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Renee Zellweger (Aug, 2016)
[저자 소개] ; 르네 젤위거 (Renee Zellweger)는 1969년 미국 텍사스주 태생의 배우입니다. 스위스 태생의 아버지와 노르웨이 태생의 어머니가 미국으로 이민을 오는 배에서 처음 만났다고 합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그녀는 자신도 “아메리칸 드림”의 일부라고 설명합니다. 그녀는 현재까지 2번의 아카데미상 (Academy Awards), 4번의 골든 글로브상 (Golden Globe Awards) 등을 수상할 만큼 할리우드에서 꾸준히 인정받고 있는 배우입니다. 영화 제리 맥과이어 (Jerry Maguire, 1996), 너스 베티 (Nurse Betty, 2000), 브리짓 존스 (Bridget Jones, 2001; 2004; 2016) 시리즈, 시카고 (Chicago, 2002), 콜드 마운틴 (Cold Mountain, 2003), 신데렐라 맨 (Cinderella Man, 2005), 미스 포터 (Miss Potter, 2006), 미쓰 루시힐 (New in Town, 2009), 주디 (Judy, 2019) 등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내년 2월 14일 발렌타인 데이에 영화 브리짓 존스 (Bridget Jones) 시리즈의 4번째 작품, “브리짓 존스: 매드 어바웃 더 보이 (Bridget Jones: Mad About the Boy)”를 선보일 예정입니다.
[본 글에 대하여] ; 한때 르네 젤위거는 성형 수술 루머에 시달린 바 있습니다. 타블로이드 저널리즘 (tabloid journalism; 과도하게 자극적이거나 선정적인 소재, 유명인의 스캔들 같은 가십성 기사 위주의 보도 행태)의 공격 때문이었습니다. 그녀의 성형 수술과 관련한 대중과 미디어의 끊임없는 토론은 결국 그녀의 비자발적 해명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습니다. 다음 허핑턴 포스트 (The Huffington Post) 기고문을 통해, 르네 젤위거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 봅시다.
원문: https://www.huffpost.com/entry/we-can-do-better_b_11355000
저는 참 운이 좋습니다. 배우라는 창의적인 일을 선택하고,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울 뿐만 아니라 때때로 세상에 메시지를 전할 수도 있는 의미 있는 작품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있다는 것은 진정 축복의 삶이고, 공적으로 알려진 사람으로서 직면하게 되는 많은 도전을 감내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는 때때로 제가 공개적인 모욕을 그저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뜻하기도 하고, 혹은 침묵이 해결책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문제를 키우는 상황을 머리로 애써 이해해 보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지난 2014년 10월, 한 타블로이드 신문은 제가 아무래도 눈을 성형한 것 같다고 보도했습니다. 저는 개의치 않았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그저 타블로이드 미디어에 의해 매일매일 양산되고, 착취적인 헤드라인과 인터넷 악플러들, 키보드 워리어들에 의해 과열되는, 수많은 가십성 루머들 중 하나일 뿐이었으니까요.
사람들의 삶을 파고드는 혼란과 스캔들, 그로 인해 그들이 겪게 되는 모멸감과 수치심으로 돈을 버는 타블로이드 저널리즘의 이익을 위해, 진실은 그저 한쪽의 허구적인 주장만을 대변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사실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억지로 꾸며낸 작위적 스캔들을 사고파는 이들에게 나의 입장을 해명한다는 것에, 혹은 단순 재미를 위해 타인을 우롱하는 이들에게 나의 입장 표명에 대한 승인을 얻는다는 것에, 과연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게 있는 것인지 의문입니다. 이것은 어이없는 촌극이고, 전혀 중요성도 없는 것이며, 적어도 저 스스로는 도대체 왜 코멘트를 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모든 것이 투명하게 공개되고, 텔레비전에서 개인의 치부가 가감 없이 방송되고, 어떤 사람들은 세간의 주목을 받기 위해 자신의 가장 사적인 부분까지 공유하는 작금의 문화에서는, 사생활을 소중하고 가치 있게 여기고 비밀로 간직하려는 선택이 되려 수상한 인물이라는 낙인과 오명을 얻게 만드는 듯합니다. 더불어, 진실되지 못하고, 뭔가를 숨기는 부도덕한 행동을 하는 거짓말쟁이가 되는 듯합니다. 타블로이드 신문은 “그녀가 부인한다”는 문구로 당사자를 거짓말쟁이로 둔갑시키고, 그들의 폭로가 진실이라고 주장합니다.
불건전한 의도로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억지로 꾸며낸 인터넷상의 스토리는 업로드 즉시 순식간에 기정사실화되고, 그 괴로운 거짓들과 굳이 맞서 싸우지 않고 침묵의 존엄성을 선택했던 것은 늘 있었던 조롱을 전혀 잠재우지 못할뿐더러, 억지 스캔들을 팔아서 부당 이득을 취하는 타블로이드 미디어가 본인의 인생을 장악하려고 드는 현실에 큰 상처까지 입게 됩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제가 성형 수술 의혹과 관련해서 공개적으로 괴롭힘을 당해서도 아니고, 버라이어티 (Variety) 매거진의 수석 영화 평론가가 제가 16년 전 찍은 첫 번째 브리짓 존스 (Bridget Jones) 작품을 보고 그때의 제 모습과 현재의 제 모습을 비교하며 제 외모를 비하해서도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불쾌한 암시, 즉 제가 입장을 표명하는 것 자체가 외모에 관한 사회적 압력에 굴복했다는 증거이며, 이로 인해 제 존재 가치와 직업적 기여가 어떻게든 폄하될 것이라는 데 항의하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어떤 이유로든 타인의 평가 없이, 개인의 몸에 대해 결정하는 것은 개인 자신의 권리임을 믿기 때문도 아닙니다.
제가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유는, 제 인생에 대한 진실을 밝히는 것이 스스로 합당하다고 생각함과 더불어, 타블로이드 추종자들에 의해 억측이 사실로 탈바꿈되어 가는 형국이 매우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제가 눈 성형 수술을 받았다고 폭로한 타블로이드 기사 자체는 무시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자기 수용 (self-acceptance;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나, “특정 외모와 나이를 강요하는 사회적 압력에 굴복한 여성”을 주제로 주류 언론까지 기사를 쏟아 내면서 그 논의의 중심에 저를 포함시킨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타블로이드의 억측이 주류 언론 보도의 재료가 되었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이것은 순전히 제 사적인 얘기지만, 저는 제 얼굴을 고치려는 결정을 내리지 않았고, 제 눈을 고치지도 않았습니다. 이 진실은 누구에게도 중요하지 않습니다만, 제가 성형 수술을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그 가능성 자체가 주류 언론 매체의 훌륭한 기자들 사이에서 논의되고 기사화, 공론화된 것은 진정한 뉴스거리와 가십성 얘깃거리 간의 혼동, 외모에 대한 사회적 집착을 보여주는 당혹스러운 실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여성의 가치가 외모에 의해 측정되었다는 것은 비밀이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는 역사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그 결과, 오늘날 우리는 여성의 사회 참여가 얼마나 중요한지 인지하고 있고, 대중의 높은 관심을 받는 모든 분야에서 여성이 지도자로 활약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여성의 기여를 폄하하는 이중 잣대가 남아 있고, 그 이중 잣대는 매일매일 우리 의식 속에 침투하고 있는 타블로이드지와 같은 부정적인 담론에 의해 고착화됩니다.
너무 말랐다. 너무 뚱뚱하다. 나이 들어 보인다. 금발보다 다크 브라운 컬러가 더 낫다. 허벅지에 있는 셀룰라이트 어쩔 거야. 주름 제거 수술받았대. 대머리가 되고 있네. 저거 뱃살이야, 아님 임신이야? 못생긴 신발, 못생긴 발, 못생긴 미소, 못생긴 손, 못생긴 드레스, 못생긴 웃음; 이는 모두 타블로이드지 헤드라인의 전형적인 재료입니다.
타블로이드지는 이러한 단어들로 사람의 가치를 매기고, 우리로 하여금 그 편협한 기준에 부합되어야만 사회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고, 직업적으로 가치가 클 수 있고, 마침내 고통스러운 조롱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이러한 메시지는 특히 젊은 세대와 감수성이 예민한 이들에게 상처가 되고, 적합성, 편견, 평등, 자기 수용, 괴롭힘, 건강 등과 관련한 무수한 이슈들을 무조건 촉발시키게 되어 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치욕적인 타블로이드 기사들, 비열한 평가들, 허위 사실들이 반복적으로 업로드되는 것은 무해하지 않습니다. 이들이 우리의 시선을 빼앗은 시간만큼, 무수히 많은 중요한 사건 사고들이 외면당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도 행태가 지속된다면, 불쾌하고 어리석은 이중 잣대는 고착화될 것이고, 사회 정치적 담론의 수준이 떨어질 것이고, 타인에게 모멸감을 주는 잔인성이 하나의 문화 규범으로 자리 잡을 것이고, 대중에게 중요하지 않은 정보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제공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중요하지 않은 타블로이드 스토리들, 비판들, 오해들이 저속한 엔터테인먼트로 취급되어 대중의 관심을 받지 않게 되고, 대신에 그 관심이 훨씬 더 중요하고 필요한 논의들을 다루는 주류 언론으로 쏠리게 된다면 어떨까요? 만약 우리가 사실을 담은 정보와 허위 정보 모두 자주 유료 콘텐츠로 상품화됨을 인지하면서, 그 내용 자체와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소비하는지가 사적, 사회적, 공적으로 중요함을 기억하면서, 우리가 어디에 에너지를 쏟고 어떤 것을 구매할지에 대해 더 조심스럽고, 더 양심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면 어떨까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왜 외모 공격으로 인해 폄하와 모욕을 당하는 타인을 집단적으로 관찰하는 욕구를 갖고 있는지, 그리고 그 집단적인 욕구가 젊은 세대와 평등을 위한 투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리고 어떻게 믿을 만한 주류 언론 매체가 진정한 뉴스거리와 가십성 얘깃거리 간의 구별을 잘 못하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로 인해 얼마나 심각한 정도로 대중 의식이 허위 사실로 채워지는지 등에 관해 더욱더 활발한 논의를 진행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진정한 사회 문제들과 그 해결책에 관해 더욱더 의미 있는 담론을 형성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만, 저속한 타블로이드 미디어의 종식을 고해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