오니, '구관이 명관이다'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더 아끼게 된다. 키스킨 없이, 보호필름도 없이 13년을 잘 버텨줘서 고마웠다.



새벽러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미니멀리즘을 해보자고 작심하여 실행에 옮기기 시작한 것이 올해 초이다. 병적으로 끌어안고 있던 책들을 하나하나 분류하여 되팔거나 소장하거나 일부는 폐기했다. 이제 100권 이하로 줄어든 책을 다시 줄여야 하는 어려운 작업이 남아있다. 왜 줄여야 했던가, 생각해 보면-'책은 버리는 것 아니다'라는 어디선가 들어온 이야기와 내 손때가 묻어있는, 이것저것 메모하고 흔적을 남겨가며 읽어가는 나의 독서습관 탓에 감정과 감각이 담겨있는 책들을 '처분'해야 함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나의 미니멀리즘 취지를 생각해 보면, '중요한 것만 남기는 가벼운 삶'이다. 그러니까 필요한 것이 아닌 중요한 것이다. 필요는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모두 다 필요하다고 볼 수 있지만, 중요성은 다르다. 곤도 마리에가 말한 '설레지 않으면 버려라'에서 나온 것처럼 설렘은 중요성과도 연결된다. 물론 중요한 모든 것이 설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설렘을 주는 대상은 내게 중요한 것이 맞다. 여기에서 고민이 생긴다.



필요가 아닌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다양한 도구들을 보유하고 있다면, 그 필요가 발생했을 때 언제든 손쉽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성에 초점을 맞추고 도구를 보유하고 있다면, 필요가 발생했을 때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 현재 내가 갖고 있는 것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긴 하나, 맥주병 오프너가 없을 때 숟가락으로 따는 것이다. 13년 된 노트북은 빠르지도 않고 가끔 창을 여러 개 띄우고 작업을 할 때 음악이 끊긴다거나 버벅거리는 현상이 발생한다. 이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이 노트북을 활용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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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된 나의 노트북, NT900X4D-A57




오랜 시간 나의 커리어를 함께하고 지켜준 친구라 애착이 있다. 내가 사용하는 범위에서 약간의 느림을 수용하면 문제없이 사용이 가능하다. 새 노트북을 사는, 쉬운 선택을 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이 노트북은 어떻게 처분할 것인가? 구입이 답은 아니다. 세월을 함께 한 물건에는 감정이 담긴다. 키보드를 타건 할 때도 특유의 감각이 살아나기도 한다. 무엇보다, 편하다. 이것저것 펼쳐놓고 작업할 깜냥이 안 되는 노트북이다 보니, 한 가지 작업에만 집중하게 된다. 음악을 들으며 글을 쓰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요즘은 발열이 심하다 보니 거치대에 올려두고 사용하고 있다. 아, 함께 여행 갔다가 저 작은 블루투스 스피커에서의 음질이 너무 좋다고 연발했더니 선물로 준 블루투스 스피커도 제 역할을 다하는 중이다.



글을 쓰고 독서노트를 기록하는 것에 전혀 문제는 없다. 살펴보면 더 오래된 노트북으로 글을 써가는 많은 분들이 계실 것이라 생각하기에, 이게 뭐 대단한 일이라 여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제는 마음을 나누고 나의 인생을 함께하는 대상이라는 감정이입이 생겨나는 지금의 상황들에 대한 기록을 꼭 남겨두고 싶었다.

앞으로 얼마나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잘 관리하고 필요하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또 조금씩 손봐가면서 더 잘 써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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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년 된 노트북으로, 나는 지금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기록들을 남겨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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