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 현재, 미래의 여성 또는 친절-냉담-불통
망각의 늪은 즐거움을 선사한다.
파나히 감독 작품을 한꺼번에 몰아서 보고 있는 지금, <3개의 얼굴들>을 틀자마자 첫 장면에서 이 영화는 이미 봤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다음 장면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 아하~ 그렇지, 하고 기억이 났지만 그다음은 역시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영화를 계속 봐 나갔다. 그런데 어쩔~ 영화의 중반이 지나자 전혀 모르던 내용이 나오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런 영화를 보다가 중간에 중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인데 아마도 무슨 사정으로 인해 영화를 중간까지만 봤던 것이 확실하다. 그래서 후반부는 더욱 집중해서 볼 수가 있었다.
이 영화는 이란 정권이 파나히 감독의 영화 제작을 금지시킨 이후에 몰래몰래 만든 네 번째의 영화이다. 이번의 경우 가장 최신작인 <노 베어스>처럼 이란의 어느 시골 오지로 숨어 들어가서 영화를 찍었다. 그 시골 오지 마을은 완고한 보수주의가 여성들의 꿈을 가로막고 숨통을 조이고 있다.
왜 홍상수의 영화에는 항상 김민희가 나오냐고 묻는다면 왜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는 파나히 감독이 파나히 자신의 역으로 나오는지를 따져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돈이 안 들기 때문이다. 영화 제작이 금지된 후에 만들어진 <노 베어스>, <택시>, <이것은 영화가 아니다>처럼 이 영화에도 파나히는 주인공이다. 2018년에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파나히가 몰고 다니는 SUV는 4년 후 <노 베어스>에 그대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파나히는 줄곧 등장하기는 하지만 관찰자에 머문다. <노 베어스>처럼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놀라운 점이 하나가 있는데 파나히 감독과 함께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여배우 베나즈 자파리는 이 영화 속에서 소개되는 대로 이란의 다양한 영화와 TV 드라마에서 엄청나게 활약하는 톱스타이다. 그런 톱스타가 금지된 파나히의 작품에 기꺼이 등장한다는 것은 웬만한 배짱이 아니면 힘들 것이다. 이 여배우는 <택시>에도 깜짝 등장하여 인상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 아마도 자파리의 위상이 너무 높아서 이란 권력도 쉽사리 어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제 이 파나히 감독이 우리에게 주는 숙제를 풀어야 한다.
왜 3 Faces, 세 개의 얼굴들일까? 쉽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영화 속에 얼굴은 등장하지 않지만 시골 마을에서 왕따 당하는 왕년의 여배우, 그리고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자파리, 그리고 영화배우가 되려는 꿈을 꾸며 거짓 자살 소동을 일으켜 파나히 감독과 자파리를 그 마을로 끌어들인 소녀 마르지예. 이 세 명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이란의 여성상을 상징하는 세 개의 얼굴들이라고 볼 수가 있을 것이다. 아주 작은 집에서 이 세 여성이 밤에 모여 춤추는 동작을 실루엣으로 잠깐 보여주는데, 이 장면은 셀린 시아마 감독의 기념비적인 여성 퀴어 작품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2019)에서 모닥불 주위에서 춤을 추는 여인들의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것이 일반적인 해석이지만 너무 평면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래서 생각을 좀 더 확장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파나히가 관찰하는 대상은 세 여성만이 아니라 완고한 보수주의 마을의 주민들이다. 그들의 삶과 생각과 행동은 이 영화에서 세 명의 여성보다도 더 주도적이고 강하게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세 개의 얼굴들은 이 마을 혹은 마을 주민들에 대한 규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매우 친절하고 예의 바르다. 그러나 돌아서면 냉담하거나 도시인에 비판적이다. 그리고 자신들만의 전통에 대해 완고한 태도를 가지며 아집의 똬리를 틀고 있다. 그러니 친절-냉담-불통이라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게다가 주민들 중에는 종교적이라기보다는 미신에 가까운 집착을 가지고 오로지 '번식'과 그것을 가져다주는 남성의 '정력'을 숭상하는 원시성까지 보여준다.
파나히가 이제까지 주로 권력을 향해 비판적 태도를 보여왔다면 이 영화는 대중의 보수적 완고함에 대해 화살을 겨누고 있다.
* 파나히 감독의 영화에는 페르시아어뿐만 아니라, 때로는 터키어, 아제르바이잔어, 또는 지방 방언들이 섞여서 나오는데, 이를 이란인들은 쉽게 구분하고 그것으로 인한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전혀 언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은 한글 자막으로 보게 되는 것이 좀 안타깝다. 마치 우리 영화에 중국어, 일본어, 제주 방언 등이 섞여서 나오는데 영어 자막으로는 똑같이 번역되어 나가는 것과 비슷한 상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