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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로 Jul 15. 2024

<지구 최후의 밤>

필감(비간) 감독, 2018

필감 감독의 <지구 최후의 밤>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10편의 영화에 들게 될 것이 분명하다.


도대체 스토리를 따라가기도, 나중에 재구성하기도 어려운 이 영화는 뭐라 형언하기 어려운 분위기에 취하는 것만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어제 3번째로 이 영화를 보았지만 여전히 플롯을 정확히 알지 못하겠다. 결국 위키피디아가 정리한 플롯을 읽어보았지만, 휴~~ 여기에도 오류가 여기저기 보였다. 그래서 결국 영화를 여기저기 앞으로 뒤로 돌리며 자세히 살펴보았다.


<화양연화>의 경우 플롯과 시간을 따라가려면 장만옥이 입은 옷과 여러 소품들까지 정신 바짝 차리고 보아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한두 번 봐서 모든 내용을 정확히 알기가 힘들다. <지구 최후의 밤>은 이보다 더한 경우이다.


일단 이 영화는 거의 정확히 반반으로 전반과 후반으로 나뉘는데, 전반은 '기억'이고 후반은 '꿈'이다. 전반은 시간의 마구 뒤섞여 있어서 주인공 뤄홍우의 머리카락(검은 머리인지, 새치가 있는 머리인지)과 구레나룻을 보면서 대략 10년쯤으로 생각되는 시간상의 전후를 구분해야만 한다. 그러니까 뤄홍후가 탕웨이를 만나 사랑하게 되는 시간대와 사라진 탕웨이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시간대를 분명히 구분해야 조금이라도 스토리를 제대로 구성할 수가 있다.


12년 후, 새치가 있는 머리카락의 주인공


12년 전, 검은색 머리카락의 주인공


그런데 이러한 정교한 관찰에도 불구하고 앞뒤가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불로 그을린 주인공 어머니의 사진이다. 이 사진을 주인공이 손에 넣은 것은 10년 후 아버지의 죽음 이후인데 어찌 된 일인지 10년 전 탕웨이를 만났을 때 주인공은 탕웨이에게 이 사진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해 보려고 씨름했지만 결국 포기했다. 아마도 감독은 영화의 전반부가 '기억'이기 때문에 잘못된 기억을 일부러 넣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중요한 키포인트 중 하나는 주인공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기억)이다. 그녀는 애인과 함께하던 공간에 불을 지르고 애인과 함께 어린 주인공과 남편을 버리고 떠난 것으로 보인다. 이 기억은 주인공의 심리에 강력하게 남아 있어서 탕웨이와의 관계에 침투해 들어온다. 그래서 후반부의 꿈에서도 주요한 시퀀스를 구성한다. 그 외에도 살해된 친구에 대한 기억 또한 중요한 요소이다. 위키피다아의 플롯 설명에는 친구의 죽음이 주인공에게 일정한 책임이 있었던 것으로 설명되는데 그것이 그럴듯한 설명인 것은 분명한데 영화에 어떻게 표현되는지 나는 확인하지 못했다. 아마도 5~6번을 보게 되면 눈에 들어올지도 모르겠다.


영화에는 여러 가지 상징적인지 기억의 파편인지 모르겠지만, 탕웨이의 손목시계, 자몽, 사과, 총, 탁구, 초록색 책, 빙빙 도는 방 등이 등장하는데 이들 여러 요소들의 정확한 의미와 자리해야 할 위치를 파악하려면 애를 써야 한다.


자~~ 여기서부터가 더 중요하다. 영화의 거의 정확히 반이 지나면 영화의 제목이 등장한다. 그리고 후반부로 넘어가는데 이것은 59분 동안 놀라울 정도로 정교하게 이어지는 '3D 리얼 원 테이크'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시간이 왔다갔다 할 이유가 없고 실시간 59분이지만 사실 꿈이기에 시간 자체가 의미가 없다. 놀랍게도 영화의 후반부는 3D로 촬영을 하였기에 영화관에서 관람하지 못하면 그 맛을 제대로 만끽하기가 힘든다. 주인공이 포르노 영화관에서 3D 안경을 쓰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때 실제 영화관의 관객은 3D 안경을 쓰면 된다. 이 부분만큼은 약간의 미소가 감돌만큼 친절하다. 여기서 '리얼 원 테이크'라고 한 이유는 샘 멘데스 감독의 2019년 영화 <1917>와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의 2014년 영화 <버드맨>의 경우에는 영화 전체가 하나의 롱 테이크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중간중간 관객이 눈치채기 어려운 순간에 테이크가 나뉜다. 물론 '리얼 원 테이크' 영화도 종종 있지만 <지구 최후의 밤> 후반부의 롱테이크처럼 유려하고 효과적인 경우는 찾기가 힘들다.


이 59분은 꿈이기에 주인공의 무의식에 알알이 박힌 기억들이 부분적으로 선명하게 되고, 과장되기도 하고, 뒤틀리기도 한다. 사과를 파는 친구가 말에 실은 사과를 길에 마구 떨어뜨리는 장면은 친구를 돕지 못한 주인공의 죄책감이 고스란히 표현된다. 애인과 함께 도망치려는 주인공의 어머니를 돕는 장면은 주인공 무의식에 깊이 파인 어머니에 대한 애증이 깔려 있고 어머니를 용서하고 싶은 심리가 담겨 있다. 톡톡 튕기면서도 주인공과 가까워지는 꿈속의 탕웨이는 전반부의 기억 속의 탕웨이와 유사하지만 어쩐지 멀어져만 갈 것 같은 거리감은 주인공이 품은 탕웨이에 대한 갈망이 담겨 있다. 그리고 탁구를 치는 어린 소년은 영화 전반부에서 탕웨이가 주인공의 아이를 임신했다가 몰래 지웠다는 이야기의 변조된 연장인데, 태어나지 못하고 죽은 아이에 대한 주인공의 아련한 아픔이 담겨 있다.


파편화된 '기억'과 그것에 무의식이 개입되어 변조된 '꿈'으로 구성된 이 영화의 치밀한 구성과 영화 전체를 감싸는 형언하기 힘든 분위기는 이 영화를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앞으로 또 몇 번이나 이 영화를 보게 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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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글을 남긴 후에 '불에 그을린 어머니의 사진'이 모호하여 다시 확인해 보았다. 


이건 정말 꼼꼼히 봐야만 파악할 수가 있다. 우선 문제의 사진은 주인공의 어머니가 애인과 지내던 집에 불을 지르고 애인과 도망을 간 이후에 주인공이 불타고 남은 집에서 발견하여 보관해 온 것으로 추측된다. 그 사진을 주인공이 탕웨이를 만났을 때 보여준 것이다.

주인공과 탕웨이의 짧은 연애 기간이 끝났을 때 탕웨이의 초록색 책은 주인공의 수중에 남게 되었고, 주인공이 간직한 어머니의 사진은 탕웨이가 슬쩍하여 가지게 된 것이다. 그 후 탕웨이는 함께 도둑질을 하던 여자에게 그 사진을 버리듯이 줘버렸고, 감옥에 있던 탕웨이의 도둑 친구는 그 사진을 주인공 아버지의 집으로 우편으로 보냈다. 

주소를 어떻게 알았을까? 감옥에 들어온 어떤 사람이 사진 속의 여인이 주인공의 어머니라는 것을 알아보고 주소를 알려준 것이다. 물론 그 집에는 주인공은 살지 않았고 아버지만이 새로운 부인과 함께 살고 있었다. 주인공만큼 도망간 전처를 그리워하던 아버지는 벽걸이 시계 안에 그 사진을 감추어 놓고는 그 시계 앞에서 늘 술을 마시곤 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주인공이 아버지가 시계 앞에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를 의아하게 여겨 그 시계를 유품으로 들고 와서는 뜯어본 것이고 그래서 그 사진은 다시 주인공의 손에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것은 그 사진은 얼굴이 크게 나온 사진이 아니라 원경 사진이며 게다가 여인의 얼굴은 불에 타서 보이지가 않는다는 사실이다. 도대체 그 사진을 보고 주인공의 어머니와 탕웨이가 닮았다고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데... 감독은 어떤 의도로 그런 설정을 한 것일까?


어쨌든 쉽게 파악하기 힘든 이 복잡한 사진 이야기는 사실 영화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주인공이 가진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잠시 사랑했던 탕웨이에 대한 기억이 중첩되고 연결되고 겹쳐지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이<지구 최후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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