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국부론]
왜 국가만 부자가 되는가?
― 애덤 스미스, 중상주의, 『국부론』 그리고 시민의 부
1. 문제 제기: 국가는 왜 부유한데, 시민은 여전히 가난한가?
18세기 유럽. 각국은 수출에 몰두했고 금과 은을 국고에 쌓아올렸다.
국가의 금고는 불어났지만, 시민의 식탁은 비어 있었다.
이는 단순한 재정 문제를 넘어, 경제 시스템 자체가 ‘국가의 부는 증가하고 시민의 삶은 악화되는’ 구조였음을 보여준다.
애덤 스미스는 이러한 시대에 다음과 같은 의문을 품고 『국부론』(1776)을 집필한다.
“왜 국가는 금을 쌓고 있는데, 시민은 굶주리는가?”
그는 국가의 부와 국민의 부 사이에 존재하는 극심한 불균형,
즉 "국부의 탈시민화" 현상을 경제 철학적 시선으로 통찰하고자 했다.
2. 중상주의의 본질: 시민 없는 경제
중상주의(Mercantilism)는 16~18세기 유럽 경제 정책의 지배적 패러다임이었다.
그 핵심은 다음과 같다:
국부는 금과 은이다.
수출을 늘리고 수입을 줄이면 부가 축적된다.
국가는 무역 흑자를 통해 외화를 확보해야 한다.
이 체제에서 시민은 생산 수단이자 세금 납부자였으며,
그들이 노동을 통해 창출한 부의 대부분은 국가 권력의 유지와 군사력 강화,
또는 상류층의 사치와 식민지 확대에 사용되었다.
스미스는 이런 구조를 강하게 비판했다.
"In the mercantile system, the interest of the consumer is almost constantly sacrificed to that of the producer."
“중상주의 체제에서 소비자의 이익은 거의 항상 생산자의 이익에 희생된다.”
— 『국부론』 제4권
3. 노동 착취와 소비 억제의 경제 시스템
중상주의 체제에서 수출이 늘어 국가에 금이 쌓여도 시민은 가난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노동자는 낮은 임금으로 과잉 생산
그 생산물은 국가가 수출하여 금을 확보
소비는 억제당함 (수입 억제 정책, 고세율, 물가 통제)
수익은 시민에게 분배되지 않고 권력자와 상인 자본으로 축적
즉, 시민의 노동이 국가의 금고를 채우는 수단으로 착취당하고,
정작 그 금은 시민의 소비로 환원되지 않는 구조였던 것이다.
4. 애덤 스미스의 혁명: 국부의 재정의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국부의 본질을 근본적으로 다시 쓴다.
"The annual labour of every nation is the fund which originally supplies it with all the necessaries and conveniencies of life which it annually consumes."
“각 나라의 연간 노동은 그 나라가 매년 소비하는 모든 필수품과 편의품을 공급하는 원천이다.”
— 『국부론』 제1권 제1장
그는 국부를 금이나 은이 아니라,
국민이 실제로 소비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양’,
즉 **‘실물적 생활력’**으로 본다.
그리고 더욱 명확히 선언한다:
"Consumption is the sole end and purpose of all production."
“소비는 모든 생산의 유일한 목적이며 본질이다.”
— 『국부론』 제4권
즉, 생산은 수단일 뿐, 목적은 시민의 소비에 있다.
5. 시민은 언제 경제의 주체가 되었는가?
스미스 이전의 철학과 정치경제 사상은 모두 왕실, 귀족, 성직자 등 권력자 중심이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는 노동을 천하게 보았고,
중세는 신의 질서 속에 위계적 봉건구조를 정당화했으며,
근대 초기 정치철학자들조차 시민의 경제적 주체성을 인식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최초로 말한다:
노동하는 개인이 국부를 창출한다
소비하는 개인이 경제의 목적이다
국민 다수의 삶이 개선되지 않으면, 국부는 증가한 것이 아니다
"It is not from the benevolence of the butcher, the brewer, or the baker, that we expect our dinner, but from their regard to their own interest."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하는 것은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의 선의가 아니라, 그들의 자기 이익에 대한 고려 덕분이다.”
— 『국부론』 제1권 제2장
이 말은 곧,
경제는 상호 이익을 위한 시민들의 자유로운 교환 활동에서 탄생한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6. 결론: 국부는 누구의 것인가?
스미스의 철학은 이렇게 요약된다:
“국가의 부는 시민의 소비 가능성에서 온다.
국민이 많이, 다양하게, 자유롭게 소비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진정 부유하다.”
그가 바라본 국부는
국가의 수출입 통계나 금고에 든 은화가 아니라,
시장에 넘쳐나는 빵과 직물과 도구들이 시민의 손에 닿는 상태였다.
그의 『국부론』은 단지 경제 이론서가 아니라,
시민을 처음으로 경제의 중심에 놓은 선언서다.
그리고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왜 국가는 부자인데, 나는 가난한가?
“한 나라의 진정한 부는 그 국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이다.”
그리고 이 부는 어떻게 만들어지느냐?
자유로운 시장
노동의 분업
경쟁과 자율성
제한된 정부 개입
애덤 스미스는 자본가의 착취를 꿰뚫어보았지만 개선책은 제시하지 않았다. '
애덤 스미스는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라고 말했지만,
그 부가 실제로 ‘노동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현실도 분명히 알고 있었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어떻게 개선할지에 대한 구체적 해법은 거의 제시하지 않았다.
이건 스미스 철학의 근본적 한계이자 의도적인 선택이기도 해.
1. 스미스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동자가 만든 부를 노동자가 다 가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The produce of labour constitutes the natural recompense or wages of labour.
But the whole of the produce of labour does not always belong to the labourer."
“노동의 산물은 노동의 자연스러운 보상이지만, 그 전부가 항상 노동자에게 속하지는 않는다.”
— 『국부론』 제1권 제8장
그는 “임금은 자본가가 지불한다”는 구조 속에서,
노동자는 자신의 생산물 일부만을 ‘임금’이라는 형태로 받고,
나머지는 자본가나 지주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아주 냉정하게 기술해.
즉, 그는 **“노동이 모든 부의 원천이다”**라고 선언하면서도,
동시에 **“하지만 그 부는 노동자의 것이 아니다”**라고 인정해버리는 거지.
2. 그렇다면, 스미스는 왜 그걸 바꾸자고 하지 않았나?
여기서 스미스의 사상적 위치가 드러나.
그는 **‘개선하려는 혁명가’가 아니라, ‘이해하려는 분석가’**였어.
그는 불평등이나 착취를 도덕적으로 규탄하거나, 제도 개혁을 직접 설계하지 않았어.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
� 첫째, 스미스는 시장질서에 대한 낙관적 믿음을 갖고 있었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해:
"It is the natural effort of every individual to better his own condition..."
“모든 개인은 본성적으로 자신의 처지를 개선하려 노력한다.”
— 『국부론』 제2권 제3장
그는 자율적인 시장에서 사람들이 이익을 추구하면,
결국 경쟁이 임금을 올리고,
생산성 향상이 전체 사회의 부를 키우고,
그 부가 하위 계층까지 점진적으로 스며든다고 믿었어. (일종의 ‘낙수효과’ 관점)
� 둘째, 그는 체제 밖의 대안을 상상하지 않았다
스미스는 자본주의가 막 태동하던 시기의 인물이야.
계급 갈등이나 노동운동, 사회주의적 상상력은 아직 없었어.
그는 노동자가 부당하게 적은 몫을 받는다는 사실은 지적했지만,
그것을 어떻게 분배하자고 주장하진 않았어.
(그건 거의 100년 뒤 칼 마르크스가 할 일이었지.)
3. 스미스가 생각한 ‘개선’의 방향이 있다면?
완전히 아무것도 안 말한 건 아니야.
그는 이런 방향성들을 언급했어:
✅ 정부는 노동자의 생존을 최소한 보장해야 한다
“No society can surely be flourishing and happy, of which the far greater part of the members are poor and miserable.”
“대다수 구성원이 가난하고 비참한 사회는 결코 번영하거나 행복할 수 없다.”
— 『국부론』 제1권 제8장
→ 아주 조심스럽게, 정부가 개입해 노동자의 기본 생계는 보장해야 한다는 태도를 취해.
✅ 공정한 경쟁이 유지돼야 한다
그는 독점, 담합, 조합주의를 싫어했어.
→ 경쟁이 사라지면 임금은 더 억압당하고, 자본가는 더 이익을 독식하게 되니까.
✅ 교육의 중요성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이나 『국부론』 후반부에서
시민 교육, 특히 노동자의 교육 향상이 사회 전체의 품격을 높인다고 강조했어.
(복지보다는 계몽에 가까운 접근이지만, 어쨌든 ‘하향 평준화’는 경계했지.)
4. 결론: 스미스는 문제를 봤지만, 체제를 넘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가 전부를 받지 못하는 현실을 정확히 묘사했다.
그러나 그것을 바꾸려 하지 않았고, 시장 내의 자연적 조정에 기대했다.
그것이 스미스의 한계이자 한 시대의 관점이었고,
훗날 마르크스, 케인즈 같은 이들이 그 불균형을 더 강하게 문제삼게 된다.
요약 한 줄:
애덤 스미스는 “노동이 부의 원천”이라고 말했지만,
“그 부는 노동자의 몫이 아니다”라는 현실을 인정했고,
그 불균형을 구조적으로 고치려 들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