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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정 Jan 08. 2021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일

정지우의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를 읽고


삶을 붙들고, 어떤 정신의 병으로 도피하지 않고, 사랑에 속하며, 망상에 도취되지 않고, 오늘에 밀착하며, 복잡한 자아에 몰두하지 않으며, 나의 의무들에 묵묵히 충실하면서, 금방 모든 걸 뛰어넘을 수 있다는 유혹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내게 주어진 것들 바깥을 꿈꾸지 않으면서, 그저 살아나가는 강인함을 지니고 싶다. (154쪽)



재작년에 아기를 낳았다. 아기를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안고 부비다 보면 허공에 붕 뜬 채 돌아다니는 마음이 이제는 제자리를 찾아 앉을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과거를 뒤적이느라 바빴다. 내가 어쩌다 지금 이 삶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찾고자.


갖고 싶은 삶이 있었고, 되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책을 만드는 첫 직장에 들어갔고 어쩌다 보니 서른 살이 되는 해에 그만뒀다. 그 후에는 한 번도 진지하게 고려해 보지 않은 삶을 택했다. 공무원이 되었다. ‘다른 출판사에서도 일을 더 해 볼 걸 그랬나’, ‘불안한 시간을 좀 더 버텨 볼 걸 그랬나’ 가지 않은 길을 궁금해 하다 보면 어느새 ‘어쩌다 내가 그렇게 좋아했던 회사를 그만두게 되었지’로까지 곧잘 생각이 흘러갔다. 그러다 보면 지금의 삶은 재미없는 이야기, 뻔한 드라마처럼 느껴졌다. 내가 하는 말들은 죄다 변명이고, 가끔 내 삶이 가진 좋은 면을 말할 때조차도 그게 마치 자기 불행을 숨기고자 호들갑을 떠는 사람의 과장된 자랑처럼 들렸다.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 불행한 마음이 조금씩 물러나기 시작한 건 지난해 상담을 받으면서였다. 상담을 하는 동안 나는 평소처럼 도망칠 수 없었다. 머물고 싶지 않은 감정에 오래 머물고, 대충 덮어 둔 기억들을 찬찬히 꺼내 보고, 슬쩍 눈 감았던 내 못난 구석들과 허황된 믿음들을 눈을 똑바로 뜨고 마주보아야 했다. 그러면서 점점 과거가 아닌 현재로 존재가 옮겨졌다. 내가 나라고 믿고 싶었던 사람과 현실의 나 사이에 있는 거리를,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과 내가 될 수 있는 사람 사이의 거리를 인지하고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한때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은 아쉽게도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건 어느 정도 슬픔이 담긴 체념이기도 했지만, 이제야 진짜 내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를 알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 그렇게 이십대에 어느 정도 부풀려진 자아상을 가지고 찍어 둔 시작점을 서른네 살에야 수정하게 되었다. 오랜만에 삶이 선명하게 보였다.



정지우의 《행복이 거기 있다, 한 점 의심도 없이》는 그런 내가 꼭 알맞은 시기에 만난 책이다. 저자는 계속해서 ‘삶에 안착’하는 것을 말한다. 그건 매일 내가 해야 할 일들을 하면서 동시에 내가 원하는 시간들을 만들어 내는 일이고, 완벽할 수 없는 삶을 받아들이는 일이고, 이 삶 바깥의 다른 삶을 꿈꾸지 않는 일이다. 이 책은 자기 앞에 끝내주는 이야기를 쓸 수 있는 백지가 놓여 있다고 믿는 천진한 시절을 건너 그게 삶에 대한 환상이었음을 깨달은 시점에 선 사람들이 어떻게 주어진 삶을 보듬고 아끼며 살아갈 건지를 이야기한다. 내가 살 수도 있었던 삶 말고 지금 내가 살 수 있는 최선의 삶을 만드는 법을 고민한다.


이 책을 읽으며 내가 드라마 〈18 어게인〉에 왜 그렇게 빠졌었는지를 더 또렷이 알 것 같았다. 이 드라마는 내게 ‘내가 될 수도 있었던 나’에 사로잡혀 자기 현재를 잃어버린 남자가 ‘내가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다시 현재를 되찾는 이야기다. 그가 잘 살아가는 모습에서 나는 간만에 용기를 냈다.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그런 류의 용기가 아니라 지금  삶이 나의 삶이라는 걸 받아들이는 용기,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는 용기. 그리고 이게 쉬운 용기가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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