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것이 점점 사라지는 시대에 대하여

소유하지 않는 소비와 선택하지 않은 취향

by 앨리스

나는 소설을 좋아하는 아이였다. 어느 정도였냐면, 공부하는 척하며 교재 밑에 책을 숨겨 읽다가 부모님과 선생님에게 걸려 여러 번 혼쭐이 나기 일쑤였다.


드라마나 영화도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영화는 대사를 달달 외울 만큼 수십수백 번 돌려봤고 대여섯 개가 넘어가는 미드 시리즈를 일주일에 전부 몰아보며 밤을 새기도 했다.


책은 대개 도서관에서 빌릴 수 있었기에 구하는 것에 큰 문제는 없었다. 문제는 영상물이었다. 당시엔 스트리밍 서비스가 발달되지 않았기에 영화 하나를 보기 위해서는 영화관을 가거나 파일 구매를 위해 몇 천 원에서 만원 가량을 지불해야 했다. 고작 초등학생에서 중학생 남짓한 나이었던 나에게 그 정도의 큰돈은 없었다.


그렇기에 부끄럽지만 고백하자면 당시 인터넷 어딘가에 올라와 있던 한국어 자막이 달린 영상을 찾아보는 것이 나의 일상이었다. 그땐 그게 불법인지도 몰랐다. 그저 한국어 자막을 달아준 이름 모를 이에게 감사하며 아무 생각 없이 드라마를 시청했다.


내가 해외로 나갔던 즈음에는 이미 영상이나 책 스트리밍 서비스가 보편화되었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책을 몇 권 가져가긴 했지만, 몇 달이면 모두 닳도록 읽어 금세 질릴만한 정도의 양이었다.


해외 이곳저곳을 다니며 미니멀리스트로 살아가는 나에게 스트리밍 서비스는 그 무엇보다 감사한 서비스다. 부피나 용량에 구애받지 않고 전 세계 어디서든 보다 많은 콘텐츠를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이것들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낀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창작물 하나에 대한 애정이 점점 작아지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땐 콘텐츠 하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길었다.


지금의 나는 그저 플랫폼에 들어가 알고리즘이 나의 취향일 것으로 추측하는 몇 가지 추천 목록을 훑어보다 그중 아무거나 골라 일단 보거나 읽는다. 그러다 첫 몇 분 간 몰입이 잘 되지 않으면 그냥 다른 것으로 넘기곤 한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일단 새로운 책을 읽기 위해선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야 했다. 마음에 드는 제목과 표지의 책을 발견하면 뒤에 적힌 추천사, 책의 앞부분 조금, 중간 부분 조금을 읽었다. 그렇게 그 책이 조금 마음에 든다 싶으면 그 자리에서 모두 읽었다. 그러다가 그 책이 계속 생각나면 몇 주 혹은 몇 달 뒤에 그제야 책을 내 손에 넣고 책장 한켠에 고이 모셔두곤 했다.


영화나 드라마도 비슷했다. 누군가가 블로그나 카페에 적어둔 긴 추천글이나 티저 영상, 혹은 이미 어느 방송사에서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의 중간 즈음을 우연히 보며 그 작품을 볼지 안 볼지를 결정해야 했다. 그러다 정말 마음에 드는 영화나 드라마가 있으면 돈을 지불하고 영상 파일을 구매했다. 집 컴퓨터에는 '영화', '한국영화', '외국영화'라고 적힌 폴더가 바탕화면 한 구석을 차지했다.


지금의 나는 보다 훨씬 더 많은 콘텐츠를 언제 어디서든 소비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그것들을 그저 밥친구나 시간 때우기 용으로만 소비하게 된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첫 화면에 보이는 몇몇 콘텐츠들 위주로 소비를 하다 보니 예전에 비해 내 취향의 폭도 점점 좁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결국 나는 이전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나, 정작 그 무엇 하나도 진심으로 소유하지 못하고 있었다. 비단 파일이나 종이책 같은 물리적인 형태뿐만 아니라 그 콘텐츠를 향한 애정조차도 마찬가지다. 언제든 다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결국 아무것도 끝까지 보지 않아도 됨을 내포하고 있다


미니멀리즘은 단순히 물건의 개수를 줄이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에게 필요한 것만 남기고 불필요한 것들은 줄여가자는 삶의 태도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미니멀리즘 한 삶에 가장 유용해 보이는 스트리밍 서비스들은 역설적이게도 나를 그 본질에서 멀어지게 하고 있다. 물건의 가짓수는 줄여줄지언정, 정작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소유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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