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어라 뛰는 이유가 고작 제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라니...
1.
죽어라 뛰는 이유가 고작 제자리에 머무르기 위해서라니.
처음엔 싫었다. 현실과 폭 50cm 길이 2m가량 되는 그 위의 세계가 너무도 닮아서다. 한번 올라서면 내려오는 방법은 두 가지다. 목표를 채우거나, 낙오해 버리거나. 스톱 버튼을 누를 수도 있다. 그것은 가장 비참한 선택이다.
나는 올라섰다. 뛰지라도 않으면 하루 종일 달리 할 일이 없어서다.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내려진 선택. 그 결과가 비참한 현실의 축소판 위에 서는 것이라니. 어쩌다 내 인생이 이렇게 됐을까.
2.
건강이라도 챙겨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아파트 1층 커뮤니티 센터 헬스클럽엔 낯익은 동네 아줌마들이 열심히 러닝머신을 뛰고 있다. 대한민국 중산층이 살고 싶어 하는 대표적인 신도시. 이런 동네에서 오전 시간에 남자가 있을 리 없다.
아줌마들은 참 열심히 뛴다. 마치 늘어난 뱃살만큼 남편과의 거리가 멀어진 것을 깨달은 양 땀을 뻘뻘 흘린다. 아니 작정을 하고 땀을 뽑아내는 것 같다. 그들은 나름대로 운동효과를 극대화하는 방식을 구사한다. 손에 아령을 들고 열심히 흔드는 아줌마도 있고, 손을 앞뒤로 흔들며 손뼉 치기를 하는 아줌마도 있다. 아줌마들의 집중력은 국가대표급이다. 그들은 그 순간 살 빼는 목적 하나에 온전히 집중한다. 애를 한둘쯤 낳으면 출산 과정에서 체면을 담당하는 뇌세포가 같이 쑥 빠져버리는 것 같다.
체중계에 올랐다. 몸무게는 100kg에 육박한다. 스트레스는 풍선에 바람을 불어넣듯 내 몸에 참으로 많은 지방을 붙여 놓았다.
TV에서 보았던 지방 블록이 떠오른다. 다이어트 클리닉을 홍보하는 의사들이 손에 들고 종종 나오는 1kg짜리 지방 블록. 벽돌만 한 지방 덩어리 100개가 내 몸에 붙어있다. 갑자기 몸이 끈적거린다. 구역질이 나온다.
러닝머신 앞에 섰다. 그 위에 올라가 뛰면 100개의 지방 블록이 우수수 쏟아져 내릴 것 같다. 위층 아줌마가 쏟아낸 비지땀이 패드 군데군데 묻어 있다. 그 아줌마의 몸에선 그동안 몇 개의 지방 블록이 떨어져 나갔을까.
간단한 기계에 참 많은 버튼이 달렸다. 천천히 올라가 TV 채널을 돌리고 속도를 시속 6km에 맞췄다. 끼익 소리를 내며 패드가 돌기 시작한다. 회전 속도가 점점 빨라지더니 4km에서 한번 멈춘다. 갑작스러운 가속으로 인한 사고를 막기 위한 설정이다. 냉혹한 현실에 어울리지 않는 세심한 배려다. 버튼을 한 번 더 눌러야 설정된 속도를 향해 다시 패드에 가속이 붙는다.
서서히 빨라지는 러닝머신 위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속도를 올리며 걷는다. 그리 빠른 속도는 아닌데 처음엔 보조를 맞추는 게 쉽지 않다. 한걸음 한걸음 반복되며 어느새 머신과 하나가 된다. 언제 왼발을 떼서 앞으로 내 디뎌야 하는지, 발을 디딜 때 어느 정도의 세기로 돌아가는 패드를 지긋히 밟아야 하는지, 허리는 어떤 리듬으로 좌우로 흔들어야 하는지. 같은 동작이 반복되면서 몸은 생각보다 빨리 낯선 기계에 적응한다.
처음엔 제각각 방향으로 출렁거리던 100개의 지방 블록들도 리듬을 타며 일사불란하게 같은 방향으로 대형을 맞춘다. 앞으로 디딘 오른발이 땅에 닿으며 동시에 왼발이 패드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늘을 나는 기분이다. 그 순간 러닝 머신 위는 무중력 상태가 된다. 100개의 지방 블록 무게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발을 디딛는 탄력으로 지방 블록들이 관성을 받아 중력과 반대 방향으로 힘의 균형을 이루는 순간이다.
한 10여 분쯤 지났을까. 타이머가 보이지 않는 풀 스크린으로 설정을 해 놓아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다. 1분이 10분 같기도 하고 10분이 1분 같기도 하다. 과연 절대적인 시간이란 게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한 것 같다. 종아리에서 뻐근함이 느껴진다.
러닝머신은 적어도 20분 이상은 뛰어야 효과가 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분 뒤에야 비로소 지방이 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잡다한 지식들이 그렇듯 사실 여부는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그런 잡다한 얘기들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 결정적인 기준이 되기도 한다.
적어도 20분을 채우기로 결심한다. 내 느낌이 맞다면 나는 지나간 시간만큼을 러닝 머신 위에서 더 뛰어야 한다. 사실 시속 6km는 뛴다고 하기엔 느린 속도다. 빠른 걸음이라고 할까. 그러고 보니 왜 러닝머신 위에서 시속 4km 미만의 속도 설정이 가능하도록 했을까. 그럼 워킹머신이 돼 버리는 데.
생각했던 것보다는 종아리가 많이 뻐근하다. 대학시절 검도부 동아리 활동으로 다져진 근육들은 다 어디로 간 걸까.
불현듯 시속 6km로 돌아가는 러닝머신 위에서도 버텨내지 못하면 나는 영원히 낙오자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나는 뻐근한 다리에 힘을 주고 좀 더 빠르게 리듬을 탔다. 다리에 쥐가 나도 버텨야 한다.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힘이 났다. 좀 더 빨라진 리듬에 몸은 다시 적응하기 시작한다. 팔의 리듬과 다리의 리듬이 빨라지고 몸의 중심이 되는 허리의 회전도 빨라진다. 하나 둘, 하나 둘, 마음속으로 두 개의 숫자를 반복한다. 이마에 흐르는 땀이 방울로 맺혀 패드 위에 떨어진다. 나는 지금 지방 블록들을 짜내고 있다.
정화. 더러운 것이 빠져나가고 비어있는 상태다. 깨끗해지려면 일단은 비워야 한다. 딱딱하게 굳어 있던 100개의 지방 블록들이 사이사이에 공간이 생기는 기분이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의 농도는 조금씩 짙어진다. 어느새 뻐근한 종아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고통이 끝에서 느껴지는 희열감. 아드레날린이다.
풀 스크린 모드를 콘솔 모드로 바꾸었다. 화면에 그동안 뛴 시간과 뛴 거리가 표시된다. 시간은 어느덧 30분을 넘어서 있다. 100개의 지방 블록 중 하나 정도는 짜낸 것 같다. 이제 99개 남았다.
3.
선배. 저 우석입니다.
어 그래 우석아.
선배는 내가 전화를 건 용건을 알고 있다. 하지만 한 동안 말이 없다.
어 그래. 그것 때문에 전화했지. 그래 조금 기다려 보자. 위에다 얘기는 했는데 아직 국장도 별 말이 없네. 네 얘기는 내가 잘해두었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모호함. 지금 나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게 바로 이 것이다. 되면 된다 안되면 안 된다 딱 잘라 말하면 좋을 텐데 전화를 걸 때마다 선배의 반응은 맺음이 없다. 희망고문만큼 고통스러운 것도 없다. 선배가 그 사실을 알까.
이제 1주일만 더 지나면 백수생활도 석 달이 된다. 평소 잘 아는 선배로부터 이직 제의를 받고 덜컥 사표를 낸 게 고통의 시작이 될 줄은 처음엔 짐작도 못했다. 막상 회사를 나오고 나니 선배 회사의 조직개편이 늦어지면서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다.
사건이 벌어지고 난 뒤 생각해보면 그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모든 일들이 마치 그 사건의 전조라도 된 것처럼 꼬리표를 달고 일렬로 죽 늘어선다. 하지만 사건이 벌어지기 전엔 왜 그처럼 수많은 전조들이 하나도 머리를 내밀지 않는 것인지. 전조는 항상 사건이 벌어진 이후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법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계약서에 서명을 한 뒤 사표를 냈어야 맞는 것인데. 왜 그렇게 서둘러 전 회사를 정리하고 나왔던 것일까. 나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사고는 상식에서 벗어난 일의 벌어짐이다. 생각이 상식의 범주에 머물러 있을 때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이 상식에서 사고의 범주로 넘어갈 때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이유는 대부분 어처구니가 없다. 사고를 낸 스스로도 그 이유를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땐 뭐에 씌었었나 봐란 말은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란 말과 같다.
사표는 사고였다.
사표를 내는 순간 나의 모습은 호기로웠다. 사장이 면담을 요청해 나를 잡았고, 회장도 비서실장을 통해 만류 의사를 전달했다. 최고 경영진의 만류는 나에게 당신은 우리 회사에서 상당히 가치 있는 사람입니다란 뜻으로 오해됐다.
그 것은 형식적인 절차였다. 나는 대체 가능한 수많은 노동력 중 하나였고, 그들이 만류 이유는 대체 절차에서 오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녹음기를 튼 것에 불과했다. 그 녹음기는 이전에도 수없이 사표를 낸 직원들 앞에서 틀어졌고 많은 경우 그 녹음기의 위력에 회사에 남았다.
나는 굴복하지 않았다. 나이 40이 넘었는데도 아직 불러주는 회사가 있었고, 마음속엔 그런 회사가 수두룩했다.
착각은 마약과도 같았다. 주사 바늘을 통해 혈관의 작은 구멍을 내고 들어온 착각이란 약방울은 이내 동맥을 타고 온몸에 퍼졌다. 약효가 모세혈관을 타고 온몸의 세포와 세포 사이에 꽉 들어차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착각은 아드레날린 분비를 촉진했고, 그 아드레날린은 온몸의 근육을 펌프질 했다. 나의 육체는 한없이 가벼워지고, 생각은 지나칠 정도로 낙관적이 됐다. 엔젤링이 머리 위에서 돌고 하얀색 깃털로 가득한 날개를 단 천사들이 나의 주위에 몰려들었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나를 위해 예비되고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아주 멋진 피날레를 준비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는 과거를 단절시킬 마침표가 필요했다. 그 마침표의 전과 후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기대감으로 가득 찼다. 나는 그에 걸맞은 이벤트를 준비했다. 마침 여름휴가철이었다.
장충동 반얀트리 호텔 2박을 예약했다. 1박에 100만 원, 이틀을 묶는데 에누리 없이 200만 원 하는 최고급 도심 리조트다. 객실에 가족용 풀장이 있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풀을 즐기며 남산과 도심 야경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야외 수영장은 푸른 물빛과 상아색 대리석의 색이 대비를 이루며 럭셔리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장동건과 고소영 부부, 심은하 등 최고 스타들이 주로 찾는다는 이유로 유명해진 수영장이다.
아들 녀석이 작년부터 하와이 가자고 노래를 했는데, 비행기만 타지 않았을 뿐 리조트의 수준은 그 이상이다. 하와이나 발리도 생각해 봤는데 예산의 절반을 비행기 값으로 날리는 것은 그리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해외 유명 리조트로의 여행을 하려면 우선 부지런해야 한다. 반년 전에는 예약을 해야 그나마 싼 값에 여행을 다녀올 수 있다. 성수기에 예약을 하면 두 배 가까운 값을 치러야 한다. 그러고도 마음에 드는 방을 구할 수 없으니, 나 같은 게으른 새는 엄두를 내기 어려운 게 바로 해외여행인가 보다.
반얀트리에서의 여름휴가에 아들 녀석은 입이 뾰족해졌다. 하기야 열 살 배기 아들 녀석에게 최고급 수영장 자쿠지와 뷔페, 별도의 수영장이 딸린 스위트룸 등 휴가의 내용은 중요한 게 아니다. 그 녀석에게 중요한 것은 방학이 끝난 뒤 친구들에게 자랑할 수 있는 행선지다. 반얀트리에서의 럭셔리한 휴가는 그 녀석의 친구들에겐 장충동 여행일 뿐이다. 아들 녀석에겐 하와이 왕복 비행기 티켓만이 중요한 것이다.
와이프도 입이 나오긴 마찬가지다. 그녀에게도 반얀트리에서의 프로그램보다는 공항 면세점에서의 명품 쇼핑이 더 중요한 이벤트다. 생각해보니 신혼여행 후 한 번도 같이 해외여행을 한 적이 없다. 하와이에서의 여름휴가는 몰디브 신혼여행 후 와이프에겐 나와 함께하는 12년 만의 해외여행이었던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그녀와 나 사이에 아들 녀석이 하나 생겼다는 것이다.
나는 예산을 좀 더 늘려 모두를 만족시킬만한 절충점을 찾기로 했다. 하와이로 갔을 경우 소요될 비행기 값의 절반을 내놓고 둘이 원하는 쇼핑을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최고급 도심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며 인근 신세계 백화점에서의 명품 쇼핑을 즐길 수 있으면서도 예산은 절반 수준이니 내가 생각해도 최고의 여름휴가였다.
얘기를 듣자마자 와이프와 아들 녀석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와이프는 루이뷔통 신상백을 해외 직구로 구매할 경우 가격을, 아들 녀석은 닌텐도 신상 게임을 검색하기 위해서였다.
휴가 마지막 날. 나는 잠든 와이프와 아들 녀석을 객실에 남겨놓고 혼자 수영을 했다. 대리석 풀에 가득 담긴 수영장 물은 마치 거대한 옥 덩어리 같았다. 다이빙을 하면 풍덩 물속에 가라앉는 게 아니라 딱딱한 옥돌 속에 갇혀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직 햇살이 따갑지 않은 오전 시간이라 그런지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생각을 정리하기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한 시간 정도 그 옥빛에 몸을 담갔다. 약간은 검게 그을린 내 살을 타고 옥색 물들이 줄줄 흘러내린다. 차가운 물이 머리 끝을 타고 떨어져 내리면 머릿속의 번잡한 생각들도 모두 쏟아져버릴 것 같았다.
수영장에서 나와 탈의실에서 목욕수건을 걸쳐 입었다. 핸드폰에 부재중 수신 전화를 확인하니 사장으로부터 메시지가 와 있다.
내일 웃는 얼굴로 볼 수 있는 거지? 순간 마음이 살짝 흔들렸다. 사장은 내가 입사할 때 술자리 면접을 했던 팀장이다. 뉴욕 지사장을 하고 돌와와 사장까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배다.
나중에 깨달은 것이지만 오랜 시간 쌓여온 추억은 다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자산이다. 회사를 옮긴다는 것은 그런 자산을 포기한다는 의미였다. 패기만만했던 시절의 어설픔을 다듬어준 선배들, 그 패기를 겨루었던 동기들, 그 패기가 고개를 숙이고 노련함이 자리할 때쯤 그런 패기로 무장하고 들어와 나를 자극시켰던 후배들. 지나간 시간이 내게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소중함이 문뜩 뇌리 속에서 고개를 든다 돌이켜 보면 상식이란 녀석이 사고가 나기 전 사고를 막기 위해 잠깐 찾아왔던 순간이다.
하지만 좋은 생각의 맞은편에선 동시에 악마의 꼬리가 갈퀴를 내밀었다. 그 악마는 자꾸 내게 사사로운 잔정에 휘말려 기회를 놓칠 셈이야? 그런 나약한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성공할래? 하며 속삭였다.
나는 악마의 손을 잡았다.
4.
다음날 아침. 휴가를 마친 나는 회사 정문 앞에서 부장을 기다렸다 사표를 전달했다. 사장과 회장께는 새 직장이 정리되는 대로 인사를 오겠노라며 인사를 보류했다. 얼굴을 맞대고 인사를 하면 다시 마음이 약해질 것 같다는 생각에서다. 그렇게 나는 20대 말과 30대를 보낸 회사를 떠났다. 십수 년 세월을 보낸 회사와의 이별 절차는 생각보다 단순했다.
새로운 삶은 그리 단순하게 나를 맞아주지 않았다.
좀 더 기다려 보자. 조직개편이 생각보다 늦어지네.
스카우트 제의를 했던 선배는 조직개편 이야기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첫 한두 달은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온 직장생활에 지친 심신을 쉬게 할 수 있는 기회라고 자위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마음이라도 편하게 쉬자. 언젠간 자리가 나겠지라며 나는 보통의 직장인이 가질 수 없는 휴가를 즐겼다.
공백기가 100일로 접어들자 속이 타기 시작했다. 100이란 숫자는 어마어마한 상징성을 지녔다.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100일 기도로 간절함을 하느님께 전달할 수 있는 시간이고, 3년을 열심히 보낸 수험생들이 마지막 스퍼트를 하는 시간도 100일이다. 특별한 계기가 없이 30년을 직장생활을 해야 하는 수많은 가장들에겐 담배 끊기와 금주 등의 결심에 대한 성공을 확신할 수 있는 절대 시간 또한 100일이다. 곰이 사람이 되기 위해 동굴 속에서 쑥만 먹고 견녀내야 했던 시간도 100일이다. 대개의 경우 100일을 버티면 성공이다.
그 시간을 나는 허송했다. 그것도 인생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40대 초반에 말이다. 처음엔 자책이 밀려오고 그다음 파도엔 무기력함이 실려왔다. 그 무기력함이 찰싹찰싹 뺨을 때리고 나는 속수무책으로 주저앉았다. 벌겋게 닳아 오른 두 뺨에서 열이나 나는 두 손으로 뺨을 감 샀다. 그 손 등 위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한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의 책임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를 나는 깨닫게 됐다. 자존심에 상처를 받게 될까 봐 와이프는 잔소리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나를 더욱 무겁게 짇눌렀다.
나는 급기야 100일간의 칩거생활을 깨고 업계 선배들을 찾아 나섰다. 원했던 회사에 대한 미련은 주저 없이 내동댕이치고 먹고살기 위해 일단 어떤 일이든 구해야 했다. 100일 동안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내게 등을 돌리고 앉아 있었다. 스카우트 제의에 얽힌 스토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은 보물선이 돼버렸다. 그 자리에 비친 내 모습은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둬버린 무분별한 직장인, 무책임한 가장이었다. 나는 스펙은 좋으나 조직엔 어울리지 않는다는 평판의 굴레를 짊어진 채 구차한 구직활동을 해야 하는 백수였다.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우리 회사에 오기엔 네 스펙이 부담이야. 자기보다 능력 있는 부하직원은 불편하거든. 그렇다고 네가 부장으로 오기엔 아직 나이가 어리잖아. 미안하다.
능력이 있어서 채용할 수 없다는 말은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져야 한다는 말처럼 위안이 되지 못한다.
추천을 하려면 하자가 없어야 하는 데 특별한 이유 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몇 달을 논 사람을 추천 천하기 쉽지 않다. 현직에 있었더라면 좋은 기회였을 텐데. 미안하다.
솔직함은 차라리 덜 상처가 됐다.
어느새 나는 하자 있는 경력을 가진 스펙 좋고 부담스러운 경력 구직자가 돼 있었다.
5.
저녁을 먹고 내가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러닝머신을 뛰는 일뿐이다. 그 순간은 와이프와 아들 녀석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뱉지 않아도 된다. 첫 몇 발짝을 때면 이젠 자동으로 몸이 반복해 움직여 주니 번거로운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아서 좋다. 절망에 빠진 백수가 할 수 있는 일 중 이 만한 게 있을까?
운동복을 차려입고 현관문을 나서면 뒤에서 와이프와 아들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다. 마치 내가 있을 때는 애써 대화를 참아온 것 마냥 나의 부재와 동시에 그들은 이야기 봇따리를 풀어놓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나는 그럴 때마다 그 게 궁금했다. 남편과 아빠 때문에 받은 스트레스를 두 모자는 뒷담화로 푸는 것일까. 아니면 모자간에만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영역이란 게 있는 것일까. 두 경우 모두 나의 소외를 전제로 했다. 내가 없어야 시작되는 가족들의 대화. 나는 가족을 위해 없어져야 하는 존재인가. 서글프다.
97.5kg. 운동을 시작하고 처음 몇 주간 2kg 정도가 빠지더니 그 이후론 좀처럼 줄지 않는다. 내가 네 몸에서 떨어져 나갈 줄 알아? 하며 지방 블록들이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이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신의 존재를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목적을 잊는 것. 목적을 이룰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무엇인가 이루려면 뚜렷한 목적을 세우고, 그에 맞는 세부전략을 짜야한다. 그다음 세부전략만 남긴 채 머릿속에서 당초 목적을 지워야 한다. 오직 하루하루 지켜야 할 세부전략만을 생각하고 습관처럼 그 일을 하는 것이다.
나는 감량 목표치를 지웠다. 그냥 뛰는 것이다. 모니터에서 나오는 감자별이란 시트콤을 보며 나는 뛰었다. 감자와 별.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작가는 왜 별 앞에 감자란 수식어를 붙였을까. 감자는 그 별의 모양일까 크기일까. 아니면 내가 모르는 감자가 갖는 메타포 같은 게 있는 것일까. 모든 작품은 일단 세상에 나오게 되면 작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수많은 해석을 낳게 된다. 의도의 모호함. 그것은 예술 수요자들에게 자기만의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작가의 의도적 배려다.
아무리 단순한 일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좀 더 좋은 방법을 찾게 된다. 사람의 머리는 쓰지 않으려 해도 매 순간 생각이란 것을 하게 돼 있나 보다. 하긴 잠을 자는 순간에도 제 멋대로 꿈이란 것을 꾸니까. 주인의 통제를 벗어나 자기 의지대로 작동하는 순간. 그 순간 머리는 가장 창의적인 결과물들 내놓는다. 머리는 제 주인보다 똑똑한 존재다.
러닝 머신 위에서의 단순 동작. 거기에 어떤 창의적인 동작이 있을까라고 하겠지만 시간이 가면서 몇 가지 노하우들이 쌓여간다.
첫 번째는 지연 운동이다. 러닝 머신에서 떨어진 발을 최대한 늦게 내려놓는 것이다. 결국 고무 패드를 디디고 있는 발이 지연된 시간만큼 더 버텨야 한다. 허벅지와 발바닥에 좀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 같은 거리를 뛰어도 근육에 더 많은 자극을 주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노하우. 비틀기다. 골반을 최대한 틀어주면서 뛰는 동작이다. 공원을 달리는 것과 러닝 머신의 차이는 디딤발이 패드를 따라 자동으로 뒤로 이동하면서 제쳐지는 것이다. 공원을 달릴 때는 디딤발이 정지된 상태에서 나머지 발이 앞으로 나서면서 이동하게 되지만 러닝머신은 그 반대다. 디딤발이 패드를 따라 뒤로 이동하는 시간 동안 패드를 디딜 수 있다. 축이 되는 발의 디딤 시간이 그만큼 길어진다. 축을 따라 몸을 트는 동작이 상대적으로 공원을 달릴 때 보다 쉽다. 골반을 많이 틀어줄수록 배와 허리의 살들이 그만큼 더 자극을 받게 된다.
몸을 더 많이 틀기 위해서는 팔의 높이를 조절하면 된다. 90도 이상 팔을 접은 상태에서 뛰다가 트위스트 동작에 들어갈 때는 팔에 힘을 빼고 늘어뜨린다. 그럼 몸을 틀 때 원심력이 생겨서 더 쉽게 틀어지고 더 많은 힘이 들어간다. 그만큼 칼로리 소모가 늘어나는 것이다.
이런 방법들을 조합하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감자별은 끝나간다. 스카이콩콩 개발자인 남편이 죽고 남편이 다니던 직장의 사장 집 차고에 얹혀사는 여주인공과 그 엄마. 시트콤에 궁상 종결자들이 나오는 것은 왠지 또 하나의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란 생각이 든다. 작정하고 웃겨야 하는 장르의 드라마에 나오는 극빈자들.
그런데 그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웃음이 난다. 궁극의 궁상맞음에서 오는 야릇한 동질감. 두 모녀를 보면서 은밀히 감춰둔 자신의 지질함에 대해 위안을 받게 되는 것일까. 궁극의 코미디는 비극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했던가. 아니면 그냥 지금 생각이 난 건가. 40대를 넘어서니 모든 게 불확실해진다. 예전엔 내 말이 맞나, 네 말이 맞나 내기도 많이 했었는데. 지금은 누가 내기를 하자면 내가 틀렸나란 생각부터 든다. 하긴 이렇게 불확실해지지 않는다면 그 많은 확실한 기억들을 어떻게 머릿속에 저장하고 살까. 선택과 집중. 머리의 생존 방식이다.
40분. 내가 정해놓은 최소의 시간이다. 처음보다 두 배가 늘었다. 한번 머신에 올라가면 이 시간에 지나기 전엔 내려오지 않기. 대신 이 시간이 넘어가면 언제든 스톱 버튼은 눌러도 된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란 게 이상하다. 내려와도 되는 시간이 되면 오히려 더 달리고 싶어 진다. 40분을 채우기 전엔 시간이 지나기만 바라다 막상 규칙에서 해방이 되고 나면 몸이 한결 가벼워지는 것이다. 그럴 땐 작정을 하고 뛴다. 언제든 내려와도 되니 몸에 남아 있는 에너지를 모두 쏟아버릴 요량으로 속도를 높인다. 시속 6km에서 8로, 다시 10으로 올리고 달린다. 몸에 익숙하지 않은 속도는 새로운 긴장감으로 몸을 자극한다. 내가 이 속도로 얼마나 달릴 수 있을까란 미지에 대한 두려움도 생긴다. 새로움은 미지고 미지는 곧 공포다. 러닝머신이란 감당할 수 있는 공간 위에서의 공포는 곧 즐거움이다. 여러 경로를 거쳤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새로움은 곧 즐거움이다. 간단한 이치를 참 복잡하게 깨닫는다. 먹물들이란.
속도를 높이고 10분 정도를 더 뛰면 땀이 뚝뚝 떨어진다. 사실 이 10분을 위해 앞의 40분을 달린 것이다. 삶도 마찬가지인가. 어떤 것을 위한 필요조건으로 반드시 채워야 하는 시간이 있다. 40분을 버티고 나면 비로소 지방이 타서 땀으로 쭉쭉 빠져나온다. 39분을 달리면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는 10분을 경험 허지 못한다. 그 39분은 결국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헛된 시간이 되는 것이다. 시간에도 제각각 역할이 따로 있는 것인가. 앞의 40분의 희생이 없이는 결코 경기장에 나올 수 없는 환희의 순간. 그 게 바로 마지막 10분이다.
10분을 시속 10으로 달리고도 숨이 차지 않았다. 10분을 더 뛰기로 한다. 결국 한 시간을 채운 뒤 나는 스톱 버튼을 눌렀다. 속도계가 서서히 내려가고 결국 0이 된다. 고무 패드의 회전 속도가 느려질수록 몸이 후끈해진다. 이상하다. 정지상태에서 느껴지는 체온 상승. 자기 차례를 기다렸던 땀들이 마치 땀구멍이 막힐까 걱정이라도 하듯 쏟아진다. 뚝뚝. 땀이 흐르는 소리를 참 잘 표현한 의성어다. 생각해보면 땀이 흐르는 모양도 뚝뚝이다. 의태어인가? 별별 생각이 든다.
몸무게를 쟀다. 96.7kg. 0.8kg이 한 시간 동안 땀으로 떨어져 나갔다. 몸무게를 재는 시간에도 하염없이 흐르는 뚝뚝이. 1kg짜리 지방 블록 한 장이 내 몸에서 또 낙오했다. 왠지 모를 희열과 성취감. 인간의 불행이 그렇듯 행복도 참 사소한 것에서 오는 모양이다.
현관문을 열었다. 내 몸과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는데 다시 느껴지는 무게감. 내가 빼놓은 1kg의 지방 블록이 산산이 부서져 우리집 거실 공기 속에 퍼졌나 보다. 와이프와 아들 녀석의 수다도 나의 출현과 더불어 다시 멈추었다.
백수에게 가장 힘든 것은 아침에 일어날 이유가 없다는 엄중한 현실이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와이프는 직장에 가고 아이가 학교에 간 한참 다음에도 내가 일어날 뚜렷한 이유는 없다. 와이프와 아들에게 누워 있는 나는 그저 97장의 지방 덩어리일 수도 있다.
일어날 이유는 없지만 그렇다고 더 누워있을 이유도 없었다. 더 잠을 자야 할 필요도 없었으니까. 사람이 살면서 자야 할 잠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면 나는 지난 석 달 동안 총량의 절반은 써버린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런데 잠을 자는 것 외엔 별달리 할 일이 없다. 직장을 다닐 땐 시간만 나면 하고 싶은 것들이 그렇게 많았는데 그 많은 희망 사항들은 왜 절망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쓰러져 버린 것일까.
습관적으로 모닝커피를 마신다. 오늘 일어나 마시는 첫 잔인데 배가 불러온다. 골프 케이블 채널은 이제 틀기만 해도 신물이 난다. 똥이가 무릎 밑으로 다가와 꼬리를 흔든다. 아들 녀석이 지어준 푸들 이름이다. 5살 무렵인가.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란 책을 읽어주며 나는 아이들이 똥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시기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똥 얘기가 뭐 그리 재미있는지 누가 내 머리에 똥 쌌어라고 익살스럽게 읽어주면 아들 녀석은 여지없이 자지러졌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나의 다섯 살에 나도 똥 얘기를 좋아했을까. 똥이의 이름은 아마도 아들 녀석의 독서 기억에서 나온 것이리라.
똥이는 내가 백수인 것이 상관없는 세상의 유일한 존재였다. 아니 내가 백수인 게 오히려 행복인 존재였다. 심심할 때마다 뼈다귀처럼 생긴 간식을 던져주니까.
나는 와이프가 지포 락에 담아둔 개껌 하나를 꺼내 들고 앉아란 명령어를 외친다. 간식을 줄 때마다 아이는 앉아, 손, 뒤집어의 순으로 명령어를 외쳤다. 그러면 똥이는 앉았고, 손을 내밀어 아이의 손바닥을 간지럽힌 뒤 몸을 뒤집어 배를 내밀었다. 먹고살기 위해 똥이는 사람의 말을, 그것도 가장 어렵다는 어족에 속하는 한국말을 익혀야 했다.
나의 명령어에도 똥이는 곧잘 앉고 손을 내밀고 배를 뒤집는다. 먹고 산다는 것, 그것은 가장 강력한 지배 수단이자, 가장 서글픈 피지배 계층의 당면 과제였다. 나는 개껌을 받아 들고 카펫 위에서 좋아라 구르는 똥이를 바라보며 잘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간식을 주는 존재. 그것이 아니라면 똥이의 눈에도 나는 97장의 지방 블록에 불과한 존재일 것이다.
이제 며칠만 더 지나면 나는 내 카톡에 저장된 1077명의 대문 사진과 문구를 외울 수 있을 것 같다. 카톡 대문 사진과 문구는 내가 지인들의 근황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채널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란 문구는 나 지금 힘든데 연락해란 뜻이었고, 대문 사진 속에 있는 부케 꽃은 나 지금 행복해, 곧 결혼해요란 메시지였다. SNS의 단서에서 읽을 수 있는 메시지는 무궁무진했다.
SNS를 통해 연락해 오는 사람은 하루하루 줄었고, 결국 아예 없는 날이 찾아왔다. 나는 내가 알던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졌고,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세상에서 잊혔다. 나는 내 의식 속에만 존재할 뿐 타인의 세상엔 없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Kogito ergo sum)고 외친 데카르트만이 내가 아직은 존재하고 있다는 자위의 수단이 됐다. 데카르트도 백수였던가. 나는 존재하기 위해 생각했다.
SNS 세상에서도 나는 단체 카톡 안에서만 존재했다. 나만을 위한 메시지는 SNS 세상에도 없었다. 남부군 정모 공지. 20여 명의 멤버들에게 뿌려진 모임 총무의 정기모임 공지 카톡 메시지가 뜨면서 카톡하고 울리는 알람음에 나는 눈이 뻔쩍 뜨였다. 누군가 나를 찾는다는 기대감. 그것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외치지 않아도 되는 단서였다. 핸드폰을 들고 메시지를 확인한다. 정모 공지를 위한 단체 카톡임을 아는 순간. 나는 또 생각했다. 존재하기 위해서.
회사를 그만둔 뒤 모든 모임에 나가지 않았다. 화려한 컴백, 그것은 내가 꿈꾸는 현직 복귀 시나리오였다. 깜짝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는 지인들. 동정이 부러움으로 바뀌는 그들의 표정. 시기와 질투의 눈빛. 그것이 내가 그려놓은 극적인 컴백 시나리오다.
삶은 자기가 써놓은 각본대로 되는 게 아니다. 나는 무대 위의 배우일 뿐, 대사와 지문은 내가 알지 못하는 다른 존재가 쓰는 것이다. 미지의 절대자는 내가 써놓은 각본을 갈기갈기 찢어 빨간색 쓰레기통에 처박아 버렸다. 그가 쓴 각본에 화려한 컴백은 없었다. 그의 시나리오가 극적인 반전이 없이 끝난다면 나는 내 생각과는 달리 비극의 주인공이었다. 아니 비극이 조연일 것이다. 내가 인생의 주인공이란 생각. 참으로 오랫동안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구나.
처음 모임을 빠졌을 때는 총무에게서 전화가 왔다. 물론 나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 빠졌을 때는 총무에게서 개인 계정으로 카톡이 왔다. 물론 나는 답장을 쓰지 않았다. 세 번째 빠지니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그의 기억 속에서 나는 빠졌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리스트에서 지우는 것은 세 번의 부재면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이제 누구를 만나려면 먼저 연락해야 했다. 관계란 쌍방향으로 유지되는 것인데 나의 관계는 이제 일방적인 바라기가 됐다. 나는 누구에게도 연락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존심은 내가 맺어온 모든 관계를 끊어버리는 가위였다. 그것은 무쇠로 만들어져 잘 무뎌지지도 않았다. 쓰면 쓸수록 날이 섰고, 서슬마저 퍼레졌다.
자존심이 오기와 만나면 어떤 모습이 되는지 나는 알게 됐다. 그것은 아집이었고, 아집은 언제나 관계의 단절과 동행했다.
무덤 속에 있지 않아도 나는 무덤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속은 빛의 실마리조차 없는 겹겹의 어둠으로 덮여 있었다. 눈을 떠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앞이 캄캄하다는 현실, 그것에 대한 자각만 없어지면 어둠 속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 100% 부재의 공간이 될 것 같았다. 그것은 바로 죽음이었다. 의식이 없어지면 어차피 산산이 부서져 버릴 육체. 그것은 이미 어둠 속에서는 없는 존재였다. 인간은 죽어서 부재의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부재의 존재가 되는 순간 죽는 것이었다. 관계의 단절. 그것은 곧 무덤이다.
6.
오늘은 유난히 몸이 가볍다. 생각하는 기능을 제외한 모든 기관이 없어져 버린 것 같다. 문뜩 머리를 숙여 발끝을 보았다. 내가 좋아하는 나이키 에어 운동화. 나의 몸은 멀쩡히 나의 의식 밑에 붙어있다. 생각하므로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을 나는 다시 떠올렸다. 의식의 확인. 그것은 내가 아직 생존하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러닝머신 위에 올라가 속도를 시속 8km에 맞추고 달리기 시작한다. 언제나 그렇듯 지루한 시간을 버티기 위해 나는 풀 스크린에 모드를 맞춘다. 서서히 돌아가는 머신. 나는 그 템포에 발을 맞춰 서서히 걸음을 옮긴다. 몸이 유난히 가볍다. 러닝 머신 위엔 나의 의식만 존재하고 육신은 올라와 있지 않은 것 같다. 나는 뒤를 돌아본다. 혹시 나의 육신이 러닝 머신 뒤에서 조금씩 걸음이 빨라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미친 생각이다. 하지만 가끔은 뜬금없는 생각이 좀 더 정확히 상황을 인식하게 할 때가 있다. 소파 위에 누워 혼자 TV를 보다 문뜩 소파 밑에 혹시 귀신이 있는 게 아닐까란 공포가 밀려올 때. 진짜 소파 밑에 귀신이 있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오감을 통해 외부의 자극이 뇌에 전달되지 않아도 퀀텀 점프식으로 파악되는 진실. 그것이 바로 육감이다. 육감은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다.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육감이란 말이 만들어졌을 수도 있겠다.
뒤를 돌아보고 나서야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의 육신이 뒤에 있지 않음을 확인했다. 안도의 한숨을 내뱉는다. 바이오 리듬에 따라 유난히 몸이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있나 보다 정도로 나는 생각했다.
한참을 달린 것 같은데 이상하게 땀이 나지 않는다. 몸이 가볍게 느껴져서일까. 땀은 육체노동의 결과인데 지금 나의 육체는 전혀 노동을 하고 있지 않는 느낌이다. 새털처럼 가벼운 의식만에 러닝 머신 위에서 달리는 것 같다.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본다. 내가 뒤에서 나를 바라보는 느낌이 계속 든다. 땀을 내기 위해 나는 속도를 시속 10km로 높였다. 모드를 바꾸는 순간 잠시 비치는 타이머. 타이머는 39분을 가리키고 있다. 다른 때 같으면 땀이 러닝 머신 패드 위로 뚝뚝 떨어져 말라버린 시간이다. 이상하다.
7.
헬스클럽 유리창 너머로 앰뷸런스 한대가 지나간다. 사이렌 소리를 내던 앰뷸런스는 408동 앞에 멈춘다. 우리 동이다. 응급상황인가 하고 나는 생각한다. 사고는 당사자가 아닌 타인에겐 호기심의 대상일 뿐이다. 어느 집에서 사고가 난거지를 생각하고 다시 러닝머신 패드를 바라본다. 시속 10km로 돌아가는 고무 패드 위의 결이 꽤나 속도감 있게 느껴진다. 달리는 기차 안에서 추수 전 누렇게 물든 들판을 바라보는 느낌이다.
누군가 이동식 침대에 실려 나온다. 침대를 앰뷸런스에 들어 옮기는 112 대원들. 뒤따라 누군가의 가족들이 따라 나온다. 앰뷸런스에 오르는 두 모자. 익숙한 얼굴이다. 어 저들이 왜 저기 있지? 나는 와이프와 아이를 보고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눈 앞의 장면을 설명할 수 없다. 다른 집 누군가의 사고에 와이프와 내 아이가 앰뷸런스를 탈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들 것에 실려 나온 그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서둘러 러닝 머신에서 내린다. 스톱 버튼을 누를 경황도 없이 뛰어내린다. 앰뷸런스가 출발하기 전 와이프와 아이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엄습한다. 뒤를 돌아다본다. 여전히 나의 육신이 어디선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톱되지 않은 러닝 머신이 계속 돌아가고 있다. 나는 헬스클럽을 나와 서서히 출발하는 앰뷸런스를 향해 뛴다.
그동안 러닝 머신 위에서 열심히 땀을 흘린 보람이 있는 것일까. 오늘은 이상하게 유난히 몸이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