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귀 발타자르>

로베르 브레송 감독, 1966

by 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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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 포스터는 미끼다. 포스터에 등장하는 소녀의 모습에서 어떤 감흥을 기대하거나, 영화 속 동물 주인공들이 흔히 보여주는 인간과 감동적으로 교감을 기대한다면 관객은 참담한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포스터를 보고 지레 짐작하게 되는 소녀와 당나귀의 애틋한 관계는 일도 없다. (이 영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기에 고등학교 때 읽은 <백치>를 다시 읽어야 할까 고민 중이다.)


영화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의 한 명으로 꼽히는 로베르 브레송의 다른 영화들과 마찬가지로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절대로 감정적인 연기를 하지 않는다. 거의 항상 무표정이고 걸음걸이조차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딱딱하다. 브레송은 배우에게 “연기”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연기”는 온전히 관객의 몫이다. 관객이 배우들 속으로 들어가 행동과 감정과 생각을 스스로 쌓아 나가야 한다.


이 영화의 매우 분절적인 스토리텔링은 관객이 조립하기가 힘들 정도인데 사실 이 영화에서 스토리는 중요하지가 않다. 중간중간 엉뚱한 내용이 삽입되기도 한다. 철학자인연 하는 사람의 대사가 불쑥 등장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캐릭터 또한 영화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아니, 영화에서 스토리도 캐릭터도 중요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남는다는 말인가?


<당나귀 발타자르>는

지극히

철학적인 영화다.


이 영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매우 긴 장편소설 <백치>(이 소설은 동물이 등장하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딱 한 마디로 요약할 수가 있다. 가장 순수하고 고결한 존재가 유혹과 욕망과 이기심과 교만으로 가득 찬 인간 사회에 던져졌을 때, 그 고결한 존재의 삶은 어떤 모습이며 또 그런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나귀는 그저 당나귀일 뿐이다. 그를 둘러싼 인간의 삶에 개입하지도 않고 쉽게 반응하지도 않고 그저 그에게 맡겨진 짐 나르는 임무를 수행한다. 간혹 자신이 태어난 고향집을 찾아가지도 하고 학대에 저항하며 도망가기도 하고 너무 힘들면 주저앉기도 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발타자르는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존재라고도 할 수가 있다. 그렇기에 발타자르는 순수하고 고결하다.


발타자르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유명한 ‘대심문관 이야기’ 속의 재림 예수와 같은 존재이다. 어린이들이 갓 태어난 발타자르에게 물로 세례를 하는 장면은 이러한 나의 생각을 뒷받침한다. 인간의 삶 가운데서 기쁨과 고통을 함께 하지만 인간과 아무런 소통을 하지 않는 존재. 단지 그러한 고결한 존재가 인간의 부대끼는 삶 한편에, 잘 눈에 띄지 않는 어느 구석에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존재. 그런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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