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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야드 Oct 16. 2024

턱 밑이 부어가는 가을

2024.10.16


  다녀보고 싶은 학교가 있었다. 싶은, 하고 말하기에도 어렴풋한 작은 호기심 정도. 집이 조금 더 여유로웠다면 학부를 한 번 더 다녀볼 수도 있었겠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학업은 이제 석사, 박사밖에 없다. 작년엔 서류심사 후 붙은 면접에서 떨어졌다. 올해의 서류 심사는 붙을지 어쩔지 모르겠다. 이왕 하기로 한 것 세 번은 해봐야지 하는 마음으로, 이번에도 떨어지면 내년에 또 도전할 것이다. 도전에 필요한 것은 시간과 돈도 맞지만, 역시나 마음이다. 무언가에 도전하는 행위는 마음을 닳게 만든다. 영혼을 조각내어 떼어가는 것만 같다.

  한동안 안정된 식사를 하다가, 다시 습관처럼 먹고 토하는 행위를 반복한다. 걱정하는 마음인지 생색 내고 싶은 마음인지 갈팡질팡하던 어느 새벽을 기점으로 밤낮이 아예 바뀌어 버렸다. 해가 뜨는 것을 보고 잠들고 정오쯤 깨어난다. 느지막하게 일어나 정성껏 음식을 요리하고, 느긋하게 먹고, 익숙하게 토한다. 음식물을 억지로 빼낸 위장은 허기를 느끼지 않는다. 실체 없는 배부름이 이어진다. 턱의 근육이 점점 단단해지며 얼굴이 부은 것처럼 변해간다.

  오후가 되면 아빠에게 안부 전화가 온다. 그는 매번 살은 좀 빠졌느냐고 묻는다. 문장은 조금씩 바뀌어, 진전이 있느냐고 묻기도 하고 엄마와의 약속은 어떻게 됐냐고도 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부모님은 나의 몸무게를 두고 돈을 걸었다. 얼마 빼면 얼마를 줄게, 하고 말하던 그들은 내가 보상에 관심을 보이지 않자 조건을 뒤집었다. 얼마 빼지 못하면 얼마를 우리에게 줘. 나는 그러겠노라 답한 적이 없는데도 그들은 단 한 번도 약속을 지킨 적이 없다며 나를 나무란다. 일방적인 언약을 하려거든 그 대상은 오로지 자신뿐이어야 한다.

  처음으로 법원에 다녀왔다. 이길 것을 알고 있는 재판이었음에도 누군가는 분명한 장면을 원했다. 우린 항소를 기각시켜야 하는 쪽이었다. 판사가 사건번호와 판결을 차례로 읊었다. 오 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 사이에 이런저런 판결이 지나갔다. 원고의 항소를 기각합니다. 깔끔하고 간결한 세 어절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법원은 너무 조용했다. 소리뿐만 아니라 행동도 정숙했다. 그래서 마음껏 둘러볼 수가 없었다. 내가 지루해하자 엄마는 나가 있어도 좋다고 했다. 나가지 않은 덕에 한 문장으로 순식간에 후련해지는 엄마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그녀를 잠 못 이루게 하는 요소가 하나 사라졌다. 남은 건 나다.

  시장에서 샤인머스캣을 샀다. 먹고 싶다가, 막상 먹으면 기분 나쁜 단맛에 질려한다. 과일만 먹고 나면 토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으깨진 과육은 비록 토사물이어도 보기 좋게 예쁘다. 중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아침에 체리를 먹고 등교했는데 속이 꼬여 도로 토해버린 적이 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데, 체리는 으깨진 편이 훨씬 예쁘다. 어떻게든 먹이려는 엄마의 노력 덕에 아침으로 이것저것 많은 종류의 음식이며 과일, 음료를 먹어봤던 것 같다. 고등학교 때 엄마는 아침마다 소고기를 구워 주었다. 나는 성적이 좋은 학생이 아니었으며, 공부 자체에 흥미가 없었다. 그래서 그 마음이 부담스러웠다. 그럼에도 소고기라 꾸역꾸역 먹었는데, 그게 소고기이든 말든 질릴 대로 질리는 날이 왔다.

  질리도록 본 영화 중에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의 '팬텀 스레드'라는 영화가 있다. 내 사랑론의 이데아라고 친구에게 농담처럼 말한 적 있다. 어제 드디어 그 영화를 본 친구는 열이 받을 정도로 완벽한 영화라고 했다. 다만 마음 놓고 아무데나 추천하고 다닐 수가 없는 게… 두 배우의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 젊은 여자와 노인의 사랑. 그럼에도 어쩔 수 없이 이 영화가 좋다. 말로는 풀어 설명할 수 없는 지점을 정확하게 긁어 준다. 충만한 사랑을 위해 기꺼이 독을 먹겠는가. 먹이겠는가. 한 번 사는 것 그런 파멸적인 사랑 해 봐도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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