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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비 Jun 19. 2022

이 문장의 마침표가 그 시작이기를

김지은의《김지은입니다》를 읽고

김지은입니다 / 김지은 / 봄알람 / 2020



2020년 7월 6일, 문재인 대통령은 안희정 모친상 빈소에 조화를 보냈다. 전‧현직 국무총리부터 국회의원, 장관도 마스크를 쓰고 나타났다. 코로나가 기승을 떨치고 있음에도, 안희정은 조문객, 조화를 사양하지 않았고 언론 취재도 막지 않았다. 마치 자기가 건재하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은 것 같았다. 3일 뒤,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인권변호사로 유명해졌던 그가, 비서를 성추행했던 내용이 언론을 통해 공개되었다. 계속되는 참담한 현실에 이 책을 폈다. 위력에 의한 성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미투 이후 피해자의 삶은 어떻게 부서졌는지, 그 참혹한 현실이 책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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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정은 철저하게 위력을 행사했다


대선 경선 캠프에서부터 충남도청까지, 안희정 소속 직원들에게 안희정의 말은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었다. 일방적으로 지시를 하고 따르는 구조였다. 정치권은 ‘이력서보다 선배들의 추천과 입김이 채용에 절대적으로 영향을 끼치’(p.81)는 곳이라고 한다. 소속 직원들의 미래가 안희정의 손에 달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중 김지은 씨가 맡았던 수행비서는 안희정의 참모들에게 ‘순장조’(p.15)라고 불렸다. 그녀는 안희정과 ‘공동운명체’라는 것을 끊임없이 세뇌당했다. 김지은 씨의 미투 이후, 법정에 탄원서를 보낸 한 공공기관의 비서는 ‘대한민국에서 일하는 비서의 현실’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비서는 지시를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거스를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p.138)


전지적 상사였던 안희정은 ‘24시간 자신의 전화 착신, 아들과의 요트 강습 예약, 개인 기호품 구매, 안희정 부부가 음주했을 때 개인 차량 대리운전’(p.360) 등 공사를 가리지 않고 김지은 씨에게 일을 시켰다. 김지은 씨는 안희정이 ‘말을 하지 않아도 기분을 알아야’(p.90) 했고, 안희정 부부의 ‘보험 약관부터 보험 담보 대출금, 중도 해지 비용’(p.101)도 대신 처리해야 했고, ‘안희정의 부인이 빵이 먹고 싶다고 하면 (김지은 씨가) 다른 사람들이 식사하는 시간에 그걸 사러 다녀’(p.100)와야 했다. 이 모든 것이 안희정의 ‘기분’을 맞춰주기 위한 일이었다. ‘인사권자의 기분이 업무의 핵심이었다.’(p.90)


안희정은 자신의 권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경찰 고위 간부, 국가 정보기관의 수장, 대통령에까지 줄이 닿아있었다. 자신이 차기 대통령감으로 불리고 있다는 것도, 어떤 행동을 해도 소속 직원들이 자신에게 이견을 꺼내지 못하는 사실도 잘 알았다. 안희정은 자신의 위력을 사용해, 김지은 씨를 네 차례나 성폭행했다. 극악한 노동 현실에서, 이미 노동권과 인권을 침해당하고 있던 김지은 씨를 더 깊은 지옥으로 빠뜨렸다. 미투를 하지 않겠다는 대답을 유도하여 김지은 씨를 무기력하게 만든 후, 바로 성폭행을 가하기도 했다. 



피해자는 왜 피해자다워야 하는가?


김지은 씨는 성폭행을 당한 이후에도, ‘일이 끊기면 바로 생계에 지장이 왔기에 바로 관두지 못했다.’(p.114)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왜 거부하지 못했는지, 왜 그만두지 못했는지를 끊임없이 진술해야 했다. 만약 일하는 회사의 사장이 직원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했을 때, 과연 직원이 쉽게 거절할 수 있을까? 게다가 직원의 가족이 아파서 병원비가 필요한데, 가족 중에 자기만 돈을 벌고 있다면? 괜히 거절했다가 눈 밖에 나서 생계에 위협이 될 가능성을 감수하고 싶을까? 김지은 씨는 안희정의 카톡에 ‘넹’이라고 대답한 것부터 평소 열심히 일한 것까지 모두 피해자답지 않다고 치부되었다.


특히 성범죄 사건의 피해자는 왜 이렇게 피해자다움을 입증해야 할까. 항상 슬픈 표정을 짓고 어두운 색 옷을 입어야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일까?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건 도대체 누가 정하는 것일까? 가해자가 명망 있는 남성일 경우, 사람들은 그가 평소에 그렇지 않은 사람임을 앞다투어 증언한다. 반면 고발을 한 피해자는 혹시 피해자답지 않은 행동을 한 것은 아닌지, 혹시 ‘이상한 사람’은 아닌지 애써 밝혀내려고 한다. 김지은 씨도 ‘평소 침실에 들어오는 이상한 여자, 내 남자를 유혹하는 엽기적인 여자’(p.172)라는 등의 조작된 진술로 공격을 받았다. 사건에 상관없이 피해자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 증거를 무력화시키는 가해자들의 전략이었다. 



생존자의 삶과 앞으로의 우리는


‘대부분의 성폭력은 권력의 차이에서 비롯되기에 가해자들은 여전히 조직의 핵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피해자를 향한 조직적인 공격을 시작한다. 2차 가해다. (...) 피해자가 그 힘 밖으로 나오려면 그 분야에서 쌓아온 자신의 미래도 함께 버려야 한다.’(p.296) 4장에 실린 김지은 씨의 일기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성범죄 피해자의 삶은 너무도 쉽게 황폐화된다. 안희정의 가족들이 조작된 이야기를 인터넷에 올렸고, 사실관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익명의 네티즌들이 마녀사냥을 일삼았다. 김지은 씨는 공무원으로 돌아가기는커녕, 극심한 2‧3차 가해에 외출을 거의 하지 못하고 통조림으로 연명했다. 


김지은 씨는 권력자라도 다른 사람의 인권을 짓밟으면 처벌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명확히 하고 싶었던 것뿐이다. 2019년 9월 9일, 대법원에서 안희정에 대한 최종 유죄 판결이 난지, 고작 1년도 되지 않았다.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의 모친상 빈소에 현직 권력자들이 앞다투어 찾아가는 것, 심지어 대통령이 조화를 보내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범죄자 안희정의 권력이 죽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아닌가?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는 길은 한없이 멀어 보이는데, 가해자가 그전의 권력을 찾는 길은 너무나 쉬워 보인다. 


피해자 김지은 씨는 생존자이다. 현재의 삶, 과거와 미래, 자아, 인격에 대한 공격은 계속되지만, 그녀는 힘껏 살아내고 있다. 그녀는 ‘죽어서 인정받는 것이 아닌, 살아서 인정받을 수 있는 사례를 만들고 싶다’(p.254)라고 다짐한다. 김지은 씨가 겪은 것은 권력에 의한 폭행이다. 사회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갑의 횡포 연장선에 있는 것이다. 부디 권력 남용으로 인권을 유린당한 피해자가 누구에게도 피해자다움을 증명하도록 강요받지 않고, 철저한 진상조사를 통해 권력을 남용한 가해자가 강력하게 처벌받기를 바란다. 피해자가 일상으로 돌아가 그저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기를, ‘이 문장의 마침표가 그 시작이었으면 좋겠다.’(p.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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