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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민 Sep 24. 2024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 진은영

그럼에도 읽는다

이번 연휴에 틈틈이 읽은 진은영 시인의 산문집이다.
'다시 본다, 고전'이라는 칼럼으로 <한국일보>에 연재했던 글을 묶었다.
명절 앞두고 목차만 훑는데 마음 울렁거림은
그녀가 소환한 작가들 때문.
버지니아 울프, 한나 아렌트, 프란츠 카프카, 에밀리 디킨스, 조앤 디디온, 존 버거,
알베르 카뮈, 실비아 플라스 그 외 여럿이다.

책머리에 그녀는 헤르베르트라는 시인의 말을 빌린다.
수많은 고전을 읽은 뒤에도 인생이 달라지지 않았으므로 책 읽기는 무용하다고.
읽은 책들의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으며 읽어야지 하고서 꺼내보면 밑줄까지 그어가며
읽었던 책이었다고.
당연하지 않은가? 어떻게 다 기억하겠는가?
기억이 날 수도 아닐 수도 영향을 줄 수도 말수도 다시 읽고서야 내 것이 되기도 아니기도 하며
단박에 도끼가 되어 얼어붙은 내 감수성을 깨부수기도 하는 것이 책 아니겠는가?
무용할지 모르나 또한 무해하므로 우리는 책을 읽는다.
띠지에 쓰인 그대로 '위대한 책들의 타격 아래서 우리는 번번이 죽고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

존 버거의 <A가 X에게>는 흥미롭게 읽은 책이다.
오랫동안 폐쇄된 교도소에서 마지막 수감자가 남긴 편지 뭉치를 발견한 존 버거가
그 편지를 새롭게 편집했다고 밝히는데
이는 소설임에도 작가 자신을 등장시켜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허문다.
시대적 상황이 불분명한 채 약사인 아이다가 수감 중인 사비에르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다.
사랑하는 사이지만 애틋하고 절절한 연애편지라기보다 현재에 맞서고 투쟁하며
서로의 가치관을 동조하는 수단으로 편지를 주고받는다.
극한 상황에서 인생 방향을 제대로 보게 한다.

실비아 플라스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소설 속 언급되었던 그녀에 관한 내용을 읽고 서다.
아마 이름 있는 소설가일 텐데 책 제목과 작가는 기억상실하고 충격적인 사실에
이런 시인이 있었구나만 강력하게 머릿속에 각인된.
그럴만한 것이 영국의 계관시인 테드 휴스와 결혼해 세기의 문인 커플이 되었고
작가 사후 출간된 책으로는 처음으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가다.
그러나 그녀의 문학보다 사람들이 더 주목한 것은 그녀의 죽음이다.
남편 테드가 시집으로 호평받으며 승승장구할 때 그녀는 기쁘면서도 비참함을 느낀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않는 남편 대신 자신의 욕구를 내려놓으면서까지 가정에 헌신했으나
거듭된 외도의 충격으로 끝내 자살한다.
아이들 방에 먹을 것을 차려놓고 문틈을 테이프로 막은 채 가스오븐에 머리를 넣었다.
실비아 책상에 놓여 있던 마지막 시집은 끔찍한 자살 충동과 싸우면서
삶에 집중하려고 애쓴 기록이며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에서는  그녀가  자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한다.
치열하게 생을 살다 간 비범한 천재의 비극이다.

그런가 하면 미국 시인 에밀리 디킨슨을 수식하는 여러 표현들.
53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35년간 집 밖으로 외출을 하지 않고 살았던
폐쇄된 수도원의 수녀로 비유되곤 하는 그녀.
시를 1800편 가까이 썼지만 시집 한 권 내지 않았고 발표한 시는 고작 일곱 편 뿐이었다.
여동생이 죽은 언니의 서랍 속에 원고들을 출간해서야 위대한 시인이 세상에 알려졌다.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폴란드 할머니 시인은 1994년 노벨상 수상 직후 인터뷰에서
<시 하나가 완성되면 다음번에는 어떤 시를 쓸까 그 생각에만 빠져 지내는
평범한 인생을 살았다>고 회고한다.
아우슈비츠에서 유태인 학살이 자행되는 등 전쟁과 함께 청춘을 맞았고
대학을 중퇴하고 결혼 생활도 원만치 않았으나
그녀는 시를 쓰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절박하기에 잊기 쉬운 유머를 말하고 사랑과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트리고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릴 만큼 평이한 언어로 시를 쓴다.
멈추지 않는 예술가의 일이다.
그들이 이룩한 예술을 글로 읽는 재미가 가득하다.
버지니아 울프와 한나아렌트를 다시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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