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자면 나는 금사빠다.
몇 년 전 <개선문>을 읽고 주인공 라비크에 빠져 헤어 나오질 못했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했더니 한 친구가 자기도 읽기 시작했다면서 근데 왜 이렇게 술 얘기가 많이 나오는 거냐고 물었다.
당시 나는 그 생각은 못 했던 것 같다.
시대적 배경이 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히틀러의 영향권 긴장 상태이며
파리 몽마르트 근처 나이트클럽과 사창가 싸구려 호텔이 공간적 배경이다.
지금 다시 보니 술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물들 대거 출연인 것을.
칼바도스, 보드카, 코냑, 페르노, 브랜디, 샴페인, 럼주가 반복 변주다. (내 친구 섬세하네)
라비크는 독일인 외과 의사로 게슈타포에 쫓기는 친구들을 돕다가 자신도 붙잡히고 그 과정에 애인 시빌을 잃는다.
도망 다니고 추방당하는 중 이름마저 바꿔 가며 파리에 불법 입국했다.
무능한 의사를 대신해 마취된 환자를 수술하고 그들이 깨기 전 사라지는 유령 의사로 생계를 유지한다.
라비크라는 이름은 벌써 세 번째 가명이다.
어느 날 센 강 다리 위 난간에서 휘청이는 여인 조앙 마두를 돕고 우연이 필연으로 이어지는데.
그녀는 라비크를 사랑하게 되지만 라비크는 마음이 끌리면서도 방황하는 여자를 믿지 못한다.
라비크의 신분이 발각돼 국외로 추방당한 석 달 동안 다른 남자를 만나고 결국 죽음을 당하는 조앙 마두와 그를 사랑하는 부유하고 아름다운 미국인 케이트 헤그시트룀이 있다.
의사로서 힘없고 약한 창녀들을 치료하고 악덕 산파에 대항하는 등 주변 여성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는다.
그러나 그를 지탱하는 원동력은 수용소에서 애인 시빌을 고문으로 죽게 한 극악무도 하케에 대한 복수다.
사랑 소설이기 전에 반전 소설로 읽히는 의미와 재미가 크다.
소설가 레마르크보다 그가 만든 소설 속 인물에 빠져든 이름도 멋있는 실력 있는 외과 의사 라비크.
그 스스로 2년째 쓰고 있는 이 가명이 가장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외로운 휴머니스트.
강강 약약 면모에 냉소적이지만 내 맘대로 느끼는 암울하고 외롭고 어두워서 아름다운 인물이다.
독일 나치스에 쫓겨 유럽 각국에서 도망 온 피난민들이 모여 사는 몽마르트 언저리.
피난민 중 한 사람 라비크의 절망적 일상과 그럼에도 인간으로의 정신 상태를 인상 깊게 그린다.
[여인은 라비크 쪽으로 비스듬히 다가왔다. 빠른 걸음이었으나 이상하게도 휘청거리고 있었다.]
호기심 가득한 첫 문장으로 시작해,
[... 너무 어두워서 개선문조차 보이지 않았다.] 안개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다 읽고 나서 나는 커피에 코냑 한 방울 떨어 뜨리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끝나지 않은 전쟁의 공포 속에 살고 있으니 라비크 같은 사람도 어딘가에...
※문득 <술과 소설과 나>에 대한 글이 써보고 싶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