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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금협회의 디지털 금 전략

by 김창익

왜 지금 ‘디지털 금’인가

스테이블코인(USDT, USDC 같은 달러 연동 토큰)이 거래소·핀테크·국경 간 B2B 정산에서 사실상의 표준 레일로 자리 잡으면서, 전통적인 안전자산인 금은 결제와 담보 영역에서 점점 뒤로 밀렸다. 스테이블코인은 24시간 전송, 낮은 진입장벽, 코딩 가능한 결제라는 장점으로 거래 규모를 폭발적으로 키웠고, 그 결과 마진콜·담보·정산 같은 금융 인프라의 핵심 자리도 차지했다. 세계금협회(WGC)는 이 흐름을 뒤집기 위해 **실물 금을 디지털 증서(토큰)**로 표준화해 다시 결제·담보·정산의 중심으로 끌어올리자는 계획을 내놓았다. 요점은 명료하다. 금고에 있는 실제 금의 소유권을 잘게 나눠 디지털로 주고받게 만들고, 그 토큰을 파생거래의 증거금, 은행 간 레포(단기 담보대출), 중앙청산소(CCP)의 담보처럼 제도권 인프라에 투입하겠다는 것이다. WGC는 2026년 1분기, 영국의 한 결제기관과 시범 거래를 통해 작동성을 검증한 뒤 표준을 본격 확산시키겠다는 로드맵을 그려두었다.


설계의 초점은 기술이 아니라 ‘법적 소유권’이다

이번 시도의 승부처는 블록체인 속도나 지갑 UX가 아니라 법과 제도다. 과거에는 “토큰을 갖고 있어도 법적으로는 발행사에 대한 ‘받을 돈’(청구권)일 뿐”인 구조가 많았고, 발행사가 파산하면 내 금이 회생재산에 섞여버릴 위험이 있었다. WGC가 바꾸려는 지점은 여기다. 토큰 보유자가 금을 직접 소유(bailment)하거나 신탁(SPV) 수익권을 분리 소유하는 형태로 계약을 설계하고, 발행사가 파산해도 내 금은 회생재산에서 자동 분리(bankruptcy-remote)되게 관할법·계약서·원장 구조를 맞춘다. 보관은 런던·취리히 등 복수 금고에 LBMA 등급 금괴로 분산하고, 개별식별(allocated) 또는 풀(미식별) 단위를 토큰과 1:1로 맵핑한다. 감사는 독립 회계법인이 고빈도 준비금 증명과 실물 실사를 정례화해 공개하고, 상환은 토큰을 현금·현물·금 ETF로 바꾸는 여러 옵션을 제공하되 최소 단위·수수료·운송 보험 같은 조건을 표준 문서로 투명하게 고지한다. 결제·정산 단계에서는 CCP나 트라이파티 레포에서 적격 담보 지위를 얻도록 헤어컷(담보가치 할인율)과 운영 규칙을 미리 설계하고, 온체인은 단일 체인에 고정하지 않고 **복수 체인+전통 장부(계정기반)**를 병행해 거래소·커스터디·은행 코어 시스템과 자연스럽게 맞물리게 한다.


과거의 세 번의 시도, 무엇을 했고 왜 막혔는가

첫 번째 물결은 1990년대 말~2000년대 초의 비(非)블록체인 디지털 골드통화였다. 대표 사례인 e-gold는 금고에 금을 넣고 이용자에게 그램 단위 잔액을 주어 서로 송금하게 했다. 초반엔 차지백이 없는 저마찰 결제로 급성장했지만, 무허가 송금·자금세탁(AML) 위반, 허술한 신원확인(KYC), 해킹·피싱 피해, 은행 파트너십 붕괴가 겹치며 결국 문을 닫았다. 동종 서비스들도 보관 투명성·감사 부재·운영진 리스크로 잇달아 사라졌다. 요컨대 “금이 있다”는 말만으로는 결제 네트워크의 인허가와 범죄통제를 대체할 수 없었다. 두 번째 물결은 2010년대의 결제+투자 하이브리드였다. GoldMoney/BitGold 류는 고객 명의로 금을 보관하고 보관증서를 발행해 저축·투자 플랫폼으로는 자리 잡았지만, 일상 결제는 확장에 실패했다. 금은 가격 변동과 보관·보험 수수료가 있고, 환불·세무 처리 등 현실적 마찰이 커서 카드·계좌이체 같은 기존 결제망보다 비싸고 불편했기 때문이다. 결론은 분명했다. 금은 지불수단보다는 장기 저축·담보로 더 잘 맞는다. 세 번째 물결은 2018년 이후의 온체인 토큰형 금이다. PAXG, XAUT, PMGT, DGX 등은 “1온스=토큰 1개” 모델로 발행되어 소액 투자와 DeFi 담보를 가능하게 만들었지만, 대형 기관 채택은 더뎠다. 이유는 넷이다. 첫째, 법적 소유권이 관할마다 달라 토큰이 실제 소유인지 발행사에 대한 채권인지 불분명했다. 둘째, 감사·보관 표준이 제각각이라 1:1 대응 신뢰가 흔들렸다. 셋째, 실물 상환은 최소 수량·운송·보험 비용이 커서 “언제든 현물로 바꾼다”는 약속이 현실에선 비싸고 느렸다. 넷째, 유동성이 체인·거래소별로 쪼개져 스프레드가 넓고, 규제 지위도 국가마다 달라 면허·공시 부담이 컸다. 이 네 가지가 합쳐져 기관의 본격 진입 문턱이 높게 유지되었다.


이번에는 무엇이 달라져야 하는가: 체크리스트를 ‘세트’로

WGC가 성공하려면 법적 타이틀·커스터디·감사·상환·시장조성·규제 정렬을 한꺼번에 맞춰야 한다. 토큰을 금의 직접 소유(또는 신탁 수익권)로 규정하고 파산격리를 계약·관할에 박아두면 “발행사 신용위험”이 사라진다. 커스터디는 다중 금고 분산과 국제 등급 금괴 사용으로 물리적 리스크를 줄이고, 준비금 증명과 실사를 자주·깊게 공개해야 한다. 상환은 리테일도 접근 가능한 소액 현금·ETF 상환, 그리고 지역 금은방·은행 창구를 묶은 라스트마일 네트워크로 실제 비용을 낮춰야 한다. 시장조성은 지정 MM이 호가 의무를 지고, 복수 체인과 거래소를 브리지로 묶어 유동성을 한데 모아 스프레드를 줄여야 한다. 규제 측면에서는 영국·EU(MiCA/EMIR)·미국(SEC/CFTC/FinCEN) 체계에 맞춰 결제면 지급결제 인허가, 투자면 증권/원자재 공시·면허를 선제적으로 갖추고, 제재·AML·KYC는 스테이블코인 이상으로 엄격히 적용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도 선택이 현실적이어야 한다. 커피값 결제 같은 소액 결제보다, 파생증거금(IM/VM), 트라이파티 레포, 은행 간 담보, 국경 간 B2B 정산 같이 금과 궁합이 맞는 영역부터 깊게 파고들어야 한다.


파일럿에서 확인해야 할 ‘성공의 눈금’

시범 사업이 성공했는지는 숫자로 확인할 수 있다. 담보를 옮기는 데 걸리는 시간이 1시간 이내로 줄어드는지, 일반 거래에서의 스프레드가 현물·선물 시장 평균과 유의미하게 차이나지 않는지, 상환에 드는 총비용(수수료·운송·보험)이 사전에 명확히 공개되는지, 준비금 증명 리포트가 월 단위 이상으로 투명하게 제공되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은행·브로커·청산기관·연기금 같은 기관들이 실제로 들어와 거래를 하는지다. 이 지표들이 원하는 수준을 넘어서면, 디지털 금은 “틈새 토큰”을 넘어 제도권 담보의 후보로 올라선다.

금리·담보·분배의 연결고리: 누가 이익을 보고, 누가 값을 치르는가

금리는 채권자와 채무자 사이의 힘의 배분 장치다. 미국이 급격히 금리를 올리면 전 세계 자금이 미국채·달러 담보로 몰리면서 담보 프리미엄이 급등하고, 그 비용은 신흥국 정부·저신용 기업·가계로 전가된다. 이때 담보 레일이 한쪽(달러 담보)에만 집중되어 있으면, 마진콜 연쇄와 강제 청산이 빠르게 확산되어 고용·임금에까지 충격이 미친다. 반대로 금이 정식 담보로 넓게 쓰일 수 있으면, 유동성은 둘 혹은 셋의 레일로 분산되고, 특정 통화권의 긴축 신호가 세계로 전이되는 속도는 늦춰진다. 이는 금융 시스템의 완충재를 하나 더 얹는 효과이며, 경기 급랭기 “누가 먼저 희생될 것인가”의 순서를 조금 바꿀 수 있다. 물론 제도가 허술하면 결과는 정반대가 된다. 법·감사·유동성 표준이 부실하면 디지털 금은 상위 금융기관만 접근 가능한 프리미엄 담보로 굳고, 상위 10% 자산가의 협상력만 강화된다. 그래서 설계의 핵심은 **접근성(소액 단위·공정 수수료)**과 **안전성(소유권·감사)**을 동시에 달성하는 데 있다.


구체적 사용 장면: 시나리오로 그려보기

예를 들어 급격한 금리 인상으로 파생시장의 변동 증거금(VM)이 폭증하는 날, 은행 A와 헤지펀드 B는 달러 현금 대신 디지털 금 토큰을 CCP에 담보로 추가 납입한다. DVP(동시 결제)를 통해 T+0 또는 실시간으로 담보 이전이 이루어지고, CCP는 미리 정한 헤어컷(예를 들어 금에 8~12%)을 적용해 부족분을 계산한다. 동시에 기업 C는 국경 간 장비 대금을 결제할 때, 일부를 달러 스테이블코인으로, 일부를 디지털 금으로 지불한다. 공급사는 수취한 디지털 금의 일부를 현금으로, 일부는 같은 날 ETF로 상환해 재무 포지션을 맞춘다. 이 모든 과정에서 커스터디 은행과 금고 사업자는 분리소유 원장을 업데이트하고, 감사 시스템은 준비금 증명을 새로 고친다. 이 시나리오가 실제로 매끈하게 돌아가면, 금은 다시 유동적이고 신뢰 가능한 담보라는 명성을 되찾는다.


리스크와 역풍: 어디서 틀어질 수 있는가

리스크도 분명하다. 첫째, 법적 타이틀이 국가마다 달라 파산 시 권리 분쟁이 일어나면 제도권 기관은 즉시 물러선다. 둘째, 커스터디 사고(보관처 압류, 금괴 식별 오류, 내부통제 실패)가 한번 터지면 신뢰 회복이 어렵다. 셋째, 브리지·오라클·지갑 보안 같은 온체인 기술 리스크가 붙는 순간, “안전자산=금”이라는 프레이밍이 깨진다. 넷째, 유동성 분절이 여전하면 스프레드가 넓어져 비용 경쟁력이 떨어진다. 다섯째, 규제 차익을 노리는 프로젝트가 우후죽순 나오면, 한두 번의 스캔들이 전체 생태계를 싸잡아 훼손할 수 있다. 이 모든 위험은 표준·감사·시장조성·규제 정렬을 동시에 해내느냐로 줄일 수 있다.


규제·감독이 볼 체크리스트: 여덟 가지 질문

규제 당국과 인프라 기관은 다음을 확인해야 한다. 토큰 보유자가 금을 진짜로 분리 소유하는가, 발행사 파산 시 자동 분리되는가, 준비금 증명과 실사 보고의 주기·범위는 충분한가, 상환 조건은 리테일과 기관에 차별 없이 공정한가, 적격 담보로 쓸 때 헤어컷 기준은 투명한가, 시장조성자의 이해상충은 통제되는가, KYC/AML/제재는 강건한가, 해킹·사기 시 책임과 보험은 어디까지인가. 국제적으로는 IOSCO·BIS·FSB 표준과 정렬해 국경 간 상환권과 준거법 충돌을 최소화해야 한다.


결론: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제도 설계의 문제

세계금협회의 ‘디지털 금’ 구상은 번지르르한 블록체인이 아니라 법적 소유권·감사 신뢰·유동성 구조를 재조립하는 프로젝트다. 이 세 가지가 맞물리면 금은 스테이블코인과 나란히 서는 담보·정산 인프라로 복귀하고, 글로벌 금리 충격이 단일 달러 레일로만 몰리는 분배의 왜곡을 완화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이 조건을 놓치면, 디지털 금은 또 하나의 틈새 투자 토큰으로 남아 현실의 결제·담보 생태계를 바꾸지 못하고, 계층 간 불평등을 완화하기는커녕 강화할 수도 있다. 결국 질문은 단 하나로 모인다. 누가 위험을 떠안고, 누가 이득을 가져가게 설계할 것인가. 표준은 말로가 아니라 계약 조항·감사 리포트·스프레드·상환 영수증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때 비로소 금은 다시 “공통 담보 레일”이라는 오래된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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