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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펜하우어 철학으로 심리치유하기

심리상담가의 생각

심리상담은 고통을 다루는 일이다. 내담자가 상담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와 마주한 시간의 대부분은 고통을 해석하고, 감당하고, 통과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진다. 사람들은 흔히 심리상담을 통해 “행복해지고 싶다”고 말하지만, 그 말 속을 들여다보면 실은 “덜 괴로워지고 싶다”는 뜻인 경우가 많다. 쇼펜하우어는 이 ‘괴로움’이라는 것을 철학의 출발점이자 중심 주제로 삼은 드문 사유가였다. 그의 철학은 고통을 회피하거나 미화하지 않고, 그것을 세계의 본질로 받아들이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이 어둡고 비관적인 시선은 얼핏 보면 심리상담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고통을 대하는 태도 속엔 오늘날의 심리상담가가 귀 기울여야 할 몇 가지 근본적인 질문과 태도가 숨겨져 있다.


쇼펜하우어는 인간 존재를 '의지'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는 이성이나 감정이 아니라, 맹목적이고 끝없는 생존 욕망, 생명 그 자체의 충동이다. 우리는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끊임없이 원하고, 갈망하고, 충족시키고, 또 다시 갈망한다. 이 의지는 우리를 살아 있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만족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우리를 끊임없는 결핍 상태로 몰아간다. 무엇인가를 얻기 전에는 불안하고, 얻고 나면 곧 지루해지고, 잃으면 괴로워진다. 그는 인간 존재의 근원에 있는 이 불만족의 순환을 ‘고통의 구조’로 파악했다. 그래서 쇼펜하우어에게 행복이란 적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고통이 일시적으로 멈춘 '소극적 상태'였다. 단지 더 아프지 않은 상태. 무언가를 성취한 기쁨보다는, 더 고통스러운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았다는 안도.


상담에서 우리는 이 고통의 구조와 끊임없이 마주한다. 외롭고, 상처받고, 버려지고, 인정받고 싶고, 무언가를 해내야만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 내담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지를 '자기 정체성'으로 오인한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바로 그 정체성마저 의지의 산물이라고 본다. 나라고 믿는 것, 내 안의 열망, 감정, 자존심, 기억, 집착들 — 이 모든 것은 실은 '세계 의지'라는 맹목적인 힘이 개별적으로 드러난 방식일 뿐이며, 결국 그 자체로 고통의 반복일 수 있다. 그렇다면 치료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단순히 욕망을 성취하게 해주는 일? 자기실현을 돕는 일? 아니면, 이 맹목적 의지를 조금이나마 '멈춰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일까?


쇼펜하우어는 고통의 근원을 '욕망'이라고 보았고, 그 욕망의 중단 혹은 일시적인 정지는 예술, 철학, 금욕적 삶, 혹은 연민을 통해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 중에서도 특히 ‘연민’(Mitleid)의 윤리는 심리상담에서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는 인간이 서로에게 공감하고,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을 인간 존재의 윤리적 근거로 보았다. 치료자의 공감 능력은 단순한 정서적 따뜻함이나 친절이 아니라, 내담자의 고통을 ‘감각적 수준’에서 함께 진동할 수 있는 존재 방식이다. 쇼펜하우어의 세계관에서 연민은 유일하게 이기적 의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창구였다. 그러니 치료자와 내담자 사이에 진정한 공감이 발생할 때, 그것은 단지 기분 좋은 순간이 아니라, 존재론적 전환의 가능성을 품은 '의지의 틈'이다. 이 틈이 치료적 순간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쇼펜하우어는 연민만큼이나, 인간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욕망 그 자체를 냉철히 인식하고, 때로는 포기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는 어떤 면에서 명상과도 닮았다. 불교의 무상(無常)과 고()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의 철학은, '자아'와 '쾌락'에 대한 집착을 줄이고 삶을 보다 초월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강조한다. 치료실에서 우리는 종종 ‘자기 긍정’이나 ‘자존감 향상’이라는 이름으로 욕망의 또 다른 형태를 키워주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자기애보다 더 깊은 자리에 있는 ‘무력감의 수용’이 진정한 변화의 시작이 되기도 한다. 이 무력감을 부정하지 않고, 그것이 나를 인간답게 만든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을 때, 내담자는 의지의 고삐에서 잠시 벗어나, 존재의 새로운 층위에 닿게 된다.


또한 쇼펜하우어는 예술을 의지로부터의 해방 수단으로 보았다. 특히 음악을 가장 순수한 예술로 평가한 이유는, 음악이 언어적 재현 없이도 존재의 본질을 울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심리상담에서도 때로는 말보다 ‘느낌’이나 ‘감각’이 더 본질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언어 이전의 울림, 억눌린 감정의 리듬, 중단된 감정선의 복원. 예술이 의지의 욕망을 정지시키는 것처럼, 깊은 감정 작업을 통해 억눌린 감정이 떠오르는 순간 역시, 자아의 구조 바깥에서 의지가 잠시 멈춰서는 경험이 가능하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명랑하지 않다. 삶이 고통이고, 욕망은 끝이 없으며, 자아는 환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어두움 속에서 그는 이상하게도 진실에 가까운 것을 꺼내 보이려 했다. 고통을 환하게 설명하지도, 쉽게 없앨 수 있다고 말하지도 않으며, 오히려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방식, 고통을 직면하고 연민으로 녹여내는 방식, 욕망을 일시적으로나마 내려놓을 수 있는 명료함을 제안했다. 치료자에게 필요한 것은 내담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기술뿐 아니라, 그 고통을 철학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의 깊이다. 쇼펜하우어는 그것을 우리에게 남겼다. 심리상담은 때로, 그의 말처럼, 괴로움과 괴로움 사이에 있는 짧은 평온의 순간들을 함께 발견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상한 위안일지라도.



- 이상혁 심리상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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