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친구들 - 에마뉘엘 보브

고독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by 세잇
진정한 고독은 낭만이 아니다.
질척대는 구걸꾼으로 만드는 비루한 허기다.


우리는 흔히 고독을 커피 한 잔의 여유나 사색을 위한 고고한 시간으로 포장하려 하지만 그 포장지를 거칠게 뜯어내면, 그 안에는 '나를 좀 봐달라'고 소리치며 타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는 어린아이 같은 자아가 웅크리고 있다. 나는 오늘, 우리가 애써 외면해 온 그 '지질한 고독'의 민낯을 이야기하려 한다. 100년 전 파리의 뒷골목을 서성이던 한 남자의 독백을 빌려서.


작가 에마뉘엘 보브(Emmanuel Bove). 이름조차 낯선 이 작가는 문학사에서 기이한 궤적을 그린다. 1898년에 태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사뮈엘 베케트 같은 거장들의 극찬을 받았으나, 사후에는 완벽하게 잊혔다. 마치 그가 평생 천착했던 주제인 '군중 속의 고립'처럼, 그는 문학의 역사 속에서 고립되었다. 하지만 그의 딸의 헌신으로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기적처럼 부활했다.


베케트는 그를 두고 '누구보다 본질적인 디테일을 다루는 본능을 가진 작가'라고 했다. 여기서 본질적인 디테일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위대함이나 숭고함이라기보다는 인간이 감추고 싶어 하는 찌질함, 비겁함, 그리고 타인의 온기를 갈구하다 못해 비굴해지는 순간의 심리 묘사를 뜻한다. 에마뉘엘 보브는 인간의 마음속 가장 어두운 지하실에 촛불을 들고 내려가는 작가다.


『나의 친구들』의 주인공 '빅토르 바통'은 1차 세계대전 상이군인이다. 연금으로 근근이 살아가는 그는 직업도 가족도 없고, 무엇보다 친구가 없다. 소설은 그가 친구를 만들기 위해 파리의 거리를 헤매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바통을 응원하기란 쉽지 않다. 그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피해자가 아니라, 타인을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도구로 보는 사람이다. 돈 많은 친구를 질투하고 자신보다 불행해 보이는 사람에게서 우월감을 느끼며, 여성을 오직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켜 줄 대상으로 여긴다. 그는 끊임없이 계산하고, 의심하고, 기대했다가 혼자 실망하고 도망친다.


책을 읽으며 이 한심스러운 인물을 꾸짖는다.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라며 혀를 차기도 하고.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그 경멸은 묘한 불편함으로 바뀐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공포다. 바통의 속마음이, 사회적 가면을 쓴 우리가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내면의 목소리와 너무나 닮아 있기 때문이다. 바통은 타인이 아니라, 가면을 벗은 우리 자신의 초상은 아닐지.




고독이 나를 짓누른다. 친구가 그립다. 진실한 친구가……
이런 나의 탄식을 곁에서 들어줄 사람이라면 아무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하루 종일 그 누구하고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은 채 거리를 헤매다 밤이 되어서 집으로 돌아오면 녹초가 된다. 손톱만큼 밖에 안 되는 우정과 사랑이라도 얻을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해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내놓을 것이다.


이 문장은 숭고한 우정에 대한 갈망이 아니다. 이것은 생존의 문제다. 바통에게 타인은 나라는 존재의 이유다. 그는 혼자서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먼저 사랑해야 타인도 사랑할 수 있다'라고 말하지만, 바통은 그 명제가 거짓이라 믿는 듯 온몸으로 증명하려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타인의 시선이 있어야만 비로소 나라는 형체가 만들어진다. '손톱만큼의 우정'을 위해 모든 것을 내놓겠다는 말은 헌신이 아니라 자아의 붕괴다.


나는 완전히 맥이 풀린 채로 그 자리를 떠났다. 억지로 기운을 내 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히려 가능한 한 슬픔을 지속시키기 위해 애를 쓰며 걸었다. 마음을 꽁꽁 닫아걸고, 내가 정말로 보잘것없고 비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일부러 더 각인시키려 애쓰며 걸었다. 나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의 위안을 찾고 있었다.


누구나 한 번쯤 이런 경험이 있지 않을까. 누군가에게 상처를 받았거나 혹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무의식적으로 찾아오는 불행한 표정과 축 늘어뜨린 어깨. 내가 얼마나 비참한지 세상이 알아주기를, 누군가 다가와서 무슨 일이냐고 물어봐 주기를 바라는 무언의 연기(acting). 바통은 자신의 불행을 전시함으로써 위안을 얻는다. 이것은 고독이 낳은 병적인 자기애다. 슬픔조차도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무대 장치가 된다.


내가 원하는 건 불행한 친구다. 나처럼 있을 곳이 없는 사람, 같이 있어도 의리나 은혜 따위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는 가난하고 착한 사람. 내가 찾는 건 오직 그런 사람이다.


바통의 이 고백은 잔인할 정도로 솔직하다. 그는 자신보다 잘난 친구를 원하지 않는다.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지 않을, 자신이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만만한 대상'을 원한다. 여기서 우정은 수평적인 교류가 아니라, 나의 결핍을 메우기 위한 수직적인 착취가 된다. 우리는 과연 바통보다 나은가? 우리 역시 친구를 사귈 때 심연의 저편에서 '나에게 도움이 되는가', '나와 결이 맞는가', '내 이야기를 들어줄 만한가'를 따지지 않는지. 바통은 그 저열한 속내를 들켰을 뿐이다.


내 몸이 따뜻하다. 틀림없이 살아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된다. 애정을 담아 나의 피부를 만지며, 심장의 박동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하지만 가슴에 손을 대지는 않는다. 사실 아무리 무섭다 해도, 심장 박동 소리만큼 무서운 건 없다. 명령도 하지 않았는데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이 기관은, 언젠가는 분명 허망할 정도로 간단히 멈춰 버릴 것이다.


바통이 그토록 타인을 갈구하는 근원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혼자 있는 방,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자신의 심장 소리는 그에게 '살아있다'는 증거가 아니라 '언젠가 죽는다'는 카운트다운으로 들린다. 타인과 대화하고 소란스러운 관계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잠시 죽음을 잊는다. 고독은 우리를 죽음과 독대하게 만든다. 그래서 바통은, 어쩌면 우리는, 죽음을 잊기 위해 거리로 나가 누군가의 옷자락을 붙잡는 것일지 모른다.


고독, 얼마나 아름답고 또 슬픈 일인가. 스스로 선택한 고독은 더할 나위 없이 숭고하지만, 내 뜻과 상관없는 오랜 세월의 고독은 한없이 서글프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약한 존재이다. 그래서 친구가 없으면 외롭다.


여기서 에마뉘엘 보브는 '자발적 고독(Solitude)'과 '비자발적 고립(Loneliness)'을 명확히 구분하는데, 철학자나 예술가들이 말하는 고독은 전자다. 그것은 충만함이다. 하지만 바통이 겪는, 그리고 우리 대부분이 겪는 고독은 후자다. 그것은 결핍이다.


'강한 사람은 고독해도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폭력과도 같다. 우리는 쿨(cool)해져야 하고, 혼자서도 잘 지내는 독립적인 개인이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외롭다고 말하는 것은 곧 약함을 인정하는 패배 선언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우리는 소셜 미디어에 화려한 혼밥 사진을 올리고, 바쁜 척을 하며, 고독을 숭고한 척 포장한다.


하지만 바통은 '나는 약한 존재이다'라고 시인한다. 이 뻔뻔할 정도의 솔직함 앞에 무장해제된다. 약해서 외롭다는 것. 친구가 없어서 미치도록 괴롭다는 것. 이 단순한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그리 힘들었을까. 바통의 지질함은 자신의 나약함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가장 인간적인 용기일지도 모른다.


바통은 결국 친구를 만들지 못한다. (혹은 만들었다가 제풀에 망쳐버린다.) 그는 여전히 외톨이고, 여전히 춥고, 여전히 누군가를 기다린다. 소설은 해피엔딩도 아니고 비극적 파국도 아니다. 그저 끝나지 않는 고독의 순환을 보여줄 뿐이다.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본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방에 갇힌 바통이겠구나. 타인을 온전히 이해할 수도 없고, 타인으로부터 온전히 이해받을 수도 없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도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에게 '나의 친구가 되어 달라'고 손을 내밀고 있구나.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도, 내 이기심이 튀어나올 것을 알면서도.


그리하여 바통이 우리에게 건네는 한 줄은 이것이다.

'고독은 극복해야 할 질병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종(種)이 지닌 피부와 같다.'

우리는 그것을 벗어버릴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독하지 않은 척 연기하는 것을 멈추는 것이다.

나의 외로움이 숭고하지 않고

비루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나 지금 너무 외로워'

'그래서 네가 필요해'라고 말할 수 있는 비루함.


어쩌면 그 솔직한 비루함만이 가면을 쓴 서로의 벽을 허물고

아주 잠시나마 체온을 나누게 해 주지 않을까.


타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비틀거리며 걷던 바통의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그 뒷모습이 거울에 비친 나 같아서.


오늘은 나 스스로를 안아주어야겠다.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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