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관을 찾았다. 딱히 보고 싶은 영화가 아니면 이제는 두 시간 이상을 소비해야 하는 일이 아깝다는 생각에 최근 영화 볼 일이 거의 없었다. 그러다 글래디에이터 ||. 아무튼 글래디에이터. 2000년도 개봉 당시 러셀 크로우라는 명배우를 알게 되었고 지금도 다시 보고 싶은 영화로 손꼽는 그 영화의 20년 후 이야기다. 모처럼 반가운 마음으로 예매했다.
로마의 진정한 검투사 막시무스가 죽고 생사를 모르던 그의 아들 루시우스가 희망의 로마를 꿈꾸는 대 서사시. 초반 장면에 주인공의 모습은 거의 임팩트가 없어 보인다. 적군에 아내를 잃고 노예로 팔려와 검투사가 되는 과정 속에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되면서 드러나는 새로운 분노. 어머니는 황제의 딸이었으며 아버지는 영웅 막시무스. 그런 어머니가 자신을 살리려고 로마 밖으로 떠나 보낸 일. 그가 어떻게 20년을 살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아프리카 변방에서 하노라는 이름의 군인으로 생활하다 전쟁에 지고 로마로 압송된다. 처음에는 아내를 죽인 적에 대한 분노로 적장의 목을 베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그 적장은 어머니의 현 남편이자 의롭고 진정 로마를 사랑하고 존경받는 장군이다. 폭압의 두 황제를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부패한 로마를 일으켜 세우려는 계획이 있음을 알게 된다. 결국 마지막 둘의 결투에서 너의 아버지를 존경했다고 말하며 기꺼이 칼을 내려놓는다. 루시우스도 칼을 거두지만 궁사들이 쏜 화살에 아카시우스 명장군은 죽고 만다.
글래디에이터는 영화적인 모든 요소를 다 갖춘 것으로 익히 유명하다. 볼거리 많은 정도가 아니라 오락적 재미를 느끼기에도 부족함 없다는 개인적 의견이다. 악덕한 로마 황제, 제 잇속만 채우는 부패한 원로원, 콜로세움에서의 잔인한 검투 장면 그 안에 로마를 사랑하는 진정한 영웅 이야기. 그러나 나는 초반부터 영화 시나리오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서사보다 대사가 귀에 들어왔으며 장면보다 인물에 집중하면서 이 방대한 영화가 갖는 의미가 역사와 신화와 문학을 배경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로스와 레무스 두 쌍둥이가 로마 건국 신화 주인공인데 영화에서도 황제가 두 형제로 등장해서 보자마자 나는 로마 건국사가 떠올랐으며 하노의 아내가 죽었을 때 배를 타고 이승의 세계를 건너는 꿈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생각났고 하노 즉 주인공 루시우스가 고대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시를 암송하는 것이라든가 단테 신곡을 연상하는 지옥에 관한 언급도 나온다. 콜로세움 해상전이며 무엇보다 자주 등장하던 '분노'라는 단어는 호메로스 일리아스의 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정체다. 하물며 그가 아버지 막시무스의 의장과 칼을 갖고 결투하는 장면은 그대로 아킬레우스 오마주로 보였다. 그런가 하면 외할아버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으로도 유명한 로마의 황제다. 너무나 새로운 시각으로 글래디에이터가 보인 것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이 의도한 영화적 배경을 나는 모른다. 모든 영화가 그렇듯 호불호가 있는 모양인데 그럼에도 호평이 우세해 보인다. 사전 지식 없이 관람하던 중 덴젤 워싱턴을 다 만나고 역시 명불허전. 20년 전에 보았던 감동적 영화에 대한 애정 어린 연장선으로 생각했다가 뜻밖의 많은 것들을 느꼈다. 나만의 방식으로 위대한 도시국가 로마를 그 역사를 문학을 생각나게 했다. 영화 포함 좋은 예술 작품은 나의 사고를 확장한다. 호기심을 일게 하고 다시 콜로세움에 가 보고 싶고 일리아스를 또 읽고 싶고 그 어려운 베르길리우스의 문학을 접하고 싶은 등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은? 기타등등. 묵혀있던 지적 감성을 되살리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