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벙커의 은밀함

관람객이 주체가 되어 정의하는 공간

by zo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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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MA벙커의 2018년 상반기 기획 전시 <관객 행동요령>은 벙커라는 공간의 특성과 본질에 집중해 여러 작가들의 새로운 해석, 그리고 관람객이 참여해 공간의 정체성을 ‘점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독특한 컨셉으로 진행된 전시이다. ‘벙커’라는 단어가 주는 일반인의 접근이 어려울 것 같은 인상과 평소 늘 지나다니던 도심의 지하에서 발견되었다는 은밀함이 많은 이들에게 관심을 끌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그런 호기심에서 첫 영감 모임의 장소를 이 곳으로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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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종이와 몇 가지 색의 종이테이프들, 마블 스펀지로 그 공간을 점유하라는 발상은 ‘벙커’라는 공간의 역사적인 무게와 흔적을 효과적으로 지워낸다.(퍼포먼스-김정모) 15센티미터가량의 타일로 된 바닥과 노출된 파이프들이 흰 페인트로 단정히 칠해진 천장은 상상 속의 벙커에 대한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인데 이 효과적인 장치들이 이 공간에 대한 상상력을 더한다. 실제로 내가 방문했을 때 자연히 어떤 현대미술 작가의 작품이려니 하고 유심히 감상했던 작품이 사실은 몇 시간 전에 그 공간을 점유했던 관람객들의 작품이었다. 지금은 막힌 통로 계단에 금종이가 살짝 열린 체 덮여있고 그 안을 설명해주듯 ‘Utopia is here’라는 글씨가 쓰여있다. 들여다보니 그 안엔 네모 반듯한 마블 스펀지가 있었다. 유토피아가 이 안에 있다고? 핵전쟁이 지나간 미래의 어느 날 벙커 안에 갇혀있던 미쳐버린 사람이 쓴 글인가 싶기도 하고 유토피아가 바로 이 지하에 있었다는 말인지 하는 이런 저런의 생각을 하며 조금 더 올라가 보니 막혀있는 계단의 끝부분에서 버스 안내방송이 들린다. 익숙한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보니 원래 이 지하 벙커의 입구가 여의도 환승센터의 2번 승강장이었다는 것을 떠올린다. 내가 집에 가려고 늘 버스를 기다리던 그 승강장 아래에 서서 가만히 방송 소리를 듣자니 감회가 새로웠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2.jpeg 크리스 쉔의 <루메(오토)> 자동 보안등이 깜빡거리면서 다양한 모양의 그림자가 생겨난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25.jpeg <구는 전개도가 없다> 윤지영 작품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27.jpeg 멋지다고 생각했던 설치물. 작품은 카데르 아티아의 <무제>


이렇게 이 전시는 계속해서 이 공간에 대해 다양한 층위의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실제로 전시 공간은 그다지 넓지 않았고 벙커의 역사를 말해주는 전시관을 빼면 거의 통으로 한 방 정도의 크기로 돌아보는 데 20분 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영상 작품을 감상하고 동행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해서 1시간이 넘는 시간을 벙커에 있었지만 관람을 마치고 보니 이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오랜 시간을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워했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jpeg 8개 작가의 작품과 계단 안쪽 역사 전시실로 이루어진 벙커 내부


이 전시가 지루하지 않은 이유는 공간을 ‘점유’했던 관람객들의 흔적을 계속 쫓아갈 수밖에 없는 구성에 있다. 관람객(나)과 작가 사이의 소통보다 관람객(나)과 벙커(전시 공간) 사이의 소통이 더 크게 이루어지는 느낌. 실제로 전시를 보고 나오면서 책자를 읽어보니 내가 가진 느낌처럼 벙커가 가지는 무거운 역사적 개념인 ‘엄폐호’에서 벗어나 관람객 각각의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했다는 설명이 있었다. 기획 자체는 역사적 맥락을 아예 배제한 다른 층위의 생각을 원한 것 같지만 그러한 상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순 없었다. 독재 정권과 비밀 벙커라는 단어는 너무나 흥미로우니까?


#1 표민홍의 작품들은 지하벙커를 탐험하는 안내서 같은 작품이었다. 들어가도 되는 곳인가 망설여지는 복도에는 표민홍의 네온사인 작품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인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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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끝엔 엘리베이터가 있는데 실제론 가동되지 않고 있는 과거의 엘리베이터였다. 이 전시장과 전시의 가장 재미있는 포인트가 바로 이 것이다. 이 것이 전시의 일부인지 아니면 그냥 지하벙커의 일부인지 잘 모르겠는 것. 과거에 존재했던 플러그와(살짝 누런) 새로 전선을 배치해 설치한 새로운 플러그가 있고 과거 이 벙커를 만들었던 누군가의 권력자가 사용했던 방의 문의 손잡이는 현대의 것이지만 계단은 과거의 것이다. 전시장 자체가 흰 도화지여야 한다는 생각을 지우고 맥락이 있는 공간에서의 전시가 오히려 더 좋은 전시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아 참 멋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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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습기. ‘지하’라는 공간의 숙명적 특성은 바로 습기이다. 표민홍의 젖어도 되는 종이로 만든 작품들은 이 습기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작품이다. 나는 안타깝게도 전시 첫날 방문해 이 종이의 변화 모습을 보진 못했지만 실제로 긴 전시 기간 동안 이 작품은 변화할 것이고 어떻게 변화할지는 작가조차도 모른다. 멋진 것 같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6.jpeg 문구 내용 자체도 재미있다


#3 에피 앤 아미르의 영상은 <집들이 01>과 <연상 기억 체조>로 나뉜다. <집들이 01>에서 에피 앤 아미르는 우리의 산책을 안내하는데 장소가 특별하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벙커 ‘에이알 케이(ARK)’. 이곳 또한 여의도 지하벙커와 유사한 역사적 맥락을 갖는다. 군사 독재정부 당시 원폭 전쟁의 날을 상정하고 건설되었다는데 지금은 전시 공간으로 활용될 계획을 가지고 있다는 설명이 나온다. 이 공간은 꽤 우리의 상상 속에 있는 지하 벙커의 모습과 유사한 편인데(여의도 지하벙커에 비해) 이 남자는 ‘기억술’에 기인해 이미지를 창조해낸다. 개념이나 단어를 공간에 각인해 기억을 하는 고대의 기억술이라고 하는데 주인공인 안내자는 사람들에게 페인트 칠을 해 각인시키기도 하고 빈 통로에 말을 만들어내기도 없애기도, 다시 물고기를 만들어내기도 없애기도 한다. ‘공간과 이미지’를 연결시키는 이 기술은 집단적인 기억이 구축되고 소비되는 과정이 공간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개념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이 개념 자체보다 흥미로운 건 이 영상을 여의도 지하벙커에서 감상하고 있다는 점! 나는 이 지하벙커라는 ‘공간’에서 어떤 주체로써 기억을 형성하고 공간을 정의해낼 것인가 라는 생각을 들게 하는 부분이었다. 나의 능력의 한계로 내용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전시 전반에서 관람객이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작품을, 그리고 지하벙커를 감상하길 바라는 의도가 느껴졌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3.jpeg 역사 전시실 안에 있던 VIP의 화장실.

원래는 칸막이가 설치되어 있었는데 지하벙커가 발견 당시 무릎 높이까지 물이 차있어서 손상된 상태. 70년대에 만들어지고 80년대 이후까지 관리된 것으로 추측되는 지하벙커라서 이 곳에 있는 변기나 세면대 소파 같은 것들은 모두 그 당시 신식이거나 고급의 물건이라고 한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5.jpeg 앞서 언급했던 옛 '플러그'와 새로운 '플러그' 이런 소소한 요소들이 전시에 재미를 더한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3.jpeg 전시장을 나가며 발견한 표민홍 작가의 매트 작품

앞서 말했듯이 표민홍 작가의 작품들이 전시장 곳곳에서 재미를 더해준다. 문구들도 재미있고 이 전시 전체의 맥락에서 고민을 한 흔적이 보인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6.jpeg 여의도 지하벙커가 SeMA 전시실로 탄생하기 위한 준공 표지판

이 전시장의 매력은 백지의 전시장이 아닌 것. 이런 소소한 것까지 자꾸 관심이 간다.


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0.jpeg VIP실에서 발견된 누군가의 '대통령'이 앉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파

우리가 상상하는 그 누군가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고급 소파. 물이 차있었기 때문에 천은 부식되어 사라졌고 프레임만 재활용해서 관객들이 영상작품을 볼 수 있는 소파로 이용되고 있다. 역사적 소파에 앉아 그 역사를 소재로 하는 손광주의 <거울 없는 방>을 관람하는 것은 또 느낌이 새롭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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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Photo_2018-05-07-18-48-39-17.jpeg 소파가 매우 푹신했음


브런치의 첫 글은 어린이날 다녀온 첫 영감 모임의 감상문이 되었다. 어쩌다 보니 시작하게 된 것 같지만 사실은 몇 년째 생각하고 2018년을 시작하며 꼭 해야지! 결심했던 것인데 초여름의 바람이 느껴지는 5월에 시작하게 되어 버렸다. 쓰다 보니 길고 지루해진 것 같은 나의 글이지만 앞으론 내가 보고 느끼고 살아간 감상과 신나는 감정을 차곡차곡 정리해보려 한다. 변화하고 성장하는 나를 만들기 위한 결심의 시작인 만큼 앞으로 한 달에 2번은 하나의 글이 올라올 예정이다. (강씨도 물론 그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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