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 이야기
장 폴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심리치료의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는 데 강력한 빛을 던진다. 그는 인간 존재의 본질을 고정된 무언가로 보지 않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하는 '과제'로 보았다. 그의 유명한 말,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선언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어떤 성격이나 운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함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구성해나간다는 의미다. 이 사유는 상담에서 우리가 매일 마주하는 문제들, “나는 왜 이런 사람이 되었을까?”, “나는 나일 수 있는가?”, “나는 변화할 수 있을까?”에 정면으로 맞선다. 사르트르의 철학은 말한다. “너는 네가 만든 너다. 그러니 지금, 새롭게 다시 만들 수 있다.” 심리치료는 바로 그 ‘만드는 과정’을 함께 걸어주는 작업이다.
사르트르의 인간관은 자유와 책임의 개념 위에 세워져 있다. 그는 인간이 본질적으로 자유로운 존재라고 보았고, 그 자유로부터 도망치려는 시도를 ‘자기기만(bad faith)’이라 불렀다. 예를 들어, 한 내담자가 반복적으로 “나는 원래 그래요”라고 말한다면, 사르트르는 거기서 자기를 하나의 본질로 고정시키려는 자기기만을 본다. 그 말은 자유로부터의 도피이자, 스스로 선택하지 않기 위한 자기 변호다. 심리치료에서 우리는 이런 자기기만의 순간들을 마주하며, 내담자가 다시 자신의 자유를 감각하고, 선택의 책임을 자각하도록 돕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나는 내가 하는 행위들의 총합이다.” 이 말은 상담에서 곧 이렇게 번역된다. “당신은 지금 이 순간부터, 당신의 삶을 다시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르트르의 실존주의는 무한한 낙관이 아니다. 그는 자유가 곧 고통이라고 말한다. 자유로운 존재는 선택해야 하고, 선택에는 항상 불안과 책임이 따른다. 존재 자체가 불안을 내포하고 있다. 심리치료는 이 불안을 제거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는 여정이다. 사르트르는 '불안'을 인간 존재의 가장 진실한 감정이라 여겼고, 이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가능성과 맞닥뜨릴 수 있다고 보았다. 이 관점은 심리치료에서 ‘증상’을 다루는 태도를 전복시킨다. 불안은 병이 아니라, 선택 앞에서의 진실한 떨림이며,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상담가는 내담자가 그 불안을 없애려 하기보다는, 그 불안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도록 곁에 머문다.
사르트르는 인간을 ‘대자 존재(Being-for-itself)’라고 불렀다. 이는 우리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항상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가능성으로 열려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상담에서 이는 결정적인 의미를 갖는다. 많은 내담자들은 과거의 상처나 실패에 붙들려 자신을 제한된 존재로 정의한다. 그러나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그 누구도 과거의 총합으로 환원될 수 없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통과해 미래를 향해 던져지는 존재다. 상담가는 내담자가 그 가능성의 문을 다시 열도록 돕는다. “당신은 되어 가는 존재입니다.” 이 말은 내담자에게 치유의 방향이 아니라, 존재의 방향을 제시하는 말이다.
사르트르 철학에서 가장 중요한 윤리적 개념 중 하나는 타인과의 관계다. 그는 말한다. “타인은 지옥이다.” 이는 자주 오해되지만, 실제 의미는 타인을 통해 나의 존재가 규정된다는 실존의 조건에 대한 성찰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 속에서 나를 인식하고, 그 시선으로 인해 나 자신이 대상화되기도 한다. 상담에서는 이 타인의 시선이 부모, 연인, 사회, 혹은 심지어 과거의 자기 자신일 수 있다. 자꾸만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자신을 살아내는 내담자는 사실 ‘자유’에서 도망치는 중이다. 사르트르는 그 관계를 끊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을 재발견하고, 다시 타인과의 관계를 '선택된 방식'으로 살아가라고 말한다. 치료는 그 관계의 맥락을 드러내고,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키는 새로운 관계 맺기의 방식을 열어주는 자리다.
또한 사르트르는 인간 의식의 특징을 ‘무화(nihilation)’라고 보았다. 인간은 단순한 사물과 달리, ‘아닌 것’을 상상하고, ‘다른 가능성’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다. 이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인간은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내담자가 “나는 이런 내가 싫어요”라고 말할 때, 그것은 자기에 대한 혐오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나를 꿈꿀 수 있다는 가능성의 발화다. 사르트르의 언어로 말하면, 그것은 존재가 스스로를 넘어서려는 운동이다. 상담가는 이 부정성을 억제하지 않고, 그 가능성을 키워주는 ‘거울’이자 ‘동반자’가 된다.
사르트르 철학은 냉혹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 누구도 당신 대신 살아줄 수 없고, 그 어떤 구원도 외부에서 오지 않으며, 모든 선택의 책임은 온전히 당신에게 있다는 사실. 그러나 동시에 이 철학은 가장 근본적인 위로를 건넨다. “그렇기에 당신은 변화할 수 있습니다.” 내담자는 이 말을 통해 더 이상 무력한 존재가 아니라, 자기 삶의 창조자가 될 수 있다. 물론 그 자유는 무겁고, 때로는 고독하며, 결코 안전하지 않다. 하지만 사르트르는 그 고독의 한가운데에서 인간다운 인간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심리치료는 종종 고통을 덜어주는 과정으로 이해되지만, 사르트르의 철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더 제대로 살아내는 과정’이다. 더 진실하게, 더 주체적으로, 더 불편하더라도 스스로의 삶을 선택하게 하는 것. 사르트르 철학으로 심리치료하기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외침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가장 날 것의 언어로, 그러나 절대 포기하지 않고 응답하는 작업이다. 그것은 결국, 내담자가 더 이상 자기 삶을 남의 것처럼 살지 않도록 돕는 일이다. 그 삶의 무게는 당신의 것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 삶의 자유 또한 당신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로, 치유다.
- 이상혁 심리상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