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으로 묻고 인간으로 답하다
타노스는 무작위로 절반을 죽였지만, 사실 우리가 사는 세계의 모든 것은 처음부터 무작위였다.
오후 작가의 『나는 농담으로 과학을 말한다』를 읽다 보면 계속 웃음이 난다. 하지만 웃음이 끝날 무렵엔 어느새 등골이 서늘해진다. 이 책은 과학을 다루지만 사실 과학책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당연'이라 믿는 세계가 실은 얼마나 불안정한 합의 위에 서 있는지를 폭로하는 고발서이자, 그 불안정함 속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는 인간의 우스꽝스럽고도 숭고한 초상화다.
오후라는 작가는 이상한 사람이다.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로 금기의 영역을 농담처럼 다뤘던 작가는, 이 책에서는 과학이라는 또 다른 금기(적어도 많은 문과생에게는)에 손을 댔다. 그의 글쓰기는 마치 경계를 허무는 놀이 같다. 과학잡지에는 문학적인 글을, 문학잡지에는 과학적인 글을 쓴다는 그의 소개는 단순한 자기 PR이 아니라 일종의 철학 선언이다. 경계란 누군가 그어놓은 자의적인 선이고 그 선을 넘나드는 것이야말로 진짜 앎의 시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책은 질소 비료, 단위, 플라스틱, 성전환, 우주 과학, 빅데이터, 일기예보라는 7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겉으로 보면 아무 연관 없는 주제들이지만, 읽다 보면 하나의 굵은 줄기가 보인다. 그것은 '표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이다. 우리는 표준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것으로 여긴다. 미터, 킬로그램, 섭씨온도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오후 작가는 이렇게 묻는다. 정말 그럴까?
화씨와 섭씨라는 온도 단위를 보자. 나는 이것이 어떤 과학적 원리에 기반한 객관적 척도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파(화)렌하이트 씨가 100℉를 정할 때 기준으로 삼은 것은 다름 아닌 '아내의 겨드랑이 온도'였다. 이보다 더 자의적일 수 있을까.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추운 온도를 고향 겨울 기온에, 가장 따뜻한 온도를 아내의 체온에 맞춘 것이다. 세계의 절반이 사용하는 온도 체계가 한 남자의 향수와 애정에서 출발했다니. (섭씨는 셀시우스-섭이수사 씨의 중국 음역에서 유래했다.)
더 황당한 건 길이 단위다. 1인치는 '엄지손가락 중간 마디의 길이'였고, 1피트는 '통치자의 발 길이'로 정해졌다. 왕이 바뀔 때마다 피트의 길이가 달라졌다는 소리다. 스코틀랜드의 데이비드 1세는 그나마 양심이 있었는지 성인 남성 다수의 엄지를 측정해 평균값을 냈고, 에드워드 1세는 보리 세 톨의 길이로 인치를 표준화했다. 하지만 엄지손가락도, 보리 알도 제각각이긴 마찬가지였다.
이런 자의성은 단순히 웃고 넘길만한 문제가 아니다. 1628년, 스웨덴의 최첨단 전함 바사호는 처녀항해에서 단 1.3킬로미터를 나아가고 침몰했다. 수백 년 후 인양된 바사호를 조사하자 진짜 원인이 드러난다. 좌현은 스웨덴 조선공이, 우현은 네덜란드 조선공이 만들었는데, 서로 다른 기준의 인치와 피트를 사용했던 것. 서로의 '인치'가 다르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첨단 기술을 집약한 배가 좌우 대칭조차 맞지 않아 바다에 가라앉았다. 64명의 선원이 죽었다. 표준의 부재, 아니 표준의 자의성이 사람을 죽인 것이다.
나는 여기서 우리 삶을 떠올린다. 우리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수많은 '표준'들. 성공의 기준, 행복의 척도,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선. 이 역시 누군가의 엄지손가락이나 아내의 겨드랑이 온도만큼이나 자의적인 것은 아닌가.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과학적이고 객관적인 진리인 양 받아들이며, 그 기준에 맞추려 발버둥 친다. 바사호처럼 서로 다른 인치로 만들어진 우리 삶은, 조금씩 균형을 잃고 기울어간다.
페루의 구아노(새들의 배설물이 퇴적, 응고되어 화석화된 것, 새똥이다) 이야기는 더 씁쓸하다. 새똥으로 일확천금을 벌게 된 페루는 연 9%가 넘는 경제 성장을 이룬다. 하지만 영국은 부패한 페루 정치권을 꼬드겨 그 돈을 설탕 플랜테이션 사업에 투자하게 만든다. '안타깝게도 이런 곳에는 늘 부패한 정부가 있다'는 오후 작가의 냉소 섞인 문장이 가슴을 찌른다. 감언이설에 속아 시작한 사업은 실패하고, 구아노마저 바닥나자 페루 경제는 끝없는 수렁으로 빠진다. 이것은 19세기 남미 이야기지만, 동시에 21세기 어디에나 있는 이야기다. 돈이 흘러들어오면 부패한 권력이 생기고 그 권력은 외부의 더 큰 권력에 포섭되며, 결국 평범한 사람들이 대가를 치른다.
볼리비아의 해군 이야기는 또 어떤가. 칠레에 해안을 빼앗겨 내륙국가가 된 볼리비아는 아직도 해군을 유지하고 있단다. 티티카카 호수에 잠수함과 전함을 띄워놓고 복수의 날을 기다린다지. 처음엔 우스꽝스럽게 들렸다. 바다도 없는 나라에 무슨 해군이람. 하지만 생각할수록 슬프고, 슬픈 만큼 이해가 됐다. 상실을 인정하지 못하는 것, 돌이킬 수 없는 것을 되돌리려 집착하는 것. 이것은 비단 볼리비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누구나 티티카카 호수에 전함을 띄우며 살지 않을까. 돌아오지 않을 사랑, 되돌릴 수 없는 선택, 다시는 오지 않을 과거. 우리는 그것들을 위해 쓸모없는 해군을 운영하며, 복수나 복원의 날을 꿈꾼다.
하지만 오후 작가의 글이 빛나는 건 그가 냉소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우스꽝스러움을 비웃으면서도 동시에 그 우스꽝스러움 속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는 인간의 힘을 믿는다. 표준은 자의적이지만, 우리는 그 자의성에 합의함으로써 바사호보다 나은 배를 만들어냈다. 미터 협약은 1875년에 체결됐고, 이제 전 세계 대부분이 같은 단위를 쓴다. 완벽하지 않지만, 적어도 좌현과 우현이 다른 인치를 쓰진 않는다.
단두대 이야기도 그렇다. '놀랍게도 단두대는 사형수의 인권 증진을 위해 도입된 기구'라는 문장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단두대. 그 잔혹한 처형 도구가 인권을 위한 것이었다니. 단두대 이전의 처형은 끔찍했고, 계급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죽었다. 단두대는 빠르고, 고통이 적고, 무엇보다 평등했다. 귀족도 평민도 같은 방식으로 죽었다. 프랑스혁명이 꿈꾼 평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방식에서 실현됐다. 이것은 암울한 이야기지만, 동시에 인간이 조금씩이라도 나아지려 한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빅데이터 이야기는 더 섬뜩하다. 월마트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허리케인이 올 때 사람들이 '딸기맛 팝타르트'를 평소보다 7배 많이 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왜 하필 딸기맛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월마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딸기맛 팝타르트를 배송했고, 그것은 불티나게 팔렸다. 데이터과학자 캐시 오닐이 빅데이터를 '대량살상 수학무기'라 부르는 이유다. 데이터는 인과를 설명하지 않는다. 상관관계만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진리처럼 받아들인다. 빅데이터라는 새로운 신이 탄생한 것이다.
우리는 또한 매일 플라스틱 속에서 산다. 신용카드 한 개 분량의 미세 플라스틱을 몸에 축적해 가며. 생수를 사 마시지만 그 생수의 93%에도 미세 플라스틱이 들어있다. 플라스틱으로 된 블라인드로 아침을 맞고, 플라스틱 칫솔로 이를 닦고, 플라스틱 옷을 입고, 플라스틱 카드로 결제한다. 우리는 플라스틱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으면서, 플라스틱이 우리를 죽이고 있다는 것도 안다. 이 모순. 우리는 이 모순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작가는 답을 주지 않는다. 질문만 던진다. 하지만 그 질문은 농담처럼 가볍고, 가벼운 만큼 깊이 박힌다. 그가 마지막 장에서 기상청 직원들을 위한 헌사를 쓸 때 조금 울컥했다. 기상청은 늘 욕을 먹는다. 일기예보가 틀렸다고. 하지만 날씨만큼 예측하기 어려운 게 또 있을까. 무수한 변수가 얽힌 카오스 시스템 속에서 그들은 최선을 다해 내일을 예측한다. 틀릴 때도 많지만 맞을 때도 많다. 그런데 우리는 맞았을 땐 당연하게 여기고 틀렸을 땐 비난한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방식이다. 우리는 표준을 만들고, 그 표준에 갇히고, 표준이 틀렸다며 분노하고, 그럼에도 새로운 표준을 만든다. 자의적이고, 불안정하고, 불공평하지만,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
개별 인간의 DNA는 99.7% 같다고 한다. 단 0.3%에서 나와 당신의 모든 차이가 발생한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는 거의 같다. 하지만 그 0.3%가 전부다. 그 작은 차이가 당신을 당신으로, 나를 나로 만든다. 세상의 모든 표준도 그렇지 않을까. 99.7%는 자의적이고 불합리하지만, 0.3%의 합의가 우리를 함께 살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과학 이야기를 빌려 우리 자신을 비춘다. 세계의 표준이 얼마나 허술하게 시작되었든,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 질서가 얼마나 우연과 맹목의 산물이든, 작가는 그것을 비웃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매일 새로이 합의하고, 고쳐 쓰고, 살아내는 존재임을 보여주기 위해 꺼내 든다. 이 책의 농담은 가볍지 않고, 웃음은 낭비되지 않는다. 농담과 농담 사이, 우리는 우리가 기댔던 표준들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 흔들림 속에서도 서로를 붙잡고 새로운 기준을 세우며 살아가는 인간의 끈질긴 의지를 보게 된다.
어쩌면 표준이란 처음부터 거대한 진리가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기 위해 마련해 둔 작은 약속의 집합일지도 모른다. 그 약속은 부서지기도 하고 오류를 내기도 하며, 때로는 누군가를 벼랑 끝으로 밀어내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또 다른 약속을 주워 들고 내일을 향해 나아간다. 오후 작가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래서 희망적이다. 세계는 늘 불완전했고 앞으로도 완전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그 불완전함을 인식하고도 서로에게 표준을 설명하고 다시 조정하며 또 한 번 합의해 낸다면, 그 0.3%의 차이는 우리를 갈라놓는 균열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여지가 된다.
결국 작가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닐까. 세계는 본래 엉망진창이고, 인간은 그 엉망진창 속에서 여전히 사랑하고 일하고 예측하고 실패하며 다시 시도하는 존재라고. 그래서 그의 농담을 다 읽고 책을 덮는 순간, 우리는 이상하게도 조금 안심하게 된다. 표준이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나 역시 완벽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고. 과학이 아니라 인간을 향한 위로가, 이 책의 가장 과학적인 진실처럼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