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g 남짓한 핸드폰 안에 들어있는 무게들

by 앨리스

몇 년 전에 본 유튜브 영상 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영상 주제는 미니멀리스트로 살기. 영상 속 남자는 100가지의 물건으로 한 달을 살아보겠다고 말하며 가방 하나에 그가 살아가기에 필요한 것들을 챙겨나갔다.


영상 말미에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 어떤 것 보다도 핸드폰이 가장 미니멀한 삶에 도움이 된다'


이 영상을 본 건 해외 생활을 시작하기 전, 그러니까 미니멀리스트로 살기 전이다. 당시 그의 말을 들었을 땐 그저 '그렇구나'하고 넘겼을 뿐이지만, 나는 이제 그의 말을 그 누구보다도 잘 이해한다. 핸드폰과 미니멀리즘은 정말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내 핸드폰에는 많은 것들이 들어가 있다.


연락처, 음악, 사진은 물론이고 온갖 중요한 서류들 역시 대부분 그 안에 들어있다. 해외에 살다 보면 나의 신분과 비자를 증명해야 할 때가 종종 있는데, 그럴 때마다 나는 핸드폰 파일을 열어 서류를 찾는다.


돈 역시 마찬가지이다. 애플페이부터 시작해서 대부분의 은행 업무는 이제 핸드폰으로 처리가 가능하다. 노르웨이로 교환학생을 갔을 때는 현금 한 번 뽑지 않고 비대면으로 설치한 트래블 카드로 모든 결제를 해결했다.


대학에서 나눠주는 읽기 자료나 논문도 실물로 들고 있던 적이 없다. 학교로 향하는 내 가방에 전자기기만 들어있는 건 이제 너무나 당연하다.


휴대폰 덕에 이민용 캐리어 하나는 거뜬히 채울 짐을 고작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전자기기로 가지고 다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보면 핸드폰 그 자체가 어찌 보면 미니멀리즘의 상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이 질문은 물론 부피에 대한 것은 아니다. 미니멀리즘의 정의에 대한 질문이다.


지난 화에도 언급했듯 미니멀리즘은 나에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들은 줄여가자는 삶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핸드폰은 결코 그 태도를 지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반대 방향으로 향하게 한다.


핸드폰이 담고 있는 수많은 것들은 육안으로 보이지 않는다. 폴더 어딘가, 어플 어딘가에 켜켜이 쌓여있을 뿐이다. 무게를 느끼지 못하니 버려야 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저 축적될 뿐이다.


한 번은 사진을 찍으려 카메라 앱을 열었다가 저장공간 부족으로 사진을 찍지 못한 적이 있다. 불필요한 어플들을 지우는 것에도 한계가 있어 사진첩에 들어가 사진과 영상을 지워야 했다. 그곳에는 단 한 번도 다시 보지 않은 스크린 샷과 사진들이 가득했다. 그 하나하나를 다 솎아내는 것에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려 사분의 일도 채 지우지 못한 채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단순히 용량의 문제만은 아니다. 나는 종종 유튜브를 보거나 노래를 들을 때 마음에 드는 것들에 '좋아요'를 눌러둔다. 언젠가 다시 보기 위함이다. 하지만 몇 달 뒤 그 목록을 다시 열어보면 처음 보는 듯한 영상과 노래가 꽤 많다. 가끔은 좋아요를 눌러둔 영상들이 모두 같은 제작자에서 나온 것임을 뒤늦게 깨닫곤 한다.


핸드폰은 그렇게 나를 미니멀리스트라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하지만 실제로 나는 그 안에 끝없이 쌓이는 것들을 제대로 기억하지도, 다시 보지도 못한 채 살아가고 있다.


그게 뭐가 문제일까 싶다가도 가끔은 내게 남아있는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릴 적 기억 중 가장 좋아하는 장면 하나를 고르라면 단연 가족 여행을 가는 차 안에서의 기억이다.

차 문에 기대 잠을 자다 느지막이 잠에서 깨어나면 차 안에서는 항상 7080 팝송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 노래들은 아버지가 cd에 구워 놓은 것으로, 항상 같은 노래들이 반복해서 재생되곤 했다. 몇십 곡에 다다르는 곡들이지만 지금도 그 노래들은 따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 노래들을 들을 때면 어릴 적 추억이 떠오르곤 한다.


내 핸드폰에도 수많은 노래 재생목록이 있다. 대부분은 내가 만든 것이라기보다는 어플이 내 취향에 따른 곡들을 모아 만든 것이거나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것들이다.


각각의 플레이리스트는 서로 다른 장르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운동할 때의 플레이리스트, 과제를 할 때 틀어놓는 플레이리스트, 이동할 때 듣는 플레이리스트 등, 수백수천 가지 곡들이 그 안에 들어가 있다. 물론 그 안에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들어가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래는 그저 내가 좋아할 법한 분위기로 당장의 공간의 소리를 채울 뿐 기억에 남지 않는다. 그저 그 순간에 스쳐 지나갈 뿐이다.


이상하게도 내가 소유한 것들은 점점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 기억에 남는 것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보이지 않는 곳에 쌓아둔 것들은 결코 나의 것이 되지 못한 채, 그저 핸드폰 데이터 어딘가에 처박혀있다.


어쩌면 핸드폰은 내 삶의 부피뿐만 아니라, 그 속을 채우는 삶의 밀도 역시 미니멀하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건의 무게가 줄어든 만큼, 내가 간직해야 할 기억의 무게마저 너무 가벼워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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