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북핵시사소설: 리버스(Reverse)

- 남과 북이 뒤바뀐다

by 김창익

2020년 9월9일 서울. 북핵 평화협정 1주년을 기념한 경평축구대회가 서울 스테디움에서 개최되고, 문재인 대통령과 민영우 서울시장, 김정은 북한국방위원장과 최룡해 당 부위원장이 현대타워 105층 전망대에서 VR 등 최첨단 장비로 이를 관람하는 장면이 전세계에 타전된다. 북핵 문제가 평화협정 국면에 접어든 2018년 초 숙청을 피해 자취를 감췄던 황병서 총 정치국장이 2년만에 서울에 나타나고, 경평축구대회 개최 열흘 전 지하철공사 군자차량기지 경정비고에서 노조위원장이 싸늘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1장: 노조위원장의 죽음(1/5)...발목이 잘린 시체


# 밤새 비가 내렸다. 여명이 트기 직전 군자차량기지 경정비창고 무채색 콘크리트 벽이 유난히 선명하다. 비 맞은 콘크리트는 낮에 품었던 온기를 밤새 내뿜는다. 그 사이를 풀 비린내가 뚫고 들어온다. 경정비고에서 구내로 이어지는 선로 곁에 시체 하나가 널부러져 있다. 복숭아뼈 아래가 열차 바퀴에 깔려 떨어져 나갔다. 열차는 선로 위를 미끄러져 가다 닫혀진 경정비고 셔터를 들이받고 멈춰섰다. 셔터는 배불뚝이 아저씨처럼 경정비고 바깥 쪽으로 툭 튀어 나왔다. 그 충격에 깨진 콘크리트 조각들이 주위에 후둑투둑 떨어져 있다.


지정선이라고 노조위원장입니다. 나이는 47세. 관할서인 성수경찰서 박경수 경사가 출동한 지수대 이테라 팀장에게 브리핑을 한다.
전문가 솜씨에요. 시체를 유심히 관찰하던 이테라 팀장이 말했다.
전문가요? 박 경사는 뜻밖이라는 표정이다.
목뼈를 단번에 비틀어 즉사시켰어요. 일반인이 아니라는 뜻이죠.
얼굴을 땅 쪽으로 묻어둔 것은 죄책감을 느꼈다는 뜻이에요. 원한 관계는 아닐 꺼에요. 지시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커요. 동정심을 느낀 것은 사이코패스는 아니란 거고, 망자에 대한 예우의 행동을 보인 것으로 보아 소시오패스도 아닙니다.
잠깐 사이 이렇게 많은 정보를 알 수 있다니. 박 경사는 놀랐으면서 짐짓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딸 벌의 풋내기 여팀장에게 20년 베테랑 형사의 자존심을 구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딱 보니까 그렇네. 박 경사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어색한 맞장구 정도다.
그런데 저 남자는 누구죠?
이 팀장의 눈에 들어온 수갑을 찬 한 남자. 몇가닥 남지 않은 머리는 피와 범벅이 돼 떡이 졌다. 툭 튀어나온 눈두덩이 형광등 아래 그림자를 만들어 눈주위가 해골처럼 쾡해 보인다. 깍 마른 체구에 광대뼈가 유난히 돌출돼 예민하고 고집센 인상을 풍긴다. 두 개의 대문이가 입술 사이로 튀어나온 게 마치 늙은 쥐 한마리가 앉아 있는 것 같다고 이테라는 생각했다. 눈동자는 초점이 풀려 땅바닥을 응시하고 있다.
지정선 옆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시체 옆에요?
네. 구노라고 경정비 담당 임시직원입니다. 술을 어찌나 마신 건지 냄새가... 순간 코를 막는 박 경사의 눈살이 찌푸려진다. 넋이 나가 횡설수설 합니다.
시체 옆에 쓰러져 있던 만취한 남자. 누가 봐도 유력한 용의자다. 하지만 현장이 귀띔해주는 범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고 이테라는 생각했다.
박 경사님. 노트북 가방을 멘 한 남자가 다가온다.
주 기자는 그렇게 일이 없어? 일개 살인사건에 뭐 쓸게 있다고. 근데 여긴 또 어떻게 안거야? 박 경사의 미간이 좁아진다.
일개 살인사건에 지수대가 떠요? 지하철공사 노조위원장이 지능범죄와 무슨 상관일까요? 일인 인터넷 매체 음모닷컴 주승우 기자의 눈빛이 순간 빛난다. 서울지방경찰청 산하 지능범죄수사대는 금융사기 등의 지능범죄나 공직자 비리 등을 전문적으로 수사하는 기관이 아닌가.
어 잠깐만요. 옆에 있던 이 팀장이 돌아서 가려는 찰나 주 기자가 그의 어깨를 잡는다. 순간 주 기자의 팔을 비트는 이테라.
이거 참. 인사하기는 좀 애매한 자세이긴 합니다만 주승우기자라고 합니다.
기자라고 사건현장에 이렇게 불쑥 들어오면 안되는 거 아실텐데요? 기자란 사실을 알고도 이 팀장은 주 기자의 팔을 놓지 않는다. 주승우는 상당한 악력을 느꼈다.
셈통이다. 박 경사가 몸을 낮춰 주승우와 눈을 맞추며 놀린다. 내 언젠간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헤헤. 주승우의 집요한 취재 때문에 여러번 곤란을 겪었던 박 경사다.
지금 웃음이 나옵니까. 이런 사건현장에서 말입니다. 피가 쏠려 주승우의 얼굴이 벌겋다.
아직 정신을 못차린 모양인데 좀더 세게 비트세요 이 팀장님. 그제서야 비튼 팔을 놓는 이테라.
끙. 자존심이 상한 주승우가 아픈 어깨를 주무르며 한숨을 뱉는다.
주승우라고 합니다. 명함을 건넨다.
제게 필요한 건 아닌 것 같군요. 무시하고 돌아서는 이테라.
제 뭡니까? 성큼 멀어져가는 이테라의 뒤에서 주승우가 박 경사의 얼굴을 바라보며 겸연쩍어 한다.
주 기자 이제 임자 만났네. 놀리 듯 혀를 내미는 박 경사.


# 성동경찰서 취조실. 어둠과 정적이 깔린 이 곳에서는 천정에서 내려오는 형광등 불빛만이 구노가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다. 피범벅이 돼 헝클어진 머리와 숙취에 더욱 부풀어 오른눈두덩, 돌출된 광대뼈가 백열등불 아래서 음영을 만들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땀이 눈에 들어갔는지 눈을 꿈먹거리는
구노.


이름.
...
이름요.
구노입니다.
나이.
...
몇살이에요?
44입니다.
주소.
서울 동작구 상도2동 127-1.
가족관계.
어머니와 딸.
구노씨 말이 짧아요. 박 경사가 노려보며 말한다.
오는 게 고와야 가는 말이 고운 거 아니겠소. 뜻 밖의 반응에 박 경사가 겸연쩍은 듯 미러를 바라본다. 미러 너머에서 취조 장면을 지켜보던 이테라 팀장이 고개를 갸우뚱한다. .
저 거 미친놈 아닙니까. 육중환 형사는 당장이라도 취조실에 들어가 한대 내려칠 기세다.
자신은 결백하다고 항변하는 거죠.
육중환이 이테라 팀장과 취조실을 번갈아 쳐다보며 머기를 긁적인다. 도통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다.
지정선의 시체는 가해자가 살인기술을 배운 전문가라고 말하고 있는데 지금 취조실엔 술에 취해 자신의 몸도 가누기 힘들어 보이는 외소한 정비공이 앉아 있다.
구노씨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지정선 노조위원장을 살해했습니까? 박 경사의 본격적인 취조가 시작된다.
모르겠습니다.
지금 장난해? 책상을 손바닥으로 내려치는 박 경사.
죽이고 싶었습니다. 제가 죽였을 수도 있구요. 하지만 죽이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원한에 의한 보복살인. 딱 그림이 나오는 데 무슨 헛소리야.


#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실. 백색 타일 위에 스테인레스 스틸 부검대의 금속성이 더해진 부검실 분위기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얽힌 각각의 사연 따위는 놓여질 여지가 없어 보인다. 날카로운 메스가 지나간 자리는 사건의 진실과 거짓이 정확히 베어져 분리될 것 같다. 부검대 위에 놓여진 지정선 위원장의 시체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울 정도로 끔찍하다. 목뼈가 비틀려 목이 퉁퉁 부어있고 열차 바퀴가 지나가면서 그의 왼쪽 발목 아래를 지워버렸다.


팀장이 여기까지 직접 오고 그래. 윤경이는 잘 지내지? 이모 친구인 한송희 박사는 이테라 팀장에겐 삶의 이정표같은 존재다. 카톨릭 의대를 수석 졸업한 그녀는 출세가 보장된 대학병원 자리를 박차고 연구원에 지망했다. 안정적인 공무원이 되고 싶었다는 게 표면적인 이유지만 따분한 진료실은 생각만 해도 숨이 막혔다. 그는 이테라가 어렸을 때부터 자신을 닮았다고 예뻐했다. 178cm의 큰 키에 고등학교 때까지 배구선수를 해 웬만한 남자는 힘으로도 그를 당할 수 없었다.
이모도 볼 겸. 건상이도 잘 지내지? TV에서 보니까 그 녀석 농구 말고 영화배우 하는 게 낫겠던데. 이모부 닮아서 그런가 DNA가 스페니쉬해.
하여간 말은. 건상이는 나도 얼굴보기 힘들어. 언제 만나거든 안부좀 전해줘라. 엄마 아빠는 서울 하늘아래 잘 살고 있다고.
그렇게 얼굴보기 힘들어?
서장훈 기록 깨겠다고 난리야. 연대 농구부 명예의 전당에 기필코 자기 이름 석자를 새기겠다나 어쨌다나. 오피스텔 현관문 비밀번호도 1215에요. 승부욕 센건 나 말고 테라 너 닮은 거 같다. DNA가 아주 테라급이에요. 서장훈은 통산 1215득점으로 KBL 통산 최다 득점 기록 보유자다.
하여간. 이모는 부검의 말고 작가가 됐어야 해. 말솜씨는 영락없는 노벨상감인데 말야 헤헤. 간만에 부담없이 농을 치는 게 이테라는 좋았다. 삶과 죽음의 현장에서 동료들은 언제나 지나치게 진지했다.
이쯤 해서 본론으로 들어가야지? 한 박사가 최면에서 깨어날 시간을 알리듯 손뼉을 치며 말한다.
어? 어....그 순간 이테라도 자신이 그 곳에 있는 이유를 깨달았다.
직접적인 사인은 경추 골절이야 4번과 5번 경추가 부러지면서 즉사했어,
역시 전문가겠지?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일반인의 솜씨로 보기 어려운 건 확실해. 물론 요새는 유튜브 등을 통해서도 방법은 얼마든지 알 수 있지만 그 것을 정확히 실행한다는 건 별개의 문제니까.
이미 발목이 절단 된 상태에서 죽은 자가 100% 힘을 써서 저항하기 힘들었다는 점도 감안을 해야해. 저 정도면 이미 패닉이었을꺼고.
정신을 잃은 상태였을 수도 있어? 출혈이나 쇼크로?
가능성은 있는데 그랬다면 경추의 비틀어진 정도가 더 심했을꺼야. 근육의 저항이 없었을 테니까.
발목이 절단돼 기어가는 사람을 뒤에서 목을 비틀어 즉사시켰다는 거네.
보통 사람였다면 힘들었을꺼야.
선명해 보였던 사건은 잿더미 위에 찍힌 발자국처럼 바람에 흩날려 버렸다. 수사대로 돌아온 이테라 팀장은 구노의 프로필과 진술서를 번갈아가며 여러번 확인했다.
육 형사님. 현장에서 발견된 족적은 분명 세 개죠?
정신없이 자장면을 입속에 붓고 있던 육 형사가 부랴부랴 젓가락을 내려놓고 손으로 입 주변에 묻은 자장을 쓱 닦으며 이테라 팀장에게 다가온다.
네. 죽은 지정선 위원장 시체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 중 전날밤 것으로 보이는 것은 세 개 정도였습니다. 지 원장의 구두, 구노의 작업화는 확인했구요. 나머지 하나도 작업화인데 그날밤 구노와 함께 술을 마셨던 김정택 있죠. 그 자의 것입니다. 작업화 사이즈가 일치합니다.
그날 밤 사건현장에 있었던 사람은 죽은 지정선과 구노, 구노와 술을 마신 김정택 세사람 뿐인데 지정선은 죽었고 김정택은 초저녁에 경정비고를 나오는 게 CCTV로 확인이 된 상황이었다. 정황은 범인으로 구노를 지목하고 있지만 군대 면제자인 구노가 전문가의 솜씨로 지정선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고 보기엔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부양가족이 있다는 것만 갖고도 군대 면제 사유가 되나요?
구노의 경우는 그랬을 겁니다. 장애가 있는 홀어머니를 부양할 사람이 있었어야 하니까요. 육중환 형사와 같이 자장면을 먹고 있던 조수영 순경이 다가오며 말한다.
장애?
네. 어머니 다리가 불편한 상황입니다. 병무청 기록을 확인해 봤는데 구노는 이유가 더 있습니다.
이유가 더?
네. 기면증 5급이에요. 정신질환 병력도 있구요.
수영이 언제 이런 것들을 알아봤냐? 기특한데. 육중환 경장이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아 쫌. 머리 만지지 마세요. 제가 어린애도 아니고. 순하기만 해 보이는 수영이 발끈하자 민망해하는 육중환.
네가 어린애가 아니면. 머리에 피도 안마른 녀석이. 육중환은 손에 자장이 묻은 채로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육중환의 무신경에 고개를 떨구고야 마는 수영.
기면증이면 수면장애?
네. 지금도 관련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질환은?
정확한 건 더 알아봐야 합니다.
그래. 육 형사님 수영이와 관련해서 좀 알아봐 주시구요.
네 알겠습니다. 군대도 안갔다 온 삐리리 한 놈이었어? 남자면 해병대지. 안그래 수영아?

1장: 노조위원장의 죽음(2/5)...27년 전 윤간 사건


# 대방동 서울공고 교정은 며칠째 내린 비에 젖어 녹음이 가득하다. 운동장을 감싼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회색 빌딩에 대비돼 흑백과 컬러의 합성사진 같다. 정문에서 보이는 본관 건물이 120년이 넘은 학교의 역사를 조용히 말해준다. 빨강색 아반떼 승용차가 교문에 다가서자 감색 유니폼을 입은 수위 아저씨가 뛰어나온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수위아저씨가 거수경례를 하며 창문을 들여다 본다.
수영이 창문을 내리자 육중환 형사가 신분증을 창밖에 내민다. 김영곤 교감선생님을 뵈러 왔는데요. 약속이 돼 있으니 알고 계실겁니다. 수영이 공손히 설명한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아저씨는 수위실로 가서 전화로 확인을 한 뒤 바리케이트를 올린다. 운동장으로 스르륵 미끌어져 들어가는 빨강색 아반떼 승용차가 학생들의 시선을 끈다.
거봐요 제가 무난한 색으로 사시라니까. 빨강이 뭡니까 빨강이. 그리고 머플러좀 사서 달아요. 부르릉거리는 소리 시끄럽지도 않아요? 스포츠카도 아니고. 운전대를 잡은 수영이 타박을 한다.
왜 임마. 멋있잖아. 정열의 레드. 그리고 멀리서 보면 남들은 스포츠카인줄 안다고. 람보르기니. 중환이 며칠전 산 중고차를 놓고 둘은 외근 때 마다 티격태격이다
거 참 얼마나 싸다고 그냥 회색 사시라니까. 저 이제 이거 운전 안해요. .
100만원이면 이런 차 한대를 더 산다구. 중환은 카센터 주인이 몰았던 2010년형 아반떼를 100만원이나 시세보다 싸게 주고 샀다며 자랑을 했었다. 색깔 때문에 차가 팔리지 않자 딜러가 동급 매물들에 비해 100만원 낮게 급매로 내놓은 것이었다.
둘이 티격태격 하는 사이 빨강색 아반떼는 본관앞에 다다랐다. 현관 앞에는 한 중년의 남자가 둘을 기다리고 있다. 수위실에서 연락을 받고 김영곤 교감선생님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연락 받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먼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차타고 금방이던데요.
자 그럼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를 하시죠. 말씀하셨던 것들도 찾아서 준비를 해 놓았습니다.
수영은 구노가 졸업한 서울공고에 연락해 구노의 재학시절 근무했던 선생님이 있는 지를 알아봤다. 김영곤 선생님은 1993년 구노가 서울공고 2학년 때 담임이었다. 27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선생님은 구노의 존재를 뚜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현관에서 복도로 들어서자 바로 교무실이다. 수업시간이어서 교무실은 텅 비어있다.
제가 입맛이 싸서 맥심 커피 밖에 없는 데 괜찮으십니까? 교감선생님의 자리는 교무실 한 켠이었고 책상 옆에 손님 접대용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다.
연락을 받으시고 좀 놀라셨죠?
김 선생님이 종이컵에 타 온 커피 세 잔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다.
아닙니다. 30년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이런일 저런일 다 겪었죠. 이 나이의 사람들에겐 놀랄 일이 그리 많지 않은 법입니다. 김 선생님은 담담이 말을 잇는다.
살인사건이라고 해서 오시기 전에 기사를 좀 찾아봤습니다. 지하철공사인가 노조위원장이 살해됐더군요.
네. 지정선 위원장이라고 ST공사 노조위원장입니다. 육중환이 커피 한잔을 들이키며 말한다.
구노가 용의자라고 하셨는데.
사건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현행범인가요?
쓰러져 있었습니다. 만취상태였습니다.
구노도 피해자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현재로선 유력한 용의자입니다. 원한 관계도 있구요.
원한 관계요?
정규직 전환이 무산된 것을 놓고 노조위원장과 티격태격 했던 모양입니다.
김 선생님은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기록을 보니 구노가 고등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나오던데요. 검정고시로 졸업장을 따기는 했지만. 수영이 정적을 깬다.
네 2학년 때 퇴학을 당했습니다.
퇴학이라면.
성폭행 사건이었습니다. 윤간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불량써클이 하나 있었는데, 구노가 사건에 연루가 됐었구요.
불량써클 활동을 했다는 말입니까?
아니요. 구노는 그런 아이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피해 여학생은 밧줄에 묶인채 윤간을 당한 상태였고, 그 옆에 구노가 쓰러져 있었습니다.
성폭행에 가담을 한 건가요?
아닙니다. 써클 애들 협박에 여학생을 유인했다고 하더군요. 피해 여학생은 구노 이웃에 살아 잘 아는 사이였습니다. 여섯이 순서대로 못된 짓을 하고 마지막에 자신도 그짓을 하도록 협박을 했다고 하더군요.
결국...
그게 아닙니다. 말을 듣지 않으니 죽기 직전까지 두들겨 맞았던 모양입니다.
...
그러다 잠이 든 모양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잠이 들 수 있는 건가요?
의학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더군요. 기절을 한 건지 잠이 든 건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건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는 것이지요.
그럴 수도 있는 거군요. 중환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표정을 짓는다.
처음엔 피해 여학생이 구노도 성폭행에 가담을 했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결국 사건의 시작은 구노였으니까요. 구노가 자신을 유인하지 않았더라면 그런 끔찍한 일은 당하지 않았었을 테니까...복수심에서였겠죠.
수영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왜 생각을 바꾼 건가요?
여학생 말로는 불쌍해서였다더군요. 그냥 그렇게만 말했었습니다.
중환은 지수대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무엇인가 석연치 않은 지 계속 고개를 갸우뚱 한다. 1년 후 소년원에서 출소 한 뒤 여섯명 중 우두머리 격인 한 학생이 오토바이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고 한 김영곤 선생님의 말이 계속 뇌리에서 맴돈다. 갑자기 갓길에 차를 세우라는 중환.
수영아 잠깐 다녀올 데가 있으니 먼저 수사대로 돌아가.


1장. 노조위원장의 죽음(3/5)...파업 전야


# 같은 시간 용답동 ST공사 노조사무실. 별관 2층 복도 끝에 있는 사무실 앞에는 '임단협 투쟁 승리' 등의 구호가 쓰여 있는 플랑카드와 피켓이 즐비하다. '직급차별 철폐'란 머리띠를 두른 직원들.


최병국 부위원장님을 뵈러 왔는데요. 이테라 팀장이 열린 문을 노크한다.

혹시 이테라 팀장님이신가요? 무리 속에서 열띤 논쟁을 벌이던 최 부위원장이 자신을 찾는 이테라의 목소리를 듣고 다가온다. 까무잡잡하고 다부진 얼굴에 반백의 머리가 영락없이 노조 간부의 모습이다.
생각보다 미인이시군요.
적어도 노조 간부의 입에서 나올 인사말은 아니라고 이테라는 생각했다. 남자들이란.
뭐든 기대 이상이죠.
네?
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여준다. 제 인생 모토에요. 이테라의 입에서 가시들이 튀어 나온다.
기분 상하셨나 보군요.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그렇다고 뭘 또 그렇게까지... 잠시 자기가 너무 과민반응을 보인 게 아닌가 이테라는 생각했다.
일단 좀 앉으시죠. 경황이 없어서 차 대접은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보시다시피.
네. 차마시자고 온 건 아니니까요.
어떤 점을 답해드리면 될까요? 변죽 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최 부원장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살해 동기요. 이테라 팀장도 마찬가지. 의외로 대화가 잘 통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자백이나 결정적 증거가 있어야 하는 데 현재로선 둘 다 없거든요.
현장에서 체포된 것으로 들었는데요.
그 것만으로 구노씨가 지 위원장을 죽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죠.
구노씨 입장에선 지 위원장이 눈엣가시였을겁니다. 자신의 밥그릇을 차버린 사람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2년 전 노조 파업 때 구내운행과 경정비 업무직 대체직원으로 들어온 구노의 정규직 전환 여부는 전적으로 노조의 손에 달려 있었다. 민영우 시장의 약속대로 1300여 무기계약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순차적 정규직 전환 작업이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면서 구노와 함께 들어온 대체직원들도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자 시가 노조의 동의를 전제로 한 정규직 전환 지침을 내린 것이다. 노조가 자기 밥그릇 뺏자고 들어온 대체직원의 정규직 전환을 찬성할 리 만무했으니 사실상 불가 방침을 밝힌 것이었다. 하지만 구노의 분노는 지정선 위원장이란 특정인을 향했다.
정규직 전환이 무산되자 구노씨는 시시때때로 지 위원장을 찾아와 행패를 부렸습니다.
노조가 반대하면 위원장이라고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 같은데요.
원망의 대상이 필요했던 거겠죠.
구노씨는 평소 거친 편이었나요? 체구로 봐서는 누군가에게 위해를 가하기 힘들었을 것 같은데요.

평소엔 말수도 별로 없고 조용한 편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날 같이 술을 마셨던 김정택씨는 계속 연락이 안되나요?
네. 그날 이후 연락이 안된다고 합니다. 인사과에서 계속 전화를 하고 있는데 받지 않습니다.
구노와 마찬가지로 업무직 대체직원으로 들어온 김정택은 사건 발발 직전까지 구노와 술을 마시고 저녁 9시께 경정비고를 나서는 게 CCTV로 확인됐다. 사건 발발 추정시간은 저녁 10시에서 12시 사이로 사건 직후 현장 탐문에서 지 위원장은 저녁 9시반까지는 노조위원장 방에 있었다는 목격자의 진술이 이어졌다. 사건 당일 저녁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참고인이 행방불명된 것이다.
노조 사무실 분위기가 파업 전야같네요. 이테라는 회사 곳곳에 파업의 결의를 다지는 플랑카드가 나부끼고 있는데 그 사실이 이제서야 자신의 주목을 끌고 있다는 사실에 스스로 놀랐다. 파업 개시일이 9일였던가요? 수영의 탐문수사 보고서가 떠오른 이테라.
네. 총파업입니다.
총파업을 앞둔 노조위원장의 죽음...최 부위원장을 만나고 노조 사무실을 나서는 이테라의 머릿속엔 그동안 구노와 지정선 위원장의 개인적 원한 관계에 초점이 맞춰졌던 수사 프레임을 확장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뜩 들었다.
아이쿠. 순간 노조사무실로 들어서는 한 남자와 부딪히며 백을 떨어뜨린 이테라. 고개를 들고 보니 주승우 기자다. 표정없는 얼굴.
동선이 같은 것을 보니 수사와 취재 사이에 교집합이 생긴 것 같군요.
글쎄요. 주승우를 무심히 지나치는 이테라.
교집합이 있다는 건 여집합이 있다는 것과 같은 의미인 거 아십니까?
주승우의 어법이 테라의 관심을 끈 것일까. 이테라는 순간 발걸음을 멈춘다.
지금 그 취재수첩에 여집합의 원소들이 있다는 뜻인가요?
아마도. 합집합은 교집합보다 크기 마련이니까요.
그런데 노조 사무실 찾아오신 거 아닌가요?
글쎄요.


# 잠시후 ST공사 사옥 앞 정원 벤치에 앉아있는 주승우와 이테라. 며칠 째 비가 온 뒤여서 하늘은 청명하고 늦여름이라고 하기엔 차가운 바람이, 초가을이라고 하기엔 따뜻한 바람이 분다.


일단 교집합부터 확인을 해보죠. 주승우가 먼저 입을 연다. 구노씨와 지 위원장간 일종의 원한관계, 다시 말해 살해동기는 확인을 하셨을꺼고...
네.
경정비고가 살해 현장였다는 사실에 주목을 해야겠죠. 스텝을 밟아가는 주승우.
네.
원망과 분노에 휩싸인 구노는 술을 마시면 노조위원장 사무실로 달려가곤 했었죠.
네.
구노의 행패를 지 위원장은 줄곧 참았다고 합니다.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네.
한국말을 잘 못하십니까?
... 하늘을 보며 못들은 척 하는 이테라.
그런데 그날 지 위원장은 왜 경정비고에 갔을까요.
노조 사무실에서 나온 뒤 이테라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취재와 수사의 교집합인 셈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으면 거대한 실체의 작은 꼬리를 잡을 수 있다고 이테라는 생각했다.
총파업 관련 노조 간부들의 회의가 끝난 저녁 9시반부터 사건 추정시간인 10시를 전후한 그 사이. 그 시간동안 지 위원장에겐 어떤 일이 있었을까요?
이제 여집합의 원소들을 나열해 보시죠. 교집합을 확인한 이테라의 입이 열렸다.
메모지 하나를 이테라에게 건네는 주승우.
핸드폰 번호네요?
마기란. 여성. 33세. 매표 담당 임시직원. 사건당일 저녁 9시43분부터 55분까지 지정선 위원장과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마기란은 지 위원장과의 통화 직전 구노와 통화를 했습니다. 지 위원장은 마기란과 통화를 마치고 구노를 찾아간거죠.
통화기록을 조회하셨나요? 불법인 거 아시죠?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라는 표정이다.
... 주승우의 당당한 태도에 오히려 이테라가 살짝 당황한다.
마기란씨 수사. 여기서부터 합집합으로 합시다.
딜이라면 그쪽이 손해아닌가요? 마기란씨를 직접 취재하면 될텐데요.
기자에겐 촉이란 게 있습니다. 이번엔 사건의 장르가 원한에서 치정으로 전환될 것 같다는 느낌. 아무래도 그쪽이 접근하는 게 좋을 것 같은 생각에.
제가 여자라서요? 발끈하는 이테라.
민감하게 생각하지 맙시다. 그냥 좀더 세련되게 접근하자는 것 뿐이니. 처음 본 기자에게 자신의 사생활을 있는 대로 말해줄 사람이 있을까요? 그쪽은 수사관이니 아무래도... 그쪽이 여자란 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란 점을 생각 안한건 아닙니다만.
어쨌든 마기란씨는 제가 만나보죠.
오케이. 단 수사결과를 그쪽의 여집합으로 남기면 안됩니다. 약속할 수 있죠?
제가 약속을 해야 하나요? 그쪽이 이 걸 주지 않았어도 저희가 알아냈을꺼에요.
어련하실까.
그렇다고 안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성격이 급한 편인가 보네요.
6세 전후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예?
도대체 어떤 사정으로 사회성을 담당하는 코드가 빠져버린 건가 해서요.
후훗. 그쪽은 아직 저의 사회가 아니니까요. 뒤끝 있으시네요.


1장. 노조위원장의 죽음(4/5)...마기란이란 여자


# 두시간 쯤 뒤 용답역 앞 커피숍.


이테라 팀장님이신가요?
이테라에게 한 여성이 다가온다. 생활고에 찌든 기색이 있기는 하지만 타고난 미모다.
네. 마기란씨시죠? 앉으세요.
교대하고 나와야 해서 좀 늦었어요. 많이 기다리셨죠?
네. 뭐. 참 커피는?
아니에요. 그냥 물 마시면 됩니다. 커피 마시면 잠을 못자서요.
그럼 탄산수라도 드세요. 잠시만요.
잠시 후 페리에 한병을 들고와 마기란에게 건넨다.
혹시 몰라 얼음잔도 갖고 왔어요.
병마개를 돌리는 마기란의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린다. 마개가 열리면서 칙하고 탄산이 샌다.
지정선 위원장이 살해된 날 밤 마지막으로 통화한 게 마기란씨더군요.
마기란의 손에 쥔 얼음잔이 파르르 떨린다.
지 위원장은 마기란씨와 통화 직후 구노씨를 찾아갔고 그렇게 됐습니다. 통화 내용과 이번 사건간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뜻이죠.
...
마기란씨.
우물쭈물하는 마기란. 좀처럼 입술이 떨어지지 않는다.
구노씨가 마기란씨에게 무엇을 요구했었나요? 마기란과 눈을 마주치는 이테라.
마기란이 목이 타는 지 물을 한 잔 마신다.
걸려들었다. 순간을 놓치지 않는 이테라.
어디까지 알고오셨나요? 작심한 듯 한숨을 내쉬는 마기란.
솔직히 말씀을 해주셔야 합니다. 비밀은 최대한 보장해 드리겠습니다.
잠시후. 마기란과 이야기를 마치고 커피숍을 나서는 이테라. 어딘가로 전화를 건다.
전화를 하신 걸 보니 제 시나리오가 어느 정도는 적중을 했나 보군요. 주승우의 통화음.
네. 그쪽의 예상이 맞았어요.


# 마기란을 만나러 오기 전 주승우는 이테라에게 마기란이 입을 열지 않으면 구노의 요구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보라고 했었다. 당시 ST공사 정원 벤치에서의 주승우와 이테라.


무리한 요구요?
한번 찔러보는 겁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걸려들꺼에요.
원래 앞뒤 자르고 몸통부터 얘기하는 스타일이신가보죠? 이테라의 말에 또 가시가 돋힌다.
80명 대체직원 중에 15명만이 정규직으로 전환됐습니다. 구노를 포함해 65명은 일시적인 수요에 의한 대체인력으로 분류돼 계약 해지 대상이구요.
네. 알고 있어요.
혹시 해서 마기란씨가 15명중에 포함이 됐는지 알아봤습니다. 지정선 위원장과 치정관계라면 지 위원장이 어떻게든 힘을 썼을 것이란 가정 하에.
포함이 돼 있던가요 ?
아니요.
가정이 틀렸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매표직원은 정규직원들도 재배치를 통해 인원을 감축하고 있는 업무라서 정규직 전환이 어려웠을 겁니다. 노조위원장이 나선다고 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란 겁니다. 설명을 이어가는 주승우.
다른 방식으로 힘을 썼다는 말이군요.
역시 경찰대학 수석 입학생답군요. 금성PSD라고 지하철 안전관리 용역업체가 있습니다. ST공사 출신들이 주로 임원으로 가는 곳이죠.
그럼 그 곳으로?
네. 사장 비서직으로 가기로 돼 있다고 합니다. 물론 계약직이지만 1~2년은 고용이 연장되는 셈이죠.
그 것만으로 치정관계를 단정할 수 있나요?
물론 단정은 아직 이르죠. 하지만 남자가 여자를 배려하는 이유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현재로선 다른 이유를 찾지 못했구요. 치정이거나 아니거나, 치정이면 금성PSD 사장과의 관계거나 지 위원장과의 관계거나. 이 중에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게 무엇일까요.
그렇다면 구노의 요구란 게 둘 사이의 치정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건가요?
남자가 자기 여자의 전화를 받고 다른 남자에게 달려갔다면 이유는 딱 하나죠.
...
자기 여자를 지키겠다는 것.
구노가 마기란에게 위협이 됐다는 건가요?
그 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건 분명하죠. 결국 지정선 위원장에게 위협이 됐다는 거. 남자가 자기 여자를 지키려는 것은 여자를 위한 게 아닙니다.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거죠.
구노가 지정선 위원장의 영역을 침범해다는 얘기군요.
그렇습니다.
구노가 잠재적인 연적으로서 위협이 되지는 않았을꺼에요.
동감합니다. 남성으로서나 권력 관계에 있어서나 지 위원장의 맞수가 되기는 어렵죠.
그렇다면 지 위원장이 영역 침범이라고 느낀 이유가 뭘까요?
몇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구노가 일방적으로 치근덕댔거나.
구노의 유형은 그럴 가능성은 크지 않아요. 환경 때문에 굴곡을 피할 수는 없었지만 기본적으로 영리하고 자존심이 센 편이에요. 그런 식으로 감정을 흘릴 타입은 아니에요. 그동안 취조과정을 지켜보면서 이테라는 구노에 대한 프로파일링의 조각들을 맞춰가고 있었다.
다른 가능성은 지 위원장과 마기란의 관계를 구노가 알았을 경우입니다.
불륜이 폭로되는 것을 두려워했을 수 있겠군요. 주승우가 놓은 추론의 사다리를 타고 이테라는 곧바로 진실의 정수리를 바라볼 수 있는 곳까지 올랐다.
네. 구노는 둘 사이의 관계를 알고 있을겁니다.
이제 퍼즐이 좀 맞춰지네요. 구노는 그 것을 지렛대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관철시키려고 했을 꺼에요. 이 경우 자신이 게임의 룰을 만드는 쪽이 뒬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구요.
하지만 한 가지 더 찾아야 할 퍼즐의 조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죠?
구노가 협상을 하려고 했다면 상대는 마기란이 아니라 지정선 위원장이었을 겁니다. 굳이 돌아갈 필요는 없었을테니까요.
그렇다면...
마기란에게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있었다는 얘기죠.
설마...
아마도 그럴겁니다. 그걸 그쪽이 확인해달라는 겁니다.
커피숍에서 마기란을 만난 이테라는 주승우와의 퍼즐에서 남겨놓은 하나의 조각을 맞췄다.


# 한달쯤 전 어느 저녁. ST공사 노조 사무실앞 복도를 비틀비틀 걸어오는 한남자. 눈동자는 풀리고 볼은 벌겋게 달아올랐다. 고주망태가 된 구노다. 이날 대체직원 80명에 대한 정규직 전환 문제를 놓고 노조가 전체 투표를 했다. 결과는 예상대로 반대였다. 자신의 밥그릇을 지켜야 하는 업무직의 거센 저항이 있었다. 구노는 투표 결과 발표 직후 경정비고에서 김정택과 대낮부터 깡소주를 들이켰다. 구노의 손에는 검은 기름때가 덕지덕지 묻은 몽키스패너가 들려 있다.


안돼. 싫다구. 노조사무실 문을 열려는 찰라 술에 취해 몽롱한 구노의 귀에 어렴풋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문을 연 구노의 눈에 들어온 건 지정선의 무릎 아래 깔린 한 여자. 예기치 않은 구노의 등장에 놀란 지정선의 휘둥그래진 눈과 다급히 브라우스를 여미는 여자의 얼굴이 시야에 교차되는 순간 구노의 동공이 확장된다. 여자는 분명 마기란이다. 술에 취해 혼미한 상태인데도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일시에 정리된 구노는 쏜 살 같이 지정선에게 달려든다. 몽키스패너가 허공을 가른다.
악. 마기란의 외마디 비명이 늦은 밤 불꺼진 복도를 따라 길게 늘어진다. 그제서야 정신이 들어온 구노. 자신도 놀라 뭉턱한 쇠뭉치가 쓰러진 지정선의 머리옆에 툭하고 떨어진다. 사무실 문을 열 때만해도 정말 죽여버리겠다는 심정이었는데 막상 널부러진 지정선의 모습을 보니 밀려오는 두려움에 몸이 얼어버린 구노. 사상 최악의 열대야로 숨이 턱 막히는 여름밤인데 구노의 몸은 사시나무 떨 듯 떨린다.
쇠뭉텅이를 맞고 쓰러진 지정선과 얼어버린 구노,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놀라 정지된 마기란의 사이로 도대체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흐른 것일까. 찰나의 순간에도 억겁의 세월이 흘러지나갈 수 있는 것인가.
영원할 것 같은 정적을 깬 건 쓰러진 지정선에게 달려드는 마기란이었다. 마기란은 재빨리 자신의 무릎위에 지정선의 머리를 올려놓고 그를 살핀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잠시 정신을 잃었던 지정선이 정신을 차리고 일어선다. 오른 쪽 이마에 피가 흐른다.
이 게 뭐하는 짓입니까. 구노의 입에서 나와야 할 이 말이 나온 건 정작 지정선의 입이다. 마기란이 일어서 손으로 지정선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는다.
지정선이 죽지 않은 것에 대한 안도는 잠시. 구노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자신은 방금전 강간을 당할 수도 있었던 여자를 구한 게 아니었던가. 지정선의 무릎 아래 깔려 있던 여자가 마기란이란 사실을 알고 생각할 틈도 없이 지정선에게 달려든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한 것인가. 대체직원 정규직 전환을 위한 비상대책위원회 모임에서 얼마전 마기란을 만난 후 구노의 가슴 한켠에는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설레임이란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가해자와 피해자가 한편이 돼 자신을 공격하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의 직감이란 건 수많은 논리의 계단을 한 걸음에 건너 뛰어 진실이란 정상에 다다른다. 분노로 바뀐 절망을 주체할 길이 없었던 구노는 분노의 대상 앞에서 또 다른 절망을 만난 것이다.
구노씨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겠는데 지금 상황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지정선과 마기란은 겹겹의 절망으로 쓰러지기 직전의 구노를 남긴 채 자리를 떠난다.


1장: 노조위원장의 죽음(5/5)...가면 뒤의 얼굴


# 다음날 오전 경정비고 뒷 편. 구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는다. 담배 연기속에 섞인 한숨이 돌고돌아 하늘로 올라가 구름속에 퍼진다. 담배 연기가 걷히면서 시야에 걸어 들어오는 한 남자. 지정선 위원장이다.

다짜고짜 다가와 구노의 멱살을 잡는 지정선. 구노를 노려보는 지정선의 눈빛은 평상시 구노가 봤던 그 것이 아니다.


어제 그 일로 뭘 어떻게 해보겠다고 생각했다면, 생각 바꾸는 게 좋을꺼야.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게 아니거든. 멱살을 잡은 지정선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간다.
왜 이러는 겁니까. 내가 뭘 어쨌다고.
정규직 전환 무산됐다고 앙심이라도 품은 건가? 나를 죽이기라도 할 셈이었어? 구노를 노려보는 지정선의 눈에 빨간 핏대가 서 있다.
어제는 술김에...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소.
그제서야 힘을 푸는 지정선. 구노를 벽쪽으로 밀쳐낸다.
나는 너같은 게 어떻게 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어제 일 입밖에 내면 네가 다칠꺼야. 부품 창고에서 바퀴가 없어지는 이유를 회사가 정말 몰랐을꺼라고 생각해?
그... 그건 지정선 당신이...
네 말을 누가 믿을 것 같아. 훔친 열차 바퀴를 살만한 사람이 대한민국에 얼마나 될 것 같나? 그들이 널 지목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고개를 숙인 구노의 머리 위로 27년 전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당시 성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는 자신의 주장을 믿어주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자신의 체액이나 체모가 발견되지 않았는데도 피해 여학생의 말 한 마디에 경찰과 검찰 모두 자신을 7명의 악마 중 하나로 치부해 버린 것이다. 심지어 어머니조차 자신의 말을 믿지 않았다.
어제 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없소. 걱정하지 마시오. 구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린다.
그래. 바로 그거야. 그래야지. 당신같은 인간들은 그저 조용히 시키는 대로 하면서 살면 되는거야. 그게 세상에 나올 때부터 정해진 역할이거든. 구노를 내려다보는 지정선의 눈빛에선 야릇한 우월감이 느껴진다.
그런데 한 가지만 물어보겠소.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어 지정선을 바라보는 구노.
뭔데?
마기란씨를 진심으로 좋아합니까? 구노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건 알아서 뭐하게.
힘들게 사는 여자입니다. 좋아하지도 않는 남자에게 노리개 취급 당할 여자가 아니라구요.
제 코가 석자인 놈이 누구 걱정을 하는거야. 주제도 모르고. 너 같은 놈에게 우리 사이가 그렇게 치부될 이유가 없어.
지정선의 말에 구노는 묘한 안도감을 느낀다. 지정선은 지금 마기란과 자신을 우리라고 한 것이다.
며칠뒤부터 회사에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마기란이 임신을 했고, 지정선 위원장의 아이란 소문이었다. 소문을 전해듣고 눈이 뒤집힌 지정선은 곧바로 경정비고로 달려갔다. 지정선이 휘두르는 주먹에 구노는 나가떨어졌다. 경정비고 뒷곁에 쌓아놓은 쇠파이프가 수도 없이 허공을 갈랐고, 정신을 잃은 구노는 지옥의 문턱을 오갔다.


# 한양대병원 6인 병실. 창가 침대 위엔 얼굴이 피멍으로 퉁퉁 부은 한 사내가 누워 있다. 눈을 꿈먹이고 있으나 산 송장과 다름이 없다. 옆에서 울고 있는 한 여자 아이. 구노를 쏙 빼닮았다. 문이 열리고 지정선이 들어온다. 지정선과 눈이 마주친 구노가 창가로 시선을 돌린다. 침대로 다가와 구노를 내려다보는 지정선. 낯선 남자를 본 여자 아이가 경계하며 지정선을 바라본다.


딸인가 보군요. 예쁘네.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지정선.
그 손 떼시오. 여기는 무슨 염치로 온거요? 흥분하는 구노.
1층에 가면 매점이 하나 있는데 거기가서 맛있는 거 하나 사먹고 올래? 지정선이 아이에게 5천원짜리 한장을 건넨다.
구노를 바라보는 아이. 구노가 고개를 끄덕이자 자리에서 일어선다. 아이가 나가자 커튼을 치고 구노의 목을 조르는 지정선. 얼굴에 핏대가 선 구노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조르던 구노의 목을 놓는다. 심하게 기침을 하며 몸을 웅크리는 구노. 팔에서 링거 바늘이 빠지며 피가 뚝뚝 흐른다.
내가 분명히 경고했지. 그날 일로 뭘 어떻게 할 생각은 하지 말라고. 지정선이 구노의 멱살을 잡고 나즈막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가 또 뭘 어쨌다고 이러는거요? 영문을 몰라하는 표정의 구노.
시치미를 떼면 내가 모를 줄 알고?
도대체 뭘 말이오?
너 이새끼 정말... 주먹을 불끈 쥐는 지정선. 순간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아이와 눈이 마주친다. 살기 띤 지정선의 눈빛과 두려움과 절망 분노가 뒤섞인 아빠의 눈동자가 동공에 비춰진 아이는 이내 울음을 터뜨린다. 자켓 속 주머니에서 돈 봉투 하나를 꺼내 휙 집어던지고 자리를 뜨는 지정선. 등 뒤로 구노의 원망과 한숨이 꼬리를 물고 따라온다.


# 며칠 뒤 오후 노조사무실. 얼굴에 피멍과 붓기가 채 빠지지 않은 구노가 위원장실의 문을 두드린다. 노조 간부회의 중이었던 지정선 위원장은 예기치 않은 구노의 등장에 당황한 모습이다.

잠시 자리좀 비워주시겠습니까? 구노씨 어서와요. 몸은 좀 괜찮은건가요? 노조간부들에게 양해를 구하는 지정선.


아니오. 다른 분들도 들으셔야 합니다. 구노의 발언에 노조간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지정선에게 다가온 구노, 병원에서 받은 돈봉투를 그의 얼굴에 집어던진다. 만원짜리 지폐 수십장이 노조사무실 허공에 날린다.
지정선씨 잘들으시오. 결의에 찬 표정으로 입을 여는 구노.
치료비조차도 안되는 이깟 돈으로 나의 침묵을 사려고 했다면 오산이오.
구노씨. 많이 흥분한 모양인데 여기서 이러면 안됩니다. 노조간부들을 번갈아 보며 당황한 지정선은 허겁지겁 구노의 팔목을 잡는다.
침묵을 원하면 합당한 대가를 갖고 오시오. 말을 잇는 구노.
어떤식으로 얼마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할 지는 앞으로 지정선 당신이 어떻게 하느냐에 달렸소. 침묵의 대가가 합당하지 않을 때는 모든 노조원이, 세상이, 그리고 당신과 마기란의 가족들이 당신의 가면을, 악마성을 알게 될 것이오.
당신 도대체....무슨....말을....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구노의 발언은 칼날이 되고 해머가 돼 지정선을 날카롭게 베고 무겁게 짓눌렀다.
영문을 몰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노조 간부들의 시선을 등에 꽂고 구노는 사무실을 나왔다. 지정선의 이중성에 질리고 삶의 비참함에 눌리고, 억울함에 패인 가슴을 구노는 부여잡는다.


# 이날 저녁 서울 외곽의 한 모텔. 지정선과 마기란이 두 마리의 뱀이 똬리를 틀 듯 뒤엉켜 있다. 구노의 돌변한 태도는 지정선의 공격성을 자극했다. 지정선은 마치 폭력을 휘두르듯 마기란을 뜷고 들어갔다. 마기란의 하얀 젖가슴과 엉덩이를 움켜쥐면서 지정선은 구노에 대한 적개심을 짜냈다.

지정선에게 마기란은 컴플렉스의 해방구였다. 와이프에게 주눅이 들어 누워버린 그의 남성은 마기란의 앞에서는 불뚝 일어섰다. 지방대 야간을 나온 지정선에게 서울에 있는 대학을 나와 방송국 보조작가로 일하는 와이프는 은근한 자랑꺼리이자 동시에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30대 초반의 육감적인 여성이 자신의 남성 앞에서 고분고분해지는 것은 지정선에게 뿌리칠 수 없는 쾌락이었다. 마기란이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몸을 내 준 것일지라도 지정선은 그 거래를 거부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살인사건 당일 저녁 9시43분 ST공사 노조사무실. 지정선 위원장의 핸드폰 벨소리가 정적을 가른다. 열흘 뒤 총파업을 앞두고 노조간부 회의가 열린 직후다. 3개의 노조가 하나로 통합되기는 했지만 출신별로 이해관계가 달라 총파업 결의 후에도 논란이 식지 않고 있었다. 피곤에 지친 기색으로 발신자를 확인하는 지정선.

당분간 전화하지 말라고 했을텐데. 지정선의 목소리가 차갑다.
알아요. 그런데... 마기란의 음성이 떨린다.
구노, 그 새끼가 완전히 돌아버렸어. 무슨 짓을 벌일 지 몰라. 그 새끼 회사 나갈 때까지만 참아. 아직 소문도...
그만. 나도 알아 알아요. 그래도 지금 좀 와주면 안돼요? 무서워요. 떨리던 목소리에 울음이 섞였다.
무슨 일이야? 불길한 예감에 자세를 고쳐 앉는 지정선.
무서워요. 이런 상황을 더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무슨 일인데. 구노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한거야?
... 마기란의 침묵은 지정선의 불안감을 더 자극했다.
설마, 너에게도 돈을?
그건 아니에요.
그럼 대체... 불안은 등 뒤에서 슬며시 다가와 어느 순간 정면으로 얼굴을 내민다. 마기란에게도 가족이 지정선과의 관계를 알게되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시나리오였다. 남편과 사별한 뒤 마기란은 시댁에서 매달 보내주는 80만원이 생명선과 다름없었다. 2대 독자인 손자가 대학에 갈 때까지 보내주기로 돼 있는 생명선은 마기란이 그 때까지 다른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이었다. 구노는 마기란의 아킬레스건을 알았고, 그 사실을 이용해 마기란을 취했다. 그날밤 구노는 술에 취해 꿈틀거리는 욕정을 위해 마기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던 것이다.
마기란으로부터 사실을 전해들은 지정선은 구노에게 달려갔다. 구노는 절망의 독에 취했고, 지정선은 분노의 늪에 빠진 상태였다.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1-1/5)...3년전의 악몽


# 아스팔트를 뚫고 들어갈 것 같은 빗줄기. 그 속을 G70 승용차가 달린다. 칠흙의 어둠을 헤드라이트가 뚫고 그 불빛을 빗줄기가 벤다. 와이퍼를 따라 차안의 남녀가 보였다 빗줄기에 사라진다. 운전하는 여자와 술취한 남자. 빗방울에 크로즈업된 남자. 로커처럼 산발을 한 머리. 주승우다.

씨발. 문정민 이 개새끼. 남자, 중얼거린다.
여자는 말이 없다.
차라리 잘 됐어. 기타나 퉁기면서 한 세상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씨발.
여자는 여전히 말이 없다.
문정민 이 개새끼. 씹어먹을꺼야.
승우씨. 취했어. 왜 안하던 말을 하고 그래.
그제서야 입을 여는 여자.
나 안취했어. 어느 때보다도 멀쩡해.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하는 게 취한거야? 혀가 꼬인다.
술에 의지하는 남자 시시해.
나 원래 시시한 놈이야. 몰랐어?
더 나가면 나도 못참아. 고시 한번 떨어졌다고 이렇게까지 망가져야겠어?
시험 떨어졌다고 내가 이러는 줄 알아?
그럼 도대체 뭔데.
문정민같은 그런 꼴통 새끼가 내 인생을 좌지우지 했다는 게 참을 수 없는 거라고. 목소리가 창문을 뚫고 나와 빗줄기 속에 퍼진다.
그러니까, 그냥 요령껏 답하지 그랬어. 권력이 그렇게 순진한 줄 알았어? 언제까지 피터팬 흉내내며 살꺼야. 여자의 목소리가 뒤따라 창을 뚫고 나온다.
차 세워. 더이상 술에 취한 눈빛이 아니다.
한강 다리 한 가운데서 차를 어떻게 세워. 부진의 목소리로 차안이 부풀어 터져버릴 것 같다.
차 세워. 더욱 단단한 목소리.
뛰어내리든가 그럼.
순간, 차문을 열고 몸을 내미는 승우.
깜짝 놀란 부진이 승우를 잡는다.
빗길에 미끌어진 차가 중앙선을 넘는다.
맞은 편에서 강한 불빛이 쏜살같이 달려온다. 곧바로 천둥같은 충격음이 따라와 빛을 삼킨다.
악~ . 잠에서 깬 승우. 비인지 땀인지 온 몸이 흠뻑 젖었다.
흠~. 긴 한숨.
또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시계를 본다. 새벽 4시반이다. 꿈속에 내린 비가 창문을 두드린다. 다시 눕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그냥 눈을 감는다.
따릉따릉. 핸드폰 소리가 선잠을 깨운다.
태송입니다. 전화속 목소리에는 아침 바람이 섞였다.
어 태송아. 돌아가는 말은 아직 눈꺼풀에 덮였다.
잠을 깨운 모양이네요.
아냐. 일어나야해.
형님. 오늘 약속 잊지 않으셨죠? 워낙 바쁘신 분이라 확인차.
바쁘긴 백수가 뭐가 바빠. 이따 보자.
백수라뇨. 대한민국 최고의 기자가.
얼어죽을.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1-2/5)...비내리는 공원묘지


# 양평의 한 공원묘지. 밤새 내린 비는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가을 문턱에서 여전히 푸르른 녹음이 굵은 빗줄기를 뚫지 못하고 옅게 퍼진다. 유리관속 영현 앞에 승우가 표정 없이 서있다. '강부진, 잠들다'란 위패. 영현앞에 놓인 사진엔 부진과 승우의 다정한 한 때 모습. 사진의 가운데는 찢었다 붙여놓은 흔적이 역력하다.


...
한동안 말없이 부진의 사진을 바라보던 승우. 달콤했던 기억들을 이내 악몽이 밀어낸다. 눈동자에 비춰진 사고순간이 눈물에 젖어 대리석 바닥에 떨어진다. 산산히 부서진다. 돌아선다. 그 순간.

형부... 부진의 동생 혜진이 들어오다 주승우와 마주친다.
형부는 무슨. 냉정하게 승우를 지나치는 부진의 어머니.
우리 다시는 마주치지 않았으면 했던 말 다음엔 꼭 기억해주게. 차가운 말 한마디가 따라온다.
잘 지냈는가. 얼굴이 많이 상했군.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승우는 한동안 고개를 들지 못한다. 어깨에 올려진 아버님의 온기에 승우의 가슴이 더욱 무겁다.
자네 아직 안갔는가? 날카로운 목소리가 온기를 식힌다.
고개를 들지 못하는 승우를 일으켜 세우며 어깨를 다독이는 아버지와 시종일관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어머니.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혜진을 뒤로 하고 승우는 부진의 곁을 나왔다.
승우야. 뒤따라 나온 아버님의 목소리가 승우의 우산에 부딪힌다.
왜 이리 얼굴이 상한거냐.
... 고개를 떨군 승우.
네 스스로를 먼저 용서해야 한다. 그저 사고였던 거다. 부진이의 운명이었던 거야. 엄마도 언젠간 이 상황을 받아들일 날이 올꺼다.
저를 용서하시면 안됩니다. 승우의 눈물이 빗줄기에 가리웠다.
형부. 기다렸다 제 차타고 가요. 차 없을꺼 아냐. 일이 있어 엄마와 따로 왔어요. 뒤따라 나온 혜진이다.
아냐. 그냥 편하게 가.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2-1/5)...희생양


# 그날밤. 김태송을 만난 뒤 주승우가 향한 곳은 종로의 한 수제 맥주집이다. 밤잠을 설쳐서 피곤으로 눈꺼풀이 내려앉을 것 같은 상황인 데 박 경사의 전화를 주승우는 뿌리치지 못했다. 구글맵의 안내대로 골목길을 돌아 찾아간 곳은 한옥을 개조한 건물이었다. 수제 맥주와 한옥. 이색적인 두가지를 어떻게 어우러뜨려 놨을까. 호기심에 분출된 아드레날린에 기대 주승우는 유리문을 열었다.

박경수 경사가 손을 흔든다.


다같이 계신 줄 몰랐네요. 테이블엔 박 경사와 지수대 팀이 둘러 앉아 있다. 알코올 때문인지 한지 조명 때문인지 이테라 팀장은 복숭아빛으로 젖었다.
그쪽도 같이 해요. 이테라가 잔 하나를 주문한다. 그녀 앞에 놓인 네 개의 맥주잔에선 방금 따른 맥주 거품이 흘러넘친다. 테이블 위에 백사 네 마리가 기어가다 서로 머리를 부딪힌다.
팀장님. 피같은 술을 이렇게 쏟아부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육중환 형사가 술잔에 차례로 입을 갖다 대고 넘치는 거품을 흡입하자 이번엔 박 경사와 수영의 야유가 거품을 따라 쏟아진다. 네 마리의 뱀이 방울 소리를 낸다.
사장이 잔 하나를 내오자 맥주를 따르려는 이테라의 손목을 잡는 주승우. 고개를 가로로 젓는다.
남자가 술도 못해요?
못합니다. 건조하면 차가워진다. 주승우의 무미건조한 말 한마디가 차갑게 이테라의 귀에 꽂힌다.
우리끼리 한잔 하시죠. 어색한 분위기를 가르는 건 육중환의 목소리다.
원샷! 언제 그랬냐는 듯 천진난만하게 잔을 허공에 들어올리는 이테라.
배터지겠어. 이 팀장 이제 그만. 박 경사의 미간이 좁아진다.
안돼요 안돼. 100잔을 채워야 효과가 있는 거라구요. 이테라의 미소가 박 경사의 좁아진 미간을 편다.
자 그래 마시자구요. 배터져 죽었다는 귀신은 못봤으니까. 육중환 형사가 박 경사에게 윙크를 하며 맞장구를 친다. 수영도 술잔을 든다.
서로의 눈치를 보는 박 경사와 육중환, 수영. 여섯 개의 눈동자가 댕굴댕굴 구르는 동안 이테라는 꿀꺽꿀꺽 500cc를 비워버렸다.
코를 막는 이테라. 인상을 쓰며 참는다. 살짝 삐져나온 트림은 무효라며 성공을 선언한다. 열세잔째 맥주를 원샷하는 동안 한번도 트림을 하지 않았다며 자랑하는 이테라. 빈잔을 높이든다. 마치 개선장군이 보검을 하늘로 치켜드는 것 같다.
맥주 100잔을 트림없이 원샷하면 소원이 이뤄진데. 미친거지. 박 경사가 주승우의 귀에 속삭인다.
개검사 때문에 우리 팀장님 열좀 받으셨네. 까짓거 같이 죽읍시다. 육중환 형사가 남은 술을 비운다.
기자님이시라던데. 조수영 순경이라고 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주승우에게 집중된다. 술판의 한 가운데서 승우는 줄곧 네 사람의 이해못할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쪽은 재미가 없나보다. 여전히 무표정이시네. 언제봐도 표정이 어쩜 그리 똑같아요?
이테라의 말에 순간 박경사가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주승우라고 합니다. 육중환에게 서둘러 손을 내미는 주승우.
아. 육중환입니다.
조수영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신가보네요. 승우는 그제서야 묵음 모드에서 무리속으로 들어온다.
그 반대야. 오늘 검찰이 구노를 기소했거든. 박 경사의 볼륨이 높아진다.
기소요? 왜 갑자기. 아직 수사중 아닌가요?
정황이 확실하다고. 막무가내야.
무슨 검찰이 정황만 갖고 기소를 해요.
그래서. 이 팀장이 오늘 뚜겅이 열린거야. 박 경사의 말에 주승우는 이테라를 바라본다.
구노는 아니에요. 이테라의 얼굴에서 장난끼가 사라졌다. 범인은 전문가라구요. 검찰이 수사결과를 완전히 무시한 거죠. 부검의 소견도 무시하고. 적어도 구노가 죽였다는 확증이 아직 없어요.
그렇다고 아니란 증거도 없죠. 아무튼 검찰이 서둘러 기소를 했다는 얘기네요. 승우의 촉이 발동하는 데.
그 영혼없는 검사영감. 자기도 시켜서 어쩔 수 없다나. 얼어죽을. 입을 삐죽거리는 이테라.
일개 노조위원장 살인사건에 윗선이 개입했다?
큰 사건도 아니고 골머리 썪을 필요 없으니 그냥 마무리하자. 뭐 이런거 아닌가요? 육중환이 끼어든다.
기본 요건은 갖추는 게 보통이죠. 왠지 한 스텝 더 서두른 느낌은 나네요. 주승우의 고개가 45도 기울어진다.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2-2/5)...서초동 똥개


그건 그렇고. 팀장님 이제 어쩌실 생각이세요. 명색이 검사인데 수사관에게 쳐맞고 가만히 있겠어요? 육중환의 두터운 눈꺼풀이 꿈먹꿈먹한다. 안타깝다는 의미다.

검사가 맞다뇨?
이 팀장이 검사 들이받았잖아. 박치기. 박 경사가 웃음을 참으려 손으로 자신의 입을 가린다. 푸풋. 하지만 이내 웃음보가 터진다. 아 미안해. 웃으면 안되는 일인데 생각하면 자꾸 웃음이 나서. 내가 그 장면을 눈앞에서 봤어야 하는데...
그 쪽이 먼저 제 멱살을 잡았다구요. 여자... 아니 경찰 멱살을.
아무리 그래도 팀장님이 실수하신거에요. 그 검사 지검에서 지랄맞기로 유명한 인물이에요. 별명이 정검이더라구요.
수영이 넌 또 언제 그런걸 알아봤냐? 중환이 수영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
육선배 쫌. 머리요.
후배 귀엽다고 머리도 못쓰다듬냐. 육중환이 두손으로 수영의 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근데 정검이 무슨뜻이에요? 중환과 수영이 티격태격하는 사이를 뚫고 들어오는 승우의 목소리.
정치검사요. 성이 정이니 실제 정검이이기도 한거죠. 수영은 중환에게 헤드락이 걸려있다.
줄 잡으려고 혈안인가봐. 지방대 출신이 중앙지검에서 살아남으려면 별 수 있었겠어. 지검 수사관 중에 선배가 있어서 나도 좀 알아봤거든. 별명이 하나 더 있더라구.
다른 별명요?
아검.
아검은 또 뭐에요?
AH 검사. 하여간 먹물들이란. 말을 만들어도 미국말로 만들어.
AH요?
Ass Hole. 맞나?
똥구녕이네. 헤헤. 술기운이 퍼진 이테라. 혀가 한바퀴 꼬였다.
출세에 필요하다면 후배 똥구멍에 꼬옥 끼인 콩나물도 빼먹을 인간이라고 후배들이 붙여준 별명이래. 차장검사 똥구멍까지 삭삭 핥을 인사라고...
골치가 좀 아파지겠느데요. 이름이 뭐랍니까? 그 똥구멍.
정도한.
그 영감 이름 한번 거시기하네. 전직 대통령 짝퉁인가. 육중환은 아직 수영에게 건 헤드락을 풀지 않고 있다.
검사 이름은 왜. 기사 쓰려고? 걱정스러운 표정의 박 경사.
아뇨. 기사는 무슨. 활자 낭비죠. 주승우의 눈빛이 깊은 생각에 비친 초승달 같다.
똥구녕 검사. 이제 밥을 똥구녕으로 먹어야 할꺼야. 헤헤. 내 박치기 한방에 입술이 위아래로 떡져 붙어버렸거든. 초승달에 걸렸던 테라의 얼굴이 쿵하고 테이블 위로 떨어진다.
팀장님 팀장님 팀...수영의 목소리가 메아리를 치다 테라의 시야에서 사라진다.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3-1/5)...아까야(あかや) 13번 방


# 다음날 점심. 서초동 서울지방검찰청 앞 일식집 아까야. 단층 적별돌 건물앞 주차장에서 주승우가 담배를 물고 있다. 이번 사건에 누군가 검찰을 움직여야 한다면 지정선 위원장의 죽음이 단순한 원한과 치정의 결과가 아닐 것이라고 주승우는 생각했다. 정도한은 깃털이다. 몸통을 흔들려면 일단 깃털을 잡아당겨야 한다.


씨발 무슨 아까징끼도 아니고 식당 이름하고는. 담배를 한모금 깊이 마시고는 주변을 살펴보는 주승우. 찡그린 두 눈에 대로변 갓길에 세워진 고급 세단들이 들어온다. 대한민국에 부자들 졸라 많아 씨발.
이락샤이마세~~. 자동문이 열리자 요리사 예닐곱명이 동시에 주승우를 향해 외친다. 바로 된 홀과 수십개의 방으로 이뤄진 서울중앙지검 앞 맛집이다.
죄다 조선사람이구만 이락샤이는 얼어죽을. 삐딱하게 서서 홀을 둘러본 주승우가 카운터로 뚜벅뚜벅 걸어가 사장처럼 보이는 사내에게 명함을 내민다. 일드 심야식당의 주인공같은 복장인데 생김새는 영락없는 왕서방이다.
기자님이시네요. 실눈을 하고 명함을 살펴본 사내. 말은 공손했지만 어디서 듣보잡 매체의 기자가 와서 기자행세를 하지란 표정이다.
여기 정검 와있죠. 몇호실이에요? 배불뚝이 사장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는 주승우.
정검요? 왕서방은 딴청을 피운다.
정도한 검사 말이오
아 정도한 검사요. 코털 하나를 뽑아 입바람에 날린다.
주차장이 좁던데. 대로변에 발레파킹된 차들 불법인 거 아시죠? 서초구청에 민원 넣으면 사설주차장 써야 하는데 서초동 금싸라기 땅에 주차장이 있을 리도 없고. 주차비 감당할 수 있으려나. 하긴 쪽바리 흉내내는 조선 주방장들 데려다 돈좀 버셨을테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겠네.
난처한 표정의 왕서방.
동행한 대한건설 최 사장, 정검 눈치 못채게 적당한 핑계 붙여서 이리로 불러주시고.
아이참. 이러면 안되는데. 떨떠름한 표정의 왕서방. 말은 부정인데 이미 벌떡 일어서 룸으로 향하고 있다.


# 잠시 후 정 검사의 스폰서인 최 사장이 방문을 열고 나오다 주승우와 마주친다. 주승우가 최 사장에게 귓속말을 하자 내빼듯 식당문을 나서는 최 사장. 잠시 후 정도한 검사가 식사를 하고 있는 13번 방문이 열리고. 정도한 검사는 기다리던 최 사장이 아닌 주승우의 등장에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발동한다. 정도한의 시선은 주승우의 동선을 따라 움직이다 밥상 맞은편 경계에 꽂힌다.


당신 누구야. 목에 한 껏 힘이 들었다.
최 사장님은 급한 일이 있다고 가셨습니다. 힘 뺀 목소리. 하지만 묵직하게 정도한의 귀청을 울린다.
당신 누구냐니까. 목소리가 힘이 빠져 뒤로 밀린다.
음모닷컴 주승우 기자라고 합니다.
기자한테는 볼 일 없는데. 점심 전인 듯 한데 남은 사시미나 좀 들고 가시오. 나는 바빠서 이만. 자리에서 일어서는 정도한. 제법 거물급 흉내를 낸다.
구노를 기소하셨더군요.
회는 말이오. 초고추장이 아니라 고추냉이에 찍어먹는 게 제 맛이라오. 최 사장이 입이 짧아 제법 많이 남았네. 딴청을 피운다.
앉아. 한층 단단해진 주승우의 목소리가 방안 공기를 묵직하게 누른다.
뭐야 이새끼. 정도한의 찡그린 얼굴과 날이 선 눈매가 주승우와 정면으로 마주친다. 묘한 긴장감.
개폼 잡지 말고 앉아. 역삼동 오피스텔 성매매 사건. 온세상이 알게하고 싶지 않으면.
문으로 향하던 정도한의 발걸음이 얼어붙는다.
당신 누구야?
같은 말 두 번 하는 거 안좋아해. 여전히 묵직한 음성.
잠시 고민하던 정도한. 결국 주승우와 마주앉는다. 잠깐의 정적. 그 사이 둘의 눈빛은 이미 많은 말을 주고 받았다.
원하는 게 뭡니까?
내일 이 시간. 이 방. 구노의 기소에 대해 납득할만한 자료를 갖고 와. 내 고개가 상하가 아니라 좌우로 흔들리면 네 가족이 가장 먼저 알게될꺼야. 그날 역삼동 오피스텔에서 대한민국 검사란 인간이 한 일을.
그 건은 나도 잘 몰라요. 나는 그냥 윗선에서 시키는 대로 하는 것 뿐이오.
오이 한조각을 입에 넣는 주승우. 말없이 아삭아삭 씹는다. 정도한과 부딪힌 시선을 놓아주지 않는다. 팽팽히 당긴다.
당신이 오피스텔 사건을 폭로하지 않는다는 걸 어떻게 보장합니까? 결국 정도한이 입을 연다.
내가 그 걸 보장해야 하나? 묘한 눈빛.
정말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는 건 알아요. 검찰 전체를 움직일 수 있는 힘이 뒤에 있다는 말이오.
내일 이 시간이야.
주승우의 단호함에 잠시 생각에 잠긴 정도한. 알았습니다. 결국 고개를 숙인다.
회 좋아하는 거 같은데 좀 들어. 비싼 집 같은데. 젓가락으로 회를 가리키는 주승우.
정도한은 주승우의 눈치를 보며 젓가락으로 회 한점을 든다.
입술은 왜 그런거요? 능청을 떤다.
어떤 미친 여자가...왼쪽 손바닥을 입술에 갖다 대는 정도한. 어제 일이 떠올랐는지 열을 올린다.
고소 취하해.
무...슨 고소 말입니까?
아무리 법밥 먹는 검사지만 자기하고 손발 맞추는 경찰을 고소하면 되나. 쪽 팔리게. 회를 한점 집어드는 주승우. 고추냉이를 푼 간장을 듬뿍 찍어 정도한의 입에 꾹꾹 밀어 넣는다.
알...았소. 톡톡쏘는 고추냉이가 툭툭 터져버린 정도한의 입술에 닿는다. 눈물이 핑돌아 뚝뚝 떨어질 것 같다.
그 일로 그 여자에게 아무 것도 하지마. 법복 벗기 싫으면.
알았다고 하잖소. 근데 이테라 팀장과는 무슨 사이요. 이거라도 되나? 이죽거리며 새끼 손까락을 들어보이는 정도한.
말 조심해. 손가락 네 개짜리 장갑 끼기 싫으면. 날카로운 주승우의 눈빛이 정도한의 오금을 밴다.
슬쩍 손가락을 내리는 정도한. 근...데 오피스텔 사건은 절대 비밀로 해줘야 합니다. 이번엔 목소리가 땅속으로 기어들어간다.
그건 전적으로 내일 무엇을 갖고 오느냐에 달렸어.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3-2/5)...오피스텔 성매매


# 이날 오전 10시쯤 서울중앙지검 박정도 차장검사실. 주승우는 정도한을 만나기 전에 박정도 검사를 찾았다. 정돈된 서류 뭉치들과 티끌하나 없는 티테이블이 박정도 검사의 성격을 말해준다. 다도에 정통한 박 검사는 후배 승우에게 아끼는 차를 한잔 내 준다.


보령에서 공수한 차야. 한 잔 마셔봐라.
색이 좋은데요 선배님.
보통은 향을 말하지. 너는 색을 먼저 말하는구나.
아련하면서도 선명한 게 꿈 같기도 현실 같기도 합니다.
누구나 자기가 의지하는 감각이 있는 법이지. 승우 너에겐 그 것이 시각인 것 같구나. 시각이란 건 궁극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기 위한 것이지.
동향 선배인 박정도 검사는 주승우의 고등학교와 대학교 선배다. 주승우가 대전고등학교 3학년 재학시절 학생회장 출신 모임인 한솔회의 모교방문 당시 주승우를 처음 만나 고려대학교 검도 동아리 선후배로 인연을 이어갔다.
어떤 말씀이신가요?
네가 몇모금에 불과한 차 한잔을 보면서 하나의 영상을 생각한 것처럼 말이다. 인간의 감각이란 결국 감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을 알기 위한 것이다.
너무 철학적인 말씀을 하시네요.
아까워서 그런다. 삶이 너무 짧다. 너도 이제 나이가 들었잖니. 더 늦으면 안된다. 대쪽같은 성격의 박정도 검사는 자신과는 달리 자유분방한 영혼의 주승우를 유난히 아꼈다.
저를 과대평가하시네요. 별볼일 없는 놈인데.
너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앵글을 가졌다. 그 것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능력이 아니야. 이제 안으로 들어와라.
저 밖에 있는 거 아닙니다. 다른 방식일 뿐이죠.
내가 또 주제 넘는 소리를 했나보구나.
아닙니다. 선배 진심 알고 있습니다. 박정도 검사가 자신을 아낀다는 것은 이심전심으로 느끼고 있다.
이 거 지민이가 직접 키운 거다. 지민은 검도부 동기 중 유일한 여자였다. 주승우는 자신이 하루도 안빠지고 끈질기게 동아리에 나오는 게 지민이와 관련된 미스테리 때문이라고 말하곤 했었다.
지민이가요? 철승이 형과 결혼해 고향에서 도장을 한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차 농사를 짓는 줄은 몰랐네요.
도장도 하지. 인근 지역 검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문이 자자하다. 철승이 아버님이 차 농장을 하셨던 모양인데 지금은 두 녀석이 물려받아서 같이 하고 있다. 승민농장이라고 다도가들 사이에선 제법 알아주는 이름이 됐다.
지민이 뭘 해도 잘할 줄 알았습니다. 남자들도 힘들어하는 겨울 합숙훈련을 한번도 빠진 적이 없었죠.
독한 녀석이지. 그건 그렇고 지민이의 미스테리는 밝혀진 거냐?
아직 미궁에 남아있습니다. 이젠 철승이형에게 물어봐야 할까봐요. 헤헤. 지민이 도복을 입을 때 과연 팬티를 입을 지를 놓고 주승우의 동기들이 내기를 했던 적이 있다. 속옷을 입지 않는 게 검도의 전통인데, 검도부 유일의 여자부원이었던 지민이 전통을 따를 지를 놓고 수컷들의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민이 연무대회 뒷풀이 자리에서 자신과 도복사이엔 땀밖에 없다고 한 말이 미스테리를 풀 유일한 실마리로 남아 있다. 그 때부터 동기들은 그녀를 마른 먼로라고 불렀다. 170cm의 키에 45kg의 그녀가 칼을 휘두르면 칼이 그녀를 흔드는 것처럼 보였다.
얼굴 보자고 찾아온 건 아닐테고 용건이 뭐냐? 점심까지 같이 하면 좋을텐데 말한 대로 선약이 있어서. 시계를 보는 박정도 검사.
취재중인 사건이 하나 있습니다.
말해봐라.
며철전 ST공사 노조위원장이 살해됐습니다. 정규직 전환이 무산된 임시직 정비공이 유력한 용의자였는데 수사 중에 서둘러 기소가 됐습니다. 정도한 검사가 담당이구요.
형사1부 정도한 말이구나.
맞습니다. 작년 강남경찰서가 관할 구역 오피스텔 성매매 집중 단속을 했는데 정도한 검사가 당시 단속에 걸렸었습니다.
이런 찌질... 혀끝을 차는 박정도 차장.
당시 상대 여성이 미성년인데다, 가학행위까지 해서 정도한이 현장에서 수습을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랬다면 입건이 됐을 꺼고 무사하지 못했을 텐데...
당시 강남경찰서장에게 압력을 넣은 사람이 있습니다.
SNS 때문에 음주운전도 검사 빽으로 어쩌지 못하는 세상인데 성매매를 무마시킬 정도면. 무엇인가 직감한 표정의 박정도 검사.
장경주 차장입니다.
역시. 그랬었구나. 어떻게 안거냐. 검찰 내부에서도 모르는 일인데.
팔로워들 중에 3천명의 핵심 회원들이 있습니다. 당시 단속을 나갔던 순경이 그 중 한명입니다. 장경주 차장이 입막음을 하려고 강남서장은 물론 당시 팀원들을 데리고 룸싸롱 접대까지 한 모양입니다. 물론 스폰서는 따로 있었구요.
장경주가 충견을 키우는 방식이다. 수렁에서 건져주고 충성을 요구하지. 그렇게 개 노릇을 하다 결국 끓는 솥에 들어간 녀석들이 꽤 있다.
차장검사가 개입한 것이라면 단순한 살인사건이 아니란 얘기입니다.
어설프게 건드려선 안된다. 어쩌면 여당 실세를 상대해야 하는 일이다.
장경주는 여당 3선 의원이자 킹메이커인 장중경의 아들이다. 25세에 사시에 합격한 수재이긴 하지만 그가 동기들보다 빨리 차장검사 자리에 오르는 데 장중경의 힘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건 서울중앙지검 앞 해장국집 아줌마도 아는 사실이다.
선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지하철 노조위원장의 죽음에 왜 여당 실세가 관심을 갖고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 일단 꼬리로 몸통을 흔들어야 하니까요. 이 일이 어쩌면 선배님이 장경주를 상대하는 데 유용한 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박정도 검사는 장경주와 사시 45회 동기로 동기들 사이에선 장경주를 상대한 유일한 라이벌로 꼽힌다. 장경주보다는 1년 늦게 차장을 달았지만 장경주보다 덕망이 높은 편이다.
쓸 데 없는 소리. 내가 도울 일이나 말해보아라.
선배님. 페어플레이는 상대도 그렇게 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필요한 거나 말하거라.
정도한이 오늘 점심을 어디서 누구와 점심을 먹는지 알아봐 주십시오.
인터폰이 울리고 박정도 차장검사실의 여직원이 곧바로 카톡창을 연다.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4/5)...그림자의 손

# 지하철 2호선 서초역 8번 출구. 아까야에서 정도한을 만난 주승우는 용답동 ST공사로 향했다. 계단을 밟는 데 지하철 입구에 붙은 플랭카드가 주승우의 눈길을 잡는다. '한중 경협의 물꼬, 서울지하철이 뚫는다'란 굵은 글씨 아래 '9월9일 새로운 시대가 달립니다'라는 작은 글씨들이 줄을 서있다. 순간 핸드폰 벨소리.
네. 형님. 박 경사의 통화음이 제법 크게 들린다.
부위원장이요?
박 경사와의 통화 후 주승우는 한양대학병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최병국 노조 부위원장이 전날밤 퇴근길 교통사고로 중퇴 상태라니. 노조위원장 살인사건 뒤에 잇따른 부위원장의 교통사고.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한양대역 정차를 알리는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오고 나서야 주승우는 지하철이 15개의 역을 거쳐 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병원 중환자실 앞에 도착한 주승우를 맞이한 건 박 경사다. 최 부위원장의 가족들과 노조 간부들 틈바구니에 있던 육중환 형사와 수영이 주승우와 시선이 마주친다.
박 경사님이 불렀어요? 왜 자꾸 기자를 부릅니까. 육 형사의 언성이 높아진다. 수영이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주 기자가 분명 큰 도움이 될꺼야. 두고 보라구. 박 경사가 입을 삐죽 내민다.
어떻게 된 겁니까?
내부순환로에서 사고가 났어. 가드레일을 들이받고 차가 전복이 됐는데 뒤따라 오던 트럭이 또 받은거야. 소나타가 종이조각 구겨놓은 것처럼 완전히... 박 경사가 혀끝을 찬다.
혹시 음주운전이나...
최 부위원장은 당뇨에 걸린 다음에 술을 전혀 안한데. 노조간부회의 끝나고 다른 간부들은 한잔 하러 갔는데 최 부위원장 혼자 집으로 갔다는거야.
간부회의요?
총파업을 앞두고 놓고 어제 밤에 노조 간부회의가 있었나봐.
총파업이라면.
직접 설명을 듣는 게 낫겠지. 박 경사가 무리속의 한 남자를 데려온다. 박 경사의 손에 잡혀 온 사람은 주재혁 수석부위원장이다.
총파업을 강행할 지 논의하는 자리였습니다.
파업이 예정됐던 게 아닌가요?
원래는 그렇습니다. 전체투표에서 그렇게 결정이 났었으니까요.
그런데 파업을 할지 논의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투표 결과는 그랬지만 파업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만만치 않습니다. 파업으로 연봉을 올리고 처우를 개선해봤자 메트로 출신들 좋은 일만 하는 거라는 게 도시철도 출신 노조원들의 생각이니까요.
ST공사는 서울 지하철 관련 2개 공사가 2015년 합병하면서 직원 1만5천명을 거느린 거대 공기업이 됐다. 수적으로 우세하고 처우가 상대적으로 좋았던 메트로 출신과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도시철도공사 출신들 간의 화학적 결합이 합병 후 회사가 풀어야할 최대 숙제였다. 양사 노조가 2018년 3월 통합노조를 출범시키면서 메트로 출신의 지정선 위원장이 초대 통합노조위원장을 맡고 도시철도 출신의 주재혁 위원장이 수석 부위원장을 맡았다. 최병국 부위원장은 메트로 복수 노조의 위원장이었다.
회사가 강경 대응 방침을 정한 상황이어서 동요하는 노조원도 많습니다. 이번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참가자 전원에 대해 고소 조치 하겠다는 게 회사 방침입니다. 아무래도 민감한 때니까요. 주재혁 부위원장이 설명을 이었다.
민감하다는 게 무슨 의미인가요?
민영우 시장 입장에선 역사적인 날 아닙니까. 경평축구대회를 성사시켰고, 중국산 지하철 수입으로 중국과의 경협 물꼬를 다시 텄다는 점을 전세계에 알리고 싶을텐데, 노조가 파업을 하게 되면 빅 이벤트가 물거품이 되니까요. 신차 첫 운행일을 경평축구대회날인 9월9일로 잡은 것도 이벤트 효과를 극대화 하자는 건데.
경평축구대회와 중국산 지하철 운행! 왜 그생각을 못했을까. 주승우는 순간 어디에 걸지를 몰라 막연했던 고리 하나가 철커덕 제자리를 찾는 소리를 들었다. 노조위원장의 살해사건과 뒤이은 부위원장의 교통사고. 우연이라고 보기엔 뭔가 석연치 않으면서도 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해 답답했던 차였다. 부위원장의 교통사고가 사고가 아니고 두 사건이 동일인의 소행이라면 지금 이 상황은 어떤 일관된 목적을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지정선 위원장과 최병국 부위원장이 무엇인가에 걸림돌이 된다면?
순간 주승우의 머리속에서 무질서하게 산재돼 있던 사건의 조각들이 일렬로 줄지어섰다. 두 사람을 제거해야만 관철시킬 수 있는 일. 그 것을 찾는 게 이번 사건을 푸는 열쇠였던 것이다.
최 부위원장은 파업을 강행하자는 쪽이었겠군요. 이 가정이 맞다면 일련의 사건들은 파업과 깊숙히 관련됐을 것이다. 분명 그럴 것이다. 주승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워낙 고지식한 양반이라. 최 부위원장은 예정대로 강행해야 한다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전체투표에서 결정을 낸 사안이니. 간부회의에서 결정한다고 쉽게 뒤집을 수 있는 사안도 아니구요. 업무직 협의체 출신들도 워낙 강행을 강경하게 주장하고 있는 터라...
업무직협의체라면 이전 계약직들 협의체 말씀이신가요?
맞습니다. 정규직 전환도 감지덕지인데 직급차별 철폐하라며 파업에 목숨걸고 있습니다.
부위원장님 말씀 가려서 하세요. 감지덕지라뇨. 저희가 무슨 거지입니까. 저희도 엄연한 정규직원이라구요. 주재혁 부위원장의 말을 듣고 노조 간부 무리 속에서 한 여성 노조원이 핏대를 세우며 달려든다. 노경자 업무직협의체 대표다.
감지덕지죠. 감지덕지 아닙니까? 2년 전만해도 계약직들이 정규직 꿈이나 꿨습니까. 아니죠. 언감생심도 유분수지. 정규직 전환해주니까 이젠 직급까지 맞춰달라니. 물에서 건져주니까 이제 보따리 내놓으란 것과 뭐가 다릅니까. 죽어라 공부해서 공채시험 보고 들어온 직원들은 무슨 죄를 지어서 그 고생을 한겁니까? 말이되는 소리를 해야지. 주 부위원장이 덩달아 언성을 높이면서 중환자실 앞은 이내 노조회의실이 돼 버렸다.

2장: 용의자가 된 서울시장(5/5)...폭풍 속으로

# 아수라장을 피해 나온 주승우가 올려다 본 하늘엔 먹구름이 싹 걷혀있었다. 분명 잠시 전 병원문을 들어설 때와 같은 하늘인 데 말이다. 주승우는 어려운 문제를 푼 사실을 누군가에게 자랑하고싶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설랬다. 구름이 걷힌 맑은 하늘에 뭉개뭉개 피어오르는 하나의 형상. 이테라의 얼굴이다.
주승우는 스스로 놀라 고개를 절래절래 저었다. 순간 울리는 핸드폰.

여보세요? 모르는 번호였다.
사고가 아니에요.
네? 이테라의 얼굴이 순간 스쳤다 사라졌다.
사고가 아니라구요.
누구신가요? 이테라의 얼굴이 또 스쳤다 사라진다.
저에요. 이테라. 사라진 그녀의 얼굴이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온다. 트랜스미션에 누군가 손을 댔어요. 메카트로닉스라고 트랜스미션을 통제하는 컴퓨터라는 데. 육중환과 수영을 병원에 보내고 이테라가 찾아간 건 국과수였다.
네. 그랬을겁니다.
네라뇨? 알고 있었어요?
아뇨 몰랐습니다.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추측 단계였죠.
맞아요. 아니에요. 누군가 최병국 위원장을 죽이려 한 거에요.
이제 새로운 용의자를 만나야겠군요. 입술을 깨무는 주승우.
새로운 용의자요?
네.
그 게 누구에요?
민영우 서울시장. 그가 용의자입니다.

# 잠시후 서울시 청사 뒷편 국제호텔 1층 파스쿠치 카페. 이테라 팀장이 주승우와 기자와 마주하고 있다. 이테라는 주승우의 입에서 민영우 서울시장의 이름이 나오자 한 걸음에 달려왔다. 지정선 위원장 살해사건 직후 노조사무실에서 최병국 부위원장을 만날 당시 살인사건과 총파업간에 모종의 관련이 있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던 건 이테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마리를 당겨 민영우 시장의 이름을 끌어내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기란씨 일로 그쪽이 추론에 일가견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이번엔 지나친 비약이에요.
동의합니다. 민 시장은 아닐겁니다. 여당 대선 주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될 수 있는 그런 일에 나설리가 없죠.
그런데 왜?
적어도 민 시장과 관련은 돼 있을겁니다.
저도 최 부위원장의 사고가 총파업과 관련된 것일 수 있겠다는 생각은 했었어요. 사고 차량 검식을 국과수에 의뢰한 것도 그 때문이구요.
1년전 9.9 평화회담을 맺을 때 우리 정부와 북한이 경평축구대회 재개를 비공식적으로 약속했었습니다. 평화협정 체제가 안정화 단계에 들어섰다고 판단되는 1년 뒤부터요.
네. 그래서 9일 경평축구대회가 열리는 거잖아요.
당시 그 것을 제안했던 사람이 민영우 시장입니다. 여당내 킹메이커이자 중국통인 장중경 의원이 당내는 물론 청와대까지 움직여 관철시켰던 것이구요.
그래서 경평축구대회와 이번 사건이 어떤 연관이 있다는 건가요? 주승우가 뜬금없이 경평축구대회를 언급하자 이테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건 아직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이번 사건이 어떤 큰 그림의 일부라면 거꾸로 그 큰 그림부터 그려봐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승우가 설명을 계속한다.
2015년 민영우 시장이 통일부에 방북 신청을 했었습니다. 서울시와 평양이 문화교류 차원에서 경평축구대회를 부활시키겠다는 거였죠.
왜 축구대회를.
명분은 문화교류였지만 사실은 2017년 대선을 염두해둔 전략이었습니다. 통일이슈를 선점하자는 거였죠.
박근혜 정부가 허가를 해줬을 리가 없었겠군요. 당시엔 야당의 대선주자였을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무산되기는 했지만 제아무리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경평축구대회만큼 매력적인 이벤트를 찾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축구만큼 전세계 사람들을 열광시키는 경기는 없으니까요. 서랍속에 넣어뒀던 아이디어를 5년만에 다시 꺼내든거죠.
민주당이 여당이니 상황도 달라졌겠군요.
맞습니다. 정부는 집권연장을 위해 민영우 시장을 사실상 후계자로 낙점을 한 거죠.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민영우 시장은 1천만 서울시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곧바로 청와대 입성 계획을 짜고 있었으니 둘 사이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거구요. 2022년 대선을 2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서 경평축구대회란 빅이벤트로 자연스럽게 민 시장이 전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게하자는 전략입니다.
중국 지하철 수입이 대선전략의 또 다른 한 축이겠군요. 사드로 경색된 한중 관계 회복을 위한 경제협력의 물꼬를 튼다. 통일과 경제, 두 가지 이슈를 선점해 청와대로 가는 티켓을 끊겠다는 각본.
....
아닌가요?
정확합니다. 주승우는 커피를 한 모금 입술에 적신다. 마기란 얘기를 할 때도 그랬지만 이테라는 대화 때 마다 자신을 놀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생맥주 100잔을 트림없이 마시면 소원이 이뤄진다며 술이 떡이 될 때까지 마시는 천진난만한 그 여자가 지금 자기 앞에 전혀 다른 얼굴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서울 지하철 1~8호선에 총 3천량의 지하철이 매일 레일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그 중 60%가 넘는, 2천량 가량이 20년이 넘은 낡은 차량이어서 교체 시기가 다 됐구요. 열차를 교체하려면 2조원이 투입되는 매머드급 프로젝트입니다.
지하철 교체 과정에서 중국과 2조원 규모의 경협이 가능하다는 얘기군요.
형식적으로 국제입찰을 거치긴 했는데 사실상 중국업체가 내정돼 있는 셈이었습니다. 예정가격이 낮아 알스톰-지멘스같은 유럽 업체는 애초부터 참여가 불가능했으니까요. 민 시장이 2018년 지방선거 직후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중국측과는 사전 교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알고 있어요. 그쪽이 쓴 기사 읽어봤어요.
네?
지정선 위원장 살해사건 전에 검찰에서 지수대로 그 건과 관련된 수사지시가 내려왔어요. 지 위원장 사건에 지수대가 출동한 게 우연은 아니에요. 언론에서 관련 국제입찰 비리 의혹 기사가 뜨고 시민단체가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니까 검찰이 나서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던 거죠.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에 지수대가 수사를 맡은 건 건 ST공사에 대한 관련 수사를 진행하는 과정이라 그랬던 겁니다.
그렇다면. 지 위원장 살인현장에서 처음 본 날 제가 누군지 알았다는 건가요?
얼굴은 몰랐죠. 이름을 듣고 그쪽이 기사를 쓴 그 기자구나 생각은 했지만. 입을 뾰죽 내미는 이테라.
어쩌면 그렇게 감쪽같이 연기를... 참 대단하십니다.
칭찬, 감사합니다. 싱긋 웃는다.
그건 그렇고. 서울중앙지검 정도한 검사가 입찰건을 담당하고 있다는 얘긴가요?
네.
어차피 수사를 해야한다면 중앙지검이 맡는 게 장중경 의원의 입장에선 통제가 쉬웠겠죠. 아들인 장경주 검사가 차장으로 있으니. 경찰이 수사를 해봤자 검찰이 기소를 안하면 그만이니까요. 퍼즐 하나를 맞췄다.
지수대가 장중경 의원의 장단에 춤을 추고 있었다는 얘기네요. 얼어죽을. 주먹을 불끈 쥐는 이테라.
들러리 입찰 의혹에도 불구하고 민영우 시장은 어쨌든 중국으로부터 1천량, 액수로는 1조원 어치의 지하철을 수입하는 방안을 밀어부쳤습니다. 중국산 새 지하철의 첫 운행이 9일로 맞춰져 있구요.
경평축구대회와 같은 날 세레모니를 해서 이벤트 효과를 극대화 시키겠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ST공사 노조가 9일을 총파업 개시일로 잡은 건 이 때문입니다. 파업을 하면 지하철 운행이 전면 중단되기 때문에 민영우 시장의 입장에선 빅이벤트가 반쪽짜리로 전락을 하는 것이니까요. 반대로 파업 효과는 극대화되는 것이구요.
민영우 시장과 노조가 9일 한날을 놓고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있는 셈이네요.
파업을 막아야 성공하는 세력. 그 세력이 이번 사건들의 범인입니다.
그래서 민영우 시장을 용의자로 지목하신 거군요.
민 시장이 알건모르건 이번 사건들과 연결된 고리의 정점에 있는 건 사실입니다.
지금 민 시장을 만나는 건 시기상조 아닐까요?
진범들이 수면위로 나오도록 해야 하니까요. 민 시장을 흔들면 베일 뒤에 숨어있는 몸통이 저를 향해 나올 것입니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는 건가요? 경찰도 아니고 그쪽은 민간인이에요. 너무 위험해요. 저쪽은 목적을 위해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라구요.
잡아먹힐지 잡아먹을지는 두고 봐야죠. 지금 할 수 있는 건 미끼를 던지는 것이구요. 몸통이 미끼를 물 때 그쪽이 낚싯대를 당겨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물린 미끼가 물고기를 잡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
때가 되면 지금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겁니다. 그런데 한가지 물어봐도 됩니까?
네.
국과수 검식 결과를 받고 왜 제게 전화를 한 겁니까?
서로 여집합을 만들지 말자고 약속한 거 잊으셨어요.? 이테라가 식어버린 커피를 단숨에 마신다.
왜 화를 내십니까. 그건 그렇다 치고. 제 번호는 어떻게 아셨습니까?
화는 무슨. 얼어죽을...
주승우는 이테라의 대답을 듣지 못하고 서울시 청사로 향했다. 커피숍에서 가까운 청사 뒷문이 있었지만 돌아서 정문으로 들어갔다. 높은 파도같은 청사의 형상이 아가리를 벌리고 주승우를 삼켰다. 주승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순간 자신의 질문에 붉어졌던 이테라의 얼굴이 떠오른 것이다.

3장: 차이나 게이트(1/5)...주인을 문 개

# 다음날 점심 께 아까야 13번 방. 정도한 검사가 시계를 본다. 약속한 시간이 10여분 지나도록 주승우가 나타나지 않자 초초해진다. 서류가방을 옆구리에 꼭 낀다. 물을 한모금 마신다. 꼴깍하는 소리가 방문을 넘어 복도에 퍼진다. 물을 한 모금 마신다. 시계를 본다. 애타는 냄새가 목구멍을 넘어온다. 물을 한모금 마신다. 방문이 열린다. 주승우다.
왜 이리 늦은 거요. 정도한이 시계를 본다. 로렉스 데이토나 금통이 불빛에 번쩍한다.
지하철이 막혀서 좀 늦었어.
지하철이 무슨... 의미없는 대답인 걸 알아챈 정도한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는다.
갖고 온건가? 서류 가방 쪽을 쳐다보며 주승우가 말을 잇는다.
한동안 망설이던 정도한이 말문을 연다. 구노를 기소한 건 일단 그가 지정선 위원장을 죽였다고 의심할 만한 합리적인 이유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낭비 하자는 얘긴가. 내가 검사 말장난 듣자고 이 자리 나온 줄 알아? 주승우의 목소리에 날이 선다.
구노가 26년 전에 살인혐의로 기소가 될 뻔 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26년 전 살인혐의? 생각지 못했던 변수였다.
구노가 서울공고 재학시절 폭력써클의 여고생 윤간사건에 연루가 됐었습니다. 당시 피해 여학생이 증언을 번복하면서 구노는 피소되지 않았지만 우두머리를 비롯한 여섯명의 학생은 소년원을 갔었죠. 1년 뒤 출소후 우두머리가 오토바이 사고로 죽었는데 구노가 유력한 용의자였습니다. 오토바이 브레이크 디스크를 교묘히 실톱으로 잘라 놓았는데 기록에는 전문가의 솜씨로 돼 있습니다. 일정 정도 이상의 마찰이 가해지면 디스크가 깨지면서 오토바이가 전복되도록...
그게 구노의 소행였다는건가?
물증이 없었습니다. 구노는 기계과 전공으로 장비들을 제법 잘 다루는 편이었습니다. 불량써클 우두머리의 죽음에 검사가 목을 맬 이유도 없었으니 사고사로 처리하고 서둘러 마무리를 했습니다.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도 증거가 없기는 마찬가지 아닌가.
한 사람이 죽고 한 사람이 그옆에 있었습니다. 제 3자가 현장에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구요. 설령 있었다고 해도 지하철 기관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몇명이나 되겠습니까. 무슨 증거가 더 필요합니까.
구노가 과거에 이미 한차례 살인 용의선 상에 섰다는 사실은 주승우의 퍼즐을 다시 한번 헝클어뜨려 놓았다. 하지만 자신이 주도할 수 없는 대화를 계속하는 건 분위기 반전의 위험이 있다고 주승우는 판단했다. 일단 고삐를 죄기로 했다.
정도한 당신이 형편없는 검사가 아니란 것을 증명하라고 이 자리에 나오라고 한 게 아니야. 주승우의 목소리에 날이 선다.
... 잠시 망설이던 정도한이 서류가방 속에서 노란 서류봉투 하나를 꺼낸다.
서류봉투를 열어본 주승우는 자신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봉투속에 든 것은 서울중차그룹이란 페이퍼 컴퍼니의 주주관계와 그를 통한 ST공사와 중국열차그룹간 지하철 공급 계약 내용을 담은 계약서 사본들이었다.
그동안 당신이 취재하던 내용들이니 보시면 내용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씨익 웃는 정도한의 황금 송곳니가 누렇게 빛났다.
# 정도한의 기억은 입꼬리를 따라 어느날 밤의 회식장소로 거슬러 올라간다. 정경유착 비리의 회오리 속에서 벌어진 삼화토건 조원경 회장의 유서사건 마무리에 대한 격려차 장경주 차장이 형사1부 검사들에게 베푼 룸싸롱 뒷풀이가 있었던 바로 그 밤이다. 장경주의 격려금 봉투를 받고 돌아가던 검사들의 무리속에서 정도한은 불현듯 술자리에 놓고온 서류가방이 떠올라 발길을 돌렸다. 흐벅진 술판이 벌어졌던 8번 방에 들어서려는 순간 안에서 장경주 차장과 민세중 검사의 밀담이 새나온다. 정도한은 손잡이를 꼭 쥔채 문틈으로 두 사람의 귓속말을 훔쳤다.
정도한은 잠시 일회용 칼이 필요해서 끌어올린거지. 곡성 촌놈 서울지검 구내 식당 구경시켜줬으면 감지덕지할 꺼 아냐. 부부장은 무슨. 언감생심. 이번에 세중이 네가 부부장을 달아야지. 조 회장 사건도 잘 마무리했고.
인사철 장경주 차장의 손길이 닿은 건 서울법대 직속 후배인 민세중 검사였다. 스물일곱에 검사가 돼 올해 13년차 검사로 정도한보다는 사시 기수로는 두 기수, 나이는 여섯살이 아래였다. 작년까지 지검내 사시 동기들이 줄줄이 부부장 승진을 했지만 정도한은 평검사 명함을 바꾸지 못했다. 작년에는 오피스텔 성매매 사건 때문에 자숙한다고 생각하면 그만이었지만 올해는 부부장 승진에 대한 기대를 품었었다. 자신이 장경주 차장의 일회용 칼이란 사실을 깨달은 정도한의 칼날은 칼자루를 쥐고 있던 장경주 차장을 향했다.
입꼬리가 내려오면서 정도한의 눈빛은 기억의 저편에서 돌아와 테이블 맞은편의 주승우로 향했다. 판도라의 상자를 연 주승우는 정도한이 건낸 서류들의 행간을 날카롭게 파고 들고 있다.
그 정도면 오피스텔 사건을 묻기엔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정도한은 자신이 휘두르는 칼날에 스스로가 베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판 칼춤을 추기로 했다. 어차피 혈연지연학연으로 촘촘히 얽힌 대한민국 검찰에서 자신이 올라설 자리는 없었다.
양아치 새끼들은 별 수 없구만. 주인을 물겠다고 이빨을 드러낸 개새끼들이 어떻게 됐는지 잘 알텐데. 서류들을 봉투속에 넣으며 주승우는 혀를 끌끌찼다.
사냥이 끝났다고 솥에 물을 끓이는 주인은 그럼 뭐요? 정도한의 눈에서 원망과 분노, 회한이 뒤섞여 회오리를 쳤다.
서류를 챙겨 나온 주승우는 구두칼을 집어드는 정도한을 옆에 두고 다짜고짜 맞은 편 방문을 열었다. 정도한이 고개를 들면서 방안의 장경주 차장과 그를 마주한 두명의 사내가 눈에 들어온다. 한명은 민세중 검사, 다른 한명은 그의 장인인 일진그룹 최태훈 회장이다. 승진인사를 앞두고 민세중 검사가 쐐기를 박기 위해 장인까지 동원한 것이다. 박정도 차장검사 방에 들렀을 때 주승우는 정도한 검사의 당일 점심 일정과 함께 장경주 차장검사의 점심 스케줄까지 파악을 했었다.
주승우가 짜놓은 각본에 걸려든 정도한은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예기치 않은 장면에 당황해 온몸이 굳었다. 말이 없기는 개방된 밀실 속 세명의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장경주 차장이시죠? 주승우 기자라고 합니다. 밀실의 안과 밖으로 이어진 침묵의 공간에 주승우가 넙죽 절을 하며 끼어들었다. 전날 민영우 시장을 흔들어 놓았으니 분명 장중경 의원과 장경주 차장이 그 사실을 전해들었을 것이란 주승우의 짐작은 적중했다. 전날밤 자신의 레지던스를 뒤지고 도주한 자객이 장씨 부자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주승우는 심증을 굳히고 있었다. 장경주 차장의 눈빛이 날카롭게 주승우의 얼굴로 날아와 꽂혔다.
주 기자님 기사는 수사에 많이 참고가 되고 있소. 어려운 상황에서 고생이 참 많소. 그런데 원래 이렇게 무례하오? 날카로운 눈빛에 이어 이번엔 묵직한 음성이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있는 민세중과 최태훈 회장의 사이를 뚫고 날아온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도 나름 지역사회에서는 알아주는 뼈대 있는 양반 가문의 장손이옵지요. 오늘 이리 방문을 열어젖힌 건 앞으로 전쟁을 치를 상대에게 귀띔이라도 해줘야 할 듯 해서입니다. 넋을 놓고 있다가 뒤통수를 맞으면 개새끼라도 기분이 참 나쁠 게 아니겠습니까. 아니그렇습니까. 차장 영감 나으리. 주승우의 비아냥이 자손심이 센 장경주의 평정심을 흔들었다.
저야 열심히 나랏일 하는 죄 밖에 없는데 선전포고라니요.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습니다. 애써 흥분을 억누른 장경주 차장이 너스레를 떤다. 장경주의 시선이 정도한에게 꽂힌다. 여전히 어쩔 줄 몰라하는 정도한.
아 참. 내 정신이 없어서 고맙다는 인사를 못했습니다. 정도한 검사님이 많은 도움을 주시고 있으니 언제 노고라도 좀 치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주승우가 얼어붙은 정도한을 끌어당겨 어깨동무를 한다.
내...내가 무슨 도움을... 도대체 무슨 말을 하...하는거요? 정도한의 떨리는 음성이 끊어진다. 주인을 물겠다던 이빨은 겁에 질린 고양이의 발톱처럼 오간 데가 없다.

3장: 차이나 게이트(2/5)...굴욕적 계약

# 아까야 주차장에 세워진 G70 승용차 안에서 주승우를 기다리던 이테라의 시야에 줄행랑을 치듯 달려나오는 정도한이 들어온다. 그 뒤를 느긋하게 따라나오는 주승우. 무언가 말폭탄을 쏟아내는 정도한을 향해 장난하듯 손인사를 한다.

정확히 3분 남겨놓고 나오네요. 차문을 열고 조수석에 앉는 주승우에게 이테라가 시계를 보며 말문을 연다.
오래 기다렸어요? 당일 새벽 주승우는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해 이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단잠을 깨운 이테라에게 주승우는 서울지검 앞 아까야 일식집 주차장에서 기다리다 자신이 12시반까지 나오지 않을 경우 13번 방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주승우는 앞뒤자른 뜬금없는 말만 남겼지만 이테라는 편의점에서 산 삼각김밥 하나로 아까야 주차장에서 점심을 떼웠다.
주승우의 전화 말투에 담긴 희미한 떨림에 이끌려 달려온 이테라는 이런 상황에서 너무나 태연한 주승우에게 화가 났다. 더구나 그는 지금같은 상황에서도 아무련 표정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게 아닌가.
고맙습니다.
난데 없는 주승우의 말 한 마디에 이테라의 고조되던 감정은 단수가 바뀌면서 뚝 떨어져버린 자동차의 RPM처럼 덜커덕 내려 앉았다. 표정은 건조했지만 말투는 촉촉했다.
그런 말 듣자고 온 게 아니에요. 애써 쿨한 척하는 이테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겠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어련하실까.
서울중차그룹이란 회사를 아십니까?
이테라의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ST공사가 신규 지하철 도입에 대한 예산절감을 명분으로 실시한 국제입찰이 사실상 중국산 지하철 수입을 염두해둔 요식행위라는 시민단체의 의혹 제기로 시작된 지수대의 수사가 막다른 곳에서 만난 이름이 바로 서울중차그룹이기 때문이다.
알죠. 공사가 중국산 지하철 운행을 위해 만든 자회사.
지수대의 국제입찰 비리 의혹에 대한 수사가 시작된 것은 두달 전 쯤이다. 연초에 국제입찰이 실시되고 중국열차집단이 전동차 1천량에 대한 공급업체로 선정될 당시 잠잠했던 야당은 정작 전동차 운행개시 일자가 다가오자 시민단체를 앞세워 대대적인 의혹제기에 나섰다. 정부가 경평축구대회와 중국산 지하철 운행 개시 일자를 한날로 맞추고 남북화해 무드 조성과 중국 경협의 물꼬를 텄다며 대대적인 민영우 띄우기에 나서자 맞불 놓기에 나선 것이다.
서울중차그룹의 존재를 확인하기까지 급물살을 타던 지수대의 수사는 서울중앙지검이 돌연 수사 지휘에 나서면서 답보상태에 빠졌다. 경찰이 수사를 하고 결과를 검찰로 보내면 검찰은 기소여부를 결정하는 절차를 깨고 서울지검이 자체 수사에 나서면서 지수대를 지휘하는 모양새가 갖춰진 것이다. 2018년 1차 수사권이 경찰로 넘어온 이후 이같은 검찰의 수사 지휘는 자취를 감췄었다.
중국산 지하철 운행에 왜 별도의 운영사가 필요한 지가 의문이었어요. 이테라가 말을 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한중합작회사입니다. 전동차 제조업체인 중국열차집단과 ST공사가 50대50으로 출자한 합작사죠. 주승우가 정도한으로부터 받은 노란 서류 봉투를 이테라에게 건낸다.
봉투에 든 서류를 살펴보던 이테라의 눈이 주승우와 마주친다. 대체 이게 무슨 얘기죠? 전동차 매매계약서가 아니라 임대계약서네요. 1조원 규모의 전동차 임대라는 얘긴가요?
지수대 수사의 초점은 WTO 정부조달협정 가입국도 아닌 중국업체가 어떻게 낙찰자로 선정됐느냐였다. 고율의 관세를 감안할 때 중국열차집단의 전동차가 최종 수입가격 면에서는 유럽의 알스톰-지멘스나 캐나다의 봄바르디에 등의 제품보다 비싸질 수 밖에 없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었다. 하지만 서울시와 ST공사가 밝힌 중국산 지하철 1천량에 대한 최종 수입가격은 1조원에 불과했다. 국제입찰에서 공사가 제시한 예정가 1조3300억원보다 3천억원 가량 낮은 액수다. 관세를 감안하면 중국열차집단이 7천억원보다 낮은 금액을 써냈다는 얘기다. 아무리 중국이라도 이같은 금액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게 업계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였다.
네. 임대계약입니다. 관세에 대한 미스테리가 풀리지 않았었는데 이 게 그 해답이네요. 중국산 지하철 수입 문제를 끈질기게 추적했던 주승우도 바로 이 관세 장벽에서 취재가 미궁에 빠졌었다.
이제 좀 알 듯도 해요. 입찰 관련 서류와 중국과의 계약서를 압수수색하면 간단한 문제였는데 번번히 수색영장 발부가 무산됐어요. 임대를 하면 관세를 물지 않아도 되니까. 장기임대란 묘수를...
맞습니다. 자동차 리스를 하면 취등록세를 물지 않는 것과 비슷하죠.
그렇다면 처음부터 공개를 하면 됐을 텐데 왜 비밀의 상자에 꽁꽁 숨겨둔거죠?
이건 실제 계약이고 표면상의 계약서는 매매계약으로 돼 있겠죠. 요식행위라도 국제입찰을 거쳤으니까요. 더 큰 문제는 서울중차그룹의 주주구성과 출자, 청산 시에 관한 계약입니다.
중국과 한국이 50대50으로 돼 있네요.
네, 그런데 출자 방식이 다르죠. 총 자본금은 2조원인데 교통공사가 1조원을 현금출자하는 데 반해 중차집단은 임대하는 전동차를 현물로 출자하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30년간 장기임대료 1조원을 선불로 지급하는 것으로 돼 있구요. 결국 ST공사의 출자금 1조원은 바로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이죠.
중국은 돈 한푼 안들이고 2조원짜리 회사의 주인이 된 셈이군요.
네. 그리고 30년 임대가 끝나고 회사 청산 시에 잔존 자산은 모두 중국열차집단이 회수하는 것으로 해 놓았습니다. 지하철의 보통 수명이 20~30년이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지만 미래의 폐품까지 모두 중국 소유로 해 놓은 거죠.
한중 경협이란 정치적 쇼를 위해 이런 불평등 계약을 맺었어야 할까요?
그 뿐이 아닙니다. 이번 계약의 클라이막스는 유지보수에 관한 조항입니다.
유지보수 조항이라. 계약서를 살피던 이테라의 시선이 멈춘 곳은 금성PSD란 업체였다.
전동차 임대계약에서 유지보수는 보통 임대인이 해주도록 돼 있습니다. 다시말해 중국측이 유지보수를 해줘야 하는데 계약서엔 ST공사의 자회사인 금성PSD회사를 용역사로 지정해 놓았습니다.
중국은 운영수익을 챙기고, 공사쪽은 유지보수에 대한 용역비를 챙기는 것이군요.
ST공사가 아니라 공사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하는 사람이겠죠. 금성PSD의 경영은 그의 하수인 손에 장악돼 있을꺼구요. 연간 수백억원에 달하는 용역비를 30년간 보장받게 되는 것이죠. 막대한 비자금 창구가 만들어진 셈입니다.
ST공사의 의사결정을 좌지우지 한다면 민영우 시장인가요? 아무리 권력 비리라도 국가간 계약에서 이런일이 정말로 가능할까요?
배후가 민영우 시장인지는 단정할 수 없지만, 중국쪽에 협력자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겠죠. 베이징과 맞닿은 선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번 계약은 황해를 둘러싼 서울과 베이징의 합작형 게이트입니다.
살인사건은 빙산의 일각였던 셈이군요.
26년 전 구노가 살인 용의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까?
네. 육 형사가 수사 보고한 내용이에요. 무혐의 처리됐던...
무혐의로 종결됐지만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어요. 누군가는 살인을 위해 오토바이 브레이크를 조작했다는 거니까요. 범인이 구노라는 결정적인 증거만 없을 뿐 정황은 구노를 향하고 있습니다. 마치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처럼.
지정선 위원장 살해범은 전문가에요.
구노가 그 전문가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도 없지 않습니까. 물론 지금 단계에서 노조 간부들을 둘러싼 잇따른 사건사고들이 거대한 게이트의 단면으로 추정되지만 구노를 완전히 용의선상에서 제외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말은 구노도 게이트의 일부일 수 있다는 얘긴가요?
아무 것도 단정할 순 없습니다. 가능성은 열어놓아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순간 꼬로록 하는 소리가 차안에 울려퍼진다. 정도한을 만나고 장겨주 차장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이테라를 만나 비밀의 문을 여는 동안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지만 주승우는 자신 때문에 이테라가 제대로 점심조차 먹지 못했다는 사실을 차안에 먹다남은 삼각김밥을 보고서야 알았다.
이테라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 것이 자신의 귀엔 천둥소리처럼 들린 배곯은 소리가 부끄러워인 지 점심도 못먹고 달려와 차안에 쭈그리고 앉았던 자신에게 화가 나서인지는 스스로도 헷갈렸다.
귓볼이 붉어진 건 주승우도 마찬가지였다. 허겁지겁 차문을 열고 나갔던 주승우가 잠시 후 돌아왔을 땐 손에 초밥 도시락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안에 들어가서 먹으면 좋겠지만 방금전 선전포고를 하고 나온 마당에 장경주 차장을 다시 마주치는 게 그림이 좋지 않을 듯 해서요.
장경주 차장검사가 안에 있다구요?
네. 지금쯤 초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지 코로 들어가는 지 모를 지경일겁니다. 속을 뒤집어 놓고 나왔으니. 초밥은 수사대에 돌아가셔서 드세요.
수사대에 돌아가면 제가 먹을 초밥이 남을 지 모르겠네요. 이테라와 주승우는 동시에 육중환 형사의 얼굴을 떠올렸다.
영상 하나 보낼테니 신원확인 좀 부탁합니다.
신원확인요?
어제 제 집에 찾아온 손님입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민영우 시장을 만난 사실을 장중경 장경주 부자가 알았다면 뭔가 손을 쓸 수 도 있을 것 같아 레지던스에 CCTV를 숨겼었습니다. 놀라운 건 복도나 주차장 CCTV엔 동일인물이 찍히지 않았다는 겁니다. CCTV의 사각지대를 골라 잠입했다는 얘긴데 현관에서 엘리베이터까지, 로비에서 입구까지 CCTV에 찍히지 않고는 입출입이 거의 불가능 했습니다.
확인해볼께요. 이제 어쩌실 생각이세요? 장경주 차장이 수사지휘를 하는 한 제 쪽에서는 더 이상 수사를 진행하는 게 의미가 없을 듯 해요.
프레임을 바꿔야죠. 장중경 부자가 손을 쓰지 못할 완벽한 프레임으로.

3장: 차이나 게이트(3/5)...패를 쥔 표준호

# 다음날 아침. 시청역 5번 출구 계단을 오르는 대한일보 조상룡 기자의 핸드폰이 울린다. 100돌이들과 전날밤 기수 대면식에서 마신 사발식 술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다.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아 들어온 신입기자 15명을 회사에선 100돌이라고 불렀다. 핸드폰을 귀에 대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수신 아이콘을 클릭하자 화통이 터진다. 데스크 곽도운 부장이다.

주승우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조상룡의 대답이 화통의 볼륨을 높인다.
야 임마. 너 주승우하고 대학동기 맞아? 명색이 대한일보 기자란 놈이 어떻게 족보도 없는 인터넷 기자에게 매번 물을 먹냐. 피부 미인 되시겄다. 물 많이 쳐드셔서.
무슨 기사에요? 물 먹은 걸 갖고 뭘 대학 족보까지 따지세요.
꼴에 존심은. '차이나 게이트' 바로 확인해서 보고해. '중국산 지하철 수입의 전모...1조 규모 차이나 게이트'
청사 앞이에요. 바로 들어... 곽 부장은 이미 전화를 끊어버렸다.
쓰벌. 어쩐지 꿈자리가 뒤숭숭하더니만. 떡이 진 머리를 긁적인다.
서울시 본청 기자실은 주승우가 쓴 차이나 게이트로 발칵 뒤집힌 상태였다.
조 기자. 주승우 기사 봤어? 아 씨발, 본청이고 ST공사고 대변인들 확인이 안돼. 석간 경제지 트리뷴의 이비지 기자였다. 10년 동안 서울시 기자실에 똬리를 틀고 짱박이 노릇을 하는 왕고참이다.
오면서 핸드폰으로 봤어요. 시끄럽겠는데요. 조상룡 기자가 노트북을 켜면서 이비지 기자를 힐끗 본다. 병신 대변인실을 다그치면 확인이 되냐? 그런 기사면 이미 기사가 났어도 여러번 났지. 속말인지 겉말인지 숙취 때문에 조상룡 자신도 헷갈리는 데 이비지가 조상룡쪽을 힐끗 본다.
주승우 기사의 핵심은 1조원 어치 중국산 지하철 수입이 사실은 매매계약이 아니라 임대였다는 점, 계약내용이 중국 쪽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계약었다는 점, 그 과정에서 돈세탁을 위해 서울중차그룹이란 페이커컴퍼니가 설립됐다는 점 등이었다. 민영우 시장 주재로 긴급대책회의가 진행중이란 점을 감안할 때 서울시와 관련 실국장은 물론 강태석 사장을 비롯한 공사의 관계자들도 모두 회의에 참석중일 것이 뻔했다. 조상룡은 어차피 그들과의 전화 연결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조상룡이 핸드폰 연락처 목록에서 누른 이름은 주승우였다.
어 상룡아. 마치 조상룡의 전화를 기다렸다는 듯 주승우는 두 번째 통화벨이 울리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또 한 건 했네. 어제 박완수 의원 전화번호 물어본 게 이 것하고 관련이 있는 건가?
어쩌다 보니.
인사는 나중에 하고. 짐작하겠지만 지금 좀 바빠서. 그대로 받아도 무방하지? 조상룡은 단도직입적으로 기사를 받아쓰겠다고 말한 것이다. 같은 기자끼리 더구나 대학동기에게 자존심이 상하는 문제였지만 일단 독자들에게 사안을 알리는 게 중요했다. 조상룡이 그런 기자란 걸 주승우도 잘 알고 있었다.
주승우와 조상룡은 경제학과 학회인 세계경제학회 멤버였다. 아시아개발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였던 이중화 선배가 92년 교수 임용 직후 만든 학회로 역사는 짧았지만 경제부총리까지 배출한 제법 영향력 있는 학회다. 2학년 멤버가 신입생 중에 한명씩을 추천하는 형태로 매년 신규 멤버 두명을 뽑았는데 10학번 중에선 147명 동기들 중에 주승우와 조상룡이 낙점 됐다. 주승우가 인디밴드 활동에 빠져서 학회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가끔씩 논쟁을 하는 주승우의 모습에서 조상룡은 정체모를 자괴감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물론. 대한일보에서 받아써주면 기삿발 받고 좋지. 표준호 대표가 방아쇠를 당길 지 고민하는 중인 것 같은데 네가 결정을 좀 앞당겨줘야겠다.
표준호는 또 무슨 얘기야?
그건 기사가 나가면 알게될꺼야. 이번 건이 마무리 되면 동기끼리 소주한잔 하자.
표준호란 이름이 언급되자 조상룡은 서둘러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대한일보가 차이나 게이트를 후속보도하자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물론 연합뉴스 등 통신까지 잇따라 온라인에 속보를 타전했다. 서울중차그룹이란 페이퍼컴퍼니의 존재 확인만으로도 데스크들의 독촉 전화를 더 이상 버텨낼 맷집이 기자들에겐 없었다. 종합지에 이어 주요 경제지와 인터넷 매체들의 기사가 온라인에 뜨는 데는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어 국회 출입기자들의 핸드폰에 표준호 자유한국당 대표의 긴급 기자회견을 알리는 메시지가 떴다.

# 전날 점심 시간 아까야 주차장. 이테라에게 줄 초밥 도시락을 챙기면서 주승우는 대한일보 조상룡 기자에게 자유한국당 박완수 의원의 핸드폰 번호를 입수했다. 박완수 의원은 현대로템 공장이 있는 창원 의창구가 지역구다. 박 의원 입장에서 민영우 시장의 중국산 지하철 수입은 3천여명에 달하는 현대로템 직원들과 그 가족들의 표심을 이탈시키는 악재였다. 국내 지하철 전동차는 사실상 현대로템 독점 체제였기 때문이다. 5천표 정도면 당락을 결정짓기엔 충분한 표수다. 재선 과정에서 박 의원이 고전했던 유일한 이유였다. 주승우가 이테라에게 말한 프레임 전환은 궁극적으로는 표준호 자유한국당 대표를 염두해둔 것이었다. 여당의 유력 대선 경쟁자인 민영우 시장을 게이트란 폭풍에 몰아넣을 수도 있는 지하철 전동차 국제입찰 비리 사건이 꽃을 피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토양은 바로 표준호의 손에 있었다. 문제는 어떻게 관련 서류들을 표준호의 손에 쥐어주는 것인가였다.

문자가 왔네요.
문자라뇨?
방아쇠를 당겨줄 사람요. 국회의원이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인터넷 매체 기자의 면담요청에 응할 리 만무했다.전화를 걸어봤자 모르는 번호를 받지 않을 게 뻔했다. 주승우는 임대계약서 사본 사진을 찍어 박완수 의원의 문자로 보냈다. 주승우가 사진과 함께 보낸 판세와 관계의 전환-주승우란 열한자의 문자를 본 박완수 의원은 주승우가 깔아놓은 레일 위에 바퀴를 올렸다.
만납시다. 박완수 의원의 답문자였다. 주승우의 메시지를 받은 박완수 의원은 십여분이란 짧은 시간 동안 주승우의 정체를 조사했다. 보좌관들은 일단 인터넷 검색에서 주승우 기자란 존재를 확인하고 국회 사무처 기자실 담당을 통해 출입기자 등록 여부를 알아봤다. 인터넷 매체 기자로 출입기자 등록 언론사는 아니지만 메일링 서비스로 연결돼 있다는 점을 확인했다. 보좌진으로부터 과거 기사 스크랩을 받아본 박완수 의원은 중국산 지하철 관련 주승우의 잇따른 단독보도 기사를 읽어본 뒤 주승우를 만나기로 결심했다. 특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전직 대통령 비자금 창구 기사의 주인공이 바로 주승우란 사실이 박완수 의원의 관심을 끌었다.
상대의 적은 나의 편이다. 이이제이군요. 설명을 들은 이테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도한이 주승우에게 전달한 노란봉투는 정치권에 흘러들어갈 경우 2022년 대선 판도를 일시에 뒤흔들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것이었다. 주승우의 말대로 박완수 의원은 도화선에 불을 당기기에 최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 서류들이 표준호 자유한국당 대표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는데 박완수 의원이 역할을 할 것입니다. 박완수 의원이 불을 당길 적임자라면 표준호는 노랑봉투의 폭발력을 배가시킬 주인공이다. 표준호는 2017년 5월 대선에 출마해 22%에 달하는 보수층의 지지를 끌어낸 인물이다. 당시 민주당 후보에게 패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표 대표가 출마를 결심한 건 당대표를 향한 경유지로 2017년 대선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승부사가 여당의 유력 대선 후보를 게이트의 구덩이로 몰아 넣을 수 있는 패감을 어떻게 활용할 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주승우가 박완수 의원에게 보낸 판세와 관계의 전환이란 문자 중 판세는 바로 표준호를 향한 메시지였다. 관계는 박완수 의원과 표준호 대표간에 형성된 미묘한 분위기를 간파한 주승우의 승부수였다. 표준호 대표가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한 때 정적이었던 박완수 의원의 경남지사 출마를 권한 건 경남의 수성이 그만큼 절실하다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박완수 의원이 표 대표의 권유를 묵살하면서 당시 지방선거에서 한국당이 상당한 고전을 치렀었다. 박완수 의원에게 주승우가 건낼 노랑봉투는 표준호 대표와의 관계를 복원할 카드인 셈이다.
주승우의 의도를 알아챈 이테라도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어떻게 하실꺼에요?
만나야죠. 마침 정기국감 시즌이 임박해 서울에 올라와 있다고 합니다. 여의도로 갈 겁니다. 곧바로 표준호 대표까지 봐야할 수도 있으니까요.
조금만 돌면 수사대에 가는 길이니 태워다 드릴께요. 시계를 보는 이테라. 건강검진 차 인근 성모병원에 들른 한송희 박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지하철로 갑니다. 점심시간이라 올림픽대로가 제법 막힐 겁니다. 이테라가 차의 시동을 걸자 주승우가 당황하며 핸들을 잡은 이테라의 손을 당긴다. 지하철로 간다니까요. 식은 땀을 흘린다.
알았어요. 지하철 입구에 세워드릴께요. 천천히 출발한다.
아뇨. 차 세워요. 소리를 지르는 주승우.
이테라가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는다. 끽... 노면에 차가 밀리는 소리가 찢어지며 주차장에 퍼진다. 급하게 차에서 내리는 주승우. 몸을 숙이고 심호흡을 한다. 땀방울이 안경 렌즈에 떨어진다.
어디 안좋으세요? 차에서 내린 이테라가 주승우의 앞에 섰다. 몸을 세우는 주승우의 얼굴이 노랗다.
아뇨 괜찮습... 이테라의 얼굴이 주숭우의 시야에서 서서히 사라진다. 아까야 빨강 벽돌과 검은 기와 지붕이 회오리를 치며 뒤섞인다. 아득히 빨려들어간다.

# 잠시후 강남 성모병원 진찰실. 쓰러진 주승우를 태우고 이테라는 인근 성모병원으로 달려왔다. 건강검진 후 만나기로 했던 한송희 박사가 이테라의 전화를 받고 동기인 응급의학과 신강철 박사를 긴급히 호출했다. 엑스레이와 MRI 촬영을 마친 주승우를 응급실에 눕혀놓고 이테라는 한송희 박사와 신강철 박사의 진찰 결과를 듣고 있다.

쇼크로 정신을 잠깐 잃은 것 같아. MRI나 엑스레이 상으로는 특별한 이상은 없고. 신강철 박사의 설명을 따라 한송희 박사와 이테라의 시선은 주승우의 MRI와 엑스레이 사진을 교차한다. 사진 속에 마치 뼈를 바느질 한 것처럼 수십개의 철심이 박혀 있다. 광대뼈와 턱뼈는 좌우 대칭이 맞지 않고 찢어진 지폐 조각들을 다시 꿰맞춘 듯한 이음새들이 지하도시의 거대한 수로처럼 얼굴 전체에 퍼져있다.
큰 사고를 당했었던 모양이네. 이 정도면 정상인들처럼 활동 하기는 불가능했을텐데. 한송희 박사의 말에 신강철 박사가 고개를 끄덕인다. 엑스레이에 고정됐던 한송희 박사의 시선이 이테라를 향한다. 남자친구니?
아뇨. 최근 수사건 때문에 알게된 기자에요. 그러고 보니 전혀 몰랐었다. 일주일 전에 지정선 위원장 살해현장에서 처음 만나 그동안 서너번 부딪히고 만나기는 했지만 주승우 기자에 대해서 아는 것이라고는 그의 이름이 전부였다. 감정이라는 게 한칸한칸 계단을 오르듯 고조되는 것만은 아닌가보다. 이테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마 웃는 것조차 힘들꺼야. 신강철 박사의 말은 이테라의 가슴에 박혀 있던 의문하나를 긁어냈다. 짧은 인연과 스치는 듯한 몇번의 만남이 전부였지만 이테라는 자신을 바라보는 주승우의 얼굴에 아무런 표정이 없다는 게 왠지 서운했다. 그의 시선을 타고 전해지는 따뜻한 감정이 그의 표정에선 매번 싸늘하게 식어버렸기 때문이다. 이테라는 고개를 저었다. 한 사람의 아픈 과거가 자신에겐 위안이 되는 이 순간이 싫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응급실 침대위에 누운 주승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테라는 생각에 잠겼다. 차의 시동을 거는 순간 쇼크를 받았다면 과거의 아픈 상처는 분명 교통사고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이테라는 추측했다. 이테라의 생각이 꼬리른 무는 사이 주승우는 3년전 악몽의 심연속으로 다시 빠져들고 있었다. 빗줄기가 내리치는 도로위의 차안에서 벌였던 부진과의 말다툼.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리려는 자신을 잡는 부진과 섬광. 그리고 세상을 둘로 쪼개는 듯한 충격음....
악! 외마디 비명과 함께 과거의 심연에서 주승우는 현실로 돌아왔다. 현실의 문을 여는 순간 주승우가 마주 친 건 자신을 지켜보는 이테라의 얼굴이다. 부진의 얼굴과 이테라의 얼굴이 여러번 교차되다 이테라가 또렷이 나타난다.
식은 땀이 흐르는 주승우의 얼굴을 보면서 이테라는 주머니 속에서 움켜쥐었던 손수건을 꺼내지 못했다. 무엇인지 정확히 알수는 없지만 주승우의 과거 상처를 자신이 건들게 될까봐 겁이 났던 것 같다.
제가 왜 여기... 깨질 듯한 머리를 움켜쥐고 주승우는 잠시 전 아까야 주차장에서의 장면을 떠올렸다. 검붉은 회오리에 휘말려 쓰러진 뒤 3년전 교통사고의 악몽의 순간으로 빠져들었던 자신이 2020년 현재로 돌아온 건 세시간 정도가 지난 뒤였다. 교통사고 직후 의식불명 상태로 침대에서 보낸 석달보다 이 세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 건 자신이 반드시 깨어나야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가 지금 자신의 앞에 서 있다.
지금 몇 시인가요?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던 건지. 정신을 차린 주승우는 불현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박완수 의원을 생각했다. 어쩌면 역사를 바꿀 수도 있을 순간 앞에서 과거의 악몽에 무너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서너시간 의식이 없었어요. 계속 문자가 오던데 아무래도 박완수 의원일 듯 해요.
주승우는 이미 신을 신고 있었다. 이테라도 주승우를 말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이라도 지금 이 순간 병원 침대에 누워 시간을 허송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테라는 태워 주겠다는 말이 나올 뻔 한 것을 애써 참았다. 응급실을 나서는 주승우가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 자리에 서 있었다. 그 밖에는 할 수 있는게 무엇인지 그 순간 떠오르지 않았다.
병원문을 나선 주승우는 박완수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급한 목소리의 박 의원은 국회 의원회관에서 줄곧 주승우의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

3장: 차이나 게이트(4/5)...대한일보 편집국

# 주승우가 박완수 의원을 만난 저녁 세종로 대한일보 편집국장실. 창가에 선 김창환 국장이 담배 한모금을 길게 내뱉는다. 지난 2년간 끊었던 담배다. 창문에 부딪힌 담배연기가 자욱이 부서진다. 창밖을 달리는 자동차들이 내뿜는 헤드라이트 불빛이 담배연기에 흐려진다. 담배 필터를 이로 한번 질끈 깨무는 김 국장. 노크 소리에 돌아선다. 곽도운 사회부장이 문을 연다. 긴급호출을 받은 세 명의 부장 중 한명이다. 곽도운 사회부장과 남궁종원 정치부장 이광휘 경제부장을 10분 간격으로 호출했다.

도운아 표준호가 패를 잡은 모양이다. 김 국장이 정치부장에 앞서 곽도운 사회부장을 부른 것은 서울시가 사회부의 출입처이기도 했지만 그가 비교적 정치중립적인 성향을 가졌기 때문이다. 남궁종원 정치부장의 경우 보궐선거 공천 건으로 표준호 자유한국당 대표와 밀월관계에 있어 사안을 중립적으로 판단하기 힘들 것이라는 게 김 국장의 생각이었다.
표준호요? 패는 또 무슨 말씀이세요? 다짜고짜 표준호의 이름이 나오자 곽도운 부장은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표준호가 민영우 잡을 패를 쥐었다고.
형님 앞뒤 자르지 말고 알아듣게 좀 얘기해봐요. 마감하고 늦은 저녁 먹고 있는 사람 불러놓고 다짜고짜 표준호네 민영우네 하면 내가 어떻게 알아듣겠습니까.
김 국장은 담배 한 모금을 내뱉는다. 민영우가 중국에서 지하철 1조원 어치 수입하는 거 있지?
9일부터 운행 시작하잖아요. 민영우가 대선용으로 지하에 만리장성을 쌓는다고 칼럼까지 쓰면서 조지라고 했던거 아니에요 형님이.
그 게 이면계약이 있었다.
이면계약요?
그래 이면계약. 관세 문제로 사실상 수입이 불가능해지니까 임대계약을 해놓고 겉으로는 매매계약처럼 꾸민거지.
그게 그러니까. 조달협정 문제로 입찰가격을 어지간히 낮추지 않고는 아무리 중국산이라고 해도 낙찰이 불가능할 것이라고들 했었으니까요.
이면계약서 사본이야. 표준호가 보낸. 김 국장은 곽 부장에게 프린트한 계약서 사본을 건낸다.
형님. 당 떨어진 저녁 10시에 이런 계약서 봐도 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중국산 지하철 수입은 거짓말이고 그 증거가 지금 이거란 얘기 아니오.
맞아.
만리장성 무너지는 소리가 들리는구만. 와르르. 근데 왜 형님이 죽을 상이에요? 안피던 담배까지 물고.
석연치 않은 게 있어서.
뭐가요?
민영우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대권이 눈앞에 있는데 뭔들 못하겠습니까. 형님 표준호가 자기패를 보여줬으면 그대로 쓰면 되는거지 우리가 왜 거기까지 고민을 해요. 기사 나가면 민영우가 알아서 해명할꺼고. 믿고 말고는 국민들의 몫이에요. 형님은 너무 생각이 많아. 그 순간 노크소리와 함께 남궁종원 정치부장이 들어온다.
뭔데 이렇게 심각해요 분위기가. 너구리 잡아요? 국장실에 자욱한 담배연기를 보고 남궁종원 정치부장은 뭔가 큰 일이 벌어진 것을 직감한다.
앉아. 종이컵에 담배를 끄고 김 국장은 프린트한 서류들을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이게 뭡니까? 남궁종원 부장은 안경을 콧등에 누르고 서류를 살핀다.
표준호 쪽에서 보낸거야.
강 선배가요? 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강 전 편집국장은 표준호의 최측근으로 대한일보와 보수야당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다.
표준호가 직접. 강 선배하고는 이후에 통화를 했고.
사안이 그만큼 중차대하다는 무언의 압박이군요. 칼을 쥐어줄테니 한판 칼춤을 추어달라.
우리가 춤을 추지 않으면 같은 자료를 중앙일보에 넘기겠지. 춤판을 넘길 수는 없지 않겠어?
불가피한 춤이라면 제대로 추어야죠. 한국당이 언젠가는 청와대 문고리를 잡을꺼고 이참에 표준호 대표 쪽에 보험 하나 들어놓는 것도 나쁘진 않죠. 남궁종원 부장은 보궐선거 공천 티켓을 놓고 표준호에게 점수를 따놓자는 속내였다.
춤은 추는데 칼을 누구에게 겨누느냐갸 관건이야. 김창환 국장이 2년 동안 끊었던 담배를 서랍에서 다시 꺼내든 것도 바로 이 대목에서였다. 사사건건 정부와 대립각을 세워온 터여서 보수정당의 정권 탈환 기회만을 손꼽아 기다려온 대한일보였다. 하지만 이번 건이 민영우 시장의 작품이란 결정적인 증거가 부족했다. 민영우 시장을 겨냥하는 게 자칫 표준호가 아니라 민영우 시장과 당내 경합 대상인 윤정희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밀어줄 수 있다는 점도 문제였다.
민영우 시장을 직접 겨냥하는 건 위험합니다. 김창환 국장의 속마음을 읽은 곽도운 부장이 나섰다. 민영우를 겨냥한다고 순순히 인정을 할 리도 없고. 나중에 민 시장이 발을 빼고 나면 우리만 반격을 당할 수 있습니다.
프레임을 민주당의 음모로 가죠. 민영우 타깃으로 할 필요는 없잖아요.
어차피 우리도 민영우가 타깃이 아니라 민주당을 겨냥하자는 거 아닙니까. 일단 전선을 넓혀놓고 상황을 봐가면서 민영우를 겨눌 지를 결정하면 되죠.
민영우에게 칼질을 한다고 촛불민심이 표준호 쪽으로 갈 리도 없구요. 자칫 윤정희 좋은 일만 하는 것일 수도 있지요. 대한일보 정치부장답게 판세를 읽는 눈이 빨랐다. 표준호의 낙점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강약 조절이 필요한 건 오히려 남궁종원 부장 쪽이었다.
서울시 산하기관에서 생긴 문제를 서울 시장 이름을 빼고 민주당이란 프레임으로 엮을 수가 있을까요? 제일 늦게 테이블에 합류한 이광휘 경제부장이 고개를 갸웃한다. 김창환 국장도 이 대목에서 고민의 골이 깊어졌다. 민영우란 이름을 넣자니 자칫 윤정희 밀어주기가 되고 빼자니 앙꼬 없는 찐빵이었다.
뿌리는 장중경이야. 드디어 몸통 이름이 언급됐다. 보면 알겠지만 서울중차그룹과 유지보수 용역사인 금성PSD의 대표로 돼 있는 차지창이가 장중경의 아들 장경주의 고등학교 친구야. 표준호의 말로는 최근 지하철공사 정비창고에서 살인사건이 하나 있었는데 그 게 이 건과 연관이 있을 것이란 거지. 그 건을 맡은 검사가 장경주고.
정황만 갖고 여당 최고 실세를 공격하는 건 위험합니다. 남궁종원 부장이 브레이크를 건다.
무대위에서 칼춤을 추면 되지 왜 우리가 연출까지 하려고 합니까? 미간을 좁히고 있던 곽도운 부장이 끼어든다. 1조원짜리 중국산 지하철 수입계약이 사실은 임대계약이고 지하철공사가 유령회사까지 만들어가며 이면계약을 했다고 터뜨리면 나머지는 표준호가 알아서 할 꺼 아닙니까.
정리하자구. 일단 팩트만 터뜨려. 이면계약을 내용으로 한 중국산 지하철 게이트. 야마는 차이나 게이트로 하자구. 기사가 나가면 한국당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명을 발표할 꺼야. 각종 의혹을 제기할 꺼고. 포인트는 이거야. 민영우의 이름을 최대한 뺀다. 공격 프레임을 민주당, 좀더 사안이 구체화되면 장중경으로. 도운이가 일단 스트레이트 준비하고 지하철 공사 살인사건 취재해봐. 차지창이 캐보고. 종운이가 표존호와 장중경 주인공으로 기사 만들고. 광휘는 대목 잡았으니 장사해야지. 현대로템쪽에 이건으로 얼마 뽑을 수 있어?
1면 5단 광고 세 판 일단 3억은 뽑아야죠. 경제부장이 존재감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기삿발 받아서 계약 파기되면 더블은 해야 하구요.
한 가지 문제가 있어. 회의의 마침표를 찍어야 할 타이밍에 김 국장이 사족을 달고 나온다.
문제요?
첫 기사는 주승우가 쓴 다음에 나가야 해. 표준호가 서류를 넘긴 조건이야.
주승우요?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남궁종원 부장이 기억을 더듬는다.
음모닷컴 주승우요? 이 건도 그 녀석이 캔 겁니까? 주승우가 전직 대통령이 실소유주인 벤처기업 비리 관련 기사를 연거푸 터뜨릴 당시 곽도운 사회부장이 주승우 영입 작업을 했었다. 주승우가 곽 부장의 제의를 거절한 건 조직생활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맞아. 그 주승우. 반드시 기사는 주승우의 스트레이트가 나간 뒤여야 해.
대한일보 체면이 말이 아니구만. 형님 지금 대한일보가 김 빠진 사이다 만들자는 얘기요? 인터넷 치라시나 다름 없는 매체 기사를 대놓고 받자는 거 아니에요. 곽 부장이 핏대를 올린다.
주승우는 스트레이트 한 꼭지 쓰고 빠질꺼야. 그 다음 우리가 물량공세를 하고 이슈를 잡아야 해. 아쉽지만 약속은 약속이야. 김 국장도 속이 쓰리긴 마찬가지였다.
이거 왠지 주승우 각본 같은데요. 곽도운 부장은 영 마땅치가 않다.
야 임마. 최순실 사태 기억하지? 그 때 최초 보도한 곳이 어딘지 누가 기억해. 결국 이슈를 주도한 JTBC의 칼춤으로 끝났잖아. 이 게 주승우의 이슈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김 국장의 언성이 높아지는 건 사실 곽 부장과 같은 심정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추어야죠. 칼춤. 마침표는 정치부장의 몫이었다.

3장: 차이나 게이트(5/5)...진실

# 표 대표의 기자회견 직후 정국은 차이나 게이트의 소용돌이에 급격히 빨려들었다. 표준호는 1조원 규모의 지하철 수입을 골자로한 한중경협이 민영우 시장의 대선용 정치 사기극이며 이 과정에 더불어민주당 실세인 장중경 의원 부자가 깊숙히 개입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했다. 표준호 대표는 지하철 공사 노조위원장의 살인사건이 차이나 게이트의 일부일 것이란 의혹을 제기하는 데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특히 중국 정부 고위층의 협조 없이는 이같은 비리가 불가능했다는 점을 집중 부각시켰다. 모든 의혹을 말끔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국정조사와 특별검사 구성이 불가피 하다며 야권은 곧바로 총 대여공세에 나섰다. 2017년 5월 촛불 민심에 꺾였던 보수단체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었다.

여론의 관심은 민영우 서울시장과 장중경 의원의 행보에 모아졌다. 서울시와 국회 출입기자들의 발걸음이 어느 때보다 분주해졌다. 서울시 출입기자들 중 말진들은 6층 시장실 앞에 진을 치고 일진들은 2층 기자실에서 데스크들과 수시로 메시지를 주고 받으며 말진들의 보고를 기다렸다. 시장실 문은 표준호의 기자회견 이후 서너시간 동안 단 한번도 열리지 않았다. 말진 일부는 벽에 어깨를 기댄 채 일부는 바닥에 엉덩이를 붙인 채 민영우 시장의 출현을 기다렸다. 대변인실 김희승 과장이 2층과 6층을 오가며 벽과 바닥에 껌딱지같이 착 달라붙은 기자들을 떼내려고 안간힘을 썼다.

입장이 정리되는 대로 시장님이 직접 발표를 하실겁니다. 여기서 이러지들 말고 기자실에서 기다리세요.
말진 기자들은 막무가내였다. 기자가 된 이후부터 누군가의 등장을 기다리며 어딘가의 문앞에서 밤새도록 뻗치기를 하는 게 일상이 된 무리였다. 정작 그들이 기다리던 누군가가 언론이 내미는 마이크와 휘갈기는 펜 앞에서 원하는 답을 하는 경우는 거의 제로였다. 그래도 그들은 어깨와 엉덩이가 저릴 때까지 누군가를 기다렸다.
촉이 좋은 일부 일진들은 지하 4층 주차장에 삼삼오오 모였다. 19하 8447 번호판을 단 검정 EQ900 일렉트릭 세단 앞에서다. 민영우 시장의 관용차다. 관용차 운전기사의 얼굴을 아는 몇몇 노련한 기자들이 주차장 운전기사 대기실 문 틈 사이로 그의 존재를 확인했다. 경쟁 관계의 기자들이지만 민 시장이란 공동의 술레를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어느새 역할분담을 통한 공조체제가 형성됐다. 정국을 뒤흔드는 빅이슈 앞에서 서로의 동향을 살피기 위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같은 것이었다.
수십명의 출입기자들이 쳐놓은 인의 그물 속에서 민 시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굳게 단힌 민 시장의 집무실을 박차고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위기에 처한 출입처 기관장에게 보내는 최소한의 예우 같은 것이었다. 약속은 없었지만 모든 기자들 사이에 암묵적인 공감대가 형성됐다. 그들은 똥줄이 바짝 타들어가는 순간에도 그렇게 선을 넘지 않았다.

# 주차장 천정엔 붉은 색 파이프라인이 그물처럼 깔려 있다. 환풍구로 이어지는 공기 통로는 마치 거대한 인체 모형의 혈관 같다. 민 시장의 관용차 위에서 시작된 파이프라인은 정 반대편 29번 표식에서 멈춘다. 공회전 금지 표식이 프린트된 기둥 뒤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주승우다. 잠시후 29번 기둥이 정면으로 보이는 비상계단 출입구 철문이 끼익하고 열린다. 또각또각 구두발 소리가 공명을 일으키며 묵직하게 정적을 깨고 들어온다. 손목시계 타키미터를 바라보는 주승우. 정확하게 3시간59분 동안 그는 그 곳에서 비상계단 철문이 열리는 소리를 기다렸다. 또각 소리가 29번 기둥 앞에서 멈춘 순간 뾱 하고 차문이 열린다. 또각 소리에 앞선 또 하나의 구두발이 먼저 다가와 차의 뒷문을 연다. 순간 차를 타려는 남자와 기둥뒤 그림자의 시선이 부딪힌다. 구둣발 소리의 주인공은 민영우 시장이다. 구둣발 소리가 깬 정적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친 사이로 다시 끼어들었다.

주 기자 아니오. 예기치 않은 주승우의 등장인데 민 시장의 얼굴엔 놀라움이 아니라 미소가 번졌다. 자칫 정치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궁지로 자신을 내몬 당사자 앞에서 보인 민 시장의 미소에 주승우도 미소로 답했다. 찰나의 침묵은 두 사람 사이에 설명할 수 없는 전율이 흐르는 통로를 내주었다.
차 안탈꺼요? 자신의 관용차 앞에 진을 친 기자들을 피해 민 시장은 반대편에 주차된 아반떼 일렉트릭쪽을 택했다. 서울시가 전기차 보급을 위해 도입한 직원 업무용 차량이다. 대체 여기서 얼마나 날 기다린거요? 절체절명의 순간 앞에서 민 시장은 의외로 태연했다.
1분만 더 있었으면 정확히 네 시간입니다. 타키미터 초침은 그 순간에도 물흐르듯 흘렀다.
내가 이쪽으로 올 지는 어떻게 안거요? 순간 실내 백미러 한 가운데서 운전기사와 주승우의 시선이 만났다. 우리 인연도 이제 역사가 꽤 됐지요?
그렇네요. 시장님 처음 뵌 게 3년 전 쯤이니까요.
세월 빠르지요?
네. 지나오고 나니 한 페이지도 안되는 시간 같습니다. 주승우가 민 시장을 처음 만난 건 2018년 2월 평창올림픽 기간 중이다. 정부가 평화올림픽의 여세를 북미대화로 이어가기 위한 포스트평창 구상에 한창인 때였다. 민 시장은 당시 정부에 5월 경평축구 대회를 제안했었다. 어렵게 만든 남북 대화의 분위기를 잇따른 스포츠 교류로 이어가자는 명분이었다. 하지만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한 당내 경쟁자들의 반대로 경평축구 구상은 결국 북한 선수단을 이끌고 내려온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 전달되지 못했다. 당시 민 시장의 경평축구 구상을 처음 보도한 게 주승우였다. 보수언론은 한반도의 운명이 걸린 북핵 문제를 선거에 이용하려 했다며 민 시장을 때렸다.
건강은 괜찮은거요?
건강이라뇨?
주 기자 처음 봤을 때 말이오. 자기 몸도 가누기 힘들어보여서 도대체 무엇을 위해 미친 듯이 뛰어다니는 지 한번 쯤 물어보고 싶었습니다.
그 게 티가 났었나 보네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당시엔 몸이 안좋은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은 괜찮은거요?
네 많이 좋아졌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 있소. 주 기자를 보면 말이오.
그런 게 있습니까?
파닥거리는 눈빛. 몸은 삐그덕 거리는 데 눈 빛 하나만큼은 마치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반짝반작 했으니까. 이 나이가 되면 그런 눈빛의 젊은이가 꽤나 반가워지거든.
시장님한테 제가 반가운 사람이라는 건 의외의 소득이군요.
주 기자의 존재가 나에게 득이 된 건 아니오. 굳이 말하자면 아군보다는 적군에 가깝지.
적군이 반가우신가요?
내가 이 자리까지 평탄하게 달려 온 건 아니오. 수많은 적들을 만나고 싸웠습니다. 그런데 말이오. 여러 전쟁을 치르다 보면 적들 중에 동질감이 느껴지는 상대가 있어요. 서로를 인정해주고 명예롭게 싸우고 싶은.
오늘은 시장님답지 않게 말씀이 많으시네요.
내가 원래는 말이 많아요. 아주 수다스럽지. 그런데 기자들 앞에선 말 조심을 해야지. 앞뒤 자르고 자기들 원하는 것만 쓰거든. 의도했던 것과는 정 반대의 말이 돼버리기 일쑤고.
뜨끔하네요.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뒤로도 조심해야 합니다. 앞뒤로 다.
... 아.
나도 농담할 줄 알아요. 몇년 전에 이런 게 유행였죠 아마. 민영우 시장은 3선 민선 시장이다. 서울시 역사상 최장기 시장이다. 변호사에서 시민운동가, 다시 행정가로 변신을 거듭했지만 그는 자의반타의반 유력 대선후보로 꼽히는 정치인이었다. 위기의 순간을 태연함으로 포장할 수 있는 건 어느 순간부터인가 몸에 벤 그의 정치 기술이었다. 주 기자 오늘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군요.
확인하기 위해 시장님을 찾아온 게 아닙니다.
항상 그랬지요. 주 기자는 내게 무엇인가를 확인한 적이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항상 무엇인가를 전달했지요.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까요. 시장님께 불편한 진실이라면 확인해 줄리 없고, 시장님께 유리한 진실이라면 제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게될 테니 말입니다. 3선 민선 시장이란 노련한 정치인을 상대로 저는 어느쪽도 선택할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진실에 다가서는 게 기자에겐 가장 중요한 일이겠지요. 이번에는 어느 정도 다가섰다고 생각하나요?
이제 진실행 티켓을 끊었다고 해야겠죠. 그 버스는 아직 출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더욱 내게 궁금한 게 많겠군요.
적당한 때가 되면 진실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주승우의 눈빛이 민영우 시장의 눈빛과 닿았다. 두 사람의 눈빛은 어느쪽도 흔들림이 없었다.
내게는 무엇이 진실인가보다는 국민들이 무엇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정치9단 같은 말씀을 하시는군요.
저는 정치인입니다. 좋든 싫든. 링에 오른 이상 링 위의 룰을 따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민 시장은 그 순간 차창을 내린다. 요점이 뭐냐하면 말이오. 내가 여기서 주 기자에게 말하는 진실은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국민이 그 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수 있느냐가 관건이지요. 정확히 말하면 국민이 그 것을 진실로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느냐입니다.
선택을 하신거군요.
선택이라. 민 시장은 깊은 숨을 내쉰다. 내게는 지금 선택의 여지가 없어요. 전진을 하려면 어쨌든 내 앞에 열리는 문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는 겁니다.
장중경 의원은 표준호 대표의 기자회견 직후 반박 입장을 밝혔습니다.
장중경 의원도 자신의 앞에 어떤 문이 열릴 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무책임해 보일 지 모르지만 저는 지금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요. 오늘은 그냥 순간을 벗어나서 쉬려고 합니다.
의혹만 더욱 커질 수 있습니다. 시장님만 궁지에 몰릴 수도 있습니다.
주 기자의 말대로 진실은 때가 되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것입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 때 국민들이 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오. 그 것이 내게 불편한 것이든 유리한 것이든.
시장님이 바라는 대로 되기를 바라겠습니다. 시장님의 진실이 무엇이든 말입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제가 청사를 좀 벗어나도 되겠습니까?
주승우는 민 시장을 태운 아반떼 업무용 차량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29번 기둥에 서있었다.

4장: 미스터H (1/5)...대방동 중절모

# 주승우가 민영우 시장을 대면한 날 밤 광화문 썸머셋 레지던스 맞은편 테라로사 커피숍. 이테라를 기다리는 주승우. 눈을 감고 있다. 끝자락 여름 밤. 창 밖엔 귀가를 서두르는 광화문 통근족들의 총총한 발걸음. 지상으로 올라온 세단들의 붉은 꼬리가 검은 밤 속에서 상모 돌리기를 하는 듯 하다. 때아닌 재즈풍 크리스마스 캐롤이 유리창에 부딪혀 바닥에 떨어진다. 커피숍 안의 풍경이 더욱 한가롭게 느껴진다. 주승우의 볼이 유리벽에 쩍 달라붙어 있다. 창에 밴 에어컨 냉기가 발끝까지 번진다. 늦여름 밤의 크리스마스 이브. 눈을 뜬다. 얼굴 앞에 느껴진 인기척. 주승우의 눈동자에 꽉 들어차는 이테라의 얼굴.

여러번 인기척을 했는데. 놀랐다면 쏘리. 이마가 부딪힐 거리에 이테라가 있다.
오셨어요? 제가 잠시... 캐롤에 맞춰졌던 주파수가 눈앞의 이테라에게 모아진다.
후훗. 주승우 쪽으로 숙였던 허리를 펴며 맞은 편에 앉는 이테라. 둘 사이를 썰매처럼 지나는 캐롤.
바쁜 하루였으니까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주승우를 병원으로 싣고 달려간 게 불과 24시간 전이었다.
수동 손목시계인데요. 뜬금 없는 주승우. 시계의 초침이 1초에 몇번 진동하는 지 아십니까?
글쎄요. 왠지모를 호기심에 주승우의 손목을 향하는 이테라의 시선.
열번입니다. 1분이면 6백번, 한 시간에 3만6천번 진동을 하는 셈이죠. 아버지의 결혼 시계인데, 30년이 넘었습니다. 그 사이 이 시계의 초침은 몇번이나 진동을 했을까요.
갈수록 알 수 없는 말. 표정은 어느 때보다 진지하다. 표정없는 얼굴에 이테라는 가상을 그렸다.
재미없죠?
네. 이테라는 마음속에서 그렇게 답했다. 지금은 조금 화가난 표정. 또 한번 가상의 표정을 그린다.
어떻게 1초에 10번이나 진동하는 기계가 30년간 고장없이 작동을 하는 지 신기했어요. 마치 비밀의 문 앞에 선 신밧드처럼.
생각보다 한가하신가봐요. 이테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느 순간 비밀을 알게 됐습니다.
정말요? 궁금했다.
표정이 환해졌다. 이테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테엽이에요.
테엽?
열쇄는 바로 테엽이었습니다.
재미없어요. 이테라는 그렇게 말해버렸다.
이렇게 테엽을 끝까지 감으면 하루 정도를 가는데요. 아랑곳 않는 주승우.
네. 결국 포기하고 끝까지 듣기로.
테엽이 다 풀리면 다시 감아줘야 해요.
네. 영혼없는 추임새. 당연한 거 아닌가. 그렇게 생각했다.
가끔은 깜박하고 테엽 감는 걸 잊을 때가 있어요.
네. 박자를 탄다.
그 순간이 시계가 쉬는 시간이에요. 팽팽했던 테엽을 완벽하게 풀고서.
지금. 자신이 긴장을 풀고 쉬고 있다는 얘기를 하는 건 아니겠죠? 설마.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가상 속에서 그려지는 익살스런 스마일 마크.
... 할 말을 잃은 이테라.
제가 실없죠?
없는 게 그 뿐인가요. 그런데 왠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처음으로 일 외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피아노 곡이 둘 사이에 흐른다. 슬로 비디오처럼 지나가는 붉은 꼬리들의 상모 춤.
한 두곡의 연주가 더 지나갔다. 꼬리의 수가 줄었다.
어제 그쪽이 부탁하셨던 거. 테블릿PC를 꺼내는 이테라.
벌써 확인 됐나요?
네.
역시.
문제가 있어요.
문제?
클루(CLUE) 정보는 알려드릴 수가 없어요.
클루요?
경찰청 인공지능이에요. 전국의 CCTV를 분석해서 범죄 현장에서 찍힌 인물들의 동선 패턴을 파악하는 프로그램이죠. 주신 영상속의 인물을 입력하면 일정 기간 일정 공간에서 그 사람이 찍힌 CCTV 영상을 모두 찾아 동선의 맵을 분석해주는 거에요.
대단한데요.
문제는 이 정보를 그쪽에 줄 수 없다는 거에요.
역시 대단하군요.
포기가 빠르시군요.
포기 안했는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외부에 유출이 되면 그쪽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 거. 반납해야 해요. ID카드를 테이블 위에 놓는 이테라.
역시 대단하군요.
저는 이 결과를 절대 그쪽에 보여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저도 절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죄송한데 잠깐 화장실좀 다녀올께요.
생리현상인데 얼른 다녀오셔야겠네요.
파일 이름은 그쪽이에요.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절대 테블릿 PC를 몰래 켜거나 파일을 열어보시면 안되요.
당연하죠.
특히 파일을 복사하시거나 전송하시면 안됩니다. 경찰청에 곧바로 데이터가 전송이 되니까요. 파일 패스워드는 이 ID카드 일련번호의 끝 네 자리 수에요. 입력 번호가 틀리면 그 또한 곧바로 경찰청에 전송이 되요.
조심해야겠군요.
제가 변비라 시간이 좀 걸릴꺼에요.
굳이...
10여분 뒤 자리로 돌와온 이테라. 주승우는 왠지 깊은 근심에 얼굴이 눌렸다. 클루의 분석 정보는 세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레지던스를 침입한 괴한과 김태송, 그리고 정체 불명의 한 남자.
태송이가 여기 왜.
김태송. 아시는 분이세요?
대학 은사 소개로 올해 초에 만난 중국 외교관이에요. 중국 대사관 보도자료나 공문, 특히 대사와 관련된 것들의 한글 번역본에 대해 감수할 사람을 찾는다며 찾아왔었죠.
친한 사이였나보군요. 레지던스에 수시로 드나든 걸 보면.
레지던스 비밀번호를 알고 있으니까요. 잘 통하는 면이 있어 형동생하며 지냈죠. 한국에 온지 얼마 안돼 제게 의지하는 면도 있었구요.
석연치 않은 점이 많아요. 괴한이 레지던스에 침입한 시간 김태송도 레지던스 주변에 있었습니다. 지정선 위원장이 살해당한 날 밤에 그도 ST공사 빌딩에 있었어요.
레지던스야 수시로 드나드니까요. 그런데 태송이가 왜 공사에.
그 건 클루 분석 결과만으로는 알 수 없어요. 그가 단지 공사 사옥에 있었다는 것 밖에는.
태송이에겐 지금이라도 전화 걸어서 확인할 수가 있어요.
안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아무것도 단정할 수 없지만. 그쪽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것 같습니다.
의도적이라구요?
국정원에 김태송에 관한 정보협조를 요청한 상황이에요. 클루가 파악한 동선 분석에서 이상한 점이 있어요.
수상한 점요?
김태송이 수시로 드나든 대방동의 한 중화요리집이 있어요.
조선족이지만 그도 중국인이니까요.
중국사람이 중화요리집에 드나드는 게 이상할 건 없죠. 그런데 그가 들른 시간이면 여지 없이 그 곳에 있는 한 남자가 있어요.
누구죠?
파악이 안되요. 항상 중절모와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정체 불명의 남자와 수시로 대방동 중화요리집에서 접촉을 했다는 거군요.
외교관들이 자국 정보국 요원들과 접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긴 한데.
그렇겠죠.
정상적으로 입국한 중국쪽 외교관이나 국가안전부 소속 요원들은 저희가 대부분 정보를 갖고 있어요. 그 중 한명이라면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클루가 매칭이 되는 인물을 유추할 수 있거든요.
우리쪽에 정보가 없는 인물이란 얘기군요.
김태송에 대해 아시는 게 있으세요?
이중화 교수라고 대학 지도교수님이에요. 중국 베이징 대학에 교환교수로 가셨을 때 만났던 중국인 교수의 아들이라고 들었습니다.
이 교수님은 김태송에 대해 좀더 많은 것을 알고 계시겠군요.
아마도.
국정원 정보를 받을 때까지 김태송에게는 모르는 척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에게 해를 끼칠 친구는 아니에요.
저도 그랬으면 좋겠어요. 기자에게 촉이 있듯 경찰에게도 감이란 게 있어요. 느낌이 안좋아서 그래요. 이테라의 말이 어느때보다 단호하다.
알겠습니다. 그쪽의 말대로 일단 하죠.
레지던스에 침입했던 건 역시 장중경 의원쪽 사람이었군요.
차지수. 26세. 차지창 서울중차그룹과 금성PSD 사장의 혼외자에요. 특수 폭력 전과 3범. 초등학교 때까지 강원도의 한 고아원에서 자랐고.
금성PSD가 장중경의 손아귀에 있을 꺼라는 짐작이 맞았군요.
차지창은 장경주 차장검사의 서울외고 동기동창이다. 수재에다가 만능 스포츠맨이어서 고교 시절엔 꽤나 유명세를 탔었다. 건설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가 나면서 인생이 삼천포로 빠졌다. 좋은 머리와 타고난 운동신경은 그에게 사기와 폭력 전과범이란 멍애를 씌웠다. 그렇게 나락으로 빠졌던 그의 손을 잡아준 게 바로 장중경 의원이다. 고교시절부터 집에 드나들 던 차지창을 지켜봐온 장중경은 갯벌 속 진주를 꺼내 정치판의 끈으로 엮었다.
그가 제일 많이 찍힌 곳도 ST공사 주변이에요. 지정선 위원장 살해사건 당일에도 용답역 CCTV에 찍혔습니다.
지정선 살인사건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을 놓고 조사중이에요. 용답역 CCTV에 찍힌 이후 주변 CCTV엔 단 한번도 찍히지 않았다는 점이 오히려 더 수상해요. ST공사 주변에서 수시로 찍혔었는데 지정선 위원장 살해사건 당일엔 오히려 의도적으로 CCTV 사각지대만 골라 움직였다는 얘기니까요.
레지던스 무단침입으로 일단 체포를 하면 되겠군요.
이미 영장 청구했어요. 거주지는 일정치 않은 듯 한데. 역삼역 인근 빌라에 자주 드나들었어요. 갸스통이란 인근 룸싸롱 여종업원이 거주하는 곳이에요. 동거녀로 추정하고 있어요.
마지막 제3의 남자. 누구일까요
최근 한달간 레지던스와 ST공사 주변에서 공통적으로 찍힌 인물들 중 그쪽을 빼면 김태송과 차지수, 그리고 그 남자 총 세 명이에요.
정체불명의 남자가 제 주변을 맴돈다는 얘기인가요?
타깃이 그쪽인 지는 알 수 없어요. 다만 대방동 중절모를 쓴 남자와 용답동 검은색 불루종을 입은 남자가 대한민국에 있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란 점은 확실해요.
그 순간 울리는 주승우의 핸드폰.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대답이 없다.
여보세요.
역시 대답이 없다. 정적을 뚫고들어오는 떨리는 숨소리. 왠지 끊어서는 안될 것 같다. 또 다른 정적이 흐른다.
주승우 기자시죠? 숨소리에서 이어지는 떨리는 목소리.
네. 주승우입니다. 말씀하세요. 허리를 곧게 펴고 자리를 고쳐잡는 주승우.
저는...강...태우...라고 합니다.
강태우요?...ST공사 강태우 사장님?
네. 강태...우 사장이라고 합니다. 주 기자님. 지금... 만날 수 있겠습니까...?

4장: 미스터H (2-1/5)...라이온의 배꼽

떨리는 목소리는 긴박함을 의미했다. 주승우는 핸드폰을 스피커 모드로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테라에 대한 동료애같은 것이었다.
바로 가겠습니다. 어디에서 뵐까요.
기자님 블로그를 봤습니다. 시계 마니아시더군요. 한가하게 시계 얘기 할 상황은 아니다. 주승우만이 아는 암호같은 것이었다. 장중경 일당의 도청 같은 것에 대한 대비일 것이다. 치밀한 강태우 사장의 성격을 대변하는 순간이다. 실제 위협이 그를 드리우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관심이 있는 편입니다. 무심한 듯한 답변.
저는 그랜드세이코를 좋아합니다. 그 중에서도 복각 모델들. 오리지널 빈티지도 좋구요.
취향이 같으시군요. 답변은 최대한 짧게 했다. 말꼬리가 길어지면 단서를 남긴다.
드래곤볼들 중 맏형을 아시겠군요.
물론입니다.
그 번호를 타고 종점으로 오세요.
알겠습니다.
두시간 뒤에 뵙는 것으로 하죠. 종점에서 내리시면 맞은 편에 커다란 과일이 하나 있습니다. 그 곳 어딘가에 맏형의 배꼽 모양을 한 동상이 하나 있을겁니다.
네.
주 기자님. 다급한 목소리다.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는 손처럼.
네. 말씀하십시오.
제 아들 녀석도 복각 모델들을 좋아합니다. 혹시 만나게 되시면 시계 얘기를 같이 하면 좋을 듯 합니다.
네.
그럼. 전화를 끊는 강태우 사장.
묵묵히 두 사람의 통화를 듣고 있던 이테라. 지금 가보셔야겠죠? 시계는 두 사람만이 아는 암호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잠시만요. 네이버앱을 여는 주승우. 3180번 버스 종점을 검색한다. 분당 오리역이 시종착지인 광역버스다.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하고 광화문역에서 오리역까지 소요시간을 찾아본다. 3년 전 사고 이후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것은 그 어떤 것도 타지 못하는 주승우. 1시간8분. 왕십리역에서의 환승시간과 걷는 시간을 감안하면 얼추 두 시간이면 넉넉하다.
저도 같이 가겠어요. 남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이테라.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호랑이가 먹이를 물 때.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나요? 지금이 그 때 아닌가요? 이테라의 시선이 주승우를 밀어부친다. 제가 같이 가는 게 도움이 될꺼에요. 제가 경찰대학 최초의 수석 입졸업생인 거 알고있죠? 입꼬리가 올라간다.
이젠 당신이 위험한 게 싫습니다. 이테라의 시선을 밀어내며 주승우는 이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차마 뱉지는 못했다. 그럼 같이 가주시겠습니까? 주승우는 이테라와 위험한 순간을 이겨내기로 했다.
두 분의 대화. 우리말인데 무슨 말인지는 하나도 모르겠어요.
가면서 설명을 드리죠. 노트북 가방을 집어드는 주승우. 그런데 차 갖고 오신 거 아니었어요?
걸어다녀요 요즘. 운동을 게을리했더니 배가 나오는 것 같아서. 이테라는 오센틱 아메리카노를 주문하면서 주차권을 챙겼었다.
그럼 나가시죠. 주승우는 커피숍 바닥에 깔리는 재즈풍 곡들 사이로 늘어뜨렸던 긴장감을 다시 잡아당겼다. 커피숍 문 밖 늦여름밤 더운 공기가 찬 볼에 닿는다.
두 사람의 총총한 발걸음은 금방 KT본사 사옥 앞 5호선 지하철 광화문 역 2번 출구 계단 앞에 닿았다. 시계를 보며 발걸음을 재촉하는 주승우. 한참 계단을 내려가다 뒤를 돌아본다. 이테라의 발걸음 소리가 따라오지 않는다. 계단 초입에서 난간을 붙들고 있는 이테라.
안 내려오고 뭐해요? 재촉하는 주승우.
알았어요. 말은 뗐는데 발은 떨어질 줄 모른다. 벽에 머리를 기댄다. 식은 땀이 목선을 타고 흐른다.
어디 불편해요? 장면을 되감기 한 것 처럼 주승우는 계단을 거슬러 이테라의 옆에 섰다.
제가 가끔씩 귀 밑을 바늘로 찌른 실험실의 개구리같아져요. 후훗.
실험실의 개구리요?
전정기관이라고 아시죠? 후훗. 경찰대학 때 동기놈한테 뒤돌려차기로 한방 맞았거든요. 같은 태권도 4단이었는데. 그 때부터 가끔 이래요. 얼어죽을.
전정기관은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귓 속 감각기관이다. 전정기관을 바늘로 찔러 고장낸 개구리를 기울어진 책받침에 올려놓으면 균형을 잃고 굴러버린다. 주승우는 책받침에서 대굴대굴 구르는 실험실 개구리가 떠올랐다.
잡으시겠어요? 이테라에게 손을 내민다.
아니에요. 혼자 내려갈 수 있어요. 조금 어지러울 뿐이라구요. 계단 난간을 잡고 한걸음을 뗀다. 비틀거린다.
잡아요. 뒤돌려 차기를 한 그 친구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군요. 그쪽 성격에 가만두지 않았을텐데.
아마 결혼하기 힘들꺼에요. 거기를 묵사발로 만들어 놓았으니까요. 후훗. 저 때문에 늦으면 안되니 오늘만 잡을께요. 한발한발 주승우는 이테라의 난간이 돼 계단을 내려간다. 이런 몸상태로 어떻게 경찰대학을 졸업했을까. 주승우는 이테라가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과정을 가늠했다. 계단을 내려가는 것보다 몇배 어려웠으리라.
왕십리행 5호선 열차의 문이 열리고 나서야 주승우와 이테라는 그 때까지 손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짝 손을 빼는 이테라. 열차가 도착했네요.
아 네. 타시죠. 아쉬움을 닫힌 문 앞에 두고 열차가 출발한다. 왕십리까지는 금방입니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다.
이제 암호해독을 좀 해주시겠어요? 두 분의 대화를.
시계 얘기를 좀 해야겠네요. 암호해독엔 난수표가 필요한 법이죠.
또 테엽 얘기는 아니죠? 후훗.
여자에게 시계 얘기는 남자친구의 군대 얘기보다 지루하죠. 좀 길어질 수도 있는데 인내심을 갖고 한번 들어보시겠어요?
뭐 여자들 샤넬 백 얘기도 저에겐 난수표나 마찬가지니까요.
세이코는 100년이 넘은 일본의 시계 브랜드에요. 그 회사가 1961년부터 그랜드세이코라는 고급 브랜드를 생산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론칭한지 얼마안돼 세이코 알바 정도의 저가 브랜드로 알려져 있지만 실은 왠만한 스위스 브랜드도 따라올 수 없는 기술력을 가진 회사죠.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로렉스보다도 윗급으로 치는.
...
재미없죠?
강의는 잘 못하시는 스타일이신가봐요. 후훗. 계속 하세요.
이래봐도 대치동에서는 유명한 논술강사에요. 암호를 제대로 풀려면 기승전결이 필요해요.
저는 속성이 좋은데. 후훗.
그랜드세이코란 브랜드를 달고 나온 수많은 모델중에 시계 역사에 남을 만한 네 가지 모델이 있어요. 그 것을 그세 마니아들은 드래곤볼이라고 불러요. 반드시 소장해야 하는. 네 개의 모델은 리메이크 모델, 즉 복각 모델이 최근 출시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 네 가지 모델이 난수표란 얘기군요.
가끔씩 느끼는 거지만. 그쪽 참 훌륭한 학생이에요. 핵심을 놓치는 법이 없네요.
경찰대학 수석입학을 기부금 내고 한 게 아니에요. 후훗.
GS 퍼스트, 44GS, 57GS, 62GS가 그 네 개의 모델입니다. 그 중 맏형이 최초의 그랜드세이코 모델인 GS 퍼스트에요. 원래 이름은 더 그랜드세이코인데 그랜드세이코 퍼스트로 더 유명하죠.
그 모델의 일련번호 같은 게 3180번 버스와 연관이 있는 거군요.
역시. 기계식 시계의 무브먼트엔 고유번호가 있어요. GS 퍼스트의 무브먼트 고유번호가 바로 3180입니다. 44GS, 57GS, 62GS 앞의 숫자들은 모두 무브먼트 고유번호의 앞 두자리 숫자들이에요. 강태욱 사장은
이 것들을 이용해 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4장: 미스터H (2-2/5)...강태우 사장의 피살

# 분당선 오리역에서 내린 주승우와 이테라는 곧바로 인근 3180번 버스 종점으로 향했다. 차고지는 탄천과 하나로마트 사이에 걸쳐있는 제법 큰 규모였다. 시계 바늘은 저녁 8시45분을 향하고 있었다. 오리역 주변의 번화가에서 떨어진 이면 도로쪽이어서 쇼핑몰과 오피스텔 등에서 나오는 불빛에도 불구하고 주변 분위기는 제법 을씨년스러웠다. 더위에 지친 낙엽이 늦여름 후텁지근한 바람에 무겁게 날린다.

종점 맞은 편에 커다란 과일이라. 주승우는 강태우 사장과의 통화를 되세겼다.
세상에서 제일 큰 사과네요. 후훗. 이테라가 맞은 편 쇼핑몰 네온사인을 가리킨다. 쇼핑몰 이름은 애플 프라자였다.
쇼핑몰은 8층짜리 두 개의 건물로 이뤄진 제법 큰 규모였다. 강태우 사장은 이 곳 어딘가에 맏형 배꼽 모양을 한 동상이 있다고 했다.
저 곳 어딘가에 라이온 형상의 동상이 있을꺼에요.
사자 모양의 동상요?
네. 그랜드세이코는 시계 뒷면에 금으로 된 메달을 붙입니다. 초기엔 시계의 왕이란 의미로 사자 모양의 앰블럼을 붙였어요. 나중엔 이니셜인 GS로 바뀌었구요. 그 것을 배꼽이라고 부릅니다.
동상이면 보통 입구나 광장에 있을꺼에요 건물 사이의 공간이 광장인 듯 해요. 2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돌면 바로 보일 거리였다. 주승우와 이테라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같은 곳을 향했다. 강태우 사장과 약속한 시간과는 10여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왠지 으스스하군요. 짐작대로라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사자상이 보여야 한다. 폐장 시간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주변은 쇼핑몰 광장치고는 어두웠다. 광장으로 이어지는 데크가 두 사람의 걸음에 맞춰 삐그덕 소리를 낸다. 왠지 인기척을 내면 안될 것 같은 이유 모를 불안감.

# 1년 전 소공동 웨스틴조선 호텔 1층 나인스게이트 레스토랑. 창밖엔 파란 가을하늘이 황궁우 팔각 기와지붕을 타고 흘러내린다. 황궁우를 에워싼 소나무와 앞뜰을 뒤덮은 잔디가 쏟아지는 하늘에 놀라 옥빛을 뿜는다. 잠자리 날개짓 사이로 창가 테이블이 클로즈업된다. 마주 보는 선남선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이다. 주변에 앉은 둘의 가족들. 여자의 어머니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시계를 본다. 여자의 아버지가 상견례 자리에 늦은 듯 하다. 그 순간. 1층 회전문을 급하게 통과하는 한 중년 신사. 강태우 ST공사 사장이다.

강태우 사장님이시죠? 걸음을 막아서는 건장한 사내. 왼쪽 눈섭에서 광대뼈까지 가로지르는 칼 자국이 선명하다. 누런색 황금니가 회전문을 뚫고 들어오는 가을 햇살에 번쩍인다.
누구신지. 시계를 보는 강태우 사장.
차지창이라고 하오.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그의 옆에 있던 덩치 두명이 강태우 사장의 양쪽 팔을 잡는다.
이거 왜 이러시오.
5분이면 됩니다. 모셔. 차지창의 지시에 두명의 덩치가 강태우 사장을 엘리베이터로 끌고 간다. 속수무책의 강태우 사장.
잠시후. 강태우 사장은 조선호텔 20층의 한 객실에서 장경주 검사를 마주하고 있다. 테이블 위에 노란 서류봉투를 올리는 장경주.
이 게 뭐요?
보시면 아실꺼에요. 몸을 뒤로 젖힌 채 강태우 사장을 깔아보는 장경주. 입꼬리가 강태우 사장을 비웃는다.
서류봉투를 열어본 강태우 사장. 몇장의 사진을 차례대로 훑어본다. 중년부부와 아들로 보이는 남자. 누가봐도 행복한 세 가족이다. 중년의 남자는 바로 강태우 사장 자신이다.
당신 대체 누구요? 떨리는 강태우 사장의 손. 그 진동 때문인지 목소리도 떨린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 지가 더 중요할 꺼에요. 강 사장님.
오만가지 생각에 넋이 빠진 강태우 사장.
노려보는 장경주. 발톱에 걸린 먹잇감이다. 어차피 끊어질 숨통. 서둘러 목을 물어뜯을 이유가 없다.
내게 사진을 보여줄 때는 거래를 하자는 게 아니오. 고지식하기로 유명한 강태우 사장의 입에서 거래란 말이 나왔다.
덕망있는 공기업 사장님이 어쩌다 두집 살림을. 쯧쯧. 세상이 이런 것을 좀 알아야 해요. 강태우의 두 얼굴 말이에요.
내게 뭘 어쩌란 것이오. 원하는 것을 말하라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복종. 장경주의 송곳니가 강태우 사장의 숨통에 박힌다.
헉.
앞으로 우리의 개가 되란 말이야. 짖으라면 짖고 물라면 물고, 기라면 기는.
숨을 쉬어도 숨이 막힌다. 눈을 떴는데 앞이 보이지 않는다. 털썩. 강 사장은 장경주의 앞에서 주저 앉았다. 만 57년의 세월이 그렇게 무너졌다.

# 주승우와 이테라는 모퉁이를 돌았다. 삐그덕 거리는 데크 소리가 주승우는 계속 거슬렸다. 40~50m 정도 거리 광장 한복판에 사자상이 보인다. 조명을 받은 사장의 얼굴은 호러 영화에 나오는 마스크처럼 괴기스럽다. 사자상 앞 벤치에 앉아 있는 중년 남자. 강태우 사장이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위아래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강 사장에게 다가온다. 담뱃불을 빌리는 것 같다. 담배에 불을 붙인 사내가 두 사람과는 반대편으로 멀어진다. 광장에 비친 조명의 밖으로 그가 사라질 때 쯤 두 사람은 벤치에 다다랐다.

강태우 사장이신가요? 사자의 두 눈이 주승우를 노려본다. 말 없는 중년 남자. 강태우 사장... 주승우가 다시 한번 확인을 하는 중년 남자가 옆으로 쓰러진다. 복부에 꽂힌 칼날이 조명을 받아 번뜩인다. 검붉은 피가 벤치 사이로 뚝뚝 떨어진다.
예상치 않은 사태가 훅하고 두 사람의 뇌리에 들어왔다. 재빨리 강 사장의 맥을 확인하는 이테라. 가느다란 호흡이 느껴진다. 119에 전화하세요. 빨리. 이테라는 주승우에게 강 사장을 맡기고 사라진 남자 쪽으로 내달린다.
40여분 뒤 분당 서울대 병원 응급실. 119 구급차 도착 직후 강태우 사장은 응급실에서 마지막 숨을 몰아쉬었다. 당직 의사의 사망선고 뒤 와이프와 딸이 응급실에 도착했다. 강태우 사장의 창백한 얼굴을 본 미망인은 남편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한다. 어리둥절한 표정이다. 아버지의 복부에 꽂힌 칼을 보고 옆에섰던 딸이 오열한다.
이테라가 쫒아갔을 때 강태우 사장을 찌른 사내는 이미 어둠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쇼핑몰 광장의 곳곳에 CCTV 있었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강태우 사장의 전화 목소리는 어쩌면 사건의 전조였다. CCTV의 존재를 알고도 그랬다면 그만큼 다급했다는 방증이다. 강태우 사장이 주승우를 만나 전달하려던 그 무엇. 그 것이 장중경 일당에게 그만큼 큰 위협이 된다는 의미다.
여보세요? 이테라는 쇼핑몰 주변의 CCTV 분석을 경찰청 클루에 의뢰해 놓은 상태였다. 주승우의 레지던스를 침입한 괴한을 조사할 당시 분석한 데이터와 연관이 있을 것이란 게 이테라의 판단이었다. 네 알겠습니다. 예감은 적중했다.
결과가 나왔나요? 주승우의 생각도 이테라와 같았다.
네. 짐작 대로에요. 범인은 차지창의 아들 지수였다. 결국 장중경 일당의 손에 강태우 사장이 죽임을 당한 것이다. 지수의 노출은 장중경 쪽의 결정적 실수였다.

# 이날 아침. 차이나 게이트를 처음 폭로한 주승우의 기사가 나간 직후 서울 가회동 시장 공관 2층 집무실. 평소 7시면 출근 길에 나서는 민 시장. 이 날은 몸살기로 한 시간 가량 늦게 현관문을 나서다 김현승 대변인의 보고를 받고 신발을 벗었다. 시청 청사 6층 시장실 앞은 이미 2진 기자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집무 책상에 앉아 정원을 내려다 보던 민 시장이 눈을 지긋이 감는다. 민 시장은 강태우 ST공사 사장을 긴급 호출해 놓은 상태다. 1조원 규모의 중국산 지하철 수입 과정에서 페이퍼 컴퍼니와 이면계약이 실재 존재하는 지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온라인으로 기사를 확인하고 청사로 향하던 강 사장은 차머리를 가회동으로 돌렸다. 30분쯤 후 강 사장은 시장 공관 현관의 화강암 계단을 오르고 있다. 발걸음이 무거워 화강암 돌계단을 누르는 소리가 2층 민 시장의 귀에까지 들린다.
시장 부인이 다과상을 놓고 나간 한참 후에도 민 시장과 강 사장은 찻잔을 들지 않았다. 두 사람의 사이엔 한동안 어떤 소리도 끼어들지 않았다. 가을의 문턱에서 흐려진 정원의 녹음이 집무실 통유리를 지나 찻잔속에 잠긴다. 연녹색 녹차의 향기만 둘 사이를 가른다.

침묵은 사실이란 의미겠지요? 녹차 향을 흩어버린 건 민 시장의 음성이다.
고개를 떨군 강 사장은 여전히 말이 없다. 찻잔을 든다. 차를 한 잔 마신다. 그렇게라도 입을 떼려 한다. 하지만 입밖으로 어떤 말도 내보낼 수가 없다. 다시 고개를 떨군다.
강 사장같은 사람이 왜 내게. 어쩌다 그렇게...
못난 놈에게 혼외자가 있습니다. 한참의 침묵이 더 지나가고 그렇게 강 사장은 말을 뗐다.
풍전등화의 위기 상황에서 나온 혼외자 얘기에 민 시장은 울컥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일단 가슴을 쓸어 담았다. 지난 10년간 봐온 강 사장은 누군가를 쉽게 배신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번엔 민 시장이 찻잔을 들었다. 민 시장은 그렇게 자신의 입밖으로 나올 실수를 눌렀다.
가난한 고시생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검사가 되고 결혼까지 생각을 했었습니다. 이미 아들까지 있었습니다. 강 사장은 어렵게 입을 뗐다.
스토리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민 시장은 또 한번 화가 치밀었다. 그래서요. 다시 찻잔을 잡았다.
신문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유명 검사가 되고 나니 재벌이 손을 내밀었습니다. 거부할 수 없는 유혹이었습니다. 7명 동생들이 저만 바라고보 있을 때였으니까요. 결국 영혼을 팔았습니다. 그렇게 여자와 혈육을 버렸습니다.
막장 스토리다. 10년 전 국내 최대 유기농 전문 식품회사인 청원의 최고경영자로 민 시장은 강 사장을 처음 만났다. 검찰 재임 시절 대구지검 근무 이력이란 공통점이 두 사람을 잇는 끈이 됐다. 창녕 고향 후배란 점이 인연의 접착력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강 사장 초임 검사 시절인 80년대 후반은 정권 차원에서 범죄와의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대구는 물론 경북지역 전체를 장악하고 있던 북두파를 소탕하면서 강 사장은 일약 유명인사로 떠올랐다. 유명세는 가난했던 한 청년 검사를 재벌가의 사위로 만들었다.
청원의 설립자인 고 최제경 회장은 개성 출신으로 1.4후퇴 때 피난길에 올라 불혹의 나이 양평에 터를 잡았다. 이북 출신 피난민들을 규합해 당시 최 회장이 만든 농장이 바로 청원그룹의 전신이다. 10명의 자식을 둔 최 회장은 청원농장이 문을 연 1년 뒤 불혹이 넘은 나이에 늦둥이로 막내딸을 얻었다. 그렇게 얻은 딸이 훗날 결혼을 하면서 최 회장은 유명 청년 검사를 사위로 맞았다.
청년 강태우의 됨됨이를 지켜본 최 회장은 딸이 백년가약을 맺고 2년 뒤 청원의 사장실 자리를 사위에게 내줬다. 6명 아들들의 강력한 반대속에서도 최 회장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농장 설립초기부터 묵묵히 농사일을 도와온 아들들이었지만 단지 혈육이란 이유로 피땀흘려 키운 청원을 맡길 수는 없었다. 법복을 벗은 강 사장은 20여년 만에 청원을 연매출 2조원대의 탄탄한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2013년 최 회장이 10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냉혹한 현실이 머리를 내밀었다. 최 회장은 청원의 지분을 11명의 자식과 그동안 경영을 맡아온 강 사장에게 12등분해 똑같이 상속했다. 여섯 형제가 규합해 강 사장을 경영권에서 밀어낼 것이라고는 최 회장도 미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경영권을 둘러싼 법정 공방은 2년 동안 지리하게 이어졌고 청춘을 송두리 째 바친 회사에서 강 사장은 그렇게 쫒겨나듯 나왔다.
그 손을 민 시장이 잡았다. 민 시장은 2015년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고 이후 지하철 안전사고가 잇따르자 경영쇄신의 적임자로 강 사장을 영입했다.
직원수 1만5천명의 공기업 사장으로 재기한 강 사장에게 혼외 가족은 언제 터질 지 모를 폭탄이었다.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재벌가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했지만 강 사장은 훗날 분당 모처에 아파트 한채를 장만해 첫사랑과 아들을 들였다.
폭탄의 안전핀을 장중경이 잡게 된 건 우연이 아니었다. 중국산 지하철 수입을 위해 민영우 시장을 속여야 했던 장중경은 강태우 사장의 아킬레스건을 찾았다. 장중경의 하수인 차지창이 강 사장의 목 줄을 틀어쥐는 데는 그리 오랜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은 민영우 시장은 식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강태우 사장의 눈시울은 더운 눈물에 젖었다. 민 시장은 손수건을 강 사장의 손에 쥐어주었다.
죄송합니다. 참회는 언제나 한발 늦는 법이다.
민 시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강 사장의 입장이면 어떻게 했을 지 생각했다. 민 시장을 동정했다. 하지만 의미없는 짓이었다. 공관 밖은 언제 물어뜯길 지 모를 정글이다. 동료애는 날카로운 이빨을 막을 방패가 되지는 못한다.
모든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시장님은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제가 밝힐 것입니다. 처음엔 딸을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라고 강 사장은 생각했다. 자신의 두집살림이 알려지면 딸의 결혼이 깨질 것이란 사실이 장중경의 손을 잡은 이유라고 자위했다. 벼랑끝에 서고 보니 모든 선택은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검사가 되기까지 자신을 위해 헌신했던 첫사랑과 아들을 버린 것도, 그 사실을 감추기 위해 장중경의 개가 된 것도 결국 이기심 때문이었다.
민영우 시장은 눈을 감았다. 강 사장의 뒤 늦은 선택이 현실적으로 지금의 상황을 돌파하는 데 도움이 될 지가 관건이었다. 강 사장의 증언으로는 부족하다. 사람들은 쉽게 믿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사건이 터지면 꼬리를 잘라낸 몸통은 조작된 진실의 그늘로 숨는 게 다반사니까. 일반에게 자신은 게이트의 주인공이자 꼬리를 잘라낸 몸통이었다.
녹취록이 있습니다. 강 사장의 말에 민 시장은 눈을 떴다.
녹취록이라구요?
이번 사건이 시장님과는 무관하다는, 장중경 부자의 모의란 증거입니다. 그 것이 세상에 공개되면 시장님은 무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자욱한 안개가 일시에 걷히는 것 같았다. 강 사장의 비장한 얼굴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이제 그 파일을 언제 어떻게 공개할 지만 결정하면 되는 것이다. 위기가 고개를 숙이자 기회가 미소를 보냈다.
주승우의 기사가 나가고 민 시장이 강 사장과 대면하는 사이 유력 언론들의 잇따라 차이나 게이트 의혹에 대한 보도를 쏟아냈다. 그리고 잠시후 민 시장은 고개 숙인 강 사장의 앞에서 표준호 자유한국당 대표가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연다는 김현승 대변인의 보고 전화를 받았다.
당장 녹취파일을 언론에 공개하겠습니다. 다급한 김 대변인의 목소리는 마주 앉은 강 사장의 귀에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서두르실 것 없습니다. 민 시장의 시선은 통유리 너머에 닿아 있었다. 잠자리들의 날개짓에, 새들의 지저귐에 진실이 변하지는 않을테니까요. 극적인 반전. 민 시장은 방아쇠를 언제 당겨야 할 지를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 민영우 시장이 강태우사장을 만나고 있을 시간. 한남동 유엔빌리지 내 장중경 의원의 저택으로 아들 장경주 검사와 금성PSD 차지창 사장의 EQ900 세단이 미끌어져 들어왔다. 주차장에서 안채로 들어가는 정원은 일류 골프장 그린보다 매끄럽게 다음어진 잔디가 양탄자처럼 깔려 있다. 윤기가 흐르는 적송들의 하늘을 찌를 듯한 도열. 장중경의 위세를 상징하는 듯 하다. 방문객은 장중경과 대면하기도 전에 저택의 위세에 먼저 짓눌린다. 장중경의 시선은 창 밖의 한강물을 따라 흐른다. 70을 훌쩍 넘은 나이지만 다부진 채격과 날카로운 눈매에선 선이 살아 꿈틀댄다.

정도한 이 개새끼. 그러니까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니까. 현관을 들어서는 장경주. 신을 벗어던지며 정도한에 대한 욕지거리를 쏟아낸다.
쯧쯧. 집안 단속도 제대로 못한 놈이 누구 탓을 하는 게냐. 돌아서서 소파에 앉는 장중경. 뒷짐진 손에 쥐고 있던 부챗살을 편다. 맹호도의 매서운 눈이 장경주를 노려본다.
걱정 마세요. 제 선에서 해결할께요.
건방진 놈. 네깟놈이 뭘 어쩌겠다는 거냐. 아들을 노려보는 장중경의 눈매가 매섭다.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는 장경주. 맹호도의 눈과 마주친다.
사람들은 민영우가 한 줄 알꺼에요. 민영우가 청와대 열쇄에 눈이 멀어서 중국과 굴욕적인 경협을 했다고 생각할 꺼라구요. 강태우는 민영우가 시키는 대로 한 꼭두각시고. 이런 그림으로 마무리를 해야죠.
어리석은 놈. 언론과 야당은 뒷짐만 지고 있다더냐. 곧 관련 보도들이 쏟아질 게다. 대한일보에서 이미 기사가 떴고. 표준호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야. 결국 펜끝과 표준호의 칼날이 우리쪽을 겨눌꺼야. 민영우야 어차피 끝난 거고.
아버지. 나이 드시더니 겁이 많아지신 거 아니에요? 누가 봐도 민영우죠. 우리야 개연성일 뿐이지 증거가 없으면 뭐로 엮을 꺼에요. 지창이가 내 친구라는 게 알려진다한 들 그게 뭐 어쨌다는 거에요. 그냥 인사 청탁 정도로 마무리하면 된다구요.
회장님. 검사님 말씀이 맞습니다. 제 선에서 문을 닫을 것입니다. 그 무엇도 그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할테니 염려 마십시오. 장경주 검사 옆에 앉은 차지창이 나섰다. 자신이 꼬리가 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르라는 말이다. 이미 짜여진 각본이고 기다렸던 말이다.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니 모양새도 좋아졌다. 장중경의 입꼬리가 올라간다. 눈가에 패인 주름이 도드라진다.
강태우 쪽은 문제가 없는거냐. 차지창 쪽 문을 닫았으니 강태우쪽만 단속을 하면 되는 것이다.
그 작자는 걱정하지 마세요.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에요 뭘 어쩔 수 있는 놈도 아니고.
네 놈은 아직 사람 볼 줄 몰라. 그러니 정도한 같은 쥐새끼에게 당하지. 쯧쯧.
정도한 얘기가 나오자 장경주의 얼굴이 찌그러진다.
강태우가 우리에게 고개를 숙인 게 충성이 아니다. 약점 때문에 굴복한 것 뿐이지.
강태우는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차지창이다.
정도한은 처리한거냐.
네. 성매수 사건으로 내사 착수키셨으니 곧 옷벗을꺼에요. 이 장경주 눈에 난 이상 이 바닥에선 한동안 변호사 개업도 못할겁니다. 적당한 때 제거해 버려야죠. 지금은 보는 눈들이 있으니.
강태우는 지금 민영우를 만나고 있을겁니다. 기사가 나간뒤 곧바로 시청으로 간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민영우가 중간에 가회동 공관으로 부른 모양입니다. 그쪽으로 들어가는 거 확인했습니다. 차지창은 강태우 사장의 비서와 운전기사까지 매수했다.
민영우가 변수다.
뭘 어쩔 수 있겠습니까.
만만한 인사가 아니야.
제 손에 피 안묻힐 인물입니다. 민영우도 강태우 선에서 매듭지으려고할 꺼에요.
강태우가 민영우에게 입을 열꺼야. 그러지 않으면 사안을 납득시킬 방법이 없을테니. 민영우도 이미 사실을 알고 있을꺼다.
민영우가 알고 모르고는 중요치 않아요. 대중이 그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죠. 장경주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민영우가 몰랐다면 개도 안믿을꺼에요. 알아도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구요.
확실하게 해둬라. 만사 확실한 게 좋다. 세월만한 선생이 있을까. 해방둥이로 태어나 대한민국 근대사와 함께 산전수전을 다 겪은 장중경이다. 장중경은 왠지 민영우와 강태우에게 계속 신경이 쓰였다. 삶의 7부 능선을 넘은 장중경에겐 장경주와 차지창에게는 없는 직감이란 게 있었다.
알았어요.
언론도 손을 쓸 때가 됐다. 우리쪽 매체는 내가 손을 써놓았지만 보수 매체들은 물만난 고기처럼 달려들께다. 후속 보도는 막아야 한다.
대한일보 구악들 몇몇 까발리죠. 구린 데가 많아서 움찔 할 겁니다. 한 회장 일가들도 워낙 계집질을 좋아해서... 흐흐.
일단 운을 떼보아라.
네?
오너는 건드리지 말란 얘기다. 궁지에 몰리면 쥐도 고양이를 무는 법이다.
팔다리 몇개 자르고, 목에 칼을 들이 대는 선에서 각본을 짜보겠습니다.
언제든 벨 수 있다는 건 분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안그러면 역공을 당할 수 있다. 전쟁은 피차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오태호 주필 파일부터 일단 공개하겠습니다. 이럴 때 쓰려고 아껴둔 거 아닙니까.
베트남 호화 섹스파티가 공개되면 대한일보도 한발 물러설 수 밖에 없을게야.
그래도 대한일보인데 순순히 포문을 닫지는 않을 겁니다. 임지연 자살사건도 먼지 더 쌓이기 전에 한번 더 우려먹어야죠.
그건 신중해야 한다. 상황을 봐서 다시 얘기하자. 주승우는 어떻게할꺼냐.
이제 손을 써야할 것 같습니다. 주승우가 온라인에서는 유명세가 있다지만 아직 오피니언 리더들에게는 마이너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대한일보가 주승우 기사를 앞으로 계속 받게 된다면 문제가 다릅니다.
지창이 지난번 데려온 아이 말이야. 장경주 쪽으로 숙였던 고개를 들어 장중경은 차지창에게 시선을 보낸다.
네. 회장님. 지수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아이 이름이 지수였나?
네.
그 아이. 눈 빛 좋더구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지수를 언급한 건 사실상 살해 지시였다.
그래. 나무가 크면 뽑기가 어려운 법이야. 위험한 건 싹부터 잘라버려야 해.
네. 회장님. 받들겠습니다.

4장: 미스터H (2-3/5)...속죄

# 민영우 시장을 만나고 온 강태우 사장은 삼성동 자택 서재에서 마지막 순간을 준비했다. 자신을 믿어준 민영우 시장에 대한 속죄 의식 같은 것이었다. 출세를 위해 버렸던 첫사랑과 그로 인해 혼외자로 키워야 했던 아들에 대한 죄를 씻는 것이기도 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아내에겐 또 한 번 죄를 짓는 일이었다. 사랑스러운 딸에게 특히 미안했다. 아이를 가진 딸에게 충격으로 혹시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걱정됐다.
서랍에서 파커 만년필을 꺼냈다. 검사 임용장을 받는 날 첫사랑이 선물한 것이다. 첫사랑은 평범한 만년필 하나를 건네며 정의로운 검사가 되라고 했다. 부정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 때 이 만년필을 꺼내라고, 자신과 아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라고 했다.
청원의 사위가 되기로 결심한 순간 강 사장은 만년필을 꺼냈다. 첫사랑과 아들의 모습을 지우며 강 사장은 이를 악물었다.
혼인서약을 한 이후 강 사장은 단 한번도 만년필을 꺼내지 않았다. 차마 버리지 못한 만년필을 서랍에 무심히 처박았다.
만년필 뚜껑을 열었다. 청년 강태우가 알라딘의 램프에서 튀어나온 지니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꿈으로 빛나는 눈동자와 의지로 가득한 입매. 강 사장은 청년 강태우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아련히 닿을 듯한 얼굴이 연기처럼 흩어지고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다. 재벌가 사위란 허울만이 늘어졌다. 서글펐다. 눈물이 뚝뚝 흘러 노트를 적셨다.
만년필을 눌러 써본다. 잉크가 말라 종이를 가른다. 만년필을 돌려 튜브를 눌러본다. 굳은 고무에서 피식하고 바람 새는 소리가 난다. 펜촉을 담가 잉크를 묻힌다. 짙은 감색 잉크가 수십년간 말라 비틀어진 펜촉을 타고 흐른다.
유석에게. 강 사장은 맨처음 아들의 이름을 썼다. 혼외자로 키운 아들은 힘든 세월을 견디고 아버지처럼 법조인이 됐다. 아들이 판사복을 처음 입던 날 강 사장은 백화점에 아들손을 잡고 갔다. 최고급 감색 양복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를 사 주었다. 구두끈 매듭을 손수 묶어주면서 강 사장은 아들이 정의로운 판사가 되기를 바랐다.
첫사랑의 이름을 썼다. 펜끝을 꼮꼭 눌러 한자한자 속죄의 마음을 노트에 팠다.
청원 오너가의 막내 딸로 남부러울 것이 없이 살아온 아내의 이름을 쓰는 순간. 펜 끝이 종이에 걸려 미끌어졌다. 결혼 생활 내내 숨기고 살아온 여인과 아들의 존재를 고백하는 대목에선 묵직한 돌 하나가 심장에 걸려 미끌어지는 듯 했다. 강 사장은 첫사랑과 아들의 이름, 사는 곳 등을 비교적 상세히 적었다. 남은 사람들이 곧 자신으로 인해 만나게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딸에겐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한다고 썼다.
강 사장은 네 통의 편지를 각기 다른 봉투에 담아 풀을 붙였다. 그리고 봉투의 앞면에 네 사람의 이름을 순서대로 쓰고 책상의 한 가운데 나란히 올려 놓았다.
만년필 뚜껑을 닫았다.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본다. 청년 강태우와 다시 마주한다. 청년은 그에게 미소를 보낸다. 그도 미소로 답한다.
강 사장은 샤워를 했다. 몸 구석구석을 깨끗이 닦았다. 잘 못 내딛은 발걸음을 돌이킬 수 없어 그 길로 억겁의 걸음을 걸었다. 다시 돌아갈 수 없지만 마지막 한 걸음은 다른 길의 입구로 향하는 것이기를 바랐다. 온몸을 타고 흘러 바닥으로 떨어지는 거품들 속에 인생의 과오가 모두 씼겨지는 기분이었다. 하얀 가운을 입고 욕실문을 나설 때 강 사장은 한없이 홀가분했다.
핸드폰 벨이 울린다. 아내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내는 대학 동창들과 골프를 치고 저녁을먹고 들어온다고 했다. 아내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건 천만다행이었다. 강 사장은 딸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을 참았다. 딸이 죽음을 예감한 아빠의 목소리를 평생 기억한다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양복 웃옷 속주머니에서 홍보실장에게 받아놓은 메모를 꺼냈다. 주승우의 전화번호였다. 숫자를 누르는 손가락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들어갔다. 몇번 울리는 신호음.
여보세요.
굳게 먹은 마음이 흔들렸다.
여보세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적이 꼬리를 물고 지나가는 사이에도 주승우는 왠지 전화를 끊지 않았다.
주승우 기자시죠?

4장: 미스터H(2-4/5)...44, 57, 62

주승우와 통화를 마친 강 사장은 옷장에서 감색 수트 한벌을 꺼냈다. 판사 임용을 받은 아들에게 수트 한벌을 사주면서 강 사장은 자신의 것으로 똑같은 수트를 샀었다. 잘 다려진 흰색 와이셔츠를 입고 딸이 사준 회색 넥타이를 맸다. 플래티늄 넥타이핀을 서랍에서 꺼냈다. 평상시엔 잘 안하던 악세서리다. 차이나게이트의 주범이 장중경이란 증거가될 음성파일이 담긴 USB를 양복 속주머니에 챙겼다. 책상 의자에 앉는다. 오디오를 튼다. 볼륨을 최대한 낮추고 눈을 감는다.
시계를 본다. 주승우와 통화를 마친 지 한 시간 가량이 흘렀다. 자신이 주승우를 만난다는 걸 장중경 쪽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24시간 감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한 시간이면 장중경 쪽에서 자신을 쫒을 준비를 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키를 챙겨 서재를 나선다. 25층 거실에서 내려다 보이는 한강이 황혼에 물들어 붉다. 불같다는 생각을 했다. 엘리베이터가 빠른 속도로 내려간다. 명품 감색 수트에 플래티늄 타이핀을 한 한 신사가 엘리베이터 문에 비친다.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신사. 차문을 연다. 이 제 곧 이승의 문은 닫힌다.
삼성동 아이파크 지하주차장을 미끌어져 올라오는 EQ900 세단. 백미러에 검은 바이크 한대가 들어온다. 일정한 거리를 두지만 검정 가죽 점퍼를 입은 사내는 분명 강태우 사장을 쫒고 있다. 서쪽으로 기우는 해가 헬멧에 부딪혀 튕긴다. 바이크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꼬리를 그린다. 꼬리를 단 헬멧을 날카로운 눈빛이 뚫는다. 지수의 시선은 EQ900의 넘퍼판을 붙잡고 있다. 강 사장은 속도를 조절하며 바이크를 일정한 거리 안에 둔다. 고개를 갸웃하는 지수. 쫒고 있는 자신이 끌려가는 느낌이다. 강 사장의 세단이 삼성역 사거리에 멈춰선다. 마이바흐 한 대를 사이에 두고 지수는 강 사장의 뒤에 붙었다. 헬멧을 벗은 지수의 머리칼이 바람에 날린다. 더 이상 자신의 존재를 숨길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백미러에서 강 사장과 지수의 눈빛이 마주친다. 지수가 묻는다. 지금 뭐하는 것이냐고. 강 사장은 답이 없다.
수서분당간 고속도로를 타고 강 사장과 지수는 40여분을 달렸다. 퇴근길 러시아워에 잠깐씩 멈춰설 때 마다 지수는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강 사장은 여전히 묵묵부답이다. 분당에 들어선 후 10여분 남짓을 직선으로 달려 3180번 차고지 앞에 차가 선다. 30여m를 사이에 두고 지수도 바이크를 세운다. 강 사장이 갓길에 차를 대고 내린다. 지수에게 따라오라고 눈빛을 보낸다. 같은 거리를 두고 지수는 강 사장의 뒤를 걷는다. 애플프라자 광장 벤치가 두 사람의 눈에 들어온다. 문을 닫은 쇼핑몰 광장 인기척이 없어 쓸쓸하다. 주위를 둘러보는 강사장.
며칠전 확인한대로 사방의 CCTV가 광장의 사자상을 초점으로 90도씩 훑고 있다. 벤치에 앉는 강 사장. 수트 웃옷 속주머니 USB의 존재를 확인한다.
멈춰선 지수는 강 사장을 응시한다. 강 사장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문다. 강 사장에게 다가간다. 마치 합을 맞춘 듯 서로를 본다. 담뱃불을 빌리자며 고개를 숙이는 지수. 순간 한 모퉁이를 돌아 삐그덕 소리가 광장으로 나온다. 라이터 불빛에 번쩍한 지수의 눈빛이 소리를 본다. 소리를 뒤따라 두 남녀가 모퉁이를 돈다. 주승우와 이테라다. 허리춤에 숨겼던 칼을 빼는 지수. 강 사장은 순간 CCTV쪽을 본다. 저항할 생각은 애초에 없다. 칼 끝이 예리하게 심장을 뚫고 들어온다. 핏덩이가 칼날을 타고 역류한다. 헉하는 외마디 비명.
비명이 끝나기 전 지수는 강 사장을 뒤진다. USB와 핸드폰, 지갑을 빼낸다. 담배 한모금을 빨고 태연히 다른쪽 모퉁이 쪽으로 걷는다. 주승우와 이테라가 강 사장에게 다가온 만큼 지수는 멀어진다. 이테라의 시선이 지수를 놓친다.
강태우 사장이신가요. 주승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아늑해진다. 강태우... 주승우가 다시 한번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눈을 감는다.

# 분당 서울대학병원 장례식장. 미망인이 된 청원의 막내딸은 역시 호랑이 새끼다. 남편의 갑작 스러운 죽음에 어리둥절했던 순간을 접고 미망인은 곧바로 자신이 해야할 일들을 하나하나 진행했다. 남편의 죽음이 타살이란 것을 안 이상 부검같은 절차는 불필요했다. 곧바로 빈소를 마련하고 남편을 쉬게 했다. 공사 홍보실장을 불러 언론에 강태우 사장의 부고기사를 돌렸다. 청원 홍보실에도 연락을 했다. 남편이 경영권 다툼에서 밀려나면서 오빠들 얼굴은 절대 다시 보지 않겠다고 했지만, 자신과 죽은 남편은 청원의 엄연한 대주주였다. 일사천리로 일을 수습한 미망인은 아버지의 상을 치르며 장만한 검은색 한복을 기사를 시켜 갖고 오게 했다. 그는 검은색 양장을 한 딸과 둘이 빈소에서 문상객을 맞기 시작했다.부고 기사가 나간 지 한시간이 채 되지 않았는데 문상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졌다. 강태우 사장과 친분을 나누었던 사람들이 먼저였다. 청원의 막내딸에게 눈도장을 찍으려는 이들이 꼬리를 물었다.

대단하네요. 나같으면 정신이 없을텐데. 이테라가 미망인을 보는 시선은 경외감이었다.
어떤 일들이 한 사람을 저렇게 단련시켰을까요. 이테라의 시선을 따르던 주승우. 재벌의 막내딸이면 온실의 화초일 줄 알았는데. 이테라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지나치게 강한 사람들을 보면.
어떤 상처들이 있었을까. 이테라는 주승우를 보며 이렇게 생각했다. 감정이 말라비틀어져 딱지가 앉은 듯한 그의 표정. 걷어내면 살짝만 건드려도 벌겋게 생채기가 날 것같은 속살이 드러날 것 같다.
분명 아들이 있다고 했는데. 주승우는 강태우 사장의 통화를 곱씹었다. 현장에 있던 망자의 유품을 모두 살폈는데 강 사장이 자신에게 건낼 무엇인가는 눈에 띄지 않았다. 핸드폰과 지갑 등 일반적인 소지품은 모두 지수가 갖고 달아났다. 아들과 만나 같이 시계 얘기를 하면 좋겠다고 했던 강 사장의 말은 이같은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플랜B였다. 식당쪽에서 문상객을 맞고 있는 ST공사 홍보실장을 보는 주승우.
실장님 고생이 많으시네요. 문선경 홍보실장에게 다가가 말을 건넨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문 실장. 지정선 노조위원장 살해사건 뒤 홍보실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주승우가 문 실장에겐 반갑지 않은 객이었다.
너무 싫은 티 내시는 거 아니에요? 실장님도 이 일 계속 하시려면 포커페이스 좀 배우셔야겠어요. 너스레를 떤다.
에구에구. 좀 귀찮게 해야 말이지. 주 기자님이 싫어서 그런 건 아니니 이해하세요. 고지식하긴 해도 악한 구석이 없는 사람인가보다. 주승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멀리 있나 보네요?
아들요? 누가요. 강 사장님이요?
네. 사건 직전에 전화통화를 했는데 아들 말씀을 하셨거든요.
에이. 잘 못알고 계신 거에요. 자식이라곤 딸 하나인데요. 외동딸이라고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이상하네요. 분명 아들 얘기를 하셨는데.
아니라니까요. 제가 몇년을 모셨는데 그걸 모를까. 주 기자님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나보네.
뭔가 속사정이 있구나. 주승우는 직감했다. 주변 사람들이 존재를 모르는 아들이라면... 한편의 드라마가 뇌리를 스쳤다. 아들은 청원가의 사람이 아니란 얘기다. 빈소에 쉽게 모습을 드러낼 수 없는 입장이란 의미다. 난감했다. 미망인과 딸에게 혼외자의 존재를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주승우 기자님.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주승우는 깊은 생각의 골자기에서 돌아왔다. 미망인이었다. 잠시 드릴 말씀이...
미망인은 빈소 옆에 유족들이 쉴 수 있도록 마련된 방으로 주승우를 이끌었다. 문상객을 맞도록 한 딸이 방 문 앞에서 멀어지는 것을 확인한 미망인은 방문을 걸어잠근 뒤에야 주승우 앞에 앉았다.
여기로 연락을 해보세요. 미망인이 주승우에게 내민 작은 메모지. 강유석이란 이름과 핸드폰 번호가 적혔다.
전화번호군요. 이름으로 보아 강태석 사장이 말한 아들이 틀림없다. 미망인이 강 사장에게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남편이 말한 아들입니다. 남편은 집을 나오기 전 네 통의 편지를 써놓았습니다. 네 통의 유서라고 해야겠지요. 저와 제 아이. 그리고... 손수건을 쥔 손이 떨린다.
편지라구요? 강 사장의 죽음은 타살이지만 타살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다. 왜 피하지 않았을까.
자신의 예상대로면 주승우 기자에게 이 번호가 필요할 것이라고 메모가 돼 있더군요.
30여년간 남편에게 다른 여자와 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몰랐던 여자. 남편의 죽음과 함께 날아온 비밀은 그에게 어떤 의미일까. 자신이라면 이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고개가 절로 저어진다.
기자님...
네.
연락하시거든 아버지 가시는 길에 마지막 예를 갖추라고 전해주세요. 그 여자분께도.
자신의 앞에 앉은 건 방금 전 남편을 잃은 가녀린 미망인이 아니었다.
대신 빠짐없이 말씀을 해주세요. 제가 알아도 되는 것이라면. 아니 제가 알아야 하는 것이라면. 여전히 떨리는 손. 그는 지금 온 힘을 다해 순간을 버틴다.
강 사장님은 바로 잡으려고 하셨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일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 듯 하구요. 정확한 건 저도 아들분을 만나뵈야 알 수 있습니다.
잠시후. 한 중년 여성과 그를 부축한 30대 남성이 장례식장으로 들어온다. 강유석 판사와 그의 어머니, 즉 강태우 사장의 첫사랑이다. 아들에 기댄 여인의 손수건은 눈물로 젖었다. 낯선 두 사람의 등장을 바라보는 미망인.
엄마. 방으로 들어가세요. 강태우 사장의 딸 유진이 영정앞에 선 두 사람을 보고 미망인의 옷깃을 당긴다.
조문을 오신 분들이다. 예를 갖추어야지. 죽은 남편이 감춰둔 첫사랑을 바라보는 미망인의 시선. 원망과 호기심.
첫사랑 여인은 영정 앞에 백합을 놓는다. 촛불에 향을 태워 향로에 꽂는다. 두어걸음 뒤로 물러난다. 비틀거리는 여인은 결국 아들의 품에 의지해 다시 선다. 하염없는 눈물에 촛불이 흔들린다. 향의 연기가 가물가물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아득한 삶이 천정에 부딪혀 부서진다.
여인은 미망인을 마주하고 선다. 아들 유석도 유진의 앞에 선다. 네 사람은 말이 없다. 서로를 바라보며 그저 섰다. 할 말은 많은 데 할 말이 없다. 예를 갖추지만 반길 수는 없다. 미망인은 그렇게 다물었던 입을 뗐다. 이건 남편이 두 분께 남긴 편지입니다. 미망인은 백 속에서 두 통의 편지를 꺼내 건낸다.
예. 유석은 답했다. 그도 더 무슨 말을 할 지 몰랐다.
입구를 나서는 둘의 앞에 주승우가 다가선다. 어머니가 방에서 말씀 나누시래요. 유진의 말에 유석이 뒤를 본다. 배는 다르지만 엄연한 남매다. 피가 당긴다. 엄마를 닮아 칼칼한 유진의 시선은 아직 곱지 않다.
유진의 안내로 방에 들어선 주승우와 강유석은 작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았다. 유진이 캔 커피 두 잔을 테이블 위에 놓고 나간다. 또각. 유석이 캔커피 따는 소리가 좁은 방에서 메아리를 친다.
그리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말문을 떼는 주승우. 커피를 딴다.
언젠가는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했습니다.
아버님이 어떤 상황이었는 지 알고 계셨다는 말씀이군요. 목넘기는 소리가 울린다.
어머니께 많은 것을 털어놓는 편이셨습니다. 저는 어머니를 통해 듣고 짐작을 하는 정도구요. 누군가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셨습니다. 위협을 느끼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마른 입을 커피로 적신다.
그러셨군요.
저를 찾으신 이유가.
아버님께서는 지금 이 상황을 예측하셨던 것 같습니다.
예측요?
정확히 말하면 계획하셨던 듯 합니다.
타살을 계획한다구요?
네.
...
아버님은 죽임을 당할 것을 알고계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알고 계셨다면 왜 피하지 않으셨단 말인가요.
자신의 죽음으로 이런 상황을 기획한 자들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그 계획은 성공하셨구요.
범인을 알고 계신다는 뜻인가요?
네. 경찰청 CCTV 분석 AI를 통해 확인했습니다.
그 게 누구인가요?
금성PSD라고 ST공사 자회사 사장의 아들입니다. 이름은 차지수이구요.
그들이 왜? 아버지를 죽인 범인 이야기가 나오자 강유석은 승우를 쏘아부치듯 물었다.
그 건 저도 아직 모릅니다. 다만 그들 입장에선 세상에 알려지면 안되는 것을 아버님이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짐작이 맞다면 그 열쇄를 판사님께서 갖고 계십니다.
제가 열쇄를요?
네. 아버님은 저와 둘이 통하는 일종의 암호같은 것으로 실마리를 말씀해주셨습니다. 저는 그 암호를 알고 있고, 그 암호를 푸는 열쇄는 판사님이 갖고 계십니다. 아버님이 암호를 주시면서 유사시에 판사님을 만나라고 하신 것을 보면.
글쎄요. 암호란 게 대체 무엇인가요?
그랜드세이코입니다.
시계 말씀이신가요?
네. 44GS, 57GS, 62GS, 3180이 아버님에 제게 주신 네 개의 암호입니다.
히스토리컬 모델이군요. 한정판 복각 모델까지 나온 모델들입니다.
맞습니다. 아버님 말씀대로 그랜드세이코에 대해 잘 하시는군요.
아버지가 콜렉팅을 하시면서 알게 됐죠. 퍼스트 모델, 3180은 아버님이 제일 아끼는 것이었고, 이 것은 제게 주셨습니다. 셔츠 소매를 올려 손목시계를 주승우에게 보여주는 강유석. 44GS 복각 모델입니다. 아버지가 두 번째로 아끼는 모델이라고 하셨죠.
3180은 제가 타야할 노선버스 번호였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세개의 번호에 실마리가 있다는 얘기군요.
그럴 것 같습니다. 짐작가시는 게 있으신가요? 이제 강유석이 암호를 푸는 일만 남았다. 유석의 입을 응시하는 주승우.
네.
유석의 대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짦은 정적의 사이로 주승우와 강유석의 시선이 수도 없이 교차한다.
가족묘지입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 작은아버지와 고모의 유골함이 모셔진 번호에요. 44번, 57번, 62번.
그 곳에 아버님이 제게 전달하려던 것을 감춰두신 것 같습니다. 차지창쪽 사람들의 감시를 피할 수 있었던 곳. 묘지가 어디인가요?
서산입니다. 3년 전에 가족묘지를 만들어 창녕에 있던 네 분의 묘를 이장하셨습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아무래도 자주 찾아뵐 수 있다고.
같이 가주실 수 있겠습니까?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일입니다.
지금 말씀이신가요?
네.
방을 나온 주승우는 이테라에게 서산행을 부탁했다. 밤 늦은 시간이지만 일분일초가 급했다. 급한 마음에 자신이 달려갈까 생각했지만 아직은 차를 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마침 비가 내린다. 그날 밤 처럼. 그 사이 수영이 와 있었다. 강유석이 오히려 시간을 재촉한다.

4장: 미스터H(2-5/5)...검은 그림자

# 이테라와 수영, 강유석 판사 일행이 서산으로 향한 뒤 주승우는 장례식장에 남았다. 차지창 사장을 비롯한 장중경 쪽 사람들이 야음을 틈타 장례식장을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자정을 넘기며 식당에 몰렸던 문상객이 썰물처럼 빠졌다. 영정 앞에선 미망인은 뜸뜸한 문상객을 맞기 위해 줄곧 꼿꼿이 서있다. 치켜올라간 눈매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몸을 지탱한다. 순간 화장실 쪽에서 들려오는 웅성거림. 소리치며 달려나오는 한 남자에 시선이 쏠린다. 호기심이 주승우를 화장실로 당긴다.

변기에 쓰러져 있었어요. 헐레벌떡 뛰어든 의사에게 소리치던 남자가 설명한다. 쓰러진 남자를 화장실 타일 바닥에 눕힌 뒤 맥을 집는 의사.
동공상태로 봐도 특별한 이상은 보이지 않는다. 바이탈은 정상이다. 바지 주머니에서 지갑을 찾는다. 당뇨나 질환이 있다면 지갑에 관련 표식이 있을 수 있다.
그냥 기절을 한 것 같습니다. 일어서 손바닥에 찬물을 쥐고 정신을 잃은 사내의 얼굴을 토닥인다. 일그러지는 얼굴.
아... 정신이 깬 사내는 뒷목을 잡으며 상체를 세운다.
괜찮으세요? 의사가 묻는다.
사내는 일그러진 얼굴을 펴지 못한다.
일단 응급실로 가서 진찰을 받으시죠.
아뇨.
혹시 모르니 검사를 받으시는 게...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데 뒤에서 누군가 다가왔어요. 갑자기 목이 눌리는 느낌이... 그 다음부터는 생각이 나질 않습니다.
혹시 그남자 인상착의 기억하세요? 무리속에 있던 주승우가 한발짝 앞으로 나온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주승우를 한참 쳐다보는 남자. 글쎄요. 순식간이라. 거울에 온통 검은 그림자 뿐이었어요. 바이크 자켓같기도 하고.
지수가 장례식장에 있었다. 아니 지금 이순간에 있을 수도 있다. 주승우는 뛰어나와 장례식장 주변을 일단 살폈다. 쓰러진 사내는 자켓을 입고 있지 않았다.
잃어버린 자켓이 무슨 색이신가요? 화장실로 돌아온 주승우가 사내에게 물었다.
어. 그러고 보니 제 자켓이 없네요. 사내는 그제서야 자신이 자켓을 잃어버린 사실을 깨달았다. 보통 감색이에요.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는 사내. 지갑과 핸드폰을 꺼낸다. 이상하네. 분명 자켓 주머니에 있었는데.
지수는 정장자켓이 필요했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바이크 자켓은 눈에 띄기 쉬우니까.
주승우는 병원측 협조를 구해 보안실에서 CCTV를 살피기로 했다. 보안실은 지하주차장 한편에 있었다. 보안실이 있는 병원 본관건물과 장례식장은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돼 있다. 강태우 사장 빈소는 장례식장 지하 1층인데 복도끝에서 곧바로 지하주차장으로 연결됐다.
아홉시 반 정도. 응급실 쪽부터 보여주시겠어요? 주승우는 강태우 사장이 응급실에 실려온 순간부터 샅샅히 CCTV를 뒤졌다. 강태우 사장을 실은 앰뷸런스가 응급실 앞에 도착한 순간. 주승우의 눈에 들어오는 뒷편의 바이크 한 대.
앰뷸런스 뒤 검은 바이크를 클로즈업 해주세요. 검은 라이더자켓에 블랙진, 푸마 스니커즈를 신은 남자. 헬멧을 쓰고 있지만 주승우는 그가 한 눈에 지수란 사실을 알았다. 대범한 건지 무모한 건지. 지수는 줄곧 주변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주승우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장중경 일당이 생각보다 훨씬 위험한 인물들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몸서리가 쳐진다.
저 남자를 추적해 주세요. 주승우의 말에 병원 보안요원들은 수십대의 CCTV에서 검은 바이크 탄 남자를 집중적으로 찾았다. 바이크는 응급실앞 CCTV에서 사라졌다 본관 지하주차장에 다시 나타났다. 바이크에서 내린 지수. 헬멧을 벗고 검은야구 모자를 꺼내 쓴다. 줄곧 CCTV를 등지고 있다. CCTV 사각지대와 얼굴이 찍히지 않는 각도를 계산해 움직인다.
보안요원들은 이제 검은모자를 쓴 사내를 추적한다. 지하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탄다. 1층에서 내린 검은모자. 원무과 앞 CCTV에 다시 나타난다.
사무실로 들어선 검은모자를 쓴 사내. PC에 USB와 이어폰을 꽂고 파일을 연다. 5분이 넘는 시간동안 지수는 PC 앞에서 꼼작도 않는다. 사무실 불은 꺼져 있다.
원무과 직원분들은 모두 퇴근을 하신 건가요?
네. 6시면 모두 퇴근합니다.
6시 이후엔 그럼 의국 사람들 외 직원들은 병원에 없는 건가요?
보안실 직원들만 남습니다. 보안실 직원들은 외부 용역업체 소속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봐야죠.
키보드를 만지는 지수. 아마도 파일을 전송하는 듯 하다. 강태우 사장이 자신을 만나 전달하려던 게 바로 저 파일이었을 것이다. 강태우 사장은 왜 지수에게 죽임을 당할 것을 알면서 파일을 갖고 나왔던 것일까. 주승우는 생각했다. 어차피 자신에겐 아들 강유석을 통해 파일을 전달할 계획이었을 텐데. 고개를 갸웃하는 주승우. 그 앞의 CCTV화면엔 지수가 고개를 기울이고 있다.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차지창일 것이다.
혹시 병원에 컴퓨터를 잘 다루시는 분 계신가요?
컴퓨터 도사가 한명 있죠. 기다렸다는 듯 보안과장의 입이 터진다. 제2의 안철수라고 불리는 분이 계십니다.
제2의 안철수요? 서울대 의대 출신으로 국내 컴퓨터 바이러스 시장을 개척한 벤처기업가의 이름 아닌가. 컴퓨터를 잘 다룰 줄 아는 의사. 동그란 안철수의 얼굴을 떠올리는 주승우.
잠시 후 보안실 직원의 손에 이끌려 김혜주 선생이 보안실로 왔다. 보안실 문이 열리며 들어서는 흰까운을 입은 의사. 동그란 얼굴에 뿔테 안경을 상상했던 주승우의 시선이 팔등신 미녀의 얼굴과 충돌한다. 여의사였구나. 김혜주란 이름을 듣고도 안철수와 닮은 꼴 의사를 상상했던 건 자정이 넘은 시간 때문일 것이다. 고개를 흔드는 주승우. 그 사이 김혜주는 성큼 주승우의 앞에 다가서 있다.
보안과장은 원무과장에게 전화로 양해를 구한 뒤 김혜주 선생을 원무과 사무실로 안내했다. 보안키로 열어야 하는 원무과 사무실문을 도대체 지수는 어떻게 연 것일까.
원무과를 나온 지수의 모습은 응급실 복도에서 다시 잡혔다. 검은 그림자는 응급실 안에서 줄곧 주승우의 등 뒤에 있었다. 저녁 10시반께 미망인과 강태우 사장의 딸이 달려오고 11시께 빈소가 마련된 이후에도 지수의 동선은 주승우와 일치했다. 빈소가 마련된 직후 화장실을 들어간 검은 그림자가 5분여 뒤 감색 자켓을 입고 나오는 모습도 CCTV로 확인됐다. 머리를 쓸어올리며 교묘히 얼굴을 가린다. 문상객 틈바구니의 지수. CCTV엔 그의 뒷모습만이 남았다. 강태우 사장의 죽음을 확인하고, USB까지 손에 넣은 지수가 왜 장례식장에 남아 있었던 것일까. 지수의 지명수배 사실을 장경주 차장이 몰랐을 리 없다. 지수는 차지창과 통화 당시 이같은 사실을 전해들었을 것이다. 지수는 아직 할 일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살인자가 CCTV가 즐비한 대학병원 장례식장에 남아 마쳐야할 일이란 건 대체 무엇일까. 순간 주승우의 눈에 들어온 CCTV 화면. 지수의 바이크가 가족묘지로 향하는 이테라와 강유석 판사 일행이 탄 차를 쫒는다. 주승우는 보안실 밖으로 뛰어 나왔다. CCTV 상에서 지수의 바이크가 세워져 있던 C4 구역 기둥 옆 자리엔 BMW 세단이 들어서 있다.
여보세요. 주승우는 황급히 이테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테라에요.
차지수가 지금 그쪽을 쫒고 있습니다. 검은색 바이크를 조심하세요.
네. 이쪽은 걱정하지 마세요.
수영이를 그쪽으로 보냈어요. 걱정이 되서. 그런데 왜 전화를 안받으세요. 조 순경이 계속 그쪽을 찾고 있는 것 같던데...
CCTV 찾느라 진동음 울리는 것을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뭐하러. 어쨌든 제가 조 순경에게 연락을... 순간. 주승우의 앞을 가리는 검은 그림자.
어. 바이크가 다시 들어오는데요. 주승우가 뛰어나간 뒤 계속 CCTV를 살피던 보안실 직원. 지수는 주차장을 나간지 10여분 만에 다시 주차장으로 미끌어져 들어왔다. 원래 세웠던 자리에 다른 차가 있는 것을 보고 주변을 살피는 지수. 주차장을 한 바퀴 돌아 CCTV를 등진 곳에 세운다. C4 구역과는 한참 떨어진 F5 구역이다.
뭔가 이상한데. 보안과장은 주승우가 뛰쳐나간 보안실 문쪽을 바라본다.

4장: 미스터H (2-6/5)...수영의 희생

# 검은 그림자의 끝에서 주승우는 차지수와 마주했다. 지수의 짙은 눈빛은 먹잇감을 목전에 둔 표범의 그 것이다. 뒷발을 웅크린 채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온 몸이 얼어붙는 느낌. 차지수가 노린 건 자신이었다.

여보세요? 전화기를 타고 온 이테라의 음성. 오감이 도미노처럼 일어선다.
지하주차장 보안실 근처 E구역입니다. 주승우는 다짜고짜 이테라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렸다. 수영이 자신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생각했다.
순간. 꿈틀하는 그림자. 주차장 천정 LED 불빛들이 날아와 지수의 손끝에 부딪혔다. 잘 벼리어진 칼날에 놀란 불빛들이 튄다. 칼끝은 주승우의 목을 노린다. 주승우의 시선은 정확히 칼끝의 동선을 따른다. 두려움마저 일어설 틈을 주지 않고 날아드는 칼날. 눈앞엔 이제 지수의 검은 눈동자와 칼끝만이 춤춘다.
빗나간 칼날은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다시 주승우를 노렸다. 허공을 가르는 칼날 소리가 의식의 심연을 벤다. 세월에 닳았던 기억들이 먼지를 털고 일어선다.
칼끝만 봐. 대학시절 체육관을 울리는 검도부 주장의 외침. 너의 목을 찌르는 것도 허리를 베는 것도 칼끝이다. 칼끝을 놓치면 죽는다. 정신차려. 기억에 묻어온 땀에 절은 도복 냄새가 코를 찌른다.
의식은 기억에서 재빨리 돌아와 다시 칼끝을 본다. 이제 모든 움직임은 하나의 점. 상대할 것은 오직 저 작은 점 하나다. 굳었던 몸이 가벼워진다. 동작은 작지만 정확하다. 칼끝은 닿지만 않으면 멀어질 필요도 없다.
칼끝이 서너번 빗나가자 지수는 멈춰섰다. 자세를 고치고 주승우를 노려본다. 다시 춤추는 불빛.
퍽. 칼끝이 다가오나 싶더니 묵직한 충격이 닿는다. 수십조각을 짜맞춘 얼굴뼈가 뒤틀린다. 눈앞에 불꽃이 튄다. 고꾸라지는 주승우. 안간힘으로 의식을 붙든다. 뚜벅뚜벅 다가오는 검은 그림자. 가까워질 수록 흐릿해진다. 번쩍하고 칼끝이 정상에서 멈춘다. 의식을 놓친다.

#실눈을 비집는 불빛. 그 틈이 이승으로 이어지는 통로일 것이다. 주승우는 불빛 쪽으로 몸을 띄우기 위해 발버둥 쳤다. 안간힘을 쓸수록 가라앉는다. 중력이 자신을 끌어안고 지구의 중심으로 달려가는 것 같다. 불가항력적이란 생각이 든다. 이승과 저승의 경계에서 나아갈 방향은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온몸의 힘을 뺀다. 계속 침잠한다. 빛조차 범접할 수 없는 암흑. 중력도 힘을 뺀다. 이 것이 죽음일까. 의식조차 존재하지 않는 검은 바닥. 순간. 잡아당기는 손길. 깃털같은 의식은 저항없이 당겨진다. 빠른 속도로 다시 떠오른다. 닿을 듯한 틈. 손을 뻗는다. 손이 닿는다. 틈이 열린다.

주승우가 눈을 뜬 건 네 시간 가량이 지난 후였다. 응급실 천정의 LED 불빛. 흰 벽을 배경으로 오가는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다시 암흑을 점령한 빛은 주승우를 어지럽혔다. 머릿속은 쩍하고 갈라졌다.

내가 이자식 재수없다고 했잖아요. 목이 조여온다. 희미했던 시야. 초점이 맞춰진다. 눈에 들어온 육중환의 얼굴. 성난 눈동자. 주승우의 멱살을 잡은 육중환을 만류하는 이테라. 이자식 일에 끼지도 우리일에 껴주지도 말라고 내가 했잖아요. 주먹을 불끈 쥐는 육중환. 이를 악문다. 부르르 떨리는 팔둑. 모든 핏줄이 일렬 종대로 일어섰다. 언제고 터져버릴 듯한 팽창감.
육 형사. 이러면 안돼. 주 기자는 자기 일을 하는 거야. 우리는 우리 일을 하는 거고. 조 순경도... 조 순경 이야기가 나오자 말을 잇지 못하는 박경수 경위. 육중환이 돌아서며 벽을 친다. 응급실에 천둥이 친다.
정신이 드는 주승우. 분명 지수의 칼을 맞았을텐데. 어떻게 멀쩡한 걸까. 눈물을 훔치는 이테라. 그 옆에 어깨를 늘어뜨린 박경수 형사.
자신의 생존과 슬픔에 빠진 이테라. 분노한 육중환과 넋을 잃은 박 경위.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설명해주는 건 수영의 부재였다. 이테라는 자신이 걱정돼 수영을 병원으로 돌려보냈다고 했었다.
설마 조 순경이...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침묵이 모든 것을 말해줬다.

4장: 미스터H (3/5)...사퇴선언

# 6월 어느날 밤. 여의도 국회의사당 뒷편 한강둔치 주차장. 벤츠 S600 12기통 의 엔진음이 고동친다. 헤드라이트는 꺼지고 시동은 켜진 상태다. 둥둥둥둥 큰북처럼 공명하는 엔진음. 보이지 않는데 압도한다. 검은 세단에 다가서는 중절모를 쓴 한 사내. 일찍 찾아온 더위에 어울리지 않는 버버리 차림이다. 얼굴을 가득채운 검은 마스크. 운전석에서 기사가 내려 뒷문을 연다. 사내가 차에 타자 기사는 문을 닫고 멀리 떨어진다.
형님. 차안의 남자는 중절모를 쓴 남자의 손을 잡는다. 보는 눈이 애틋하다.
잘 있었니. 중경이. 얼굴 좋구나야.
오시는 길은 어떻셨습니까.
편케 왔다. 중국쪽도 신경을 많이 써줬고.
거처하는 곳은 괜찮습니까. 제가 모셔야 하는데.
사정을 다 아는데 피차 인사치레는 생략하자.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라. 일을 그르치면 되겠니. 불편한 거 없다. 지금 있는 곳이 여러모로 편하다. 대방동 말이야 중국이나 다름이 없더구만.
형님. 여기선 벗으셔도 됩니다. 사내는 차 안에서도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허허. 내 버릇이 되서. 어쩔 땐 쓰고 있는 것도 잊는다. 마스크를 벗는다. 중절모는 여전히 쓴 채다.
그런데 형님. 잘 어울리시긴 합니다. 장중경이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런가. 내 계속 쓰고 다녀야 되갔구만.
그러십시오. 하하.
준비는 잘 되고 있겠지? 날카로워지는 사내의 눈 빛.
염려 마세요 형님. 1차 물량이 평택항에 들어와 있습니다.
검사는 문제 없이 통과가 되갔지? 다 된 밥에 코 빠뜨리는 일은 없어야지 될낀데.
적절히 손을 써 놨습니다. 검사 단계에서 문제가 되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래야지.언제쯤 서울로 끌고 오는거네?
보름 정도 걸릴 겁니다.
수고했다. 네가 욕봤겠구나.
그런말 서운합니다. 제가 형님 빚갚으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집어치라. 경의선을 통해 들어왔으면 더 좋았을낀데. 그 점은 좀 아깝다야.
민영우도 민영우지만 정부차원에서 애를 많이 썼습니다. 중국산 지하철이 북을 거쳐 남으로 들어온다면 그 것만큼 평화협정 체제를 홍보할 수 있는 이벤트가 어디있겠습니까. 그 것도 다시 이어진 경의선을 통해서 말입니다, 그랬다면 정부는 통일 한반도에 한 걸음 더 다가섰다며 꽹과리를 울렸을 겁니다.
그랬갔지. 세상 어케 돌아가는 지도 모르고 말이야. 이제 미군이 빠졌으니 김정은이는 언제든 손만 뻗으면 남조선을 손아귀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할끼야. 그런 아새끼가 문재인이하고 민영우 얼굴에 광내는 일을 하갔니.
김정은이. 어리다고 얕봤는데 가만히 보면 보통내기가 아닙니다.
야야. 그러면 뭐하네 낼모레면 지 배떼지가 터질 것도 모른데 말이야. 안그래? 우헤헤헤.
그거 말도네요. 하하하.
갸는 말이야. 언제든 배창자가 터져버릴 수 있어. 그케 쳐먹는데 그 배가 온전하갔니.아무리 돼지 가죽이라도 말이야.
돼지 가죽이요? 아 하하하,
이케 웃는거 오랜만이구나 야. 김정은이 때문에 이케 웃게 될 줄은 내 또 몰랐다야.
형님 그동안 잘 견디셨습니다. 장중경은 사내의 손을 꼭 쥐었다.
기건 그렇고. 민영우는 모르는 거갔지?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민영우가 본 건 모두 이면계약서입니다. 1조짜리 전동차 수입계약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끝까지 단단히 해야 한다. 밑에서 그렇게 분탕질을 쳐 놨는데 언제까지 감출 수만은 없을끼야,
걱정하시는 일 없을겁니다. 알게 된다면 바로 손을 쓸 겁니다.
기래.
USB에 담긴 파일은 장중경 의원과 장 의원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한 사내의 대화가 담긴 육성 녹음이었다. 둘은 차 안에서 여러 차례 만나 밀담을 나누었다.
민영우 시장이 차이나게이트에 연루된 게 아니란 사실은 분명해진 셈이네요. 장중경이 쳐놓은 인의장막에서 민영우 시장은 진실로부터 철저히 차단됐던 것이다. 장중경이 편집한 정보들만이 강태우 사장의 손을 거쳐 민 시장에게 전달됐다. 주승우는 혀를 찼다. 지수에게 가격 당한 얼굴이 지끈거렸다.
강태우 사장이 이 파일을 세상에 공개하려고 했던 건 민영우 시장을 위해서였군요. 입을 떼는 이테라.
아버지께서는 민영우 시장에 대한 신의를 지키고 싶으셨을 겁니다. 청원의 경영권 분쟁에서 밀려 쫒겨나듯 회사를 나왔을 때 손을 잡아준 게 민영우 시장이니까요.
주승우는 생각에 잠겼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하세요.
강태우 사장은 장중경 일당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죽음으로 속죄를 하고 이를 통해 장중경 일당의 민낯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싶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죽음이 속죄만을 위한 것이었다면 왜 죽임을 당하는 쪽을 택했을까요. 파일의 공개만으로도 장중경을 수면위로 끌어올리는 게 가능했을 텐데요. 이테라를 보는 주승우.
죽음이란 삶의 마침표고 누구나 마지막 순간은 성스럽기를 바라죠. 그 순간을 무엇고 맞바꾼다면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어야 해요.
강 사장님은 이 파일 이 외의 것에 대해서는 전혀 힌트를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 파일 안에 답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아니라면 죽음을 예감한 강 사장이 분명히 다른 장치를 남겼을 겁니다. 주승우는 장중경과 형님이란 사내의 대화를 곱씹었다.
중년의 남자가 자신이 원하는 죽음의 형태와 기꺼이 바꿀만한 가치가 뭐가 있을까요. 이테라는 질문을 하는 순간 머릿속에 한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가족. 주승우와 이테란는 동시에 같은 답을했다.
강 사장님은 장중경의 가면을 벗기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 거에요. 장중경 일당의 소행이 세상에 드러나고 수사가 마무리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려고 한 건 아닐까요. 장중경 일당이 자신들에게 장애가 된다면 살인까지 서슴지 않는다는 건 강 사장님 자신의 죽음으로 증명을 한 거니까요. 차지수가 체포가 되면 차지창을 고리로 고구마 줄기 빼듯 줄줄이 엮여서 나올 테니까요. 이테라와 주승우는 서로의 생각을 디디고 닿기 힘들었던 진실에 손을 뻗었다.
시간이 많지 않다는 뜻일겁니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서둘러 하지 않으면 강 사장님은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고 생각하신 거에요. 그 것은 무엇이 됐든 궁극적으로는 사랑하는 가족을 잃게 되는 일일 수도 있구요.
주승우와 이테라는 다시 녹음 파일에 집중했다. 차이나 게이트의 주범이 장중경 일당과 형님이라 불리는 사내란 점보다 더 중요한 진실이 파일에 담긴 게 확실했다.
순간. 주승우 핸드폰이 울린다. 문자 수신을 알리는 진동음.
민영우 시장이 긴급 기자회견을 한다고 하네요. 서울시 대변인의 문자였다.
기자회견요? 민영우 시장은 전날 주승우의 단독기사로 차이나게이트가 세상에 알려지고 표준호가 이를 빌미로 정치적 공세에 나선 뒤에도 아무런 입장을 내지 않았다. 장중경 의원은 이를 야당의 정치음모란 프레임으로 몰아부쳤다.
네. 24식간의 침묵 뒤에 긴급 기자회견이라... 주승우는 전날 오후 시청 본관 지하주치장에서 본 민 시장의 눈 빛을 떠올렸다. 기사로 밥벌이를 한 뒤부터 직감을 경계했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가르는 것은 항상 직감이었다. 눈빛은 자신의 결백을 말하고 있었다.
주승우는 수신문자의 전화 버튼을 눌렀다. 어 승우야. 문자를 보낸 대변인은 주승우의 대학 선배다. 출입기자가 아닌 주승우에게 서울시 보도일정을 문자로 알려준 건 배려다.
선배. 정신이 없으실텐데. 간단히 물을께요.
네 말대로 정신이 없네.
전진입니까 후퇴입니까. 표준호의 정치공세에 대한 민영우 시장의 스탠스를 묻는 것이었다.
승우야. 회견 전까지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시장님 지침이야. 미안하다. 내 입장도 있잖니. 회견장에서 보자. 이만 끊는다.
선배. 수차례의 재발신은 허사였다. 민영우 시장의 결백을 입증할 음성 파일의 존재. 누구보다 민영우 시장이 먼저 알아야 하는 게 아닌가. 주승우는 민 시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기가 꺼져 있다. 8시를 넘어선 시침. 기자회견까지는 한 시간이 채 남지 않았다. 분당에서 서울시청까지 가기엔 빠듯한 시간이다.
저는 시청으로 가겠습니다. 기사로 음성파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것은 기자회견보다 늦을 수 있다. 주승우는 핸드폰에 녹음한 음성파일 사본을 민영우 시장의 카톡으로 보내고, 서울시청으로 향했다. 기자회견 전에 민 시장이 카톡을 보는 것과, 회견 전에 자신이 시청에 도착하는 것. 아직은 민영우의 정치생명을 되살릴 두 가지 카드가 남아 있는 셈이다.
주승우가 시청에 도착한 건 기자회견이 거의 끝날 무렵이었다. 분당 서울대병원에서 지하철 정자역까지 뛰는 데 많은 시간을 잡아먹었다. 급한대로 지하철역까지만이라도 택시를 탈까 생각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민 시장의 간단한 성명발표 형식으로 진행된 기자회견은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례적으로 질의응답 시간도 빠졌다. 민 시장은 기자들이 퍼붓는 질문공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브리핑룸을 빠져나갔다.
온라인에는 이미 시장 사퇴를 선언한 민 시장의 기사가 쏟아졌다. 네이버 실검 1위는 민영우, 2위는 민영우시장 사퇴였다. 민영우 시장은 기자회견에서 차이나게이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장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본인의 개입 여부와 상관없이 시의 산하기관에서 생긴 일이라는 것만으로도 수장으로서 책임을 통감한다고 강조했다. 시기는 국정조사와 특검이 마무리되는 시점으로 못박았다. 사퇴는 조사 결과를 결부하진 않았다. 차이나게이트에 본인이 개입했는 지 여부에 대해서는 명확한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다만 국정조사와 특검 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민 시장은 차이나게이트와 상관없이 중국산 지하철 운행은 계획대로 강행하겠다고 했다. 게이트와 관련된 진실은 철저히 밝혀져야 한다면서도 현재로선 중국측과의 계약파기는 불가능하다는 현실론을 주장했다. 총 1천량에 달하는 지하철 운행이 중단될 경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서울시민의 몫이 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논란의 여지가 큰 결정이었다. 그만큼 야권에서 공격의 빌미로 악용할 공산이 컸다. 서울시장 입장에선 게이트에 대한 조사가 끝날 때까지 지하철 운행을 보류한다는 결정이 오히려 쉬울 수 있다.
기자회견으로 민영우 시장의 사퇴는 기정사실화 됐다. 민 시장은 무조건적 사퇴선언으로 자신의 결백을 항변한 것일까. 지하철에서 핸드폰으로 관련 기사들을 검색한 주승우는 시청 브리핑룸으로 뛰어가며 이렇게 생각했다.
주승우가 헐레벌떡 도착했을 때 민 시장은 기자회견을 마치고 브리핑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2진기자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고, 1진 기자들도 민 시장의 갑작스런 사퇴선언을 속보 타전한 뒤 후속 기사 방향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해 했다. 민 시장은 대변인실 직원들의 스크럽 속에서 묵묵부답 엘리베이터를 탔다.
주승우는 개미떼 속에도, 개미떼를 바라보며 후속 기사를 고민하는 1진들의 사이에도 끼지 않았다. 민 시장의 뒤를 쫒는 일이 이미 무의미했졌다고 생각했다.
야 주승우.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주승우에게 대한일보 조상룡 기자가 다가온다. 도대체 무슨 말이야. 민영우 시장이 차이나 게이트에 개입하지 않은 것을 증명할 수 있다니.
곧 알게 될꺼야. 그건 그렇고 민 시장에게 전달했어? 여전히 거친 숨을 내쉬는 주승우. 3년전 교통 사고 뒤 몸을 격렬하게 움직이면 온몸의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을 느낀다.
브리핑룸에 들어설 때 네가 보낸 카톡 꼭 확인하라고 말은 했는데. 민 시장도 그럴 정신이 있었겠나. 주승우는 카카오톡과 텔레그람을 통해 민 시장에게 음성파일 사본을 보낸 뒤 대한일보 조상룡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기자회견 전에 파일을 꼭 확인하라는 말을 전하라고 부탁했다.
핸드폰으로 카톡을 확인하는 주승우. 1이 지워져 있다. 카톡을 확인한 것이다. 기자회견 직전 민 시장은 조상룡 기자의 말을 듣고 핸드폰을 켠 게 확실하다. 민 시장이 음성파일을 확인했다면 왜 사퇴선언을 강행한 것일까. 카톡을 본 시간과 기자 회견 사이의 몇 분. 카톡을 봤다고 해도 음성파일을 확인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지만 음성파일과 함께 보낸 주승우의 문자. 분명 민 시장의 결백을 입증할 증거라고, 반드시 확인하라고 했었는데. 갖가지 의문이 꼬리를 물었다. 주승우는 뼈가 으스러지는 통증도 잊은 채 브리핑룸의 뒷편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30분 가량이 지났을까. 주승우 핸드폰의 문자 수신 진동음이 울린다. 발신자는 MD. 민 시장(Mayor)의 운전기사(Driver)다. 발신 문자는 '4-29'. 지하 4층 주차장 29번 블록이란 의미다. 민 시장이 이 번에도 언론을 피해 업무용 차량으로 시청을 빠져나가려는 것이다.
주승우가 29구역으로 갔을 때 민 시장은 업무 차량인 아반떼 전기차 뒷 좌석에 앉아있었다. 조수석 대각선 편의 뒷문을 여는 주승우를 민 시장이 반갑게 맞는다. 주 기자. 어서오세요. 민 시장이 운전기사를 시켜 주승우를 부른 것이다. 민 시장은 전날 운전기사가 종종 주 기자에게 자신의 위치를 알려준다는 사실을 눈치챘었다.
왠지 제가 시장님 각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주 기자같은 분이.
사퇴선언을 한 서울시장의 얼굴이라고 하기엔...
저는 모든 상황을 즐깁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매 순간 다음 순간을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 징검다리를 건너는 것과 같습니다. 매 순간 다음 디딜 돌을 선택하고 집중하고 디디고. 또 다음 돌을 보고 선택하고 디디는. 강 건너 숲속에 무엇이 있는 지, 흐르는 물 속에 무엇이 있는 지는 건넌 다음, 빠진 뒤 생각해야죠. 지금은 다음 디딜 돌을 보고, 선택하고 디디는 것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번에 시장님이 디딘 돌은 강을 건널 수 있는 돌입니까?
저는 그렇게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그럴 수 있는 지 저는 모릅니다. 이제 디디었으니 봐야지요. 디딤돌이 되 줄 지, 썪은 동아줄 같은 것이었는 지.
음성 파일은 확인하셨더군요. 넘겨 짚는 주승우.
방금 전에 들었습니다.
처음엔 파일을 시급히 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장님의 정치 생명이 파일의 공개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처음엔이란 의미는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말이군요.
네. 이제 깨달았습니다. 파일을 들었더라도 시장님은 기자회견을 강행했을 것이란 것을.
그런가요.
아니란 말씀이신가요?
그런 가정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어제도 말했지만 진실보다 중요한 것은 시민들이 무엇을 진실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겠습니까.
시장님은 강태우 사장이 시장님의 결백을 입증할 유일한 증인이란 사실을 알고계셨을 겁니다. 증거가 됐든 증언을 하든 그 주인공은 강태우 사장일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젯밤 강태우 사장의 부고를 접하셨겠죠.
...
하마터면 깜박 속을 뻔 했습니다. 처음엔 어쩔 수 없이 시장님이 사퇴선언을 택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택한 게 아니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강태우 사장의 부재는 곧 결백 입증이 불가능해진 것을 의미하니까.
...
하지만 곧 알겠더군요. 사퇴선언은 시장님이 그리고 있는 큰 그림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
사퇴선언을 변수가 아니라 상수로 놓고 보니 모든 의문이 풀리더군요. 어떤 경우에도 시장님은 사퇴선언을 한다. 이후 결백을 입증할 증거나 나오면 시장님은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책임을 지고 물러난 리더가 되는 것이죠. 혹시 결정적 증거가 나오지 않으면 차이나게이트 주범의 오명을 쓰고 해임을 당할테니. 어떤 경우에도 사퇴 선언은 시장님 선택의 종착지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
2022년 5월 대선을 생각하면 이번 사퇴 선언이 신의 한 수가 되는 것이구요. 국정조사와 특검이 마무리되려면 적어도 수개월이 걸릴테고 2021년이 어느 시점에선 어차피 시장직을 조기 사퇴해야 할테니. 시장직을 대선의 발판으로 이용했다는 야권의 공격도 차단할 명분이 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럴 듯한 가설이군요.
제가 기사를 통해 이 파일을 공개한다면 그 땐 정말로 시장님의 각본대로 움직이는 셈이 되겠지요.
...
그렇다고 제가 파일을 공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도 시장님은 너무 잘 알고 계실테구요.
그 건 왜 그런가요.
이미 시장님의 수중에 파일이 들어갔으니까요. 제가 안하면 다른 기자의 손에 그 파일이 전달되겠죠.
민 시장은 한동안 주승우를 응시한 뒤 입을 열었다. 주 기자. 내가 이 파일을 다른 기자의 손에 넘기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강태우 사장도 주 기자를 통해 이 파일이 세상에 공개되길 바랄 겁니다.
파일의 주인이 강태우 사장이란 걸 어떻게 아십니까? 저는 얘기한 적이 없는데.
어제 아침. 차이나게이트 기사가 처음 나간 뒤 강태우 사장이 공관으로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저 또한 차이나게이트의 피해자란 사실을 입증할 파일을 갖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 사실을 알고도 사퇴선언을 하신 겁니까? 도대체 왜.
주 기자가 이미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사퇴선언을 한 것이라는 게 더 정확하겠지요.
정치를 위해 만들어진 인공지능 같군요. 인간성은 모두 증발해버리고 목적달성에 충실한.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주 기자. 하지만 사람들이 한 가지 간과하는 게 있습니다. AI는 인간의 사고 알고리즘을 본따 만든 시스템에 불과합니다. 목적지향적인 것은 비인간적인 게 아닙니다. 극단적으로 인간적인 것입니다.

4장: 미스터H (4-1/5)...지수의 피눈물

# 당산동 막다른 골목길. 가을 문턱 정오의 햇볕이 뜨겁다. 임차인들이 떠난 재개발 철거직전 건물들은 온기가 식어 싸늘하다. 상가 셔터는 동내 불량배들의 발길질에 허리가 구부러지고, 2층 유리창들은 온전한 것을 찾기 힘들다. 드나드는 바람에 모자이크 조각처럼 달라붙은 당구장 마크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대낮인데 귀신이 튀어나올 듯 음산한 골목길 한 귀퉁이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를 따라가면 지하실로 이어지는 계단과 만난다. 밀폐된 지하 공간은 마치 앰프처럼 악다문 어금니 틈 사이로 새나오는 얇은 소리를 증폭시킨다.

퍽. 퍽. 퍽... 지하실 회색 콘크리트 바닥은 습기에 젖어 검은색을 띤다. 곰팡내 나는 바닥을 두 발로 떡하니 디디고 체중을 실어 날리는 주먹이 지수의 얼굴에 부딪힐 때마다 유리창이 퍽퍽소리에 바르르 떨린다. 검정색 가죽구두에 검정색 기지바지를 입은 사내는 검정색 가죽점퍼를 입고 검정색 가죽 장갑을 꼈다. 축축한 지하실 바닥에서 스멀스멀 일어서는 저승사자 같다. 장갑은 지수의 아구에서 터져나온 붉은 피에 검은색을 내줬다.
거지 새끼를 사람처럼 만들어줬으면, 은혜를 갚아야지 이 새끼야. 퍽. 퍽. 퍽... 저승사자는 몇대를 때렸는 지 숫자가 생각나지 않을 때 쯤 간간히 한 마디씩 내뱉으며 주먹질을 한다. 피에 젖은 장갑이 미끄러운 지 간혹 왼쪽 손바닥으로 피를 닦아낸다.
바위 같은 주먹에 연타당한 지수의 입술은 부어올랐다 터지고, 피를 쏟고 쪼그라든 뒤 다시 부어올랐다. 광대뼈를 견디지 못하고 찢어진 살점은 연이어 날아오는 주먹에 터져 너덜너덜하게 짖이겨졌다. 눈누덩은 퉁퉁 부어오르고 흰자위까지 검붉은 선지빛을 띤다. 지수는 이제 날아오는 주먹을 피하지 않는다. 피할 수도, 피할 이유도 없다. 증오와 원망, 그리고 그리움이 뒤섞인 눈빛이 피눈물에 젖어 뚝뚝 떨어진다.
어이. 차 사장. 그렇게 때리면 사람 죽어요. 지하실 한 귀퉁이 의자에 앉아 시종일관 지켜보던 알마니 스트라이프 수트의 남자가 일어선다. 씩 웃어 올라가는 입꼬리를 뚫고 나오는 누런 금니가 사악한 기운을 뿜는다. 포마드 기름으로 단정히 빗어넘긴 복고풍 머리에 금테 안경을 낀 남자. 여드름 자국에 얼굴 곳곳이 패였지만 잘 가꾸어진 남자의 얼굴이다.
아무리 깡패지만 자기 새끼를 패 죽이면 되나. 안 그래 차 사장? 그 창녀같은 년이 진짜 차 사장 씨를 밴 건지는 몰라도 지 새끼라고 거두었으면 어찌됐든 잘 키워야지. 그러니까 너희 들이 천륜도 모르는 양아치란 소리를 듣는거 아냐.
창녀란 소리에 장경주를 쏘아 보는 지수. 힘없이 고꾸라진 고개를 꼿꼿하게 들면서 목에 핏대가 툭 튀어나올 듯 일어선다.
개 새끼. 눈깔에 힘주는 것 보소. 그래도 아들 새끼가 애비보다는 낫네. 지 애미년 창녀라고 했다고 지금 눈깔을 씨부라리는 거 아니냐고.
쩍. 눈깔 풀어 이 개새끼야. 지수의 뺨을 후려갈기는 장경주. 씨발. 애를 도대체 얼마나 때렸길래 살이 너덜너덜하네. 내 손에 살이 붙겠다 붙겠어. 쩍. 쩍. 쩍... 차지창을 비아냥거리며 장경주는 계속해 지수의 뺨을 날린다. 살점이 떨어져나가는 고통에 온몸이 나른해지는 데 장경주를 쏘아보는 지수의 눈빛엔 오히려 날이 선다.
퍽. 퍽. 퍽... 매타작은 맞는 쪽이 설사 연기라도 몸부림을 쳐야 때리는 맛이 나는 법이다. 맞는 쪽이 기가 죽지 않으면 때리는 쪽이 기가 질린다. 장경주는 오기가 나 주먹질을 시작한다. 퍽. 퍽. 이 개새끼. 아직도 네가 무슨 짓을 했는 지 감이 안오지. 어 이 새끼야. 퍽. 퍽. 퍽... 기자 나부랭이 하나 처리 못하고 형사를 죽여 이 사단을 내냐고 이 새끼야.
장경주의 주먹은 전혀 아프지 않다. 입술이 터져 비틀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너덜해진 마당에 몇대의 주먹을 더 받아낸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지수를 정작 아프게 한 건 장경주의 옆에 무기력하게 서 있는 차지창이다. 차지창에게 버림받은 어머니는 술독에 빠져 지내다 지수가 일곱살 때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순간 어머니가 지수의 손에 남겨준 건 차지창이란 이름과 주민번호가 적힌 사진 한장이었다.
지수는 열다섯살에 원장 아들을 칼로 찌르고 고아원에 불을 질렀다. 원장 아들이 지수가 친누나처럼 의지했던 원경을 겁탈하려 했던 것이다. 원경은 지수보다 한 살이 많았고 원장 아들은 지수보다 한 뼘이 컸다. 원경의 증언이 참작돼 지수는 소년원에서 3년을 지내고 출소했다. 사복을 입고 나온 지수는 곧바로 차지창을 찾았다. 자신과 어머니를 버린 비정한 아버지에게 망가진 아들의 모습을 보이는 건 지수 나름의 복수였다. 차지창은 세살때 마지막으로 본 아들을 첫 눈에 알아봤다. 우수에 찬 눈매와 골격이 그 나이때 자신을 빼다박았기 때문이다. 일그러진 부정은 15년 만에 만난 아들을 거두어 살인 청부업자로 만들었다.
한참 주먹질을 하던 장경주는 분이 풀린 것인지 지친 것인지 손수건을 꺼내 주먹에 묻은 피와 살점을 닦는다. 아이 씨발 내 주먹이 까진 줄 알았네. 야 이 새끼야. 참 이 새끼 이름이 뭐라고 했지? 차 사장 이 새끼 이름이 뭐냐고 내가 묻잖아.
지수입니다. 높낮이가 없는 목소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다. 두손을 모으고 선 채다.
어 그래. 차지수. 이 개새끼야. 내 말 잘 들어. 너는 오늘밤 평택항에서 배를 타고 중국으로 가는거야. 이 땅에 다시는 발 붙일 생각 하지마. 지금 너 때문에 몇 사람이 위험해진 줄 알아?
너희 부자겠지. 장중경과 장경주.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쏘아본다.
지금 네가 걱정하는 거. 그거 너희 부자 뿐이잖아. 불어터진 입술이 굳은 피에 붙어 채 떨어지지 않는다.
어 그래. 너 말 잘했다. 이 새끼. 그럼 내가 이 판국에 너희 부자까지 걱정하리? 지금 그 얘기 하는거야? 야 차지창이. 너 지금 이 새끼 하는 말 들었지. 거지새끼들 거두어서 사람처럼 살게 해주니까 이제와서 주인을 물겠다는 거 아냐. 이래서 머리검은 짐승 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옛 어른들이 말씀을 한 거야. 이 씨발. 흥분한 장경주 주변을 두리번 거리더니 구석에 놓인 각목을 발견한다.
개새끼들은 몽둥이가 약이야. 장경주가 각목을 휘두르려는 순간 순식간에 날아온 주먹. 선수를 친다. 너 이 새끼. 입 안다물어. 부릅뜬 차지창의 두 눈이 지수를 노려본다. 지수의 눈가에 고인 핏방울이 눈물에 밀려 흐른다. 멱살을 잡은 차지창의 두 손. 지수가 처음 느낀 아버지의 손길이다.
어쭈. 이 새끼들 이제 쌍으로 생 쇼들을 하시네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건가. 지 새끼를 밴 여자를 버린 새끼가, 18년만에 찾아온 아들을 살인자로 만든 새끼가, 이제와서 가슴속에 파묻었던 부성이라도 발견하신건가. 그런건가 차사장? 장경주가 휘두른 각목에 뒷통수를 맞은 차지창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진다. 개새끼면 죽을 때까지 그냥 개새끼로 살아 이 새끼야. 왜 이제와서 사람 흉내를 내고 지랄이세요. 경련에 온 몸이 떨리는 차지창에게 장경주는 멍석말이를 하듯 매질을 했다.
그만해 이 개새끼야. 매질 소리에 희미해진 지수의 목소리에 장경주가 뒤를 본다. 뭐라고? 귀에 손을 갖다 대는 장경주.
중국에 갈께. 그만하라고. 남은 힘을 다해 소리를 내뱉는 지수. 입 속에 고인 피가 튄다.
야 이거. 눈물 없인 못봐주겠어. 각목을 콘크리트 바닥에 끌면서 장경주는 터벅터벅 지수에게 온다. 늘어진 지수의 목을 머리칼을 잡아당겨 젖힌다. 부릅뜬 눈으로 지수를 노려본다. 퉁퉁부은 둔꺼풀을 뚫고 나오던 지수의 안광은 패배감에 꺼졌다.
그래. 중국으로 가. 그 게 너희 부자와 우리 부자가 다 같이 사는 길이야. 그래도 차 사장과 내가 지난 세월이 있는데 먹고 살게는 해줄께.
한 가지 조건이 있어.
아 이 새끼가 피날레는 그래도 인간미 있게 하려고 했는데 끝까지... 조건 같은 건 네가 줄 게 있을 때 제시하는 거지. 지금 아쉬운 게 누군데. 주제도 모르고. 상황도 모르고. 너희가 그래서 이런거야.
그럼 그냥 죽여. 내 발로 중국행 배를 타는 일은 없을꺼야.
아 요 여우같은 새끼가... 그래 일단 들어나보자. 조건이란 거.
장중경. 그를 만나게 해줘.

4장: 미스터H(4-2/5)...따바이투나이탕

# 주승우가 서울시청으로 달려간 뒤 이테라는 장중경 의원의 운전기사 행방을 수소문했다. 강태우 사장이 건넨 USB에 담긴 녹음 내용이 대부분 장중경의 차 안에서 이뤄진 점을 감안할 때 운전기사가 관련됐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점심시간이 다 돼 이테라가 찾아간 곳은 태평로 한국중공업 본사 사옥 인근의 진주식당이란 콩국수 가게였다.

여름 끝자락인데도 가게 안은 콩국수를 먹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가게에 들어선 이테라는 국회 입법조사관으로 일하는 대학 동기가 카카오톡으로 보내준 사진 속 인물을 찾았다. 이테라의 눈에 한구석에서 혼자 국수를 먹고 있는 60대의 사내가 들어왔다. 머리가 9할은 빠지고 머릿가죽은 검버섯으로 거뭇했다. 남은 1할의 흰머리가 검은 기와지붕 위에 쌓인 눈처럼 뒤덮힌 사내는 실제 나이보다 훨씬 늙어보였다.

장중경 의원의 기사시죠? 이테라는 사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 편에 서서 말을 건넸다.
삼키던 국수를 입에 문 채 장 의원의 운전기사는 이테라를 응시했다.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다. 뉘슈? 노인은 퉁명스럽게 답을 했다.
이테라라고 합니다.
이름을 물어본 게 아니잖수. 낯선 방문객이 달갑지 않은 노인의 말투는 퉁명스러웠다. 텁텁한 콩국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지능범죄수사대 팀장입니다. 처음부터 신분을 밝히는 게 좋다고 이테라는 생각했다. 타인을 경계하는 사람에겐 정면 승부를 하는 게 낫겠다는 계산에서다. 돌려 말하는 것은 오히려 경계심만 키울 수 있다.
형사님이 무슨일로 찾아왔는 지 모르겠소만 나는 할말이 없수다. 노인은 절대 넘어오지 말라는 투로 선을 그어버리고는 이내 국수를 먹는 일에 열중했다. 후룩 후루룩. 삼복더위가 지났는데 시원한 콩국수 국물은 보는 사람까지 시원했다. 참 맛깔나게도 먹는다. 이테라는 그렇게 생각했다.
변만섭씨가 위험합니다. 이테라는 앞뒤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작전은 적중했다. 노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음이 동했다는 의미다. 노인은 젓가락을 김치 그릇 위에 내려 놓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만섭이가 위험하다니. 이테라는 기다렸다는 듯 테이블의 맞은 편 의자를 빼 앉았다.
장중경 의원은 얼마전 운전기사인 변만섭을 해고하고, 정원관리를 하던 김태곤을 기사로 쓰고 있었다. 운전기사가 USB를 녹음한 게 맞다면 시기적으로 김태곤이 아니라 변만섭인 것이다.
아직 확실치는 않아요. 하지만 제 생각이 맞다면 변만섭씨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뭔소리를 하는 거요. 목숨이 위험하다고 하더니 이제와서 확실치 않다고 하질 않나. 에이참 국수맛만 떨어지네. 김태곤은 짜증이 난 듯 얼꿀을 찡그렸다. 김태곤과 변만섭은 십수년간 장중경을 위해 일하면서 호형호제하는 사이로 지냈다. 성격이 괴팍한 장중경이 때때로 부리는 행패만 아니면 60이 넘은 나이에도 내치지 않는 게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러던 중 변만섭이 최근 돌연 해고를 당한 것이다.
변만섭씨가 세상이 알아서는 안될 장중경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장중경도 알게됐습니다. 그 다음은 김 선생님도 짐작하실 겁니다.
만섭이가 무슨 비밀을. 그 무지렁이가. 무슨 말같지도 않은... 김태곤은 말끝을 잇지못했다. 변만섭이 위험하다는 말에 온 정신이 집중됐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나요. 변만섭이 위험하다는 말에 김태곤 마음의 빗장이 살짝 풀었다. 20년지기가 옆에 없으니 딱히 사는 낙이 없던 그였다.
어떻게든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사람 죽이는 건 아무 것도 아닌 사람들이에요.
가끔 포악하긴 해도 우리 의원님이 사람을 죽일 사람은 아닌데. 살짝 연 빗장 사이로 김태곤은 얼굴만 빼꼼 내밀고 아직 발을 완전히 떼지 못했다. 이테라에 대한 경계심이 완전히 풀어진 것은 아니었다.
강태우 사장님 아시죠?
잘 알죠. 우리 강사장님이야.
어젯밤에 돌아가신 거 아세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달초에도 얼굴을 뵜는데요 강 사장의 소식에 김태곤은 정말 놀란듯 했다. TV 뉴스에도 난 사실을, 세상이 떠들석한 사건을 김태곤은 전혀 알고 있지 못한 것이다.
어젯밤에 칼에 찔려 돌아가셨어요.
에구 어쩌다 그런... 법 없이도 사실 분인데. 김태곤은 혀끝을 차며 안타까워했다.
차지창 사장의 아들, 차지수가 범인이에요. 물론 그는 차지창이 시켜서 한 짓이고. 그 다음은 뭐겠어요.
도대체 왜요. 그 착한 분을 무엇 때문에 그렇게 끔짝하게 죽였단 말입니까.
변만섭씨가 알고 있는 비밀을 강태우 사장에게 넘겼으니까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이테라는 그렇게 단정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제가 뭘 도와 드려야 하나요. 저 또한 늙은 무지렁이에 불과한데.
변만섭씨에게 위험하단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지금 계신 곳은 어디든 위험해요. 장중경이 알고 있을테니까요.
제 전화도 받지를 않습니다. 마음의 상처가 컸는지 의원댁 사람들 전화는 누구라도 받지를 않아요. 그래도 십여년간 가족처럼 지냈던 사람들인데.
일단 문자라도 남겨야 해요. 제 짐작대로면 한시가 급한 상황이에요. 변만섭씨가 사는 곳 혹시 알고 계세요? 이테라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집도 절도 없어요. 그 나이에. 안암동인가 어디 여관에서 산다고 들었는데. 의원댁에 골방이 몇개 있는데 쓸데없이 신세지기 싫다고 절대 자는 법이 없었어요. 아무리 늦어도 꼭 퇴근이란 것을 했죠. 그 주제에 괜찮은 여관일리도 없고 보나마다 어디 싸구려 연인숙쯤 되겠죠. 쥐오줌에 천정이 너덜너덜한.
여관 이름은 모르세요? 안암동에 여관을 모두 뒤지기엔 물리적으로 시간이 촉박했다. 경찰청 클루에 변만섭의 동선 추적을 의뢰할 수도 있는 일이다.
동네 이름하고 비슷했어요. 여관 이름이. 그 뭐더라. 안암동이니까 안암여관이었나.
안암여관요?
그 건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세글자였더 거 같은데.
혹시 안암장 아니에요?
아 맞다. 안암장.
이테라는 육중환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육 형사님 지금 바로 안암동에 있는 안암장으로 출동해 주세요. 변만섭씨가 그 곳에서 장기투숙 중이에요. 지금 바로요. 전화를 끊은 이테라는 김태곤의 핸드폰을 받아 변만섭에게 문자를 보냈다. 문자를 확인하는 즉시 안암장을 나와 지수대로 오란 내용이었다. 일단 급한대로 조치는 취했으나 장중경쪽이 손을 쓰기 전에 이쪽 손이 먼저 닿아야 한다. 일각에 한 사람의 목숨이 달렸다. 이테라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시계를 보는 이테라.
변만섭씨는 무슨 일로 그만두신건가요? 진작에 해야했을 질문이다. 이테라는 김태곤의 마음을 여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썼다고 생각했다.
국수좀 먹어도 되겠습니까? 이게 불면 맛이 없어서. 김태곤도 일단 안심이 됐는지 국수타령을 한다.
네. 그럼요. 죄송해요. 제가 식사를 방해하고 있었네요.
지금 내 배불리는 게 중하겠소만, 배가 고프긴 하네. 나이가 들면 밥심으로 사는 거거든. 국수 한젓가락을 뜨는 김태곤. 불은 국수가락이 서로 달라붙어 한 젓가락이 제법 큰 덩어리로 올라온다. 진한 콩국물이 뚝뚝 떨어진다.
사탕 하나 때문에 그 사단이 났지. 혈육이 뭐라고. 지 손주놈 이쁘면 다른 사람 귀한 줄도 알아야지. 말이 한번 트이자 김태곤의 입은 열차처럼 달렸다.
사탕하나 때문이라뇨.
장 검사님. 의원님 아드님 말이에요.
네.
검사님에게 늦둥이 아들이 하나 있어요. 딸만 내리 둘을 낳고 나온 아들이라 의원님이 애지중지했어요. 3대독자니 그럴 수도 있지. 세상을 다 가진 양반도 결국 지 죽고나면 제삿밥이 제일 걱정이지.
그랬군요.
한 일주일 됐나. 만섭이가 어디서 났는 지 중국 사탕을 한 봉다다리 갖고 왔어요. 의원댁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일일히 하나씩 돌렸지. 그 무지렁이가 그런 놈이야. 사탕 하나도 혼자 두고 먹는 법이 없었으니까.
중국 사탕요?
그랬다니까. 봉다리에 토끼가 그려진 사탕인데 연유가 들어있어 제법 달달하고 맛이 있었어. 따발총라이타인가 뭐인가. 아무튼 나 같은 놈이 중국말을 아나.내 귀엔 그냥 따발총라이타라고 들리더라고. 에이 그 게 중한게 아니고. 암튼 그날 그 손주가 장 의원댁에서 놀고 있었거든. 장 의원이 보고싶다고 하니까 검사님이 기사를 시켜서 애만 보낸거야. 자기하고 며느리는 동창회 모임에 간다고. 장 의원, 그 일로 심기가 별로 좋지 않았어.
그런데요.
아 그날 강태우 사장님도 의원댁에 왔었어. 뭔지는 모르겠고 심각한 얘기들을 하는 것 같더라고. 노인네 눈치를 보니. 이래저래 심기가 불편했지 그 양반.
사탕 때문에 사단이 났다는 건 무슨 말씀이세요? 이테라는 김태곤의 말이 곳곳에서 삼천포로 빠지는 게 못마땅했다. 마음이 급했다.
만섭이가 그 손주에게 사탕을 하나 줬거든. 만섭이도 강 검사님 아드님을 예뻐했어. 사탕 하나를 챙겨서 마루에서 놀고 있는 검사님 아드님에게 건네는 데. 의원님이 서재에서 강 사장님과 나오다 그 모습을 보고는 다짜고짜 골프채로 만섭이를 후려친거야.
아니 왜요.
낸들 그걸 아나. 강 사장님이 말렸기에 망정이지 그 자리에서 송장치르는 줄 알았다니까. 귀신이 씌운 것 같았어. 정말 미치광이같았다구. 장 의원님 그 때 그 눈빛 말이야. 나중에는 막아선 강 사장님까지 내려치려하더라고.
트라우마였다. 특정 상황이 애써 묻어둔 기억을 끄집어내 방아쇠를 당긴 것이다. 일단 방아쇠가 당겨지면 겉잡을 수 없게된다. 변만섭씨가 손주에게 중국 사탕을 주는 장면이 장중경의 트라우마를 자극했던 것이다.
이제 남은 건 그 장면속의 무엇이 방아쇠를 당겼는 지 특정하는 것이다. 변만섭씨가 무엇을 손주에게 준 자체일까. 아니면 준 것이 사탕이란 게 문제였을까. 그도 아니면 중국사탕이 방아쇠를 당긴 것일까. 이테라는 머릿속에 장면을 그리고 장면속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조합해 모든 경우의 수를 나열했다. 변만섭과 손주, 사탕 등은 장중경이 일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해답의 실마리를 지고 있는 키워드일 가능성이 높았다. 중국사탕이 장중경의 어떤 기억을 끄집어낸 것일까. 이테라는 국수를 후루룩 삼키는 김태곤 앞에서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4장: 미스터 H(4-3/5)...레드카펫의 악마

# 이테라 팀장의 전화를 받고 육중환 형사는 곧바로 안암장으로 향했다. 내비게이션이 안내한 곳은 안암동 로터리에서 고려대 공대쪽으로 올라가다 만나는 오른쪽 골목길이었다. 골목길 문턱에 차를 세운 육중환은 안쪽 안암장 간판을 확인하고 차 와이퍼에 명함을 꽂았다. 차키를 골목길 코너 편의점 아르바이트에게 맡기며 단속이 나올 경우 차를 빼달라고 부탁했다. 명색이 지수대 형사가 불법주차 딱지를 떼는 건 체면 깎이는 일이었다. 아르바이트는 편의점 밖에 세워진 빨강색 아반떼와 육중환을 번갈아 쳐다봤다. 웃음을 애써 참는 모습이 왠지 차와 주인이 안어울리다는 표정이었다. 안암장 간판에는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목욕탕 마크가 달려있었다. 간판의 그림과 필체는 옹색하기 짝이 없었다. 주인장이 직접 페인트로 그려넣은 듯한 간판 글씨는 시간에 낡고 헤져 제멋대로 일어서며 파도타기를 하고 있었다. 다음차례에 일어설 페인트는 이미 낡고 헤어져 제 역할을 하지 못할 듯 해보였다.

계세요? 여관에 들어서며 육중환은 주인장을 찾았다.
대실이죠? 주인장의 아들뻘 쯤 되는 청년은 얼굴을 빼꼼 내밀어 육중환을 보고는 대뜸 물었다. 껌을 딱딱 씹는 모습이 대낮에 여관방을 찾는 떡대의 목적은 뻔한게 아니냐고 웅변하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고...죄진 것도 없는 데 육중환은 자기도 모르게 변명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여자 필요해요? 여기 그런거 안한지 오래됐는데. 청년의 그윽한 눈꼬리가 육중환을 찌른다.
그런 거 아니고. 여기 장기투숙객 중에 변만섭씨라고 있지? 육중환은 지수대 신분증을 청년에게 내민다. 전세가 역전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지금 내가 이 꼬맹이 녀석과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거지. 육중환은 갑자기 그런생각이 들었다. 웃음이 나왔다.
짭새면 진작 말씀을 하시죠.
어린 놈이 말 폼새는. 짭새가 뭐냐 짭새가. 지수대 형사에게.
지수대 형사면 뭐 짭새 아니고 잡새인가.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야. 나 지금 바빠.
근데 아까부터 왜 반말이세요. 형사면 아무한테나 반말해도 괜찮은거에요?
변만섭씨 방 몇호실이야. 단호해진 육중환의 말투는 상황을 본론으로 돌려놓기 위한 의도였다. 더 이상 여관집 주인아들과 노닥거릴 때가 아니었다.
변만섭씨란 분은 안계시는데요. 아니 변만섭씨건 아니건 장기투숙객이 없어요. 요즘 누가 여관에서 장기투숙을 해요. 여긴 그냥 대딩들 치러 오는데라구요. 떡이나 카드.
확실해? 투숙객 중에 이 사람 본 적 없어? 육중환은 이테라가 전송해준 사진을 청년에게 보여준다. 여기 오른 쪽 이 사람. 똑바로 좀 봐봐. 사진 속에 김태곤과 변만섭이 나란히 서 있다.
오른쪽이건 왼쪽이건 장기투숙객 없다니까요. 대실하면 몇배를 버는 데 왜 헐값손님을 받아요. 리모델링에 얼마를 들였는데. 여관집 아들은 나름대로 경영의 개념을 갖고 있었다.
이테라 팀장은 분명히 안암장이라고 했는데. 이테라에게 전화를 거는 육중환. 팀장님 변만섭 묵는다는 여관이 안암장 확실해요? 지금 여관인데 장기투숙객 자체가 없다는데.
본관 정문앞에 안암장이라고 여인숙이 있어요. 육중환의 전화 목소리를 듣고 끼어드는 청년. 코딱지를 파 손가락으로 퉁기는 게 귀찮다고 항변하는 듯 하다.
안암장이 또 있다고?
그렇다니까요. 고대 주변에 안암장이 총 세 개에요. 중국집까지.
아뿔싸. 육중환은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불행은 때때로 레드카펫을 깔고 등장을 예고한다. 불량 청년 앞에서 흘려보낸 10여분이 어떤 사람에겐 운명을 가를 시간일 수도 있다.
이런 씨발. 팀장님 안암장이 또 있다고 하네요. 가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서둘러 통화를 끝내고 골목길을 빠져나온 육중환. 차창에 붙은 불법 주차 딱지를 보고 속이 뒤집힌다. 편의점으로 달려들어가 아르바이트에게 차키를 가로채듯 갖고 나왔다. 이미 업질러진 물이었다. 불길한 예감이 레드카펫을 밟는다.
안암장 여인숙은 내비게이션에 뜨지않았다. 카카오내비를 켜봐도 마찬가지였다. 육중환은 고대 정문앞 갓길에 차를 세우고 지나는 학생들에게 길을 물었다. 길 건너 골목길을 들어서 몇번이고 코너를 돌아 마주한 건 3층짜리 허름한 여인숙이었다. 현관 깨진유리를 녹색테이프로 덕지덕지 붙여놓은 게 그리 영업이 잘 되는 곳은 아닌 듯 했다. 건물 코너의 배수파이프는 2층 언저리에서 이음새가 떨어져 바람에 끼익끼익 소리를 내며 덜렁거렸다. 지수대에서 무감각의 대명사인 육중환이지만 해도 너무한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데도 사람이 자나. 아니 사나. 육중환은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여인숙의 문을 열었다. 주인아줌마로 보이는 중년 여자는 양푼이를 가랑이 사이에 끼고 열무김치며 두부며 김이며 닥치는대로 넣어버린 비빔밥을 맛깔나게 먹고 있었다. 인터넷 방송엔 막장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남자주인공 앞에서 오열한다. 저런 저런 쳐맞아도 싸지. 바람피는 것들은 죄다가 거시기를 잘라버려야 돼. 감정이입이 지나친 주인장은 손가락으로 싹둑하는 시늉을 한다.
흐흠. 지나가는 과객이 주인장을 부르듯 육중환은 헛기침을 했다. 한참 재미난 순간인데 갑작스럽게 끼어든 불청객이 주인장은 달갑지 않다. 주무실 꺼에요 쉬실꺼에요? 여자는 못불러드려요.
아이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요구하지도 않은 것에 대한 거절에 육중환은 화가 났다. 불량 청년도 막장 드라마 아줌마도 왜 자꾸 자기를 백주대낮에 그런 짓꺼리나 하고 다니는 한심한 놈으로 보는 것일까. 육중환은 얼굴을 찡그리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다.
주무실꺼면 2만5천원이에요.
여기 장기투숙객 받아요?
얼마나 묵으실꺼에요? 월 30만원이에요. 주인아줌마의 눈은 여전히 TV에 고정됐다. 입안에는 한껏 집어넣은 비빔밥이 분쇄되고 있었다.
그게 아니구요. 여기 투숙객 중에 변만섭씨라고 있죠?
주인아줌마는 그제서야 육중환을 쳐다본다.
변만섭씨라고 장기투숙객인데...
누구신데요? 말이 퉁명스럽고 짧다. 밥풀이 튄다.
주인아줌마는 육중환이 내민 신분증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본다. 형사셨어요? 범인이 아니고라는 표정이다.
형사 맞다니까. 한두번 당하는 일도 아닌데 그 때마다 화가난다. 덩치에 비해 섬세한 데가 있는 육중환이다.
근데 투숙객 정보는 드리면 안되는 거 아닌가. 개인정보보호 차원에서. 막장 드라마에 열광했던 아줌마가 돌 연 개인정보를 들먹인다. 어이가 없네. 육중환은 생각했다.
아줌마. 지금 빨리 이사람 찾아야 해요. 안그럼 죽을 지도 몰라. 아줌마가 책임질꺼에요?
끼익. 순간 육중환의 뒤에서 현관문 열리는 소리가 난다. 170cm 정도의 키에 헌팅캡을 눌러쓴 남자는 검은 비닐 봉투를 들었다. 삐져나온 모양으로 보아 소주한병과 컵라면 두어개가 들어있는 듯 하다. 옷이 낡기는 했지만 제법 깔끔한 모습이다. 육중환은 머리에서 발끝까지가한 번 쭉 훑어 본다.
고양이도 제 말하면 온다더니.
호랑이에요 아줌마. 순간 육중환의 시선은 현관앞을 지나간 헌팅캡 쓴 남자를 쫒는다. 저 분이에요?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는 주인아줌마. 눈치를 살핀다.
변만섭씨. 자신을 부르는 소리는 사내를 세웠다. 낯선이의 부름에 전혀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서너걸음 다가가 신분증을 내미는 육중환. 지능범죄수사대의 육중환이라고 합니다. 공손히 제 소개를 한다.
형사님이 나같은 늙은이를 무슨일로 찾으시는 지.
강태우 사장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장중경 쪽 소행이구요.
강 사장님께서? 변만섭은 놀라는 기색이 역력했다.
차지창이 자객을 보냈습니다. 어르신도 위험합니다. 빨리 피하셔야 합니다.
나같은 놈이 세상에 무슨 미련이 있겠소. 죽지 못해 사는 데 죽여주면 감사하지. 형사 양반 아무 걱정하지 말고 그냥 가소. 변만섭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눈하나 깜짝 않고 사람을 죽이는 자들입니다. 강 사장님 뿐 아니라 ST공사 노조위원장도, 부위원장도 모두 그들이 죽였습니다.
평생 떠돌며 살았어요. 내 인생에서 장 의원 댁에서 일한 최근 십수년이 꽃이지. 다른 사람들에게 어쩐지는 몰라도 내게는 고마운 분이에요.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나 한잔 하고 가시오. 변만섭은 돌아서서 계단을 오른다. 그의 방은 2층 복도 제일 끝방이었다. 한평 남짓 크기에 5단 서랍장 하나와 비닐 옷장 하나, 야상 침대 하나가 그가 가진 전부였다. 변만섭은 커피포트 플러그를 꽂고 종이컵 두개를 꺼냈다. 하나에는 맥심 믹스커피 끝을 가위로 잘라 조심스럽게 부었다. 나머지 하나에는 소주를 가득 채웠다.
근무중이니까 술은 마시면 안되겠지? 변만섭은 종이컵 가득 소주 한잔을 단숨에 들이켰다. 잠시만 기다려요 커피물이 곧 끓을거야.
육중환은 침을 꼴깍 삼켰다. 마침 목이 칼칼해 소주 한잔 생각이 간절한데 그래선 안될 것 같은 분위기에 눌렸다. 어르신 지금 이렇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정말 피하셔야 합니다.
그런말 하려면 그냥 가. 죽여주면 나는 좋다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이오 아침에 눈을 뜨는 게 겁이나. 저녁에 잠이 들면서 기도를 하지. 내일 아침엔 눈을 뜨지 않게 해달라고. 눈을 떴는데 딱히 일어날 이유가 없는거. 그게 얼마나 끔찍한 건지 알겠소?
자식들 위해서라도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죠.
허허. 형사님 내 사는 꼴을 보시오. 자식이 있다면 내가 이렇게 살겠소. 저 문만 걸어 잠그면 이 안에서 내가 죽어도 아무도 모른다오.
이런 식의 대화는 더이상 의미가 없었다. 무작정 끌고 나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USB에 녹음된 사람 말이에요. 북한 말투를 쓰던데요. 육중환은 화제를 돌렸다. 지수대로 변만섭을 데려가겠다던 당초 계획은 접었다.
본적은 없어요. 녹음된 것만 들어봤지. 북한 말투 맞아.
직접 말하는 건 본적이 없으시다구요?
그랬다니까. 얼굴도 본 적이 없어. 항상 중절모에 마스크를 하고 있었으니까. 그가 차에 타면 나는 항상 저만치 떨어져 있었어요.
중절모에 마스크요? 육증환은 이테라 팀장이 클루에서 받은 파일 속 남자가 떠올랐다. 김태송이 대방동 중식당에서 만났던 정체불명의 사내가 항상 중절모를 쓰고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녹음은 왜 하신거에요?
하려던 게 아니었어요. 차에 핸드폰이 떨어진 것을 모르고 내렸는데 나중에 보니 녹음이 되 있더라구. 어쩌다 그게 눌렸었나봐. 한번 들어봤어요. 내용이 심상치가 않은거야. 형사님 말대로 북한말투도 섞인 듯 하고. 다음부터는 핸드폰을 차에 숨겨놓고 녹음을 했지. 지나치게 사람을 경계하는 것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러셨군요.
뭘 어쩌겠다는 생각은 아니었어. 좀 수상하다 싶었어. 뭔가 잘 못되가고 있구나란 생각도 들고. 변만섭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의 말은 나름대로 정연했다.
녹음파일을 강태우 사장에게 주신 것은 이유가 있으신가요?
강태우 사장 이름이 나오자 변만섭은 고개를 떨구었다. 참 좋으신 분인데. 내가 죽인 셈이에요. 내가 죽인거야. 그 것만 아니었어도...
어르신 잘못이 아닙니다. 살인자는 장중경이에요. 저희가 반드시 잡을겁니다. 육중환은 이를 악물었다. 수영의 얼굴을 떠올린 것이다.
강 사장님께 혹시라도 필요할까봐. 나같은 무지렁이가 뭘 알겠소만. 최근들어 장 의원댁을 찾아오는 강 사장님의 얼굴이 밝지 않았어요. 뭔가 곤란한 일이 있구나 생각했죠.
강 사장님과는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나같은 놈이 강 사장님 같은 분하고 관계랄 게 있나. 강 사장님이 잘해줬지. 따뜻한 분이었어요. 나 뿐만 아니라 장 의원댁 일하는 사람들 모두 같은 생각일꺼야. 항상 먼저 인사해주시고. 우리같은 사람들 그런 분들이 아는 척이나 하나. 변만섭은 담배를 한 대 물고 비닐 옷장 속에서 유리로 된 재떨이를 꺼내 왔다. 비닐 옷장 안에는 옷이 아니라 책으로 가득했다.
담배를 끊었었는데... 변만섭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지금 죽어도 상관없는 데 사람이란 게 또 그런가봐요. 몹쓸 일을 당하고 나니까 치욕스럽더라고. 화가나고. 죽어도 상관없겠다는 놈이 그런 일로 다시 담배를 피우다니. 알 수 없는 게 사람이지. 한숨인지 담배연기를 내뿜는 것인지 변만섭은 폐부 깊은 곳에서 부터 숨을 끌어올렸다. 담배 연기가 사라지고 다시 육중환의 눈에 들어온 변만섭.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몹쓸 일이란 게... 육중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변만섭은 김태곤이 이테라에게 했던이야기를 그대로 육중환에게 들려줬다. 낡은 티셔츠를 잡아당겨 보여준 변만섭의 어깨와 등은 골프채로 맞아 군데군데 피멍이 든 상태였다. 이렇게 죽을 수도 있겠구나 했어요. 강 사장님이 그 순간 장 의원을 막아서시더군요. 장 의원이 휘두른 골프채에 강 사장님이 머리를 맞았습니다. 장 의원은 그날 정말 악마같았어요. 그래도 피하지 않더군요. 강 사장님은. 나같은 놈이 뭐라고.
이런 개새끼... 육중환은 미친개 한마리가 병아리들을 물어뜯는 장면이 떠올랐다. 안구는 부풀어 오른 실핏줄로 시뻘겋다. 어린 병아리를 유린한 날카로운 송곳니에선 선홍색 피가 뚝뚝 떨어진다. 입주변엔 검붉은 피에 젖은 연노란 깃털들이 덕지덕지 붙어있다. 육중한 앞발에 깔린 병아리는 마지막 숨을 새근새근 내쉬고 있다.
이유가 대체 뭐랍니까.
낸들 알까요. 말그대로 미친개에게 물렸다고 볼 수 밖에요. 제 잘못이면 장 의원 손주에게 중국 사탕 하나를 쥐어준 것 밖에는 없는데요.
중국 사탕요?
변만섭은 재떨이를 꺼낸 비닐 옷장을 열더니 사탕봉지 하나를 꺼내왔다. 봉지에 그려진 흰색토끼가 촌스럽지만 인상적이다. 변만섭은 하나를 꺼내 육중환에게 권했다. 사탕 하나를 받아들고 이리저리 살피는 육중환. 하나 먹어봐요. 보기는 그래도 제법 맛이 좋아요. 변만섭의 권유에 육중환은 사탕 포장을 벗겨 입에 넣었다. 연노란 사탕 알맹이가 어린 병아리 같다는 생각이 든다. 달콤한 유가맛이 입에 번지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간다.
따바이투나이탕(大白兔奶糖)이라고 연유 사탕이에요. 우리말로 토끼사탕이지 토끼사탕. 여기보면 화이트 래빗(White Rabbit)이라고 씌여있잖아. 흰토끼말이야. 변만섭은 국민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지만 다독으로 박학다식한 편에 속했다. 학벌에 대한 컴플렉스를 중독적인 독서로 극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보기엔 이래도 중국에서는 제법 역사가 있는 사탕이라고 하더구만.
맛만 좋은데요. 육중환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손주에게 사탕을 준 게 죽을 죄라도 된 듯 변만섭에게 달려든 장중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사탕을 집어던지더니 나중엔 달려가서 발로 짓이기는 거에요. 변만섭은 손을 떨었다. 당시 상황이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이런 미친 개새끼. 육중환은 다시한번 병아리를 물어뜯은 광견을 생각했다.
2층 계단을 내려오는 육중환은 이렇게 돌아가는 자신이 잘하는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계단을 한걸음 한걸음 내려갈때마다 악마가 레드카펫을 성금성큼 걸어오는 기분이 들었다. 싫다는 노인네를 끌고 지수대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여인숙 현관을 나서는 육중환의 어깨를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옷의 한 남자. 미안하다는 육중환의 말을 무시하고 검은옷의 사내는 휙 하니 여인숙으로 들어가 버렸다. 니미럴. 무거운 기분은 불쾌감에 더 무거워졌다. 그 무게가 발걸음을 잡는다. 흔들리는 현관을 돌아보는 육중환. 클루 파일속의 한 남자와 검은옷 사내의 뒷모습이 오버랩된다. 육중환은 고개를 흔들며 검은옷 사내를 따라 다시 여인숙으로 들어간다. 2층에 올라선 육중환의 눈에 들어온 건 복도끝 변만섭의 방으로 들어가는 검은옷의 사내였다. 레드카펫을 걸어들어온 악마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이런 씨발. 불길한 예감이 현실과 맞닿는 순간 육중환은 변만섭의 방을 향해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문을 열려는 데 안에서 잠겼다. 총지갑에서 총을 꺼내 안전핀을 푸는 육중환. 공포탄 한방을 천정을 향해 쏜 뒤 곧바로 총구를 문고리로 향하고 방아쇠를 당겼다. 두 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린뒤 문고리는 문에 매달려 달랑거린다. 육중환의 발길질에 문은 방 안쪽으로 떨어져 나갔다. 열린 창문에서 복도쪽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육중환의 머리카락이 날린다. 눈을 따시 뜨고 보니 칼을 맞은 변만섭이 숨을 거칠게 몰아쉬고 있다. 어르신. 변만섭을 부르며 육중환이 방으로 달려들어가는 찰라. 손끝하나 움직일 힘이 없는 변만섭은 눈짓으로 방 구석을 가리킨다. 옆을 돌아보는 육중환의 얼굴을 향해 날아오는 칼날. 본능적으로 피한 칼끝은 육중환의 눈앞에서 바람을 갈랐다.
칼끝이 채 멈추기 전에 검은옷의 왼주먹이 육중환을 가격했다. 주먹이 닿는 순간 검은옷의 사내는 육중환에게 수많은 정보를 전했다. 전문가다. 육중환은 자신의 상대가 고도로 훈련된 무관이란 사실을 직감했다. 시정잡배에게선 이런 초식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길거리 잡싸움으로 잔뼈가 굵은 육중환은 잘 알고 있었다. 육중환의 손에 쥐어졌던 권총은 어느 순간 방구석으로 나가떨어졌다. 도무지 정신을 차리기 힘들 정도의 스피드다. 이런 상대와 초근접전에서 이기는 방법을 육중환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바로 한방이다. 날아오는 칼끝은 피하고, 주먹과 발차기는 가드를 치고 대충 맞아냈다. 몸이 날렵하고 스피드로 승부하는 파이터는 주먹과 발차기의 아치가 큰 법이다. 허점을 노리면 반드시 한번은 기회가 온다. 육중환은 가드를 친 두 팔 사이로 상대 어깨의 움직임을 읽는데 온정신을 집중했다. 오른쪽 어깨가 추진력을 얻기 위해 살짝 뒤로 빠지는 순간. 육중환의 주먹이 가드자세에서 반동없이 곧바로 잽을 날린다. 짧게 끊어쳤지만 육중한 무게가 실린 주먹은 검은옷 사내의 턱을 정확히 타격했다. 방바닥에 나뒹군 사내는 반사적으로 일어서 다시 공격 자세를 취한다. 전투로봇같았다.
승산이 없다. 퇴로를 열어주지 않으면 둘 중 하나는 죽어야 끝나는 싸움이다. 육중환은 오른쪽으로 두 걸음 옮기며 문쪽으로 퇴로를 열었다. 자세를 고쳐잡기는 했지만 육중환의 주먹에 턱이 깨진 검은옷의 사내도 같은 방향으로 스텝을 밟으며 퇴각의 기회를 엿본다. 칼날이 날아오는가 싶더니 사내는 어느새 문밖으로 쏜살같이 튀었다.
검은옷의 사내가 복도끝으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하고 육중환은 변만섭의 목에 손가락을 대고 맥을 확인했다. 억지로 끌고라도 변만섭을 지수대로 데리고 갔어야 했다. 불길한 예감은 어째서 언제나 정확히 같은 모습으로 현실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까. 육중환은 레드카펫의 끝에서 악마와 마주했다.

4장: 미스터H(4-4/5)...국정원의 개입

# 지수대로 복귀한 육중환은 구급상자를 챙겨 칼로 베인 상처에 붕대를 감고 있다. 변만섭을 억지로라도 끌고 나왔어야 한다는 자책에 마음이 천근이다. 싸움에서 만큼은 어떤 상대에게도 밀린 적이 없었는데. 검은옷의 사내의 압도적인 기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보건실이라도 가보세요. 그렇게 아무렇게나 방치하면 나중에 고생하세요. 수사에 마음이 급한 이테라였지만 동료를 챙기는 게 우선이었다. 검은옷 사내의 동선이 CCTV에 포착이 됐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도 어지간히 마음이 급했던 모양이다. 이번엔 얼굴이 선명하게 찍혀서 신원파악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꺼에요. 클루의 조사결과가 곧 나올 예정입니다.
제가 상대할 수 있는 놈이 아니었습니다. 고도의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놈입니다. 육중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육 형사님의 잘못이 아니에요. 형사님이 크게 다치지 않은 것만도 다행입니다. 수영이 그렇게 되고 육 형사님마저 잘못됐더라면 더이상은 견디기 힘들꺼에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어디가서 싸움으로 밀리는 놈은 아니니까.
그래도 몸 조심하세요.
걱정말라니까요. 자꾸 그러시니까 꼭 팀장님이 제 마누라나 오누이라도 된 것 같네요. 헤헤. 막상 내뱉고 보니 이상하게 쑥스러운 말이었다. 검게 그을린 육중환의 얼굴이 홍조를 띤다.
참 팀장님.
네.
녹음파일 속의 그 사내 말이에요. 이북 사투리 쓰는.
네.
변만섭 말로는 항상 검은 중절모에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중절모에 마스크라면...
역시 같은 생각이시군요. 이테라와 육중환은 대방동 중국집에서 김태송이 수시로 만난 중절모의 사내를 떠올렸다. 녹음에서도 사내는 대방동에 머물고 있다고 했었다. 둘이 같은 인물이라면 김태송이라는 남자도 장중경 일당의 음모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일까.
팀장님. 저거... 순간 육중환은 TV를 가리켰다. 뉴스에 등장한 검은옷의 사내. 여인숙에서 육중환이 혈투를 벌였던 바로 그 남자였다. 육중환은 리모컨으로 볼륨을 키웠다.
... 이번에 체포된 강석호는 북한 보위부 소속 전직 장교로 2018년까지 중국 베이징에서 핵탄두 제조 관련 재료들을 북한에 반입하는 역할을 했던 인물이라고 국정원은 밝혔습니다. 그는 2018년 5월 횡령 혐의로 평양에 소환되기 직전 영국으로 도피했다 최근 한국으로 망명했다고 국정원은 덧붙였습니다. 이번 사건은 생활고에 시달리던 탈북 고위장교의 비참한 말로로 탈북주민에 대한 정부의 보다 세심한 정책이 절실한 시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입니다. ...
뉴스 자막엔 '생활고에 시달리던 북한 전직 고위장교, 대낮에 칼부림...'이라고 씌여 있었다.
뭐야 이거. 팀장님 이건 아닌 거 같은데요.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생활고에 찌들린 탈북주민의 개인적 원한이 낳은 참사라니요. 저 놈은 장중경 일당의 하수인 아닙니까.
뉴스에선 살인사건이 난 여인숙 여주인의 육성 증언이 나오고 있었다. 모자이크 처리가 되고 음성변조를 했지만 양푼이에 한가득한 비빔밥을 정신없이 들이키던 그 여주인이 틀임없었다. 변**씨가 나갔다 들어오고 난 뒤 검은옷을 입은 남자가 뒤따라 들어갔어요. 요란한 소리가 나서 이상하다 했는데. 얼마후에 그 남자가 나오고... 증언의 여자는 끝내 목이 메였다.
여자의 증언에 육중환과 관련된 대목은 없었다. 검은옷의 사내가 달아나고 과학수사대까지 출동했었는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부서진 문값부터 챙겼던 여자인데. 이런저런 내용들은 뉴스엔 전혀 나오지 않았다.
검은옷 사내의 정체가 밝혀지기 직전 갑자기 등장한 국정원과 짜맞춘 듯한 여인숙 주인의 증언. 쌍팔년도 시국사건을 다룬 영화들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음모의 그림자가 이테라의 눈앞으로 지나갔다.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이테라.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자료를 줄 수 없다니.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카펫을 밟고 현실에 여지 없이 모습을 드러낸다.
짐작했던 대로네요. 클루팀이 자료를 줄 수 없다고 합니다. 윗선의 개입이 분명해요. 더구나 특검이 구성되기까지 저희는 공식적으로는 수사를 중단한 상태니까요.
아니 우리는 국가기관이 아니고 뭐 개인기업입니까? 수사대에 넘길 수 없는 국가 기밀이란 게 도대체 뭡니까? 육중환은 화가 치밀었다. 사건의 실체는 집히기 직전 꼬리를 끊고 달아나버렸다.
순간 울리는 이테라의 핸드폰.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왠지모를 불안감. 이테라는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누구시라구요? 순간 이테라와 육중환의 눈이 마주쳤다.
지수요? 차...지수. 그 지수 말인가요?

4장: 미스터H(4-5/5)...문정민과 마주친 주승우

# 서울시 청사 지하 4층 주차장. 주승우가 기둥에 기대있다. 눈동자가 풀려 멍하다. 멀리 끼이익 주차장 바닥을 마찰하는 소리. 아반떼 전기차가 코너를 돌아 출구 표시가 된 연결통로로 사라진다. 민영우 시장이 탄 서울시 관용차다. 목적지향적 사고가 오히려 극단적으로 인간적이란 민 시장의 말에 주승우는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했다. 주승우가 놀란 건 민 시장의 말이 아니었다. 그 것을 논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다는 게 충격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사람이었구나. 주승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반떼의 뒷꼬리가 사라지고 주승우는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1층 로비로 올라왔다. 커튼월 바깥은 우산을 쓴 행인들로 분주했다. 단비였다. 주승우는 가뭄 끝에 내리는 시원한 비가 반갑지 않았다. 하늘보다 머릿속이 더 우중충했다. 어쩌면 자신은 민영우 시장과 게임을 하고 있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기분 좋게 한방 먹은 셈이었다. 고개를 저었다. 쓴 웃음이 입가에 번졌다.

주승우군 아닌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주승우는 바닥에 꽂아두었던 시선을 들어올렸다. 멍한 안개가 걷히고 서서히 한 노신사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동공이 급팽창하는 느낌. 문정민 교수였다.
... 말 문이 막힌 주승우. 지난 3년간 그를 향해 퍼부었던 수많은 증오의 말들은 실제 그의 출현 앞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정작 머리를 내밀 곳에서 꼬리를 내리는 분노. 그 실체가 과연 무엇인지 주승우 갑자기 혼란을 느꼈다.
잘 지냈나? 가끔 소식은 듣고 있네. 기사도 잘 보고 있고. 훌륭한 기자가 됐더군. 날카로운 분석력도 전혀 바래지 않았고.
이럴 땐 그냥 감사한다고 말해야 하나. 하긴 자신을 기자로 만든 건 결과적으로 9할이 문정민 교수 때문이 아니었던가. 공직에 대한 출사를 포기하게 만든 장본인. 여자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한 빗길 교통사고의 원인제공자. 그 사고로 주승우 자신은 온몸의 뼈가 산산조각이 나고 석달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비만오면 이를 악물고 견뎌야 하는 뼈가 바스라지는 고통. 얼굴을 찡그리면 희미했던 한 인물의 형상이 고통의 끝에서 선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그 게 문정민 교수였다.
괜찮은건가? 왜 이렇게 식은 땀을 흘리는건가.
이마를 손바닥으로 훔치는 주승우. 언제부터였을까. 등줄기를 타고도 땀이 흐른다.
괜찮다면 어디가서 차 한잔 할텐가?
우리가 차를 마실 사이는 아닌 것 같은데요.
감정이 남은 모양이군. 나는 자네와 차를 한잔 하고 싶은데.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의 부탁이라고 하면 어떨까?
잠시후. 주승우는 서울시 청사 지하1층 커피숍에서 문정민 교수를 마주하고 있다. 언젠가 마주치면 시원하게 주먹이라도 한방 날려줄 참이었는데. 막상 얼굴을 마주친 순간 온몸이 바짝 얼어붙다니. 구역질이 났다.
몸은 좀 어떤가. 큰 사고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덕분에 죽지 못해 살고 있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이 마치 남의 말처럼 귀에 들어왔다. 몸서리가 쳐져서 얼굴을 찡그렸다.
역시 나에게 감정이 좋지 않군. 이해 못할 것도 아니지.
이해라고 하셨습니까. 푸풉. 주승우는 헛웃음이 났다. 피해자 앞에서 가해자가 보이는 여유에 치가 떨리는 것일까. 여전하시군요. 세상만사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돈다고 믿는 그 아집 말입니다.
시험에서 떨어진 게 나 때문이라고 생각하겠지. 1, 2차 수석으로 패스하고 사실상 형식절차인 면접에서 떨어진 경우는 극히 드문, 아니 행시 역사상 자네가 처음이었으니까.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다는 말로 들리는 군요.
내가 왜 자네를 떨어뜨렸다고 생각하나?
괘씸죄였겠죠. 수험생이 면접관의 견해를 정면으로 반박했으니까요.
그랬지. 자네는 내 견해를 심지어 무시했어. 하지만 중요한 건 나와 자네의 견해차이가 아닐쎄.
제가 해석을 잘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물론이야. 언젠가 자네를 만나면 꼭 이 부분에 대해 얘기를 하고 싶었네.
말씀 한 번 해보시죠. 도대체 저를 떨어뜨린 이유가 무엇인지. 주승우는 커피잔을 들었다. 겉에 흐르는 차가운 물방울이 손에 닿았다. 긴장을 했던 탓일까. 손바닥에 제법 땀이 맺혔다. 손바닥 한가득 전해지는 시원한 느낌이 좋았다. 애써 묻어둔 나쁜 기억들이 일시에 출구에 몰리면서 머릿속도 상당히 과열돼 있었던 모양이다.
자네는 공무원이 되서는 안될 사람이야.
뻔한 답이었다. 소위 식자란 사람들은 같은 말을 어렵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냥 미운털이 박혀 떨어뜨린 것이라고 하면 될 것을. 억울하고 분하겠지만 차라리 그렇게 말했더라면 나쁜놈이라고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줄텐데. 문정민 이 개새끼는 끝까지 위선의 포장을 뜯지 않고 있는 게 아닌가.욕지거리 한사발 시원하게 먹일 틈마저 주지 않고 있단 말이다.
개새끼. 주승우는 생각한다는 것을 내뱉어 버렸다. 당신은 개새끼야. 명문대 교수에 대통령 특보까지 했으니, 묘비에 새겨넣을 벼슬 한자리는 했으니 자신의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겠지만, 당신은 그냥 개새끼야. 자신의 결정이 누군가를 불행하게 할 수도 있다는 사실. 그 것이 권력의 단맛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부류의 쓰레기란 말이야.
똑똑한 친구인 줄 알았는데. 내가 크게 착각을 했던 모양이군. 어리석기 그지 없어. 자만과 위악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그로 인해 괴로워하고. 자네에겐 분노의 대상이, 저주를 퍼부을 대상이 필요했던 것 아닌가? 내가 가장 쉽게 찾아낼 수 있는 대안이었겠지. 스스로를 속이기에도 논리적인 결함을 찾기 어려울 테니까. 자네 때문에 불행해진 사람에 대한 죄책감도 한결 덜 수 있을 테고.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자네가 그토록 분노한 대상. 그 것은 바로 자신이란 것을. 그 사실을 다른 사람이 알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주승우는 다시 잔을 들었다. 얼음이 녹아 커피는 연갈색으로 흐렸다. 잔을 타고 흐르던 물방울도 냉기를 잃었다. 문 교수의 말은 정곡을 찌르고 들어와 척추를 타고 흪러 발끝까지 전율을 남겼다.
다시 말하지. 자네는 공무원이 되서는 안되는 사람이야. 이번엔 문 교수가 커피잔을 들었다. 한모금 넘겨 목을 적셨다. 공직자에게 국가는 절대적이고 경외스러운 대상이어야 하네. 끝이 어딘 지 모를 존재이어야 한단 말일쎄. 하지만 자네에게 국가는 권력자들의 통치 도구일 뿐이지 않나. 손만 뻗어도 사방이 닿을 듯한 좁은 틀이 아니냔 말이야. 그런 사람이 어떻게 국가를, 국민을 위해 일 한다는 말인가. 자네 말대로 국가는 권력이 만든 환상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공무원이 될 사람은 그 것이 설사 환각이라도 취해 있어야 해. 국가의 존재를 지적 탐구의 대상 따위로 생각하는 자네 같은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할 사명감. 그 것은 결국 그런 최면상태에서 나오는 것이란 말일쎄. 그 게 내가 자네를 떨어뜨린 이유야. 같은 상황이 오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똑같은 결정을 내릴걸쎄. 당시 자네를 떨어뜨린 결정은 오류 가능성이 없는 확신의 결과물이었으니 말이야.

4장: 미스터H (4-6/5)...킨텍스의 설전

# 문정민 교수의 말 마디마디가 비수였다. 베인 심장 사이로 꾹 눌렀던 기억들이 쏟아졌다. 고시 낙방에 밴드 친구들과 퍼마신 독주. 술에 취한 자신을 태우고 빗길을 달리던 약혼녀. 섬광과 굉음 속에서 파괴된 사랑과 꿈. 잃어버린 퍼즐처럼 사라진 3개월간의 기억. 무너진 자존감과 고통에 몸부림치던 재활치료. 모든 것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기억의 단편들이 하나로 엮일 때마다 자책감이 숨통을 조였다. 모든 것은 자신에서 비롯된 부메랑이었다. 무게를 버티려면 비상구가 필요했다. 비겁함의 손을 뿌리치면 두려움의 악마가 손을 내밀었다. 문 교수에 대한 적개심은 주승우의 방어기제였다. 낯익은 진실은 직면하니 낯설었다. 쓴 웃음이 났다.

털썩. 그순간 문정민 교수가 바닥에 쓰러졌다. 찡그린 코끝으로 마지막 정신줄을 잡고 있는 듯 했다. 문 교수는 자켓 주머니에서 약통을 꺼냈다. 억세게 뚜껑을 따자 팝콘이 후라이팬에서 튀듯 알약들이 쏟아졌다. 약들은 저격수를 뒤에 둔 탈옥수처럼 사방으로 구르다 힘이 다하면 쓰러졌다. 문 교수는 손바닥으로 바닥을 쓸어 손안에 잡히는 대로 알약을 입에 털어 넣었다.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커피 잔을 잡으려는 모양이다. 주승우는 관객처럼 보고있다. 자신이 편집한 기억에서 문 교수는 악마였다.
커피잔이 문 교수의 손에서 미끌어져 테이블 위에 나뒹군다. 주승우는 여전히 스크린 앞에 있다. 문 교수는 마지막 힘을 다해 뛴 아테네 병사처럼 다시 쓰러졌다. 막대기로 건드린 쥐며느리처럼 쪼그라들었다.
주승우는 순간 긴박한 현실임을 깨달았다. 황급히 자신의 커피잔들 들어 문 교수 곁으로 다가갔다. 커피숍 직원들은 영문을 몰라 발을 굴렀다. 주승우는 문 교수를 일으켜 입안에 커피를 부었다. 잠시 후 문 교수의 일그러진 콧등이 펴졌다.

112 부를까요? 직원 중 하나가 물었다. 괜찮습니다. 이제 괜찮아요. 문 교수는 바닥에서 일어나 의자에 앉았다. 미안하네만 물 한 잔 갖다줄 수 있겠나. 문 교수의 시선은 바닥에 앉은 주승우를 향했다. 주승우는 말없이 일어섰다. 라임이 담긴 아이스워터를 가져와 문 교수에게 건냈다. 상쾌하군. 문 교수는 태연했다. 익숙한 일 같았다.
묻지를 않는군.
두려워서요.
두렵다?
기대했던 답이 나오면 제가 기뻐할까 두렵습니다.
암이라고 하더군. 요즘은 암도 병이 아닌 세상이라고 하긴 하네만. 살고 죽는 건 아직 인간이 어찌할 수는 없는 문제인가봐. 문 교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죽어가는 노인네의 부탁이란 게 그냥 하신 말씀이 아니었군요.
자네를 만나고 싶었네. 마음만 먹으면 쉽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네만 나도 왠지 쉽지가 않았어.
잠시 고개를 내민 동정심이 분노의 발길질에 나가 떨어졌다.
진심일쎄. 자네가 공직에 맞지않는다는 생각은 변함 없어. 하지만 자네의 통찰력은 잘 다듬으면 상당히 쓸모가 있을 것이란 게 내 생각이었네. 자네가 그날 한 얘기는 정부가 한중, 한미관계를 재정립하는 데 실제 많이 참고를 하고 있네.
누군가에겐 추억인 과거가 다른 누군가에엔 남은 평생을 이고갈 돌덩이인 경우가 있습니다. 내려놓고 돌아서면 여전히 어깨 위에 있는...

# 2017년 9월18일 일산 킨텍스 제1 전시관. 행정고시 3차 면접시험이 있는 날이다. 각 부스앞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수험생들이 줄지어 있다. 정리한 매뉴얼을 마지막 순간까지 챙기는 이들. 수험생들은 하나같이 감색 양복에 흰색 와이셔츠 차림이다. 넥타이만이 남녀를 구분하는 표식이다. 한 머리긴 수험생이 부스로 입장한다. 넥타이를 맸다.

남자인가 여자인가? 면접관 중 제일 연장자가 자리에 앉는 주승우를 시선으로 묶으며 물었다. 혀를 끌끌 차는 소리에 서류에 고개를 묻고 있던 다른 두명의 면접관들이 시선을 올린다.
넥타이를 맨 거 보면 남자인 모양인데. 머리 보면 또 여자같기도 하고. 두번째 면접관도 주승우의 머리 모양이 영 마뜩하지 않다. 한 면접관은 아무런 말이 없다.
남자냐 여자냐에 따라 면접 결과가 달라질 수 있는 겁니까? 피면접자의 입에서 나온 뜻 밖의 대답. 면접관들은 어리둥절했다.
성별에 따라 인터뷰 결과가 달라지지는 않네. 하지만 태도는 당락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도 있으니 명심하게. 마지막 면접관이 입을 열었다. 대통령 정치특보 문정민 교수다.
면접인데 머리가 단정해야 하는 거 아닌가. 연장자는 또 혀를 찬다.
사정이 있습니다.
도대체 뭔가? 눈살을 찌푸렸던 면접관이다.
말은 아니라지만 당락이 제 머리카락 끝에 달려 있는 듯한 분위기군요. 말폼새는 단정하다.
문정민 교수가 상황을 정리하려 나선다. 선배님들 머리 얘긴 접으시죠. 시간이 한정됐습니다.
공무원이 뭐라고 생각하나? 연장자가 마지못해 질문을 던졌다.
권력입니다.
권력을 잡기 위해 공무원이 되려고 한다는 말인가?
네. 권력을 갖기 위해 행정고시를 봤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국가와 국민에게 헌신할 수 있겠나?
국민을 위해 국가 시스템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힘, 그 것이 권력이라고 생각합니다.
허험. 연장자는 헛기침을 했다.
북핵 문제 관련해서 하나 묻지. 아무래도 가장 중요한 현안이니까 말일쎄.
네.
운전대론에 대한 견해를 말해보게.
망상이지만 정치적으로 유용한 프로파간다입니다. 한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문 교수의 입김이 닿은 정책이었다. 그 사실을 모르진 않을 텐데 프로파간다라고 하다니. 문 교수도 당황했다.
이유를 말해보겠나.
실현 가능성이 없다는 점에서 망상입니다. 잘만하면 국민들에겐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는 꽤 이용가치가 있는 선전문구입니다. 내년 6월에 있을 지방선거를 생각하면 특히 그렇습니다.
어째서 불가능한가.
운전대를 잡으려면 우선 목적지와 경로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둘째 제각각의 목적지와 스케줄을 갖고 있는 승객들을 일시에 차에 태워야 하고, 중간에 내리려는 자를 무력화시킬 카드가 있어야 합니다. 기본적으로 운전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 중에 정부가 확답을 할 수 있는 게 있습니까?
정부는 비핵화란 목적지를 정확히 알고 있네. 북미를 중심으로 한 협상 테이블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경로도 알고 있지 않나.
범위가 크면 더이상 타깃이 아닙니다. 북핵을 동결하자는 건지, 폐기하자는 건지 목표를 명확히 해야합니다. 협상이란 해결책은 목적지로 향하는 방향이지 경로가 아닙니다. 경로란 출발점은 물론 핸들을 꺾어야할 수많은 포인트를 구체적으로 나열한 개념입니다. 물론 목적지도 최종 경로에 포함이 되겠죠. 무엇보다 정부는 트럼프와 김정은, 푸틴과 아베를 동시에 태우고 컨트롤할 힘이 없습니다. 운전을 할 수 있는 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할 능력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네. 운전대론은 현실을 말한 게 아니라 당위를, 그 것에 대한 의지를 표현한거지. 어쩌면 불가능하지만 이 모든 것을 해내야만 한다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나? 언성이 높아진다. 흥분했다.
망상입니다. 정치는 희망사항을 나열하는 게 아닙니다. 대통령은 발레파킹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트럼프가 원하는 곳에 차를 댈 주차요원인 셈이죠. 운전대를 잡은 것처럼 보일 뿐.
어떻게 정치적으로 유용한 프로파간다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문 교수는 책상위에 놓인 생수 뚜껑을 땄다.
그 것도 실은 불확실합니다. 대통령은 트럼프와 김정은을 상대로 미끼없는 낚싯대를 드리운 상황입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군침을 삼킬만한 미끼가 우리에겐 없지만 운이 좋으면 언젠가는 그들이 빈 낚시바늘에 입질을 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그 외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이해할 수 있는 말로 설명을 해보게. 생수를 들이킨다.
트럼프와 김정은은 협상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트럼프는 마음만 먹으면 평양 정도는 지도에서 사라지게 할 수도 있죠. 하지만 대륙간탄도미사일, 즉 ICBM과 핵탄두가 있는 이상 김정은도 미국에 손톱자국만한 상처쯤은 남길 수 있습니다. 내년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있는 트럼프 입장에선 미국의 자그만 생채기 하나도 큰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누가 대화의 물꼬를 트느냐인데, 트럼프와 김정은은 그 때 대통령이 던져놓은 낚시바늘을 쳐다보게 될 것입니다. 대통령이 낚은 것처럼 보이겠지만 실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대통령의 낚싯대를 지렛대로 이용하는 것이죠.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역할이 작지 않게 보일 것이란 점입니다. 정치적으로 영리한 전략입니다.
김정은이 핵미사일을 쏴대면서 한반도에서 당장 내일 전쟁이일어나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다. 이 시점에 주승우는 평화협정을 말하고 있다. 문정민 교수가 놀란 건 주승우의 예측이 자신의 것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전문가들과 머리를 맞대로 북핵 문제를 논했다. 하지만 주승우처럼 트럼프와 김정은의 블러핑에 매몰되지 않고 판세를 읽는 이는 드물었다.
발레파킹을 하고 있다고 치세. 트럼프가 주차하려는 최종 기착지가 우리의 목적지와 일치하면 되는 것 아니겠나.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것 말이야.
중요한 건 협상 이후입니다.
정곡을 찔렀다. 문정민 교수는 주승우를 노려봤다. 북핵 문제를 다룰 때 협상 이후 국면은 절대 언급하지 말아야 한다. 자신이 대통령에게 줄기차게 강조해온 사항이다. 주한미군철수, 북미동맹 체결과 한미일동맹의 와해, 한중동맹 체결등의 순서로 전개될 평화협정 이후의 국면. 그 사실을이 알려진다는 건 정권의 붕괴를 의미했다. 봉합이 어려울 정도로 분열된 보수 진영이 재집결할 게 뻔했다. 무엇보다 국민들이 그 충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다. 협상 이후의 그림은 어려운 블록을 맞추듯 한조각한조각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었다. 물론 드러나지 않는 게 최선이지만.
자네는 협상... 이후의 국면을 어떻게 예상하고 있나? 떨리는 음성을 감추려 말이 빨라졌다. 문 교수는 생수통 한병을 이미 다 비웠다.
북미 관계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입니다. 그로 인해 동아시아에서의 힘의 균형이 무너지고 새로운 균형을 찾는 과정에서 한반도 정세는 대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면 동아시아는 평화국면이 되는 게 아닌가. 문정민 교수는 주승우가 말하려는 요점을 정확히 알고 있어지만 짐짓 모른 척 했다. 주승우가 판도라의 상자를 열 수 있을 정도의 인사이트를 갖고 있는 지 궁금해졌다. 한 당돌한 청년이 지금 자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북핵 이후 국면이 정말 평화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수험생의 질문. 면접관이 돼 수많은 면접을 해봤지만 자신이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다. 사실 주승우는 이 순간 질문을 한 게 아니었다. 자신에게 지금 왜 하나마나 한 얘기를 하고 있느냐고 따져물은 것이다. 설마 대통령 정치특보란 사람이 그 정도도 모르는 건 아니겠지라고.
질문은 우리가 하는걸쎄. 자네는 대답을 하면 되고.
미국의 목적이 단지 핵위협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죠? 주승우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작은 눈동자끼리 마주친 것 뿐인데. 주승우는 마치 쇼윈도를 들여다 보 듯 자신의 생각을 읽는 게 아닌가. 문 교수는 생각했다.
분명히 말했지. 질문은 내가 하는 것이라고. 문 교수는 악다구니를 애써 눌렀다. 둘은 어느새 논쟁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무표정한 주숭우의 얼굴. 그렇다면 대답을 해드리죠라고 말하는 듯 하다. 그는 또 한번 한숨을 쉬었다. 미국의 목적지가 핵위협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라면 압도적인 군사력으로도 손쉽게 가능할 것입니다. 협상이란 우회로를 고려하는 건 북한을 개방시키겠다는 목표 때문입니다. 북한을 자본주의화해 미국 중심의 체제에 편입시키겠다는 것이죠. 이를 통해 중국과의 패권전쟁에서 유리한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복안입니다. 북핵은 이를 위한 구실에 불과합니다. 물론 생각보다 빠른 시일내 실질적인 위협이 될 수도 있지만.
북한이 미국의 손을 잡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중국에게 등을 돌린 김정은 체제가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냔 말일쎄.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닙니다. 김정은은 미국쪽으로 한발 다가서지만 축이되는 왼발은 여전히 중국쪽에 디디고 있을 것입니다. 시진핑 입장에선 이런 김정은이 밉겠지만 그렇다고 내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김정은은 중국으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어내기 위해 트럼프와 밀월을 연출하고, 트럼프와의 협상을 위해서라도 시진핑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할 것입니다. 김정은은 미중간 패권게임에서 줄타기하며 최대한 실리를 뽑아내려고 할 것입니다.
맞다고 치세. 개혁개방된 북한은 우리에게도 기회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해봤나?
상당히 위험한 생각입니다. 일반 사람이라면 그런 판단을 할 수도 있지만, 대통령 특보가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건 큰 문제입니다. 면접부스의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이미 시간이 너무 지체됐습니다. 문 교수님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시는 게... 한 면접관이 분위기를 수습하려는 의도로 나섰다. 실제 20분 시한을 훨씬 넘겼다.
북한이 개방되면 유라시아로 가는 관문이 열리는 셈이야. 반도국가이면서 사실상 섬나라로 살아온 우리에겐 결정적인 모멘텀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네. 문 교수는 다른 면접관의 생수병을 집어들었다.
북한의 개방은 미국 입장에선 더이상 남한과의 동맹이 필요치 않다는 의미입니다. 그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교수님께서도 잘 아시겠죠.
그건 한미동맹의 의미를 모르는 무지한 소리네. 동맹의 주적은 북한이 아니야. 그 것은 가시적인 명분일 뿐이고 한미일 동맹의 총구가 향하는 곳은 중국일쎄.
그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이 안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니 그 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달라질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북핵을 주적으로 한 한미동맹은 해체 수순을 밟게 될 것이고, 중국을 주적으로 한다고 해도 한미 동맹은 북한이란 새로운 파트너로 인해 미국에겐 효용이 떨어질 것입니다. 트럼프 말대로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가며 한미 연합훈련을 매년 실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이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한국이 천덕꾸러기로 전락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국제정치란 복잡다단한 고차방정식이야. 자네의 생각처럼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란 말이야.
누군가 쉽게 푼다고 그 문제가 단순한 것은 아닙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가?
제 말의 의미는 이미 아셨을 겁니다.
모든 비판에는 대안이 존재해야 하네. 대안없는 비판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지 알고 있지?
남녀 관계에서 키를 쥐는 것은 보다 덜 매달리는 쪽입니다. 천덕꾸러기가 되는 게 두려워 우리가 미국에 매달릴 수록 매력은 떨어지게 됩니다.
여자든 남자든 튕기려면 상대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갖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 말대로 이미 매력이 떨어진 한국이 미국에게 튕긴다면 그 것은 파국을 의미하는 게 아니겠나.
매력만큼 중요한 건 매력이 있어 보이는 것입니다. 진실보다 인상이 더 중요할 수도 있으니까요. 권태기에 빠진 남녀가 해야할 일은 익숙한 것들을 낯설게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작가를 뽑으려는 게 아니네. 공무원을 뽑는 거지.
예를 들면 진보 진영을 중심으로 주한미군철수 여론을 만들고, 정부가 미국에게 주한미군을 철수해도 상관없다는, 좀더 강력하게 나가려면 주한미군을 철수하라는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주한미군철수는 북한이 줄기차게 주장해온 사안이네. 우리가 그 것을 미국에게 요구하는 것은 김정은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게 아닌가. 아무리 북핵 문제가 해빙 무드라도 우리가 나서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대한민국 안보에 주한미군은 결정적입니다. 북핵이 제거되도 위협은 완화가 되겠지만 주한미군의 중요성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 어떻게 그런 얼토당토한 얘기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자네 제 정신인가.
우리에게 북한이 위협이듯, 북한에겐 주한미군이 위협입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되고 북한이 개방을 하게 되면 북한 입장에서도 주한미군은 더 이상의 위협이 될 수 없습니다. 북한도 주한미군철수를 주장할 이유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한미군철수를 요구하자는 말인가?
주한미군철수는 북한보다 중국이 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관점을 바꾸면 미국은 중국 때문이라도 주한미군철수를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입니다. 우리가 요구한다고 주한미군철수가 현실화할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한미군의 주둔에 안달할 경우 미국은 주둔비용 증액을 요구할 것입니다. 실은 자기들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100% 주둔비용을 물고서라도 오히려 주둔 병력을 증강해야할 판인데, 겉으로는 우리를 위하는 척하며 분담금을 늘리라고 할 게 뻔합니다. 트럼프의 캐릭터는 충분히 그렇고도 남겠죠.
우리는 원치 않으니 미국이 원하면 주둔을 시키고 아니면 말라?
그렇습니다.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철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시나리오대로 연기를 하는 건 배우의 몫이구요.
정치란, 특히 안보 문제는 국민의 생명이 걸린 문제네. 자네처럼 실험정신으로 대할 대상이 아니란 말일쎄. 0.1%의 실패 가능성이 있어도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일이 있네. 공무원은 모험가여선 안된다는 말이야. 자네같은 사람이 공무원이 된다면 국가가 위험해질 수 있어. 자네는 진로를 재설정해야할 것 같군. 전시관 안이 문 교수의 음성으로 쩌렁쩌얼 울렸다. 줄지어선 수험생들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했다.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모른다고 불확실하다는 건 교만입니다.
뭣이 어째? 행정고시 면접장을 찢어놓은 문 교수의 고성이 훗날 주승우의 인생경로를 갈기갈기 찢게 될 줄은 몰랐다.

4장: 미스터H(4-7/5)...'리버스' , 북미동맹과 한중동맹

자네는 시진핑이 요구하는 '포괄적동반자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나.
문정민 교수의 음성이 3년전 킨텍스 면접장의 주승우를 현재로 불렀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마주 앉은 문 교수와 3년전 면접관인 그가 오버랩됐다. 주승우는 순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무슨 생각을 하나. 중국이 요구하는 포괄적동반자관계 말이야. 자네 생각을 듣고 싶네.
'카프리(CPAPRI)' 말씀이시군요. 주승우는 냅킨을 하나 뽑아 이마의 땀방울을 닦았다.
언론에서는 카프리라고 하더군. 카프리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이슈에 관한 포괄적 동반자 관계(Comprehensive Partnership for Asia Pacific Regional Issue)'의 줄임말이다. 앞글자를 따 카프리라고 불렸다.
한중동맹을 돌려 말한 것입니다. 아태지역 이슈는 중국 입장에선 일대일로를 말합니다. 인도에서부터 태평양 지역을 아우르는 미국의 재균형 전략과 충돌하는 핵심 개념입니다. 미중 패권전쟁의 골자로 볼 수 있습니다.
미중 패권전쟁에서 어느 편을 들지 선택을 하라는 얘기지. 자네가 면접 당시 말한 시나리오가 3년이 지나 현실화 하고 있네.
북한과의 혈맹관계가 사실상 해체됐으니 중국은 우리를 끌어들이는 쪽으로 전략을 선회한 것입니다. 북미수교와 원산항 개항은 결국 북미동맹을 의미하는 것이니까요.
2019년 9월9일 종전선언을 기점으로 북미 관계는 전환점을 돌았다. 김정은은 트럼프에게 핵 관련 리스트를 제공하면서 핵 폐기 수순에 돌입했다. 트럼프는 통큰 대가를 지불했다. 북한을 IMF에 가입시키는 것을 시작으로 달러 자금이 대규모로 북한에 투자되는 구조를 만들었다. IMF 가입은 김정은이 북한 경제의 민낯을 트럼프에게 내보이는 것이었다. 김정은은 체제보장의 대가로 경제와 안보 양쪽에서 벌거벗은 모습으로 트럼프 앞에 선 셈이었다.
미국의 대북 투자 첫단계는 원산 리조트 타운 건설에 집중됐다. 원산 갈마지구에 건설된 트럼프월드는 북한 개방의 상징이었다. 트럼프는 2019년 10월7일 항공모함 레이건호를 타고 트럼프월드 착공식에 참석했다. 10개월 뒤인 2020년 8월7일엔 트럼프월드 오픈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역시 레이건호를 타고 원산항을 통해 입북했다.
김정은은 생각보다 영리했어. 원산 개항이 미국 항공모함의 기항을 의미한다는 것을 당시엔 국제사회가 눈치채지 못했네. 미국 핵항모의 원산 기항은 중국을 압박할 수 있는 빅카드였다. 원산항에 정박한 레이건호에서 스텔스기가 뜨면 트럼프가 햄버거 하나를 먹어치우는 동안 베이징 상공에 진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12 북미 정상회담이 성사된 게 김정은이 원산개항을 조건으로 내걸었기 때문이란 게 워싱턴 조야의 정설입니다. 트럼프도 그 조건을 듣고 김정은의 개방의지를 믿게 됐다고 하지 않습니까.
중국에겐 서쪽 신의주를, 미국에겐 동쪽 원산을 내줌으로써 교묘한 경쟁구도를 만든거지. 나진항을 누구에게도 내주지 않은 건 신의 한수였네. 김정은은 북한의 개혁개방에 미중 패권전쟁을 최대한 이용했다. 중국과 접경한 압록강 유역은 중국과의 경협지역으로 만들고, 원산엔 미국을 필두로 한 자본주의 바람이 불게 했다.
양쪽이 제일 탐내는 건 내주지 않은 것입니다. 나진항은 중국에겐 태평양으로 나가는 출발점이고, 미국에겐 중국으로 들어가는 관문이 될 수 있으니 양쪽 모두에게 요충지 아닙니까. 마지막 카드는 남겨둔 셈이죠. 양쪽의 상투를 틀어쥐자는 심산입니다.
중요한 건 우리가 한중동맹에 대한 요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가 아니겠나. 한중동맹을 맺는다는 건 미국과 일본을 적으로 돌리는 것이야. 문재인 정부는 미궁에 빠졌네.
길을 찾겠다고 생각하면 미궁을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그게 무슨말인가.
다이달로스가 미궁을 설계한 것은 길을 찾는 지혜를 시험하기 위한 게 아니었습니다. 미노스왕의 아내 파시에파가 수소와 바람을 피워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를 영원히 가둬두기 위해서였습니다. 미노타우르스에게 탈출이란 희망고문이었던 셈입니다. 미궁에서 길을 찾는 것은 설계자의 의도에 놀아나는 것입니다.
옳지. 그렇다고 처음부터 탈출을 포기하는 게 정답은 아니지 않은가.
기다려야 했습니다. 나뭇잎이 떨어져 길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힘을 아껴두고 말입니다.
그만한 시간이 있겠나? 대세가 중국으로 기울었다 해도 아직은 미국의 세상일쎄. 미국이 우리를 버렸다고 해도 대한민국이 미국을 등지고 생존한다는 건 우리 시대에선 불가능하네.
기다릴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면 때를 앞당겨야겠죠.
그건 또 무슨 말인가.
우리의 효용가치가 떨어진 건 미국이 북한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김정은 체제 하의 북한을 얻은 것이죠. 미개척 시장과 중국과의 접경, 두 가지 면에서 북한은 우리보다 미국에 매력적입니다. 트럼프의 눈에 우리가 보일 리 만무하죠.
그걸 누가 모르겠나.
손에 쥔 북한을 잃는다면 트럼프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까요.
북한을 잃는다?
김정은을 제거하고 친중정권을 세운다면 말입니다.
김정은 참수가 가능하다면 중국이 왜 아직 가만히 있었겠나. 6.12 정상회담에서부터 지금까지 2년이 넘는 세월이야.
중국이야 말로 때를 기다린 것이죠.
때?
북한의 군부는 김정은의 개혁개방에 불만을 갖고 있습니다. 김정은의 핵.경제 병진노선은 줄곧 경제에 방점이 찍혀있었지만 군부의 계산법은 전혀 다르니까요. 핵보유국의 군대를 꿈꾸었던 군부 실세들은 북핵평화협정 이후 거세당한 환관의 신세와 다를 게 없습니다. 거세 직후 무기력감은 지금쯤 원한이 됐을 겁니다. 대대적인 숙청작업을 했지만 군부 전체를 제거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김정은은 여전히 화약고를 끌어 안고 있는 상황입니다
중국이 북한 군부의 쿠데타를 종용해야 한다는 말인가?
네. 북한 군부엔 친중파인 장성택과 황병서 라인이 여전히 존재합니다. 문제는 쿠데타 이후에 누구를 옹립할 것인가입니다. 북한의 인민들은 자본주이란 환각제에 아직 취해 있는 상태입니다. 김정은의 개혁개방이 인민들에겐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군부의 도발을 인민이 지지하려면 새로운 체제의 정통성이 확실히 보장돼야 합니다. 동시에 개방은 지속적으로 추진돼야 합니다. 그럴 인물이 모의에 동참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린 것이죠. 시진핑의 시선은 줄곧 한 사람에게 있었습니다.
김정남이 죽었으니. 백두혈통이라면 김정철 아닌가. 김여정도 물론...
김정철은 김정은과 친형제 사이여서 모의에 동참하지 않을겁니다. 권력에 대한 욕심도 없고 그만한 배짱도 없는 인물이구요. 모의 사실이 새 나갈 수도 있으니 위험합니다. 김여정도 그런 면에서는 마찬가지구요
그렇다면 백투혈통에선 한 사람 밖에 남지를 않네. 그런데 그 사람은... 문 교수는 순간 말을 뱉지 않고 커피잔을 들었다.
맞습니다. 김정남의 장자 김한솔.
김한솔이라. 어쩌면 그가 백두혈통을 계승할 최고의 적임자일 수 있지. 정상적인 경우였다면 북한의 왕좌는 김일성 김정일 김정남 김한솔로 이어졌을테니. 김한솔 입장에선 삼촌 김정은은 아비의 원수이자 자기 자리를빼앗은 도둑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는 지금 행방이...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문 교수의 뇌리를 스쳤다.
교수님의 생각이 맞을 겁니다. 주승우는 문 교수의 표정에서 직감했다. 그가 지금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2년이란 세월이 그를 세상에서 잊혀지게 했어. 하지만 망각 또한 그가 김일성 왕가의 적통이란 사실을 변하게 할 수는 없겠지.
김한솔은 2017년 2월 아비 김정남의 시신을 수습한 뒤 바로 잠적했습니다. 당시 유튜브에 김한솔이 등장한 동영상을 공개하면서 그의 뒤를 봐주고 있는 천리마민방위라는 조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었죠. 겉으로는 탈북민 지원을 위한 인권단체로 포장돼 있지만 김정은 체제전복을 위한 국제조직입니다. 중국과 미국, 네덜란드 정부가 공식적으로 지원하고 있고, 우리정부도 지원을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가 지금 중국 또는 미국 정부의 비호 아래 있다는 얘기도 되겠군.
중국일 겁니다.
미국 정부가 김한솔을 보호하고 있다면 북핵 협정 과정에서 부담이 됐을 겁니다. 김정남 암살이 CIA의 공작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이 김한솔의 신병을 미국쪽에 넘겼을 리도 만무하구요. 김정남 암살이 CIA 소행이란 대목에서 문정민 교수는 움찔했다. 하지만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북한 군부의 쿠데타 지원과 김한솔의 옹립이라. 중국이 북한의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면 인민들 입장에서야 큰 불만이 없겠군. 미국이든 중국이든 누구 말대로 쥐잡는 고양이가 장땡이니 말이야. 문제는 역시 미국 아니겠나. 미국이 이 사실을 알고도 가만히 있을까.
그 것이 변수입니다. 미국이 이같은 시나리오를 모를 리 없습니다. 중국쪽에 김한솔이 유용한 카드라면 미국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미국이 안다고 해도 중국과 직접 충돌은 쉽지 않을 겁니다. 적어도 아직은 말입니다. 시진핑은 왼쪽 뺨을 맞으면 오른쪽 뺨을 내줄 인물이 아니니까요.
시진핑을 말하는 게 아닐쎄. 우리 정부를 말하는 거지. 미국의 우리 정부를 가만히 내버려 둘 지 말이야.
첩보라인에서 한 일들은 공식적으로 문제삼지 않는 게 국제 관례입니다. 서로 건드려봐야 좋을 게 없으니까요. 명분이 없으니 애둘러 다른 구실로 못살 게 굴겠지만 그 정도는 감수해야 합니다. 정부가 그런 위험과 맞서지 않고 어떻게 국민을 보호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자네 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중국이 독자적으로도 수행할 수 있는 것 들이네. 우리가 할 수 있는 역할이 없다는 말이야.
북핵평화협정 과정에서와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내용을 알고 보면 우리 정부가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람잡이의 역할을 한 것 외에는 말입니다. 중국이 원하는 장소에 김정은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일. 이틀테면 경평축구처럼 말입니다.

4장: 미스터H (5-1/5)...민영우의 손바닥

# 문 교수와 인사를 하고 주승우는 1층 청사 뒷문을 나왔다. 비가 갰다. 먹구름은 비가 돼 아스팔트 위에서 놀던 열기를 끌고 땅속으로 사라졌다. 구름 없는 하늘은 선명해졌고 식은 땅은 더욱 짙은 색을 낸다. 뜨겁지 않은 바람이 뺨에 스친다. 머리카락이 나풀거리고 기분이 가볍다. 문정민 교수를 피한 이유는 증오가 아니었다. 두려움이었다. 원망의 대상이 사라져버리는 것에 대한 공포. 그것이 기피의 실체였다. 그를 만나고 원망의 대상이 사라졌다. 대상은 주승우 자신이었다.
핸드폰이 울린다.

태송입니다.
그래. 왠일로.
내일 제가 레지던스로 모시러 갈께요.
내일? 주승우는 그제야 내일이 경평축구대회가 열리는 날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김태송은 중국 대사관에 배정된 VIP 티켓 두 장을 구해 주승우을 불렀던 것이다. 아 그 게 내일이구나.
이럴 줄 알았어. 전화 안했으면 까마득히 몰랐을 꺼야.
그래 맞다. 잘했다.
내일은 제 차로 가세요.
나는 지하철로 갈께. 알잖아.
내일만 제 말대로 하시죠.
새삼스럽게 왜 그래. 김태송은 주승우의 교통사고 트라우마를 잘 안다. 백이면 백 김태송이 주승우의 레지던스로 찾아온 건 그에 대한 배려였다.
승우형. 내일을 제 말대로 해요. 경기장 바로 옆에 친구집이 있는데 차 대고 걸어서 5분이에요
너 오늘 이상하다.
그냥 제 차로 가면 편할텐데 해서. 형님 내일 늦지 않게 오세요. 늦으시면 안됩니다. 꼭 제 시간에 오셔야 해요.
알았다니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주승우. 평상시답지 않은 태송의 태도가 그는 영 찜찜했다. 축구가 11시 반 시작이지? 15분에 매표소 앞에서 보자.
정상들 세리머니까지 보려면 11시 전에는 입장해야 해요. 10시 45분에 뵈요.
그냥 축구나 보자.
역사적인 순간인데. 제가 이래뵈도 공무원이라. 형님은 특히나 기자면서. 이번엔 김태송이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주승우는 자꾸 다그치듯 하는 태송의 태도가 점점 더 신경이 쓰였다.
역사적인 순간은 개뿔. 알았어. 45분. 이번엔 왠지 자신이 한발 물러서야 할 차례라고 주승우는 생각했다.
형님. 절대 늦으면 안뙵니다. 아셨죠?
알았다니까. 근데 태송아.
네 형님.
네 이름 말이야.
.. 순간 말이 없는 김태송.
김태송이란 이름.
제... 이름이 왜요?
아니 문뜩 학창시절 생각이 나서.
학창시절요?
내가 고등학교 때 한솔회란 모임이 있었거든. 학생회 간부들 모임였는 데 학교 운동장이 솔밭으로 둘러쌓여서 큰 소나무들의 모임이란 뜻으로 한솔회라고 했어. 한솔은 우리말로 큰 소나무란 뜻이야.
그런데요?
별건 아니고 옛날 선배들은 한솔회를 태송당이라고 부르기도 했거든.
...
오늘 누굴 만났는데 김한솔 얘기를 했어. 김한솔 알지?
김한솔요? 그 게 누구죠?
모르나? 암살당한 김정은의 이복형 김정남의 아들 말이야.
아. 그 사람 이름이 김한솔였나요?
김한솔과 김태송. 생각해보니 같은 이름이네.
그렇네요. 하하. 묘한 긴장감이 돈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비슷하네. 김정남 암살당시 김한솔이 스물넷이었으니. 태송이 너 올해 스물일곱 맞지?
네.
네가 살 좀 찌면 닮았겠다.
김한솔은 좋겠네. 중화 최고의 꽃미남 김태송을 닮았다니. 하하.
자꾸 실없는 얘기가 나오네. 끊자.
네. 오늘 내가 아니라 형님이 이상하네. 형님 내일 늦으면 안되요. 절대
전화를 끊은 주승우는 친한 동생이라고만 생각했지 정작 태송이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을 했다. 김태송, 그는 희로애락에 즉각적이고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자지러지게 웃기도 했고, 흐드러지게 울기도 했다. 화가 날 때는 폭풍처럼 일어섰고, 갑자기 주저않기도 여러번 했다. 주승우는 그런 김태송이 중국인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렇다고 미국이나 영국, 또는 프랑스인 같다는 생각을 했던 것도 아니지만 왠지 중국인은 아니었다.
핸드폰이 진동한다. 이테라의 전화다.
네. 핸드폰을 오래 대고 있었던지 주승우는 귓볼까지 붉어졌다.
뭐 하실길래 그렇게 숨을 헐떡거리세요? .
제가요? 아침까지도 같이 있던 사람인데 주승우는 이테라의 목소리에 새삼 가슴이 뛰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시청 앞입니다.
제가 그쪽으로 갈께요.
네. 바람을 쐬고 싶은데 동아일보 앞 청계광장에서 뵈요.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겨우 수렁에서 빠져나온 듯 했다.

# 오후 2시가 지난 무렵. 태양은 청계 광장 수직의 상공에 떠 있다. 아스팔트에 데워진 공기가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에 실려 날린다. 여름 내 머금었던 습기를 빼낸 도심은 뜨겂지만 가볍다. 늦은 점심을 한 행인들이 지나는 청계광장은 도심 한복판 치고는 한가롭다. 광장 분수는 태양을 꺼버릴 듯한 기세로 솟아오른다. 조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주승우. 땅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같기도, 거꾸로 세워놓은 다슬기 같기도 하다. 빨강과 파랑이 나선으로 꼬이며 상승하는 모습이 남북평화를 염원하는 상징물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금방이라도 솟구쳐 오를 듯한 거대한 창 같기도 하다. 거대한 창은 미사일의 잔상일 것이다. 만든 사람은 실제론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주승우는 그런 생각을 했다.

팝아트에도 관심이 있나요? 이테라의 목소리가 따듯하 바람에 실려와 귓가에 닿는다. 민영우 시장의 사퇴선언을 막으려 부랴부랴 분당 서울대 병원을 달려 나간 지 예닐곱 시간이 지났을 뿐인 데 이테라의 목소리는 아득한 과거에서 온 듯 그립다. 주승우는 한동안 말없이 이테라의 얼굴을 바라본다.
밥은 먹었어요?
... 말없이 계속 이테라의 얼굴을 응시하는 주승우.
... 이테라도 말없이 주승우의 얼굴을 마주본다.
방금 전에 누구를 만났어요. 평생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힘드셨겠어요.
네.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만나고 비로소 누군가를 놓을 수 있게 됐어요. 그래서 가벼워졌어요. 마음이.
다행이에요. 마음이 편해졌다면.
밥은 아직 못먹었습니다. 그쪽은 먹었어요?
저도 아직. 마침 이테라의 배에서 난 꼬로록 거리는 소기가 난다.
혹시 대구탕 좋아해요? 이 근처에 전세계에서 대구탕 제일 잘하는 집이 있거든요.
기자가 뻥이 너무 심한거 아니에요? 헛웃음을 짓는 이테라. 글로벌 대구탕 한번 먹어보죠 뭐.
정말입니다.. 100% 리얼 팩트.

대구탕집은 지척의 거리였다. 허름한 3층빌딩은 재개발 바람에 키가 훌쩍 커버린 인근 고층빌딩들 사이에서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고 외치는 고집스런 노인네처럼 코너 자리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1층엔 서울 도심에선 보기 힘든 옛날 수퍼마켓 간판이 달려있다. 페인트가 벗겨져 슈퍼인지 수퍼인지 글자를 구분하기 힘들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형광등이 나가 백주대낮인데도 어두컴컴했다. 이테라는 주승우의 뒤를 따라 계단을 올라갔다.
여기가 허름하긴 해도 대구탕맛은 글로벌 1위에요. 주승우는 창가쪽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식당안은 늦은 점심을 하는 한두사람의 손님이 전부였다.
첫 데이트에 이런 데를 데리고 왔다고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자기 아버지 빌딩을 내려다 보며 돈자랑을 해대는 멍청이들은 이미 질릴대로 봐와서.
첫 데이트요?
아닌가요? 저는 아까 스프링 앞에서 그쪽이 고백을 한 걸로 아는데. 스프링은 조승우에게 이런저런 상상을 하게 만든 청계광장의 조형물 이름이다. 미국의 유명한 팝아티스트 부부의 작품이다.
놀란 토끼는 입이 쪼그라드는 것인가. 주승우는 눈이 휘둥그레해진 채 입을 열지 못했다.
미사일이라도 떨어졌어요? 이테라는 민망함을 감추려 짐짓 씩씩하게 창가의 데이블 쪽으로 진격한다.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창밖만 응시하는 이테라의 맞은 편에 주승우가 앉는다. 물병을 테이블에 올려놓는 식당 주인에게 뽈탕 두 그릇을 주문하는 주승우.
누가 그래요. 내가 아니라고.
네?
그쪽 말이 아니었으면 나도 다음 데이트는 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우리 빌딩 가리키며 돈자랑 하려던 참이었거든요.
...푸훗. 다행이네요. 첫 데이트에 여자를 이런 곳에 데려올 정도로 자신만만한 남자인 줄만 알았는데 상속받을 빌딩까지 있다니.
아버지 눈 밖에 나서 상속을 받을 수 있을 지는 몰라요.
풋. 일이 잘 안된거에요? 민영우 시장은 결국 사퇴를 선언했던데요. 화제를 돌리는 이테라.
대구탕집에서 많은 일들이 이뤄지는군요. 첫데이트와 일이 동시에.
마음이 급해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 일단 일을 마치고 데이트 모드로 다시 전환키로 하죠. 이테라가 막 나온 뽈탕에 공기밥을 덥썩 말아 넣으며 재촉한다.
민 시장은 알고 있었습니다. 강태우 사장이 녹음 파일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파일이 제 손에 있다는 것도.
그런데도 사퇴선언을 했다는 간가요.
사실상 대선출마 선언인 셈입니다. 제가 민 시장은 차이나게이트와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보도하게 되면 산하기관장의 책임을 끌어안기 위해 물러난 시장이 되는 거죠. 시간은 더 걸리겠지만 특검에서 파일이 존재가 드러나게 되도 결과는 같을 테구요 2022년 대선을 고려하면 후자가 민 시장에겐 더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무서운 사람이군요.
제가 어떤 선택을 하든, 모든 것은 민 시장의 각본 안에 있었던 셈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지키려던 진실이에요. 강 사장은 스스로 목숨까지 던지면서까지 밝히려고 했던. 그런 죽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되요.
물론입니다. 그렇게 두지는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일단 대구탕을 맛있게 먹을 생각입니다. 이테라는 그제서야 갓 끓어나온 뽈탕에서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이 눈에 들어왔다.
풋. 여유가 있는 것을 보니 플랜B가 있는 거군요. 이테라는 고춧가루와 청양고추를 듬뿍 넣은 뽈탕 한 숫가락을 푹 떠서 입에 넣으며 말했다.
녹음 파일을 공개할 겁니다.
파일을 공개하는 것도 민 시장의 각본에 있다고....이테라는 순간 주승우가 말하는 파일이 강태우 사장이 건네준 파일이 아니란 사실을 직감했다. 다른 파일이 있군요. 이테라는 주승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표정은 없지만 웃고 있는 듯 했다.
민 시장의 육성이 녹음된 파일입니다.
민 시장을 만나셨군요. 자신의 무고를 증명할 파일을 존재를 알고도 사퇴선언을 했다는 육성을 녹음했구요.
네. 사퇴 선언 후 그의 차 안에서. 녹음은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기자가 민 시장처럼 최고위급 취재원을 독대할 땐 사전에 양해되지 않은 녹음은 하지 않는게 암묵적인 룰입니다. 때문에 저도 민 시장을 독대할 땐 핸드폰과 노트북을 차 빆에 내려둡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녹음을.
민 시장이 녹음을 했습니다.
민 시장의 수중에 녹음 파일이 있다는 얘기잖아요.
네. 정확하게는 민 시장의 기사가 녹음을 한 것이죠. 저와 독대를 할 때마다 민 시장은 기사를 시켜서 녹음을 했습니다. 치밀한 사람이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었겠죠. 이제는 거의 식어버린 뽈탕을 한 술 뜬다.
민 시장의 기사도 취재원이란 얘기네요. 언제 민 시장의 운전기사를 포섭한 거죠? 엄지 손가를 세워보이는 이테라.
알고보면 한 두가지 억울한 일 없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4장: 미스터H (5-2/5)...꼬리를 밟힌 황병서

# 주승우와 이테라는 뽈탕을 먹고 인근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테라스에서 보는 청계광장 분수는 이국적인 분위기를 냈다. 물줄기는 태양을 꺼버릴 기세로 솟아 올라 정점에서 방울방울 흩어졌다. 태양을 떼어낸 카드섹션처럼 무지개가 피어올랐다. 부유하는 작은 물방울들은 나비처럼 날아 내렸다. ST공사 노조위원장 살인사건 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지난 9일을 정신없이 달려왔다. 무지개로부터 날아드는 작은 천사들로 뺨이 젖었다. 둘은 약속한 듯아무 말이 없었다. 맞닿은 손가락 끝으로 심장이 뛰는 것을 다만 느꼈다. 하나가 하나의 속으로 녹아들어 두 개의 박자는 어느덧 하나가 됐다.

강석호란 사람였어요. 테이블에 머리를 묻었던 이테라가 꺼낸 말 한마디는 두 사람을 다시 지난 시간을 달려온 코스 위에 세웠다.
강석호요? 앞뒤 자르고 무슨 말이에요?
클루에 찍혔던 세 사람 중 한 사람요.
강석호... 강석호라. 어디서 들었더라. 낯설지 않은 이름에 주승우는 기억을 더듬었다.
북한 보위부 소속 장교였어요. 2018년 횡령 혐의로 평양 소환직전 돌연 영국으로 망명을 했었구요.
아 강석호. 주승우는 기억속에서 그 이름을 끄집어냈다. 그가 왜 서울에. 그를 떠올린 순간 주승우는 장중경을 중심으로 얽힌 차이나게이트의 실체가 생각보다 훨씬 더 거대한 것임을 직감했다. 게이트의 몸통은 껍질을 벗길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아는 이름이에요?
네. 횡령 후 영국으로 도피한 것으로 돼 있지만 그 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의 망명 직후 김정은이 10명의 특수부원으로 구성된 암살단을 영국으로 보냈었으니까요.
비리 장교 하나를 잡겠다는 것 치고는 사이즈가 크군요.
강석호는 보위부 소속이었지만 황병서 전 총정치국장의 오른팔이었습니다. 김정은의 통치자금이었던 외화벌이를 황병서가 총괄했고, 강석호가 중국총책이었으니까요. 그가 영국으로 망명한 건 횡령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횡령 때문이 아니라구요?
네. 역모였습니다.
역모라면.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거잖아요.
강석호는 김일성의 혁명동지인 강판석의 아들입니다. 김일성 직계 백두혈통을 제외하면 북한 내에서는 최고 귀족 계급입니다. 최룡해도 마찬가지구요. 혁명1세대 직계는 북한에선 어지간한 일로는 숙청되지 않습니다. 최룡해가 황병서의 모함으로 잠시 곤혹을 치르기는 했지만 결국 당부위원장으로 복귀한 것도 그의 출신성분 덕이었죠.
망명한 시점으로 봐선 평화협정과 관련이 있겠군요. 군부의 핵심 인물이 평화협정을 앞두고 런던으로 도피를 했다는 얘기네요.
정확합니다. 김정은은 트럼프와의 협상을 앞두고 본격적인 군부숙청 작업에 돌입했었습니다. 2017년 11월 황병서를 총정치국장에서 보직 해임한 게 그 신호탄이었습니다. 총정치국 중간 간부의 비리란 명분으로 치장된 숙청작업이었죠.
김정은이 목을 죄어오자 쿠데타를 모의한 건가요?
그의 역모는 쿠데타의 형태가 아니라 김정은의 자금줄을 끊는 것이었습니다. 따뜻한 햇살 사이로 촉촉한 물방울들이 나비처럼 실바람에 실려 날아든다.
자금줄이라면 비밀계좌같은 건가요?
핵심은 동판입니다.
동판요?
위폐를 찍는 동판 말입니다. 북한의 외화벌이 일꾼들이 중국에서 하는 일은 일반의 상상을 초월합니다. 북한 식당과 호텔로 위장하고 있지만 실제 달러를 벌어들이는 수단은 마약과 매춘입니다. 중국 당국도 필요악으로 간주하고 눈감아 준 것이죠.
마약과 매춘, 그리고 달러위조. 군이 아니라 갱이군요,
강석호는 원래 군인이 아니었습니다. 김책공대와 베를린 공대에서 핵물리학을 공부하고 북핵 개발 초기에 참여했던 핵물리학자였습니다. 북한이 핵보유국이 되면 인민들이 잘먹고 잘살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이상주의자였죠.
촉망받는 핵물리학자에서 망명한 외화벌이 일꾼으로 전락했다는 거네요. 현대사가 만든 한편의 비극이군요.
그를 발탁한 게 황병서였습니다. 강석호가 중국에서 맡은 임무 중에 하나가 북핵 개발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 북한으로 반입시키는 것이었습니다. 핵개발 전반을 잘 알고 성격도 혁혁한 데다 혁명1세대의 직계로 투철한 애국심까지. 그만한 적임자가 없었겠죠. 위조달러를 찍어 핵물질을 북한에 밀수하는 중책을 맡기기엔 말입니다. 핵물리학자가 특수 요원이 되기 까지 얼마나 혹독한 과정을 거쳤을 지 상상이 되십니까.
그런 사람이 망명을 택했다는 건 그만큼 배신감이 컸다는 뜻일꺼에요. 젊음을 핵개발에 투신했는 데 김정은이 미국을 상대로 한 일은 결국 김일성 일가의 권력을 보장받는 것이었으니까요.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첫 북미 정상회담이 열렸지만 김정은과 트럼프의 물밑 협상은 사실상 그 1년전부터였습니다. 2017년 11월 김정은이 황병서 총정치국장을 보직해임한 것은 트럼프와 비핵화 협상을 수면위로 끌어 올리겠다는 선언이었던 셈이죠. 김정은은 쿠데타의 가능성을 싹부터 자르자는 계산을 했던 겁니다. 황병서의 숙청 이후 군부 내 이른바 북핵개발 4인방이 차례로 총살을 당했습니다. 황병서 입장에선 부하들을 잃고 자신만 목숨을 부지한 못난 장수가 됐던 셈입니다. 죽음보다 치욕이었을 겁니다.
황병서가 택한 건 복수였겠군요. 복수에 대한 집념이 치욕을 견디게 한 유일한 이유였을 꺼에요
2018년 2월 뉴욕 채널을 통해 북미 대화가 시작되자 황병서는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총살을 당했던지 수용소로 끌려갔을 것이란 추측도 나왔지만 그랬다면 정보당국의 안테나에 걸렸을 꺼에요. 황병서는 도피한 겁니다. 황병서가 사라진 직후 강석호가 망명 했습니다. 둘은 무관한 사건이 분명 아닙니다. 김정은은 외화벌이와 달러 위조로 번 돈을 스위스 비밀계좌를 통해 관리했습니다. 그 관리인이 황병서였습니다. 강석호는 동판의 소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구요. 김정은은 통치자금에 상당한 압박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미국 쪽 투자에 더 목말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인거죠.
우리쪽 수사망이 좁혀지자 국정원이 강석호를 긴급 체포한 건 그의 동태를 처음부터 파악하고 있었다는 얘기에요. 영국으로 망명한 강석호가 서울 한복판에서 모습을 드러낸 게 정부와 무관치 않다는 뜻 아닐까요
맞습니다. 강석호의 입국은 국정원의 기획일 가능성이 큽니다. 동판에 관한 정보는 우리쪽에도 유용한 정보니까요.
우리 정부에게도 동판이 필요하다? 언뜻 이해가 잘 안되는 대목이네요. 이테라의 볼이 뾰루퉁해졌다. 고개를 갸우뚱 하는 이테라.
지금 그 동판이 가장 절실한 게 누구일까요.
김정은이겠죠,
그 다음은요.
글쎄요 김정은 말고 위조달러가 필요한 사람이 누구일까요. 이테라의 볼이 더욱 부풀어 오른다.
김정은의 손에 동판이 들어가면 안되는 쪽이죠.
미국이겠군요. 김정은이 동판을 갖게 되면 트럼프의 달러가 그만큼 덜 필요할테니까요.
맞습니다. 김정은의 손에 동판이 쥐어지든, 트럼프의 수중에 들어가든 우리 정부로서는 좋을 게 없습니다. 김정은이 트럼프와 밀착할 수록 우리는 미국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는 것이니까요.
복잡하군요. 한 가지 이해가 안가는 게 있어요. 강석호가 국정원의 통제 하에 있었다면 왜 변만섭의 죽음을 방치했을까요.
방치한 게 아니라 몰랐을 겁니다. 미처 손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겠죠. 일이 커지기 전에 부랴부랴 긴급체포하고. 내부에서는 지금 몇사람 목이 날아갔을 겁니다.
그런 상황이 가능할까요? 강석호 같은 인물을 관리하면서.
국정원 요원들도 사람일 뿐입니다. 007 제임스본드나 에단헌트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아요. 황병서의 숙청이나 강석호의 망명 이유를 외화벌이 라인 중간간부들의 비리와 횡령이라고 판단, 보도했던 게 국정원입니다. 당시 국내에선 주목을 받지 못했지만 교도통신 특파원이 강석호의 중국내 행적을 끈질기게 취재해 보도를 했었습니다. 일개 기자도 알아낸 사실들을 한 국가의 정보기관이 전혀 파악하지 못했었죠.
그랬었군요.제임스본드는 몰라도 에단헌트는 있었으면 좋겠네요. 톰크루즈는 어쩜 환갑이 다 됐는데 정말 멋지지 않아요? 이테라의 눈동자가 촉촉해진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옵니까.
아내를 지키기 위해 일을 포기한 비밀요원. 결국 일을 그만둘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내를 다른 남자에게 떠나보내야 하는 비운의 영웅. 생각만 해도 애틋해요. 에단헌트와 줄리아. 미션 임파서블은 어쩌면 가장 슬픈 로맨스 영화일꺼에요. 이테라의 눈빛은 아련한 기억속으로 가라앉는다.
점점. 눈물 장르를 좋아하는 캐릭터인 줄은 몰랐네요.
여자들은 누구나 한번쯤 비극적 사랑을 꿈꾸죠. 줄리아 같은. 그쪽은 그런 상상 해본 적 없나요?
언제까지 그쪽이라고 할 건가요. 제가 무슨 동서남북도 아니고.
동서남북요? 하하. 이번엔 정말 빵 터졌어요. 예기치 않은 대목에서 자리러진다.
이테라씨.
네. 웃음을 멈추지 못하는 이테라.
연애 해본적 없죠?
제가요? 하하. 계속 웃는다. 그럴 리가요. 경찰대학 남자 수만큼 연애를 해봤을 꺼에요.
진짜 연애를 해봤다면 비극적 사랑은 정말 비극이란 걸 알텐데... 멋진 비극이란 현실엔 존재하지 않아요. 슬픈 사랑을 꿈꾸는 건 자신이 관객일 때까지죠. 영화는 적당한 순간에 막을 내리기 때문이구요. 막이 내린 뒤의 주인공 삶을 볼 수 있다면 그 게 얼마나 끔찍한 지를 알게 될 꺼에요.
이테라는 순간 주승우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주승우의 눈동자가 촉촉해진 건 분수대에서 날아온 작은 물방울들이 내려 앉아서가 아니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제가 연애를 못해본 걸로 해요. 좋겠어요 저의 첫사랑이시네요. 어색한 너스레를 떨어본다.
미안해요. 제가 좀...
네.너무 다큐죠.
그럼. 일을 좀 더 해볼까요?
네. 어련하실까.
강석호가 변만섭을 살해한 이유가 뭘까요. 여인숙에 찾아갔다는 건 우발적 살인이 아니라는 얘기에요 목적이 있었다는 거죠.
둘 사이의 접점이 차이나게이트일까요. 그렇다면 중국산 지하철 수입과 강석호가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언제 그랬냐는 듯 화제는 다시 사건으로 돌아왔다.
장중경과 강석호, 또는 장중경과 황병서가 어떤 관계가 있을 지를 알아내야 해요. 강석호의 뒤에 아직 황병서가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변만섭의 살해가 황병서의 지시에 따른 것이란 얘기군요.
그럴 개연성이 큽니다. 황병서도 지금 한국에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국에요?
네. 정확히 말하면 대방동에.
두 사람은 순간 동시에 한 사람을 떠올렸다. 그는 바로 중절모를 쓴 사내였다.

5장: 경평축구(1-1/5)...오태호 주필 성상납 사건

# 강석호 긴급체포에 관한 국정원의 발표가 있던 당시 대한일보 편집국. 국회 정무위 국감을 TV로 보고 있던 차학경 정치부 차장이 벌떡 일어섰다. 하태석 민주당 의원이 부산 디에이치타워 불법 인허가 비리를 폭로하며 대한일보 오태호 주필의 이름이 거론됐던 것이다. 25년 경력 베테랑 기자 차학경은 이번 폭로가 몰고올 후폭풍을 직감했다. 손끝이 파르를 떨린다. 그의 시선이 의자를 뒤로 젖친 채 단잠을 자고 있던 남궁종원 정치부장을 향했다.

부...부장.
눈을 뜨는 남궁 부장. 입가에 묻은 침을 손바닥으로 쓱 닦는다. 대충 알아서 하지. 뭔 일인데 잠까지 깨우고 그래. 차 차장을 타박한다.
차 차장은 TV를 손가락으로 가르킨다.그의 손끝을 따라가던 남궁 부장의 시 선이 TV 속 하태석 의원의 목에선 핏대를 확인한다. 저 꼴통, 또 무슨 건수 하나 잡은건가. 남궁종원 부장은 책상위의 안경을 집어든다.
하태석 의원은 해운대 디에이치타워 전경 사진을 카메라 쪽으로 들고 인허가 비리 의혹을 조목조목 설명하고 있다. 정무위 국감장에서는 한나라당 의원들이 웅성대기 시작한다. 편집국 여기저기서 TV 볼륨이 커지고 있다.
쾅! 하고 국장실 문이 열린다. 김창환 국장은 남궁 부장 쪽으로 성급히 다가온다. 침이 묻은 남궁 부장의 얼굴을 보고 누살을 찌푸린다.
침 좀 닦아라. 애들보기 안부끄럽냐.
국장이 하실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남궁 종원 부장의 말은 가시를 달았다. 김창환 국장은 표준호 공천 바라기를 하는 남궁 부장이 영 못마땅했다. 남궁 부장은 자신의 친위대인 서울대 라인만 챙기는 김 국장을 따를 마음이 없었다.
이 새끼가 점점... 김 국장은 말을 삼킨다. 야! 볼륨좀 최대로 키워봐. 애꿎은 정치부 막내에게 파편이 튄다.
수습 딱지를 갓 뗀 막내는 부랴부랴 리모컨을 찾는다. 6개월 수습 생활을 하며 몸에 밴 건 눈치 뿐이다. 볼륨 게이지가 40을 넘어섰다. 지직 잡음을 내며 하태석 의원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편집국에 울린다.
야 이새끼야. 볼륨좀 줄여. 환갑도 안지난 놈이 귀 먹었냐. 남궁 부장이 막내에게 성을 낸다.
지금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지. 김 국장이 남궁 부장을 쏘아 본다.
하태석 얘기좀 들읍시다 쫌. 차학경 차장이 결국 둘 사이에 선을 긋는다. 편집국의 시선이 온통 하태석의 입에 쏠린다.
여기 이 땅 말입니다. 원래 주상복합을 지을 수 없는 부지에요. 그런데 말입니다. 2017년 10월에 이 땅이 돌연 해운대 활성화 특구로 지정됩니다. 도시계획법 상에 족보도 업는 특구가 생깁니다. 직후 대화건설이 기다렸다는 듯 디에이치타워 주상복합 건설 계획을 발표합니다. 뒤이어 2018년 3월 총 3조원 규모의 주상복합이 분양됩니다. 해운대가 한눈에 보이는 금싸라기 땅의 용도변경과 3조원대 분양 사업. 딱 봐도 그림이 나옵니다.
민주당 소속 의원들은 짜맞춘 듯 한나라당 김영학 의원에게 손가락질을 한다. 해당 지역구 의원이다.
여기가 국감장이지 애들 백일장인 줄 알아? 어디서 삼류소설을 쓰고 있느냔 말이야. 김영학 의원이 자리를 박찬다.
말씀 잘 하셨습니다. 김 의원님, 증거는 차고 넘칩니다. 하태석 의원이 김 의원의 뒷통수를 향해 일갈한다. 자 지금부터 제발 저리신 분의 스토리가 나옵니다. 하 의원은 폭로를 이어간다. 디에이치 인허가는 지역구 의원이신 김영학 의원님과 대한민국 대표 보수 언론인 대한일보 오태호 주필이 얽힌 전형적인 정경언 유착 비리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하 의원은 카메라쪽을 응시하고 마치 국감이 아니라 방송을 하듯 한글자 한글자 힘을 줘서 말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본 사건은 3조원 규모의 주상복합 건립 사업 과정에서 지역구 국회위원과 보수 언론인이 개입한 대표적인 정경언 유착 비리 사건입니다.
하 의원. 너 이새끼. 나이도 어린 게. 뒷감당 할 수 있겠어?
저는 이자리에 하태석이 아니라 국민의 대표로 있는 겁니다. 사석에선 제가 김 의원님께 연장자에 걸맞는 예우를 해야겠지만 지금 이 자리에선 아닙니다. 나이 드신 걸로 대접 받으시려면 아드님 댁에 가셔서 손주 찾으세요.
이 새끼 점점...
김 의원님. 활 시위를 당기는 하태석 의원.
왜.
베트남 다낭 아시죠.
다낭이란 말에 움찔하는 김영학.
표정을 보니 잘 아시네요. 끝까지 들으시겠습니까. 아니면 다른 분들 위해 자리를 좀. 그렇게 서서 윽박만 지르시면 국감에 방해 됩니다만.
화살을 맞은 김 의원은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문과 의자를 번갈아 보더니 헉기침을 하며 나가버린다.
하태석 의원은 준비해 온 사진 한 장을 위원들에게 들어보인다. 김상태 의원님 잘 보이시나요? 하 의원이 맞은편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 쪽으로 사진을 내민다.
이 것은 2017년 9월10일 베트남 휴양지 다낭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 속 장면은 호화 요트 위다. 세 명의 남자와 그들의 무릎에 앉은 세 명의 젊은 여자가 보인다. 남녀의 나이차와 원색 비키니 차림 여자들의 풍만한 젖가슴이 선상파티의 성격을 말해준다.
국민 모두가 보실 수 있기 때문에 제가 모자이크 처리를 좀 했습니다. 세 분 얼굴이 잘 보이십니까? 제일 왼 쪽 이 분은 대화건설 송주호 회장님이시죠. 가운데는 잘 아시다시피 김영학 의원님. 오른쪽은 대한일보 오태호 주필이십니다. 다들 라이방을 끼셔서 얼굴이 잘 안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아 제가 가슴컷으로 사진을 확대한 것을 따로 준비했습니다. 하태석 의원은 들고 있던 사진을 바꿔 든다. 확대된 사진 속 세 명의 남자는 분명 송주호 회장과 김영학 의원, 오태호 주필이다. 오태호 주필은 트레이드 마크인 마도로스 파이프를 물고 있다.
정무위 국감장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세 명의 남자가 하태석 의원이 제기한 의혹의 주인공이기도 했지만 정작 더 큰 이유는 사진속의 한 여자 때문이었다.
그 여자. 오태호 주필 무릎 위에 있는 여자 말이에요. 말 문을 연 건 민주당 김보경 의원이었다. 고 임지연양 아닌가요?
김보경 의원님이 보신 게 맞습니다. 하태석 의원이 말을 이었다. 오태호 주필의 입꼬리가 이렇게 올라가 있는 이유는 마도로스 파이프 때문이 아닙니다. 그의 무릎에 앉은 이 여성 얼굴 보이시죠. 제가 잘 안보이실까봐 오태호 주필과 이 여성 얼굴만 또 확대를 했습니다. 국감폭달, 즉 국감장 폭로의 달인으로 유명한 하태석 의원은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법을 잘 알고 있었다.
확대된 사진 속의 얼굴은 배우 임지연양이 틀림 없었다. 오태호 주필의 손이 비키니 속 가슴에 닿아서일까. 입꼬리가 올라간 오 주필과는 달리 임지연양은 눈꼬리가 올라갔다.
임지연은 2018년 1월 자살사건으로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는 7살 때 아역 탤런트로 데뷔해 똑 소리나는 연기로 유명세를 떨쳤다. 자살시점은 임지연이 오랜 무명생활의 터널을 지나 막 제2의 전성기를 구가하기 시작한 때였다. 임지연은 분당 자택 침대위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수면제를 다량 복용한 상태였고, 머리맡에서 유서가 발견됐다. 하지만 경찰은 자살로 결론짓고 서둘러 수사를 종결했다.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이 극단적 선택으로 이어졌을 수 있다는 전문의의 소견이 전파를 탔다. 유족들은 부검을 원치 않았다.
SNS를 중심으로 갖가지 음모론이 제기됐다. 유서 필체로 보아 쓴 사람이 정신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태였고, 이는 일반적으로 자살을 결심한 사람의 심리상태는 아나라는 한 신경정신과 의사가 올린 글이 음모론을 확대재생산 했다. 임지연이 재기하는 과정에서 기획사가 정치권과 언론계, 연예계 유력 인사들에게 성상납을 강요했고 임지연이 죽기 전 이에 대한 괴로움을 여러차례 토로했다는 익명의 증언들도 나왔었다. 경찰은 타살을 입증할 뚜렷한 증거가 없다며 재수사를 거부했다. 의혹은 꼬리를 문 채 수면 아래 가라앉았다.
지금까지 보여드린 사진들은 임지연양의 오빠 임창주씨가 저희쪽에 보내 왔습니다. 저희 당은 임창주씨가 넘겨준 임지연양의 일기장 두 권과, 다낭에서의 선상파티 당시를 녹음한 음성파일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일기장 내용을 이 자리에서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임지연양 자신과 같은 소속사 동료 연예인들이 성상납한 정계와 재계, 언론과 연예계 유력인사들의 실명이 낱낱이 기록돼 있습니다. 오태호 주필의 이름도 있습니다. 음성파일로 오태호 주필에 대한 강요된 성상납을 증명하 수 있다는 점을 이 자리에서 일단 밝히겠습니다.
그런 증거가 있었다면 왜 2018년 사건 당시 임지연양의 가족들은 가만히 있었던 겁니까. 이상하지 않아요. 증거의 진위를 담보할 수 있습니까. 김상태 의원이 나섰다. 이번 의혹이 진실로 밝혀진다면 한나라당의 입지에 심각한 타격이 불가피했다.
증거의 진위 여부는 검찰 수사에서 밝혀질 것입니다. 본 의원은 해운대 디에이치타워 불법 인허가와 그 과정에서 송주호 대화건설 회장이 김영학 의원님과 오태호 대한일보 주필을 상대로 베푼 베트남 휴양지 호화 섹스파티, 즉 성상납 사건에 대한 검찰수사와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바입니다.
하태석 의원은 짐짓 섹스파티란 용어를 썼다. 3조원 규모의 부동산개발 사업에 얽힌 스캔들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었지만 섹스파티나 성상납이 언론은 물론 일반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데 보다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대답을 제가 빼먹을 뻔 했습니다. 존경하는 김상태 의원님께서 임창주씨, 즉 고 임지연양의 오빠가 왜 사건 당시에는 일기장과 녹음파일을 공개하지 않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에 대한 답을 드리겠습니다. 당시 임양의 가족들은 협박을 받았습니다. 그 것도 매우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는 정체 미상의 조직으로부터 말입니니다. 임양의 오빠는 당시 당한 폭행으로 인해 왼쪽 눈이 실명 상태입니다. 임양의 일기장과 선상 섹스파티 녹취파일은 임양의 가족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 숨겨온 증거인 것입니다. 2018년 5월8일 정권이 바뀐 날 임창주씨는 비로소 숨겨왔던 증거들을 꺼냈다고 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존경하는 의원님들은 충분히 이해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본 의원은 당시 임양의 가족에게 위해를 가하면서까지 협박을 한 조직의 배후가 저희가 짐작하는 분들이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차이나게이트를 빌미로 민주당에 포문을 연 한나라당은 디에이치타워 불법 인허가 스캔들로 하루 만에 역공을 당한 꼴이 됐다. 세간의 관심은 부동산 개발 스캔들보다 베트남 호화 섹스파티에 집중됐다. 하태석 의원을 배후 조정한 장중경이 설계한 의도였다. 3조원 규모의 부동산 개발 비리에 1조원 규모의 차이나 게이트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차이나 게이트를 구실로 한 한나라당의 공세를 일시에 꺾을 수 있는 메가톤급 재료였다. 섹스파티는 대한일보를 겨냥한 것이었다. 장중경 입장에서 이번 폭로는 일석이조의 묘수였다.

5장: 경평축구(1-2/5)...꼬리를 자른 대한일보

# 하태석 의원의 오 주필 성접대 폭로로 대한일보는 쏙대밭이 됐다. 차이나 게이트를 빌미로 민주당 쪽으로 열어두었던 포문은 일시에 닫혔다. 편집회의실에 긴급 호출된 간부들이 모였다. 김창환 국장은 담뱃불을 당겼다. 사내 금연이지만 뭐랄 이가 없었다. 남궁종원 부장은 연신 하품을 해댔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쏘아보는 김 국장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담배를 끊은 곽도운 사회부장도 김 국장의 담뱃값에서 한개비 남은 담배를 꺼내 문다. 전략통인 이광희 경제부장도 어찌할 바를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담배가 타는 건 지 속이 타는 건지 편집회의실은 검은 연기로 가득찼다. 끼익. 회의실 문을 여는 소리다. 고개만 안으로 쏙 내미는 사람. 오태호 주필이다.

들어와 앉으세요. 안어울리 게 눈치는. 엎질러진 물 아닙니까. 빨리 말리는 게 상책이에요. 오 주필은 세 기수 아래인 김 국장의 사수였다.김 국장을 키운 건 8할이 오 국장의 욕이었다. 야 이 새끼야. 세시 쯤이 아니라 세시 께라고 몇번을 말해. 소 새끼도 이만큼 했으면 기사를 썼겠다. 이 돌대가리 새끼야... 오 국장의 쌍욕을 듣지 않는 날은 퇴근길이 오히려 불안할 정도였다. 둘이 마신 술을 한강에 풀면 서해 물고기들이 취할 것이라고 오 주필은 농을 치고는 했다.
오 주필은 곱사등이처럼 허리를 굽히고 발레리나처럼 발가락을 세워 걸어들어와 앉았다. 담배 연기에 질색하는 그였지만 이번엔 코를 막고 참았다.
어디까지 커버쳐야 합니까. 김 국장은 단도직입적으로 오 주필에게 물었다. 자신의 담배가 필터까지 타들어가자, 곽 부장이 문 담배를 빼앗아 물었다.
뭘 물어요. 딱 봐도 기획인데. 이미 준비된 파일이에요. 언제 써먹을까 호시탐탐 기회만 보다 차이나 게이트 터뜨리니까 이 때다 한 거지. 장중경이 원투쓰리 준비 안하고 날렸겠어요. 곽 부장은 김 국장이 가로챈 담배를 다시 빼앗아 물었다. 이번엔 이로 필터를 질근 깨문다. 곽 부장은 김 국장의 부사수였다. 오 주필의 손자 뻘인 셈이다.
섹스 파티. 했지. 오입 했어. 인정해. 근데 그 게 나 뿐이냐. 나 뿐이냐구. 김 주필하고 송 주필은 안 그랬을 것 같아. 야 웃기지 말라 그래. 다 그랬어. 근데 왜 나만 갖고 그래. 순간의 호연지기는 자신을 쳐다보는 후배들의 시선에 금새 무너졌다. 오 주필은 다시 곱사등이가 되어 회의실 바닥에 시선을 꽂았다.
아 씨발.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구만. 도통 감이 안와요? 지금 여기서 왜 중앙일보, 동아일보가 나오는데요. 교통딱지 떼는 데 왜 나만 잡냐고 벌금 안낼꺼에요. 안낼꺼야. 아 씨발. 애시당초 걸리질 말든가. 지금이 무슨 쌍팔년도인 줄 알아요? 주필이 연예인 뒷구멍 핥으며 오입이나 하고 다니고. 곽도운 부장이 바닥에 담뱃불을 비벼 끈다.
지금 우리끼리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잖아요. 장중경이 한 번 문 이상 피를 보려고 할텐데. 어떻게 해야 출혈을 최소화할 지 논의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이 부장이다.
뭘 어떻게 해. 사실무근이라고 잡아떼야지. 일 한두번 해보나. 장중경이 반격해야지. 이 새끼가 대한일보를 물로본 거야, 대한일보를. 곱사등이의 등이 펴졌다 다시 꼬부라진다.
상황이 간단치 않아요. 검찰 수사까지 운운하는 거 보면 제2, 제3의 플랜이 있다는 얘기지. 잽만 날리고 끝낼 기세가 아니에요. 김 국장의 촉이 왔다.
국장 말이 맞아요. 남궁종원 부장이 젖혀진 의자를 바로 세우고 앉았다. 임지연 오빠가 사진을 갖고 있었다면 임지연 폰으로 찍었다는 얘긴데. 이상하지 않아요. 아마추어도 아니고.
생각해보니 그렇네. 걔들 처음부터 비키니 차림이었거든. 연예인하고 오입한 게 한두번도 아니고 핸드폰이야 접대하는 쪽에서 보관해 놓는 게 불문율인데. 안그럼 불안해서 어디 묵겠나. 내도 사전에 그 정도는 확인하고 한다.
참 잘하셨어요. 손목에 칭찬 도장이라도 찍어드릴까. 곽 부장이 쏘아본다. 오 주필이 김 국장에게 시선을 보낸다. 구조요청이다.
왜 저를 보십니까. 도운이가 틀린 말 한 것도 아니고. 김창환 국장도 이번만큼은 오 주필 편이 아니다.
사진을 보면 저 배에 적어도 일곱이 있었어요. 누군가 사진을 찍어줬다는 얘기니까. 남궁종원 부장이다.
오 선배 핸드폰은 아니고. 김영학 의원도 아니에요. 그렇다면 송주호 회장과 요트 기사 둘이 남습니다. 일단은 송 회장이 보험용으로 찍어놓았을 가능성인데. 김영학 의원도 오 선배도 그럴 실수를 할 분들은 아니에요.오 선배 자신의 말대로 오입 한두번 한 것도 아니고. 오 주필이 또 한번 고개를 숙인다. 그럼 요트 기사 하나가 남습니다. 이 경제부장은 여러 시나리오 중 가능성이 적은 것들을 하나하나 제외시켰다. 결국 한명의 용의자가 남았다.
요트는 산업은행이 제공한 것이었어. 오 주필은 당시 기억을 더듬었다. 후배들 앞에서 면목이 없는 척 연기를 했지만 그는 분명 녹록치 않은 인물이었다. 대한일보 사상 최장기 편집국장이란 경력이 여신의 미소 때문만은 아니었다.
산업은행요? 부동산 비리와 섹스 스캔들의 한 가운데서 갑자기 산업은행이란 이름이 나오자 김 국장은 사진의 출처를 직감했다.
디에이치리조트는 한베 경협의 결과물이야. 당시 정부도 대화건설도 그 점에 초점을 맞춰서 대대적으로 홍보를 했지. 베트남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산업은행이 국내 건설사가 시공과 운영을 맡는 조건으로 개발비를 100% 파이낸싱 했으니까. 오 주필은 무서우리 만치 차분하게 당시의 기억을 정리했다.
3천만평 부지에 개발비용만 10조원. 베트남 부동산 개발 사상 최대규모였죠. 호텔과 리조트, 컨벤션, 베트남 최대 면세점, 72홀 골프장, 요트와 패러글라이딩 등 각종 해양스포츠가 가능한 복합리조트... 규모만 보면 대륙 스케일이죠.
도운이 너는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 남궁 부장이다.
대화건설이 리조트 오픈하면서 언론사 데스크 대상 출장을 갔었어요. 김영란법 때문에 출장을 가려면 전 언론사를 데리고 가야해서 비용이 만만치 않았을 텐데 송 회장이 빅이벤트를 감행한거죠. 그만큼 홍보효과는 있었을테니까.
산업은행이 사진을 갖고 있었다면 국정원의 손에 사진이 넘어갔었다고 봐야겠지. 정부 초기 정권 안정에 정신이 없었을테니 사진을 써먹을 기회만 노렸을테고. 도운아 산업은행 출입기자가 누구지?
차 차장이죠.
학경이면 밀을 만 하겠군. 최 행장은 장중경이 꽂은 인물이니 조심하고, 부행장들 중에 박근혜 때 라인 없나 파악해봐.
마침 조 부행장이 당시 PEF본부장을 했던 장본인이에요. TK면서 최 행장 체제에서도 살아남은 유일한 인물이고.
일단 사진의 출처가 산업은행이란 점만 밝혀지면 정부여당의 치졸한 정치공세로 밀자구. 임지연 오빠 이름이 뭐였지?
임창주요
그래 임창주. 임창주는 위증으로 프레임을 짜고.
형님. 위증은 하태석 아니에요?
하태석보다 임창주가 상대하기 편할 꺼 아냐. 국민이 법 조문 따지며 신문보냐.
곽도운 사회부장은 떨떠름한 표정이다. 고지식한 인물이다.
그리고 장중경이 샅샅히 캐봐. 언제 처음 걸음마를 했고 똥은 무슨색인지까지 다 털어.
...
종원. 내 말 들은거야?
상대는 여당 3선 실세에요.
그러니 칼을 뽑았을 때 숨통을 끊어야지. 안그럼 우리가 당해. 그게 너 공천 받는 데도 유리하지 않겠냐. 비꼬는 말투다.
여기서 공천 얘기가 왜 나옵니까.
그리고 도운이.
예.
임창주도 털어.
임창주요?
돈 문제. 여자 문제... 암튼 애기 되는 건 모두. 빌붙어 살다 여동생 죽고나니 생활고에 찌들려 어쩌고 저쩌고. 왜 있잖아.
형님. 선을 넘지는 맙시다. 대한일보가 3류 주간지도 아니고.
지금 전쟁이야. 적군 가려가며 총쏘냐. 휘두를 수 있는 건 모두 휘둘러.
네. 마지못해 답한다. 근데 말에요 형님.
또 뭐.
우리가 여기서 이러는 게 의미가 있는 겁니까.
무슨 소리야.
결국 결정은 회장이 하는 거 아니요. 회의실 분위기는 일순간 얼어붙었다. 따르릉. 마침 전화가 울린다. 2679. 회장실이다.
네. 회장님. 회의실 간부들은 김 국장의 손에 들린 수화기에 귀를 기울인다.
네?...정말 그렇게... 네. 알았습니다. 전화기를 내려 놓는 김 국장. 표정이 어둡다.
뭐라 그래?
...
야 임마. 회장님이 뭐라 그래?
오태호 주필, 자진사퇴. 대한일보 자정 위해 인적쇄신. 내일자 사고 야마랍니다. 고개를 떨구는 김 국장.
회장이 그럴리가 없는데. 자리에서 일어서는 오 주필. 회장님을 뵈야겠다.
형님. 올라오지 말라십니다.

5장: 경평축구(2/5)...연쇄살인범 구노

# 어 이게 뭐지. 포크레인 기사 김씨는 포크를 내려찍었다. 산동네 집들은 포크질 한번에 대부분 주저앉았다. 이번엔 달랐다. 커다란 바위가 방바닥 밑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쇳덩이가 이기지 못하고 튕겼다.
포크를 다시 들어올렸다. 조금 옆을 찍었다. 쇳덩이는 이번에도 튀었다.

오씨. 김씨는 고개를 내밀어 뒷정리를 담당하는 오씨를 불렀다.
오씨와 최씨는 드릴을 들고 포크질에 방바닥이 주저 앉기만을 목을 빼고 기다렸다. 이집만 끝나면 상동2동 재개발 구역 철거작업은 얼추 마무리가 되는 것이었다.
왜 불러쌌는겨. 오씨는 일이 끝나면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사겠다는 최씨의 말에 마음이 급했다.
거기 방바닥좀 한 번 봐줘요. 좀 이상해요.
방바닥이 방바닥이지 뭐가 이상하다는 거여.
오씨와 최씨는 김씨의 말에 군데군데 패여 난장판이 된 방바닥을 이리저리 살폈다. 방 한 칸과 부엌으로 이뤄진 판잣집은 포크질 몇번에 지붕과 벽, 부엌 바닥이 형채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부숴져 버렸다. 방바닥만이 예외였다. 방바닥은 거대한 콘크리트 덩어리였다.
대체 뭐단가. 뭔 하꼬방에 시멘트를 이리 쳐바른겨.직감적으로 불길함을 느꼈다. 콘크리트 더미에선 항상 누군가 세상에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지수대로 들어서는 이테라는 조금전 청계천에서 주승우와 보낸 시간을 생각했다. 남자는 시시한 것이었다. 경찰대에서 만난 녀석들과 연애란 것을 해볼까 생각도 해봤었다. 녀석들은 예외없이 자신의 우수한 DNA를 자랑하기 바빴다. 궁금하지도 않은 자신의 아버지 얘기를 첫 데이트에 하는 녀석도 있었다. TV에서 본 전직 기재부 장관이었다. 한 녀석은 자신과 첫 섹스를 한 뒤 연락이 끊겼다. 그날밤은 무엇에 그토록 화가 났었는 지 밤새도록 섹스를 탐닉했다. 경찰이 된 후에도 몇번 소개팅이란 것을 했지만 가슴이 설레는 남자는 없었다. 시간이 흘러도 남자들은 자신의 우성 형질과 힘쎈 아버지 얘기를 했다. 그리고 몇번의 섹스를 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다. 잘나고 권력이 있는 아버지를 가진 남자들은 하나같이 침대에선 무기력했다. 남자들은 자신을 안고 나면 알 수 없는 표정을 짓곤 했다.
주승우는 자신의 우성 형질을 자랑하지 않았다. 부자 아버지 얘기를 농담처럼 내뱉은 게 그나마 다른 놈들과 비슷했다. 그의 무엇이 자신을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테라는 궁금했다. 수사대 사무실로 들어서며 이테라는 피식 웃었다.
침좀 닦고 다닙시다. 눈앞에 불쑥 나타난 익숙한 얼굴. 짙은 쌍꺼풀에 졸린 눈. 육중환 형사였다.
무슨 침을 흘렸다고…. 이테라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으로 입주변을 쓱 닦았다.
이마에 써 붙이지 그래요. 연애한다고. 육중환은 동생같은 이테라 팀장을 골리는 게 제법 재미가 있었다.
연애는 무슨 얼어죽을. 이테라는 비밀을 들킨 어린 아이처럼 짐짓 화를 냈다. 얼굴이 붉어진다.
팀장님 화장하셨어요? 홍조를 띈 얼굴을 보고 육중환은 팀장 놀려먹기 장난을 계속한다. 얼굴이 창백할 정도로 하얀색이어서 안색이 조금만 변해도 이테라는 눈에 띄었다.
화장은 무슨… 얼어죽을. 육 형사님 이런 것도 성희롱인 거 아시죠? 식탐도 많으신데 콩밥 한번 드셔보실래요.
화장이 아니었네. 팀장님 지금 부끄럼 타시는 거에요? 천하의 이테라가? 콩밥 경고로는 소용이 없었나 보다.

주먹을 불끈 쥐는 이테라. 한 대 칠 기세로 뒷걸음 쳐 달아나는 육중환을 쫒는다.
티격태격 하는 사이 날아오는 주먹을 육중환은 무대뽀 몸으로 막아냈다. 애당초 타격할 의지가 없다. 이테라도 그저 부끄러운 순간을 모면할 요량이었다.
참 팀장님. 가볍게 날아오는 이테라의 주먹을 손바닥으로 쥐더니 육중환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급한 보고 내용이 이제 막 생각이 났다는 표정이다. 쌍꺼풀을 꿈벅꿈벅 한다.
구노가 자백을 했답니다.
놀란 이테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구노는 적어도 지정선을 죽이지 않았다고 이테라는 확신했다.
며칠전 상도2동 재개발 구역 철거작업 중 인부들이 구노 아내의 백골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아내의 백골이라구요? 구노 아내라면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야반도주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이테라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구노 어머니의 진술이었죠.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아내가 구노를 버린 것과 살해를 당한 건 엄청난 차이였다. 아내를 죽인 게 구노라면 그에 대한 프로파일링은 원점에서부터 재구성 돼야 한다. 이테라는 자신의 프로파일링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다 손 쳐도 적어도 구노에 관한 자신의 프로파일링은 틀림이 없어야 했다. 그를 둘러싼 재료는 오직 한가지 결과를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가능성이 있을 수 없었다. 구노가 자기 자신마저 완벽히 속이고 있다는 것 외엔.
구노가 아내를 죽였다는 말인가요. 이테라는 아니기를 바랐다.
네. 기대는 빗나갔다.
구노가 딸을 학대했었다고 합니다.
딸을요? 점점 더 이해하지 못할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프로파일링 상으로 구노는 자존감이 쎈 사람이었다.
구노의 아내 말입니다. 이테라는 딸 이야기를 하는 데 육중환의 보고는 구노의 아내에 초점이 맞춰졌다. 구노 고등학교 때 윤간 사건 기억하시죠.
네.
구노의 아내가 바로 그녀입니다.
그녀라구요? 피해자 말인가요?
네. 피해자 한지숙이 구노의 아내였습니다.

# 서울지검 취조실. 지정선 ST공사 노조위원장 살인 혐의로 서대문 구치소에 수감된 구노가 소환됐다. 차이나게이트가 폭로된 후 특검 구성까지 관련 수사는 박정도 차장검사의 손에 맡겨졌다. 대쪽같은 성품에 공명정대하기로 정평이 난 박 검사였다.
구노는 지난 31일 지 위원장 살해 현장에서 체포됐을 당시 경찰서 취조실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주변 정황이 자신을 둘러싼 진실과는 상관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구노는 직감했다. 자신이 지 위원장을 실제 죽였는 지는 중요하지 았다는 것을 구노도 알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 자신이 살인자이길 바란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는 원하는 대로 상황을 만들 수 있는 사람임이 분명했다. 세상은 또 한 번 자신을 짓눌렀다.

순간 취조실 문이 열린다. 박정도 검사실의 배테랑 조조영 수사관이었다.
툭 하고 탁자 위에 서류 봉투 하나가 떨어졌다. 구노는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봉투 안에 무엇이 들었는 지 모르지만 자신을 범인으로 만들 무엇임이 분명했다. 구노는 그렇게 생각했다.

구노의 관심이 봉투에 집중된 것을 눈치챈 조 수사관은 봉투에서 서류를 꺼내 구노의 앞에 내밀었다.
이 게 뭐요. 구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보면 알 꺼 아냐.
구노는 두 눈을 찡그렸다. 심각한 근시였던 구노는 돋보기 없이는 신문조차 보지 못할 정도였다. 서류는 읽을 수 없었지만 동봉됐던 몇장의 사진은 눈에 들어왔다. 뚜렷하진 않지만 그 것이 무엇인지 구노는 금방 알아챘다. 순간 찡그렸던 두 눈이 놀란 토끼의 그 것마냥 커졌다.
한지숙, 네가 죽었지. 조 수사관은 질문을 빌어 단정했다.
구노는 말이 없었다. 말문이 막혔다.
사망한 지 2년이 지난 백골. 40대 중반의 중년 여성. 혈액형 A형. 키 164cm. 한지숙 맞잖아.
국립과학수사원의 백골 검식 결과는 모든 것이 한지숙과 일치했다. 검식자란엔 한송희 박사의 사인이 선명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지정선 위원장에 대한 살해 혐의를 벗어날 방법에 골몰했던 구노는 자신이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조차 까마득히 잊었었다. 자신은 억울한 살인 용의자가 아니라 실제 살인자였던 것이다. 망각의 서랍속에 밀어 넣었던 끔찍한 과거가 현실로 삐죽삐죽 새 나왔다.
눈을 뜨고 있으나 단 한줄기 빛도 보이지 않았다. 사방을 둘러봐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구노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죽였습니다. 어깨에 힘이 빠졌다. 눈이 풀렸다. 의자에 붙은 엉덩이가 흐물흐물해져 허리를 똑바로 펴고 앉을 기운이 없었다. 구노의 기억은 한 순간에 2년전 그 날밤으로 돌아갔다. 술에 취해 주먹으로 딸을 때리던 장면이 눈앞에 섬광처럼 지나갔다. 그를 말리던 아내 한지숙의 모습과 자신이 한지숙의 목을 조르던 장면, 그 모든 것을 숨죽여 지켜보던 어머니의 눈빛. 공포와 원망이 가득한 그 눈빛이 기억속을 가득 메우자 구노는 눈물이 났다. 구노는 한지숙에 대한 의심과 컴플렉스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신의 딸이 친딸이 아니라는 망상에 시달렸다.

# 박정도 검사실. 이테라와 청계천에서 망중한을 보낸 주승우는 고교와 대학교 선배인 박 검사의 전화를 받고 서울지검으로 왔다. 티테이블엔 여지없이 박 검사가 직접 내린 녹차 한잔이 나왔다.
주승우는 전화로 박 검사로부터 대략적인 구노의 자백 내용을 들었다. 구노가 아내를 죽인 살인범이란 사실은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의 수사방향에도 결정적인 변수였다. 프로파일러인 이테라는 구노가 지 위원장 죽인 범인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주승우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자는 생각이었지만 이테라의 주장에 믿음을 갖고 있었다. 찻잔을 드는 주 승우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구노의 아내가 그 사건의 피해자였다는 건 의외네요.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이 핵심이었지만 구노의 과거는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구노가 자신의 아내를 죽였다는 사실은 지정선을 살해했을 가능성도 더 커졌다는 의미다. 결국 지정선 위원장 살인사건과도 연결된 사건이었다.
이 일을 하다보니 세상엔 보통사람들과는 다른, 다양한 삶들이 존재하는 사실에 놀라곤 한다. 수많은 삶의 모습들을 봤지만 구노의 경우는 익숙하지가 않다. 박 검사는 차를 한모금 마셔 목을 축였다.
성폭행, 그 것도 윤간을 당한 피해자가 그 사건의 가해자와 함께 산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엄밀히 말하면 구노는 가해자는 아니지. 한지숙을 꼬여 피해 장소로 데려갔으니 사건과 관계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든 윤간에는 가담을 하지 않았으니.
한지숙의 입장에선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어쩌면 가해자들보다 구노가 더 원망스러웠을 수도 있었겠죠. 구노가 아니었으면 사건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구노는 한지숙을 사랑했었네. 물론 짝사랑이었지만.
세상에 그런 사랑도 있습니까.
사건 이후 한지숙 자신의 삶은 물론 가족 전체의 인생이 산산히 깨졌네. 아버지는 술에 취해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어머니는 딸의 사건에 이어 남편이 죽자 목을 메 자살을 했네. 언니는 그래도 동생과 살아보겠다고 애를 쓴 것 같은데 결국 사창가의 여자로 전락했어.
박 검사는 또 한모금 목을 축인다.당시 여고생이었던 한지숙이 감당하기엔… 한지숙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지게 됐더군. 10년이란 세월을 정신병원에서 보낸 한지숙이 어떤 상태였을 지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
그 곁에 구노가 있었겠군요.
정확하네. 한지숙의 아버지 한태호는 한 때 이름만 대면 알만한 택시회사 사주였었네. 동업하던 친구에게 속아 회사를 빼앗기고 빈털털이가 돼 상도2동 달동네로 오게 된 모양이야.
전형적인 비극의 여주인공이네요.
구노는 한지숙의 가족이 이사를 오던날을 생생히 기억하더군. 마치 앨범 사진을 보듯이 말이야. 따듯한 봄 햇살이 비추던 한지숙의 하얀 얼굴을 보는 순간 구노는 자신의 모든 영혼을 빼았겼다고 했네.
그 때가 지금 이 모든 비극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을까요.
글쎄. 구노는 그 때가 자신의 삶이 시작된 출발점이라고 하더군.
삶의 시작이라… 한지숙의 삶은 그 점에서 끝났는데 말입니다.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는 않지. 사랑도 마찬가지야. 누군가를 끔찍히 위하는 마음이 그 대상을, 결국은 자신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버스가 종점에 다다르기 전에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야.
사랑은 해피엔딩을 꿈꾸며 불속으로 질주하는 자동차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박정도 검사의 말은 구노를 염두한 것이지만 주승우의 마음에도 정확히 꽂혔다. 부진을 죽음으로 내 몬, 사랑하는 사람을 보면서 옅은 미소조차 지을 수 없는 지금의 자신도 결국 모두 사랑이란 불장난의 결과였다.

정신병원 생활 10년 내내 구노는 지숙을 챙겼네. 정비소 보조 생활을 하면서 번 돈은 구노는 두 여자를 위해 모두 써버린 셈이지. 한명은 자신의 어머니, 나머지 한명이 바로 한지숙이고.
지극정성이 한지숙의 마음을 연 것이군요.
아니. 한지숙이 마음을 연 건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이후네.
한참 후라구요.
병원을 나온 한지숙이 상도2동 달동네로 돌아온 후에도 구노는 계속 그녀를 보살폈어.
마음을 연 것이 아니라면 그 집으로 돌아가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구노의 정성이 결국 통했다는 게 아닐까요.

한지숙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네. 부잣집 공주로 태어나 부족함 없이 살았던 여고생 시절에서 한지숙은 멈춰있던 사람이었지. 부모도 없고 언니도 소식이 끊긴 상황에서 한지숙이 무슨 수로 달동네 판잣집을 벗어날 수 있었겠나.
한지숙이 구노의 곁으로 간 건 결국 생존을 위한 것이었단 말씀이군요.
그랬던 것 같네. 병원을 나온 후 한지숙은 한동안 양길수란 동네 건달과 동거를 했다고 하더군. 그 때도 한지숙을 돌본 건 양길수가 아니라 구노였어. 양길수는 동거녀가 매달 갖고 오는 푼돈까지 도박판에서 날려버리기 일쑤였고 틈만나면 돈을 더 갖고 오라며 지숙을 폭행했네. 물론 그 돈은 모두 구노가 지숙에게 준 것이었고.
구노와 한지숙이 살게 된 건 결국 어떤 계기가 있었다는 얘기네요. 주승우는 찻잔을 들었다 찻잔이 비워진 것으로 보고 내려놓았다.
어느날 밤. 양길수가 한지숙을 심하게 때리던 날, 그 소리가 담장밖을 넘은 모양이야.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밤인데도 비명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퍼진 거지. 그 소리를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구노가 듣게 됐고.
왠지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질 수 밖에 없었던 분위기네요. 찻잔을 들어 한모금 마신다.
구노는 달려들어가 양길수를 죽였네. 깨진 벽돌 하나를 들고 들어갔다고 하더군.

5장: 경평축구(3/5)...아까다(あかだ) 농장의 황필구

# 광화문 코리아나호텔 1층 카페. 주승우는 땅거미가 진 카페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다가오는 전조등과 멀어지는 테일램프. 뒤엉켰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한숨을 쉬었다. 민영우 시장의 결백에 집중하는 사이 중요한 것을 놓쳤다. 앞만 보고 달린 경주마 같았다.

음성파일이 세상에 나와야 하는 이유. 그 것은 민영우 시장이 아니라 황병서였다. 황병서는 변만섭을 살해한 강석호의 배후임에 틀림 없다. 지정선 위원장 사건과도 어떤 식으로든 연루가 됐음이 분명했다. 그는 서울에 있다. 이유는 김정은에 대한 복수다. 황병서는 서울에서 테러를 모의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와 지하철 공사 노조위원장의 죽음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변만섭의 죽음은 음성파일이란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김정은에 대한 테러와 지하철. 두 단어가 주승우의 머릿속에서 얽혔다.

왠일이냐. 여기까지. 주승우가 맞나. 대한일보 조상룡기자였다.
친구보러 왔지.
안어울려. 하던 대로 하자구. 달달한 말은 주승우의 혀와는 매칭이 안된단 말이지. 의자를 빼고 앉는다.
커피 한 잔 시켜라. 더블샷? 주승우가 일어선다.
됐어. 주승우의 손목을 잡는 조상룡. 카페인에 몸이 절었다. 꼰대 잔소리에 스트레스 만땅이거든. 주승우가 여기까지 온 거 보면 뭔가 급한 일이 있다는 건데. 본론으로 가자.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 파일이란 것과 관련된 건가? 민영우 시장에게 보냈다던. 네가 아침부터 설레발을 치는 것을 보고 또 뭔가 물었나 보다 했다. 일단 네가 시키는 대로 하기는 했는데 무슨 일인지 얘기는 해줘야 할 게 아니냐.
주승우는 USB를 테이블 위에 꺼냈다. 그 음성파일이야.
무슨 내용인데.
하나는 민영우 시장이 차이나게이트와는 상관이 없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말을 삼키고 입을 꾹 다무는 주승우. 황병서를 언급하려던 대목에서 멈칫한다.
조상룡은 뭔가 심상치 않은 내용이 파일에 담겼음을 직감했다. 민영우 시장이 차이나게이트에 연루되지 않았다는 사실만 담겼어도 빅뉴스다. 대선 판도에 결정적인 변수였다. 대체 무엇인데 주승우가 이토록 신중한 것일까.
황병서.
황병서?
황병서가 서울에 있는 것 같다. 주승우는 단정하지 않았다. 확신했지만 아직은 심증에 불과했다.
황병서는 뭐고, 서울에 있는 것 같다는 건 또 뭐고. 마음이 급해지자 조상룡은 고향 사투리가 튀어 나왔다. 북한 황병서 말이가.
맞아 황병서. 황병서가 서울에 있다. 내 짐작이 맞다면 목표는 김정은에 대한 테러고.
무슨 말이고. 거두절미하라 했지만 말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든 것이었다. 주승우의 성격을 잘 아는 조상룡은 황병서와 테러란 두 단어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허튼 소리할 놈이 아닌데. 조상룡은 생각했다.
네가 보도해라. 파일 속 인물 중 한명은 장중경이고. 북한 사투리를 쓰는 자가 황병서야. 음성의 진위 여부는 네가 확인해줬으면 좋겠어. 시간이 없다.
하나만 묻자. 왜 이 걸 나에게 주는거지? 역사적 특종인데. 대한민국의 운명이 달린 일이다. 음성이 떨렸다. 손도 떨렸다.
맞아. 나조차 오늘에서야 이 파일의 갖는 의미를 깨달았지만.
그런데 왜.
그냥 주는 게 아니야.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주승우는 몸을 앞으로 숙였다. 마침 울리는 전화벨. 이테라였다. 주승우는 문자를 남겼다. 곧이어 긴급이란 답문이 떴지만 주승우는 읽지 못했다.
뭐냐.
좀 더 몸을 앞으로 숙이는 주승우. 조상룡도 이에 맞춰 몸을 숙인다.
조상룡이 사무실로 돌아간 후 주승우는 이테라에게 전화를 건다. 서너통의 문자가 와 있다. 한번 울리자마자 이테라가 전화를 받는다.
급한일이 있던 모양이네요. 이테라의 목소리다.
네. 음성파일을 대한일보에 전달했습니다.
대한일보요? 무슨 말씀이세요. 이테라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음성파일의 존재를 세상에 알리는 건 민영우 시장의 전략에 이용당하는 것이라며 보도를 하지 않겠다던 주승우였다.
황병서가 서울 한복판에서 테러를 모의하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알려야 하니까요. 민영우 시장과 관련된 사실은 단 한줄도 대한일보가 보도하지 않을 겁니다.
그랬군요.
급한 일로 전화를 했던 것 같은데.
아. 이테라는 황병서의 테러란 말에 자신이 주승우에게 전화를 했었단 사실을 잠시 망각했다. 황병서와 장중경 의원은 같은 고향에서 형제처럼 지낸 사이에요.
같은 고향이라구요? 북한 총정치국장였던 황병서가 대한민국 여당 실세이자 5대 재벌인 장중경과 동향이라니. 주승우는 거의 모든 각도에서 황병서와 장경중의 연결고리를 생각해 봤지만 둘이 동향이란 사실은 예상 밖이었다.
장중경 고향이 전북 고창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고창에선 웬만큼 나이드신 분들은 다들 알고 있는 사실이라고 하네요. 황병서가 고창 출신이란 것을요.
황병서가 고창 출신이라. 하긴 황병서 나이 81살이니 남북이 분단되기 훨씬 전에 태어난 인물이다. 남한 출신이라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고창경찰서에 경찰대 선배가 있어서 부탁을 좀 해놨었어요. 장중경 아비인 장삼부. 이 사람이 보통이 아니네요. 빈농으로 태어나 일제시대 호남 2대 농장인 아까다 농장의 주인이 되기까지 스토리가 소설이에요. 황병서 아비인 황필구. 이 사람도 우리 근대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소설속 주인공 같구요. 장중경과 황병서의 인연은 아까다 농장에서 맺어진 장삼부와 황필구의 인연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 1945년 8월15일 정오 아끼다 농장 사장 하루키의 집무실. 라디오에선 항복선언을 하는 일왕 히로히토의 육성이 흐른다. 천둥번개 소리가 문틈을 뚫는다. 비에 흠뻑 젖은 장삼부는 결딴 낼 듯한 기세로 하루키 앞에 서 있다. 번개는 장삼부가 든 잘 벼리어진 낫에 퉁겨서 하루키의 눈동자에 부딪힌다. 낫을 쥔 장삼부의 팔뜩엔 힘줄과 핏줄이 부풀어 올라 섥혀 있다. 인근 장터 씨름대회를 모두 휩쓸어버릴 정도로 힘이 장사인 장삼부다. 농장 사람들은 그가 맷돼지를 맨손으로 때려잡다 애꾸가 됏다는 소문을 전설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내 말대로 하면 죽이지는 않을 것이오 결연한 말투다. 목포항에 갈 때까지 변고는 없을 것입니다. 사장님의 덕망은 적어도 전라도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아사코를 두고 일본으로 가라는 말인가. 장삼부를 바라보는 하루키의 눈빛은 원망이다. 복중의 아이가 내 것이 아님은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니. 그 아이가 너의 것이란 것도 짐작을 하지 못한 바는 아니다. 아니길 바랐을 뿐.
사모님은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그녀는 이 놈을 바란 적이 없습니다. 허나 엄연히 벌어진 일입니다. 사장님은 본국으로 돌아가서도 잘 살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안됩니다. 사장님의 인품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사내는 사내일 뿐입니다. 다른 사내의 씨를 품은 여인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두고, 아니 버리고 가십시오. 더렵혀진 몸입니다.
그 주둥이 닥치지 못할까. 뱃속에서 분노가 끓어오른다. 피가 솟구친다. 온몸의 핏줄이 부풀어 터질 것 같다. 찢어죽여도 시원치 않은 놈이 어디서 함부로 주둥이를 놀리는 것이냐. 더럽혀졌어도 내 것은 내 것이다. 아사코도 복중 아이도.
빌어먹을.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지금 당장 사장님을 베도 아무 탈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천지개벽을 했습니다. 지금 저 목소리. 무식한 놈도 저게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정도는 안단 말입니다. 제발 죽이지 않게 해주십시오. 사장님의 은혜로 제 새끼들이 여지껏 굶지 않았습니다.
닥쳐라.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비록 주인으로 만났으나 내 너를 동생처럼 살폈거늘. 조선 속담에 머리 검은 짐승은 거두는 게 아니라고 했던가. 돌아서 일본도를 든다. 장삼부가 제빨리 낫을 든다. 번갯불에 낫과 카타나가 춤춘다.
잠시후, 집무실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빗속으로 나온다. 팔뚝에 묻은 선혈이 빗물에 줄줄 씻겨 내린다. 부풀어 오른 핏줄들이 가라 앉는다. 털썩, 주저 않는다. 이게 아닌데. 장삼부의 탄식이 빗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터벅터벅. 하늘을 올려다 본다. 시커먼 하늘에서 핏줄기가 내린다.

# 같은 시간 하루키 사장의 아내 아사코의 방. 천둥번개 소리 사이를 아사코의 진통 소리가 날카롭게 파고든다. 비명이 멎고 아이 울음소리가 마당으로 나온다.

# 며칠이 지난 어느날 화창한 낮. 해방을 맞은 아까다 농장의 인부들이 삼삼오오 모여 새참을 먹고 있다. 그들의 일상은 해방전후가 별반 다를 게 없다. 비록 일본인이지만 하루키는 같은 조선인보다 인부들을 인간적으로 대했다. 호남 최대 농장인 구마모토 농장 인부들이 아까다 농장주 하루키의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떻게 그런분들을… 인부 하나가 입에 한가득 국밥을 우겨 넣은 채 탄식을 한다.
그러게 말이야. 쯧쯧… 나란히 앉은 다른 인부는 혀만 끌끌차며 말을 잇지 못한다.
세상에 이 게 뭔 일이래. 며칠 새 송장을 둘이나 치를 줄 누가 알았능가 말이여. 에구 에구. 다른 인부 하나도 말문이 막히긴 마찬가지다.
그 소문이 사실여?
뭔 소문.
사모님이 낳은 애가 사장님 애가 아니라는. 내뱉고는 누가 들을까 실눈을 하고 앞뒤를 살핀다.
자네도 들었구만.
안들은 사람이 없을꺼여. 농장 안에 수근대지 않는 사람이 없어. 주변을 또 살핀다.
뭔 소리여. 눈을 꿈벅거린다.
하여간 세상 돌아가는 걸 모른다니께. 해방된 거는 알랑가.
내가 일자무식이란 거여 지금? 버럭 화를 낸다.
자자. 지금 그 게 중한 게 아니고. 삼부 그 놈이 우리 주인이 되는 거 아녀.
그렇게 되나.
그럼. 생각해봐. 사모님 유서에 모든 재산을 도련님이 클 때까지 삼부에게 맡긴다고 돼 있다는거 아냐. 그럼 이 농장이 삼부 것이 되는 거랑 뭐가 다르냐는 거지. 앞으로 족히 이십년은 삼부가 지 마음대로 할텐데 말이야.
이십년이 아니야. 삼부 그 인사가 이 농장을 관리해서 도련님에 넘겨줄까. 그럴 인간이 아니야.
그리고 사모님 유서란 것도 본 사람이 없어.
맞는 말이야. 근데 삼부 그 인사가 사장이 되면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여?
뭘 어떻게 돼. 좋은 시절 끝난거지. 하늘을 보며 한숨을 쉰다.
뭔가 수를 내야해. 삼부가 우리를 이대로 내버려 둘 리가 없어. 그 때 그 일을 잊어을 리가 없단 말이야.
뭔 수가 있어. 지금 우리가 뭘 할 수 있는가 말이야. 나가라면 나가고, 있으라면 있는 수 밖에.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자네를 모자란다고 하는거야. 당하고만 있자는 말이야?
그러는 자네는 뾰족한 수가 있어?
나도 뭐…
이봐 이봐. 별 수 없기는 마찬가지면서 왜 맨날 나만 갖고 그래.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니야.
근데 그 소문이란 건 대체 뭐여. 답답해 죽겠구만.
하루키 사장님이 자결한 게 아니란 말이여. 소문이.
뭔 소리여. 일왕의 항복선언을 듣고는 할복을 한 게 아니여?
그 게 아니란 말이지. 삼부 그 놈이 죽였다는 거여. 삼부 그놈이.
암만 생각해도 이상하단 말이지. 하루키 사장님 시신을 본 사람이 없어.
뭔 소리여. 우리가 관을 묻었는데.
관만 봤지. 시신을 봤나?
허긴 그러네.
염두 삼부 그놈하고 장씨 단둘이 한 거 아냐. 우리 동네에서 강씨 어르신 손을 안거치고 장례를 치른 적이 있느냔 말이야.
생각해보니 그렇구만, 삼부하고 장씨가 염을 언제 해봤다고.
삼부 그 놈이 사장님을 죽인 게 확실해. 그냥 소문이 아니란 말이여.
그럼. 사모님이 낳은 애도 삼부 놈 애란 말이 사실여?
에이. 사모님이 삼부와 눈이 맞았다는 말이여? 사모님이 그럴 분이 아니여.
에구. 이 팔푼이. 여인네가 꼭 사내놈하고 눈이 맞아야 애를 갖는 건 아니여.
그럼 사모님이 자결한 이유도...

# 1951년 1월4일 아까다 농장. 횟불을 든 장정 너댓이 앞서간다. 총검을 찬 인민군들이 뒤따른다. 눈덮인 평야는 받은 횟불을 동심원을 그리며 편다. 인민군들의 눈빛은 늑대같다. 훨훨 타는 횟불이 비춰서인지 피에 굶주린 실핏줄이 부풀어 오른 건지 흰자위가 온통 검붉다. 권총을 든 우두머리가 발걸음을 재촉한다. 뒤따르는 졸들은 총끝에 장착된 검을 앞으로 향한다. 장정들의 보폭이 커진다. 눈이 펴낸 동심원은 금방이라도 장삼부의 집 대문에 닿을 듯 하다.

사장님 시간이 없습니다. 인민군들이 곧 들이닥칠 것입니다. 산발을 한 황필구가 장삼부를 재촉한다.
장삼부가 지긋이 감았던 눈을 뜬다. 결심을 한 듯 입을 뗀다. 필구야. 출발하자.
네. 사장님. 채비는 모두 끝났습니다. 중경 도련님은 아들놈이 챙길 것입니다. 뱃시간에 맞추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바닷바람이 찰 터이니 옷을 단단히 입으셔야 합니다.
문갑에서 누빔솜으로 된 도포 두벌을 꺼내드는 장삼부. 하나를 챙겨 입고 다른 하나를 황필구에게 던져준다.
저는 필요없으니 사장님께서 한겹 더 입으십시오. 바깥 바람이 살을 엡니다.
네 살은 강철이냐. 어서 하나 껴입어라. 시간이 없다면서. 솜옷을 껴입고 가슴팍을 살핀다. 전답 문서다.
문을 열자 필구의 자식들이 보따리를 들고 섰다. 장남 병순은 등에 애를 하나 업었다. 장삼부의, 아끼꼬의 아들 장중경이다.
중경을 내려라. 애를 업고 어찌 뛴단 말이냐. 장삼부의 말투가 엄중하다.
업고 달리는 게 더 빠릅니다.
내려라. 이제 여섯이니 충분히 따라갈 수 있다. 그 것도 못한다면 살아남을 가치도 없다. 그리 나약한 놈이 이 농장을 어찌 다시 살리겠는가.
황필구가 아들 병순에게 업고 있던 중경을 내리란 눈짓을 한다.
어서 출발하자. 놈들의 불 빛이 마당에 이미 들었다.
뒷문을 나온 무리는 횟불이 닿지 않는 어둠속으로 뛰어들었다. 어둠이 무리를 덮었다. 모든 온기도 함께 지웠다. 어둠속은 얼음지옥 같다. 땅도 공기도 모두 얼었다. 날숨이 무거운 공기를 뚫지 못해 숨을 내쉬기 어렵다. 칼 바람이 얼굴을 벤다.
사방이 칠흙이라 북극성이 아니면 방향을 가늠할 수 없을 것이다. 횟불들이 집안 구석구석을 뒤진다. 광에 불을 냈는 지 거대한 불기둥이 북극성에 닿는다. 무리는 불기둥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북극성만 보고 달린다.
아차. 장삼부가 문뜩 든 생각에 발걸음을 멈춘다.
어디 불편하십니까. 뒤따르던 황필구가 묻는다.
필구야.
네 사장님.
먼저 가라.
네?
나는 돌아가야 한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두고 온 것이 있다.
안됩니다. 지금 돌아가면 죽습니다.
꼭 가져가야 한다. 저리 두면 불에 타버릴 것이다.
무엇입니까. 제가 갖고 오겠습니다. 머리를 돌린다.
아사코의 유품. 네가 가면 찾을 수 없다. 내가 가야만 한다. 먼저 가라. 꼭 뒤따라 가겠다. 시간이 없다. 명령이다.
알겠습니다. 결심이 선 황필구. 꼭 따라오셔야 합니다.
필구야.
네 사장님.
중경을 부탁한다.
왜 그런 말씀을. 반드시 오셔야 합니다.
불기둥을 향해 뛰는 장삼부. 필구의 무리는 반대편으로 뛴다. 불빛에 비춰진 장삼부의 얼굴이 또렷해진다. 황필구의 무리는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5장: 경평축구(4-1/5)...안개 낀 평택항

# 목동 지능범죄수사대 정문앞. 4층 건물로, 겉모습은 여느 경찰서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인텔리전트 빌딩을 생각했던 건 지능범죄수사대란 이름이 준 선입견이었을까. 마치 휘장 두개를 옥상에서 늘어뜨려 놓은 듯 메인빌딩 현관 양옆은 붉은 색 페인트를 칠해 놓았다. 주승우는 문득 그 것이 혈액을 상징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능범죄와 피. 묘하게 연상됐다. 강력범죄는 피를 보지만, 지능범죄는 피를 쓴다. 주승우는 피식 웃음이 났다. 시계를 본다. 그랜드세이코의 초침이 물흐르듯 지나간다.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다. 7시를 가리키는 굵은 시침에 늦여름 땅거미가 내려 앉았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어디서 나타났는 지 정문 보초가 주승우의 앞을 가로막는다. 늙수그레한 모습이 살짝 당황스러웠다. 전경일텐데 모습은 영락없는 은퇴한, 아파트 정문 수위 아저씨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두터운 입술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주승우는 명함을 꺼내 건냈다. 수고하십니다. 이테라 팀장과 약속이 있어 왔습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주승우는 발걸음을 뗐다.
잠시만요. 주승우의 팔뚝을 잡는 보초. 음모...닷컴? 이게 뭡니까. 웃음을 억지로 참는 보초의 얼굴에 주승우는 문뜩 화가 났다. 이런 일이 한두번도 아닌데. 대학동기 조상룡에게 기사를 넘겨주면서 그는 왠지 씁쓸했다. 터벅터벅 발걸음이 유난히 무겁기도 했다.
거 참. 말했잖소. 기자라고. 주승우는 다시 발걸음을 뗐다. 보초도 다시 주승우의 팔뚝을 잡는다. 제법 고집이 있었다. 주승우는 욱하는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돌아섰다. 여기서 화를 내면 유치한 자신에게 오히려 더 화가 날 것 같았다. 늦더위에 고생하는 데, 알겠는데 몇기지? 주승우는 보초의 옷깃을 두 손으로 쓰다듬었다.
네. 일천구백팔십칠기... 보초는 말끝을 흐렸다. 기수란건 말하는 쪽이 십중팔구 불리해지기 마련이었다.
아직 입대서류에 피도 안말랐겠구만. 나 육십일기. 주승우는 짐짓 보초의 뺨을 어루만졌다.
이병 조상득. 선배님을 뵙게 되서 영광입니다.
그럼 수고. 주승우는 손가락 두개를 이마에 살작 갖다 댄 뒤 발걸음을 돌렸다. 대학교 다날 때 무단횡단을 하다 걸리면 써먹던 방법인데 이게 통할 줄 몰랐다. 그런데 그순간 강력한 힘이 주승우의 팔뚝을 잡는다.
선배님은 선배님이고 음모닷컴은 음모닷컴입니다. 확인절차가 끝날 때까지 잠시 기다려주시겠습니까. 선배님.
졌다. 주승우는 그렇게 생가했다. 내가 졌다. 그리고 그렇게 말했다. 쪽팔림이 밀려왔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정문 초소 안으로 들어간 보초가 어디론가 전화를 건다. 고개를 끄덕인다. 확인이 된 모양이다. 전화를 끊고 주승우에게 다가온다.
실례 많았습니다. 1층 복도 오른쪽 끝으로 가시면 됩니다. 선.배.님. 보초는 짐짓 선배님을 강조했다.
그럼 수고. 주승우는 경례하듯 수신호를 보내고 줄행랑을 치듯 현관쪽으로 걸었다.
저 근데... 선배님. 기어들어갈 듯한 보초의 말투가 뒷통수를 떼렸다. 뒤를 돌아보는 주승우,
또 왜. 더 확인할 게 남았어?
삐죽나온 두터운 입술에 축쳐진 눈꺼풀. 방금전까지 당당한 에프엠 이병의 모습은 오간 데가 없었다.
왜 그러는데.
선배님, 혹...시
혹시 뭐.
이테라 팀장과는 어떤 관계이십니까.
기자라고 했잖아.
단지 그 뿐이십니까.
그 뿐이 아니면 뭐. 지수대 정문을 통과하러면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개인적으로 묻는 겁니다. 선배님. 깍듯한 선배란 호칭이 왠지 모를 부담이 됐다.
정확히 질문이 뭐야.
혹…시. 남자친구이신지를 묻는 겁니다.
... 주승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어디서 주워들은 건 있어가지고.
맞아.
네?
맞다고. 남자친구.
보초의 눈물이 글썽거렸다. 두터운 눈꺼풀 사이로 금방이라도 소똥만한 눈물이 흘러내릴 것만 같았다.
이런 식으로 고백을 하다니. 늦여름 석양 아래. 주승우는 상황이 코미디같다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인생은 희극이니까. 채플린이었던가. 말한 이의 이름이 뭐가 중할까.
복도 끝방앞에 섰다. 문을 열려는 순간 드르륵 열린다. 육중환이다. 주승우를 보고는 못마땅한 표정이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다.
비켜주시겠습니까. 필요없는 말은 최대한 뺐다. 말도 섞고 싶지 않다는 것인가. 거구가 주승우를 툭 치고 지나간다.
육 형사님. 주승우가 육중환의 등에 대고 말을 건다.
이테라 팀장 만나러 온 거 아니오. 주승우 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육 형사님. 수영씨 일은…. 차마 입에 담지 못한다.
지금 일이라고 했소? 그제서야 고개를 돌린다. 수영이가 죽은 게 당신에겐 일이오? 그런거요?
그런 뜻이 아니란 거 잘 아시지 않습니까.
기자면 기자일을 하시오. 우리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꼭 해야할 일이 있습니다. 육 형사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수영씨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입니다.
아무 데나 수영이를 갖다 붙이지 마시오. 분명히 말했습니다. 각자 일을 하자고. 난 지수 그 놈 죽일 생각 밖에 없는 사람이오.
수영씨가 죽은 건 지수 때문이 아닙니다.
뭔 개소리를 하는거야. 흥분하는 육중환. 주승우의 멱살을 잡는다. 몸 전체가 엄청난 악력에 끌려 올라간다.
지수는 하수인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일을 설계하고 조종하는 사람. 장중경을 잡아야 합니다. 육중환의 팔뚝을 잡는 주승우. 숨이 막힌다.
난 그런 거 몰라. 난 그냥 수영이 죽인 그 놈 죽일꺼야.
육 형사님. 이테라의 목소리다. 지금 뭐 하시는 거에요.
뭐하는 지 보면 모릅니까.
수영이 때문이면 사과하세요.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사과라고 한 거 맞습니까?
네. 사과하세요.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제가 왜 이 인간에게 사과를 합니까.
수영이 죽음이 주 기자님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아닙니까? 이 사람 살리겠다고 수영이가 죽은 게 아니냐는 말입니다.
그럼 그 상황에서 수영이가 어떻게 했어야 했나요? 보고만 잇어야 했나요? 도망 쳤어야 했나요? 수영이는 해야할 일을 했던 거에요.
그 게 지금 말입니까. 너무하시는 거 아닙니까.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란 건 알지만...
지금 뭐라고 하셨어요.
그만 하시죠. 주승우가 끼어든다. 지금 우리끼리 이럴 때가 아닙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글쎄 당신은 당신 일 하라고. 우린 우리 일 한다고. 육중환은 휙 돌아서 가버린다.
커피 드릴까요. 팀 회의실에 들어서며 이테라는 믹스 커피를 탄다. 먹던대로 두 봉지를 뜯는다.
아뇨. 많이 마셨습니다.
육 형사님은...
저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 쪽 잘못이 아니에요.

파일 속 음성은 황병서가 맞아요. 2014년 아시안게임 폐막식 참석차 방한 했을 때 황병서 음성과 일치한다고 합니다. 국과수에서 확인해줬어요.
주승우는 조상룡에게 전화를 건다.
황병서 음성 확인됐다. 국과수 확인으로 나가면 될꺼야. 관련 서류 톡으로 보낼께. 핸드폰을 통해 들리는 조상룡의 음성. 흥분했다. 대한일보 편집국도 숨가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에 먼저 알려야 해요. 경평축구 막아야 합니다. 이테라의 목소리에서도 긴박감이 묻어났다.
대한일보에서 기사가 곧 나갈꺼에요. 청와대가 아는 것도 시간문제입니다.
한 시가 급해요.
어떻게 보고하시려구요.
상부에 보고해야죠.
차이나게이트 수사는 특검 구성이 완료될 때까지 공식적으로는 올스톱된 거 잊으셨어요. 이 상황을 상부에서 알면 그 쪽만 곤란해집니다. 보고 라인에서 이래저래 시간만 끌거구요. 장경주 차장이 이미 손을 썼을 수도 있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에요?
이성적으로 생각해요. 냉정해야 합니다. 기사가 더 빠릅니다.
얼어죽을. 대단하시네요. 지금 이 판국에.
이제 공은 대한일보에 넘겼으니, 저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그 쪽이.
제가요?
장중경을 잡아야 합니다. 음성파일이 우리 손에 있는 것을 안 이상 장중경도 앉아만 있지는 않을 겁니다.
장중경이 어디로 갈 지 알 것 같아요. 이테라가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 잠시후 검은색 밴이 지수대 정문을 나선다. 현장 작전차량이다. 자정이 넘은 시간. 달빛조차 구름속에서 잠을 잔다. 운전대를 잡은 육중환은 입이 한뼘은 나왔다. 육중환은 거울로 이테라를 본다.

육 형사님. 말씀드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나가버리셨으니...
진작에 말 했어야죠. 지수 그 놈이 어떤 놈입니까. 핸들을 꽉 움켜쥐는 육중환.
죄송해요. 화 푸세요. 슈렉 고양이 눈빛이다.
에휴. 제가 무슨 수로 팀장님을 당하겠습니까. 악셀을 밟는다. 그런데 이 거 함정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함정요?
이상하잖아요. 개가 주인을 물겠다는 게. 고개를 갸우뚱하는 육중환.
개가 주인을 문다면 한 가지 이유 뿐입니다. 주승우다. 이마에 식은 땀이 흐른다. 창문 없는 작전차량이지만 불안하기는 마찬가지다. 호흡이 빨라진다.
그 쪽에게 물어본 거 아니오. 육중환의 말에서 냉기가 흐른다.
육 형사님. 이테라가 냉기를 걷고 끼어든다.
지수대 분들은 사람 이름 부를 줄 모르나요? 이쪽 분들만 만나면 제 호칭이 그쪽이 됩니까. 괜한 농을 치는 주승우. 애쓰는 중이다.
운전석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이테라와 육중환. 이테라가 어깨를 으쓱한다. 어쩌겠냐는 표정.
이유가 뭐에요? 이테라가 화제를 돌린다.
끓는 솥에 들어가기 싫은거죠. 장중경 입장에서 지수는 소용을 다했으니 솥에 물을 끓이고 있을 겁니다.
토사구팽이란 말이군요. 밀항선은 함정이구요.
중국쪽에 도착하는 대로 제거하겠죠. 어쩌면 도착하기 전에 손을 쓸 수도 있을 겁니다.
팀장님. 장중경이 항구에 나올까요. 지수가 만나자고 한다고 장중경 같은 거물이 말입니다. 말이 안되잖아요. 지금 제 코가 석자인데. 꼬를 만지작하는 육중환.
마침 이테라의 핸드폰이 울린다. 네, 이테라입니다. 기다렸던 전화다. 긴급히 전화를 받는다. 네네 알겠습니다.
장중경은 반드시 나옵니다. 배를 타는 건 지수가 아니라 장중경 본인이니까요.
확인하셨습니까. 주승우는 뭔가 알고 있는 눈치다.
네 방금 전화가... 평택항 마리나에 장중경 요트가 있어요. yt1074. 오늘밤 해경에 운항신고가 접수됐다고 합니다. 그 쪽 예상이 맞았네요. 주승우 쪽을 본다.
내란음모죄는 중죄입니다. 중형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장중경도 잘 알겁니다. 대한민국 사법권이 미치는 곳에서는요. 장중경은 밀항을 하려는 겁니다. 평택항에서 반드시 잡아야 합니다.

5장: 경평축구(4-2/5)...중국 국가안전부 대방동 안가

# 대한일보 편집국. 조상룡이 주승우로부터 받아온 음성파일에 발칵 뒤집혔다. '황병서와 장중경, 테러 모의'. 보도된다면 대한일보 100년 역사상 최대 뉴스였다. 오태호 주필 건설사 섹스접대 사건을 일시에 묻어버릴 메가톤급이다. 김창환 국장은 신중했다. 만에 하나 오보라면 대한일보는 창립 이래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보도의 책임을 지고 자신이 물러서야할 수도 있는 일이다. 음성파일은 어느쪽이 나올 지 모를 동전 던지기였다. 편집국 간부들은 동전을 던질 지 결정해야 했다.

음성감식 결과 아직야? 김창환 국장은 소리를 질렀다.
전문업체에 보냈으니 곧 결과가 나올 꺼에요. 곽도운 사회부장도 속이 타기는 마찬가지였다. 생수를 벌컥 마신다.
주승우가 장난치는 거 아냐? 이런 대어를 낚아 놓고 왜 우리에게 넘기냔 말이야. 세상이 공짜 점심이 있는 줄 알아. 기자 생활 30년에 얻은 교훈이 딱 그거 한가지라고. 김 국장은 피우던 담배를 비벼서 끈다. 아이 씨발. 이내 새 담배에 불을 당긴다.
그럴 놈은 아닙니다. 조상룡은 단호했다.
야 임마, 어떻게 확신해. 김 국장은 또 담배를 비벼끈다. 씨발. 정신이 없네.
글쎄 그런 놈은 아니라니까요. 답답한 표정이다.
사람 속을 어떻게 알아. 대학 때 그리 친한 사이도 아니었다며.
음성감식 결과 나오면 알 꺼 아니에요. 화를 내는 조상룡. 핸드폰 벨이 울린다. 주승우다.
국과수에서 황병서 음성으로 확인됐답니다.
국과수? 사설업체 아니었어?
주승우 전화입니다. 지수대 쪽에서 국과수에 확인했다고 합니다.
지수대는 또 뭐야. 새 담배를 무는 김 국장.
형님, 지금 이럴 시간 없습니다. 그동안 기사를 보면 주승우 그 놈이 허튼 말을 할 놈은 아닙니다. 곽도운 부장이 상황을 정리하고 나선다. 2판에 내보낼 지부터 일단 결정하시죠.
국장. 남궁종원 부장이 제동을 건다. 청와대 쪽과먼저 논의를 해야하는 거 아닙니까.
씨발. 선배. 언제부터 대한일보가 청와대 허락받고 기사를 썼습니까. 곽도운 부장이 안경을 벗는다.
씨발. 그런 말이 아니잖아. 이 건 국가안보에 관련된 문제라고. 곽도운 너 그리고 선배한테 말투가 그 게 뭐야. 지금 해보자는 거야? 넥타이를 푼다.
종원이 말도 일리가 있어. 파일 내용이 알려지면 대한민국은 바로 패닉이야. 아수라장이 될 꺼라고. 보도가 능사는 아니야. 김 국장이 신중론으로 돌아섰다.
앞뒤 제다 또 개줍니다. 지금 이 사실은 우리말고 적어도 두 사람이 더 알고 있다구요. 상황을 정리하고 나선 건 이번에도 곽도운 부장이다.
주승우 말고 또 누가 있어?
민영우요.
뭐? 민영우가 어떻게 안다는 거야?
주승우가 민 시장에게도 파일을 전달했습니다. 조상룡 기자다.
뭔 소리야? .
더 늦기 전에 보도해야 합니다. 민 시장은 아직 음성의 주인공이 황병서란 사실은 모를 겁니다.
알아 듣게 얘기해봐.
주승우가 파일을 입수한 직후 집중한 것은 황병서가 아니었습니다. 차이나 게이트가 장중경의 모의고, 민 시장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게 주승우가 주목한 대목입니다.
그런데.
주승우는 아침에 민 시장의 사퇴선언을 막기 위해 시장에게 음성파일을 보냈습니다.
민영우는 그 사실을 알고도 사퇴선언을 했다는거야? 담배 연기가 회의실에 자욱하다.
네. 나중에 사실이 알려지고 나면 잘못이 없으면서도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용단한 리더가 될테니까요. 어차피 내년초면 대선 때문에 시장직은 내려놔야 하는 상황이구요.
그림이 그렇게 된 거였구만.
민 시장이 사퇴선언 전에 파일 속 내용을 알고 있었다는 걸 증명해 줄 사람은 저밖에 없습니다. 민 시장이 언론에 파일을 흘리는 것을 막아달라는 게 주승우가 제게 단독을 넘긴 조건이구요. 조상룡은 담담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알다가도 모를 놈이구만. 주승우 말이야.
그런 놈입니다.
... 김창환 국장은 조상룡의 설명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결심이 선 듯 핸드폰을 든다.
노 실장님. 김창환입니다. 상대는 대통령 비서실장이었다.

# 청와대 지하벙커. 대통령은 긴급히 NSC를 소집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다. ‘황병서와 장중경의 테러 모의’. 믿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보의 소스가 대한일보 편집국장이었다. 국가안전보장회의 위원 12명이 속속 도착했다. 안보실장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경평축구 개막식을 앞두고 청와대 안보실은 비상체제였다. 국정원장이 뒤질세라 안보실장의 뒤를 이었다. 국무총리와 관련 장관들이 속속 자리에 앉았다.

황병서가 국내에 있다는 게 무슨 말이오? 총리가 물었다.
... 국정원장은 대답없이 바닥만 응시했다.
국정원장이 그 것도 모른단 말이오.
일개 신문사 국장의 말일 뿐입니다. 황병서가 국내에 있다고 아직 단정할 순 없습니다. 국정원장의 시선은 여전이 벙커 바닥에 꽂혀 있었다.
그 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거요. 대한일보가 일개 신문사요? 국정원장을 노려보는 총리. 그도 언론인 출신이다.
일단 테러모의가 사실이란 전제 하에 대책을 논의해야 합니다. 안보실장이다.
북에서는 이 사실을 알고 있는거요? 총리가 이번엔 안보실장에게 물었다.
모른다고 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알고 있다면 벌써 난리가 났을 겁니다.
그 것도 확실치 않은거요? 대체 안보라인에서 아는 게 뭐요? 언성이 점점 높아진다.
지금 누구 잘잘못을 따지기 위해 이 자리가 있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비서실장이 나섰다.
답답하긴. 대통령님, 국가비상사태입니다. 이를 선포하고 북에도 알려야 합니다. 늦어지면 사태를 걷잡을 수 없습니다.
그 건 안됩니다. 비상사태를 선포하면 전국이 대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폭탄이 터진 뒤에 선포하자는 거요? 지금 패닉이 걱정인 거요, 경평축구를 못하게 되는 게 걱정인 거요. 총리는 경평축구가 내심 탐탁치 않았다. 경평축구는 민영우 시장의 대선 전략인 이른바 평양플랜의 핵심 이벤트다. 사실상 대선을 앞두고 민영우 시장 띄우기용 행사였던 것이다.
총리야 말로 국민의 안전이 걱정인 겁니까, 아니면 경평축구가 성공적으로 개최되는 게 걱정인 겁니까. 안보실장은 총리의 의중을 정확히 꿰뚫어 봤다.
뭐욧. 총리가 안경을 벗는다.
그만들 합시다. 예의주시하던 대통령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행사를 중단하는 것도 물론 고려 해야 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벙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북미 평화협정은 대통령이 정권의 운명을 걸고 개입했던 사안이다. 경평축구는 그 분위기를 2022년 대선까지 끌고 가기 위한 이벤트였다.
하지만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발언의 핵심은 이 부분이었다. 내일 여명이 밝기 전에 황병서를 잡아야 합니다. 장중경의 이름을 뺀 것은 대통령의 의도였다. 어쨌든 그는 민주당 핵심 인물이다.
대통령님,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황병서를 무슨 수로 막습니까. 국내에 있는 지 조차 몰랐던게 우리 현실 아닙니까.
대통령님, 존 킴 연결됐습니다. 안보실장이 총리의 말을 잘랐다. CIA 코리아미션센터장 존 킴을 화상으로 연결한 것이다. 한국계로 대북 문제 관련 미국 정보 라인의 핵심 실세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존 킴은 인삿말을 하지 않았다. 위기상황에서 굿 이브닝은 어울리지 않았다.
김 센터장, 대강의 상황은 설명을 들으셨지요? 좋은 밤이 아닌 건 대통령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한 상황은 저희쪽에서도 파악중입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당장 내일 행사를 취소하고 비상체제를 가동해야 합니다.
거 봐요. 총리가 이 때다 하고 맞장구를 쳤다. 안보실장과 국정원장은 떫은 감을 씹은 표정이다.
김 센터장, 황병서를 잡는 게 먼저입니다. 전국이 대혼란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혼란은 감수해야 합니다.
김 센터장, 아직은 시간이 있습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황병서가 서울에 있다면 최악의 경우 핵사용 가능성까지 고려를 해야 합니다. 그는 2년전까지만 해도 북핵 개발을 주도해던 인물입니다.
핵은 모두 폐기된 거 아닙니까.
미스터 프레지던트,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미중이 북한의 핵을 100%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냔 말입니다. NSC 의원 열두명의 시선이 일시에 화상 속으로 쏠렸다.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그 것은 협약 이행사항이 아닙니까. 북한이 이행사항을 준수했다는 것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미스터 프레지던트, 그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존 킴은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웃음을 참는 표정 같기도 하고 화가난 표정 같기도 했다. 아무튼 한국 정부에선 최악의 시나리오에 대한 대비책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잘 알겠소.
김 센터장. 안보실장이다.
네 실장님.
황병서에 대한 정보 공유가 필요합니다. 안보실장은 황병서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요구한 것이다.
... 존 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김 센터장, 시간이 없습니다. 공유해 주십시오. 안보실장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 나라의 정보라인이 모두 모인 벙커였다.
실장님, 저희도 황병서의 위치를 알지 못합니다. 그 것을 알고 있다면 저희가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을 리 없지 않습니까. 모범 답안이다. 미국이 설령 황병서의 위치를 알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답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면 김 센터장의 말대로 미국은 황병서 일당의 테러를 방조한 셈이 되는 것이다.
대통령을 비롯한 NSC 위원들은 난감했다. 미국이 모른다면 황병서를 잡을 방법은 없는 것이다.
다만 짐작이 가는 곳이 있기는 합니다.
어디입니까. 대통령은 마음이 급했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글쎄 그게 어디냔 말이오. 대통령의 목에 핏대가 섰다.
대방동입니다.
대방동이라구요?
저희들은 수년 전부터 황병서를 추적해 왔습니다. 황병서는 2017년 말 총정치국장 자리에서 쫒겨난 뒤 2018년 3월에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그 것은 저희도 알고 있는 사항입니다. 국정원장이다. 총살설도 있지 않았습니까.
황병서는 당시 중국 망명을 시도했었습니다. 총살당한 장성택을 제외하면 황이 북한 정권에선 가장 친중국적 인물이었으니까요. 존 킴 센터장은 국정원장의 말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랬다면 저희쪽 레이다에도 잡혔을 겁니다. 황병서 밑에 있었던 중국쪽 외화벌이 총책이 지금 우리 손에 있습니다.
중국이 망명을 거부하자 황병서는 국경을 넘어 베이징으로 도피했습니다. 김정은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시진핑이 공식적으로 망명을 받아줄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죠. 저희쪽에선 중국 국가안전부가 개입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시진핑의 담요 아래 있었던 것이죠. 시진핑의 담요란 중국 정부의 비호를 뜻하는 정보라인 쪽의 은어였다.
그래서 대방동일 것으로 추측하는 것이군요. 안보실장이다.
네. 대방동에 중국 국가안전부 안가로 파악된 곳이 있습니다. 국정원장의 말을 깡그리 무시하던 김 센터장은 안보실장의 말에는 깍뜻이 반응했다.
황병서가 안가에 있다면 중국 정부도 테러 모의와 연관이 있을 수 있다는 얘기인가요? 총리가 핵심을 찔렀다.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안가에 있다면 중국이 테러 모의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건 분명해지는 겁니다.
김 센터장. 미국은 도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요. 속 시원히 좀 말해보시오. 총리는 가슴이 답답했다.
총리님, 저희쪽의 아는 한도 내에서는 충실히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렇게 보이질 않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총리는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미국이 한국 정부에 정보를 내놓을 의무는 없는 것이었다.
총리님, 저희가 한국 정부쪽에 그렇게 할 의무가 있습니까. 김 센터장이 정곡을 찔렀다. 벙커 안에서 이에 대해 반박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벙커안의 12명은 모두 서로의 시선을 피했다. 워싱턴에선 한국이 미국을 동맹으로 생각하는 지 조차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민주당 내에서두요.
그 건... 끙. 운전대를 잡기 위해선 북한에 당근을 줄 수 밖에 없었다. 힘없는 정부가 그 외에 달리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대통령은 목구멍까지 넘어온 말을 삼켰다.
설령 황병서가 있다고 중국 국가안전부 안가라면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는 거 아닙니까. 총리가 물었다. 대통령에게 던진 질문이다.
지금은 거기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습니다. 일단 황병서 일당을 잡고 봅시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미국은 이 일에 대해서 공식적으로 아는 바가 없는 것이어야 합니다. 중국과 문제가 생겼을 때 말입니다.
중국이 그 말을 믿겠소? 미국과의 정보 공유 없이, 정확히 말하면 미국의 묵인 없이 한국 정부가 중국 국가안전부 안가를 공격할 수 없다는 것을 중국도 잘 알고 있을 것이란 의미다.
그 건 중요치 않습니다. 공식적으로 모르는 것이면 말입니다.
김 센터장,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네 총리님, 무엇입니까.
미국은 황병서의 입국 사실을 알고 있었소?
존 킴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모르고 있었습니다. 공식적으론 말입니다.

5장: 경평축구(4-3/5)...세 발의 총성

# 새벽 평택항. 컨테이너 선적장 라이트가 무거운 어둠을 들어올렸다. 마치 거대한 빛의 돔 같다. 달빛이 은은하게 천정을 비춘다. 높이 쌓은 컨테이너가 만리장성이다. 높낮이가 제각각이다. 작곡가의 노트에 그려진 음표처럼 묘한 리듬을 만든다. 만리장성 사이로 수십개의 계곡이 났다.

한 계곡 속에서 벤츠 S600이 스스륵 미끌어져 나온다. 작은 배가 정박된 선착장 앞에 선다. 뒷좌석에 장중경이 앉았다. 라이트를 끄지 않는 건 정면에서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장경주 차장검사를 태운 G90가 S600 뒤를 호위했다. 운전대를 잡고 있는 건 차지창 사장이었다.

다른 계곡에서 한 사내가 걸어나왔다. 비수처럼 날아온 헤드라이트에 눈이 찔린다. 왼쪽 팔굼치로 빛을막는다. 차문을 여는 차지창. 지수에게 다가간다. 장중경과 장경주가 차지창과 차지수가 소근대는 모습을 바라본다. 잠시후 차지창의 손에 끌려 지수가 장중경의 차에 다가선다. S600 뒷 창문이 스스륵 내려온다.
장중경을 노려보는 지수.

인사 드려야지. 차지창이 지수를 본다. 지수의 시선이 차지창에게 맞선다. 원망 어린 눈빛.
지창아 그만 두어라. 장중경의 낮은 목소리. 차지창이 고개를 조아린다.
나를 보자 했다고. 지수가 장중경에게 다가선다. 차지창은 장경주의 차쪽으로 멀어진다. 발걸음이 새벽 안개를 가른다. 틈 새를 파고드는 불 빛.
장중경을 노려보는 지수.
담배를 꺼내 무는 장중경, 깊이 한 모금 내뱉는다. 시선은 지수를 짐짓 외면한다. 지창에게 아들이 하나 있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그래 나를 무슨 일로.
죽기 직전 주인 얼굴 한번 보려는 개의 심정이라 생각하십시오.
죽기 전이라... 담배를 길게 내뿜는 장중경.
저 배를 타면 죽으리란 걸 내 모를 줄 알았소.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지창이 아들이 사고를 치고 밀항선을 탄다는 얘기는 들었네만. 모르쇠를 떤다.
음성파일이 경찰의 손에 넘어갔소. 차이나 게이트의 주범이자 테러모의의 공범. 장중경 당신, 무사하지 못할꺼요. 이 마당에 강태우 사장 살해를 사주했다는 게 들통이 날까 두려워 나를 중국으로 보내는 건 아닐테고. 사냥을 제대로 못한 놈이 괘씸해 벌을 주려는 것이겠지.
그깟 파일로 나를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태연한 척 하는 장중경. 담배를 한모금 깊게 들이마신다.
그건 파일속 남자가 누구냐에 따라 다르겠지. 순간 지수를 노려보는 장중경.
이제서야 내 말에 관심을 갖게 된 겁니까. 입꼬리가 올라가는 지수.
이북 말투를 쓰는 사람은 대한민국에 수없이 많아. 흥분을 가라앉히는 장중경. 음성파일이 주승우와 이테라 팀장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장중경은 한가닥 사실에 희망을 걸었었다. 그 것이 황병서의 음성이란 사실을 알아내기가 쉽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었다. 황병서는 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에 없는 사람이니까.
역시 늙은 구렁이 답소. 이 상황에서도 시치미를 뚝 떼시다니 말입니다. 경찰이 이미 그 사내의 정체를 알아 냈소. 순간 움찔하는 장중경. 한가닥 희망이 사라졌다. 파국이다.
이제보니 자네 배를 타러 여기 온 게 아니었군. 지수쪽을 보더니 담배를 길게 내뿜는다. 80이 넘은 3선 정치인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사업가다. 지수의 말 한 마디로 장중경은 자신이 지금 처한 전후 상황을 꿰뚫어 보았다. 강태우 사장 살인 용의자로 경찰에 쫒기는 지수다. 경찰이 음성파일속 사내의 정체를 알아 냈다는 사실을 지수가 알 리 만무했다. 함정이었던 것이다.
당신도 나를 보러 여기까지 온 건 아니잖아.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지수.
순간 자신의 총지갑을 확인하는 이테라. 지수대와 주승우는 작전차량에서 장중경과 지수의 대화를 도청하고 있었다. 지수의 몸에 도청장치를 한 것이다. 이테라는 지수가 황병서 얘기를 꺼내자 아차했다. 이내 그 것이 지수의 실수가 아님을 직감했다. 의도였다. 프로파일링상 지수는 지능적이고 치밀한 성격이었다. 황병서 얘기는 지수가 준비한 피날레의 전조였다. 그는 지금 장중경을 죽이려는 것이다. 이테라는 그제서야 지수가 자신에게 접근한 목적을 깨달았다. 총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테라는 자신의 총지갑에 총이 있음을 확인했다. 이테라는 곧바로 육중환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어어. 이거 왜...왜 이러세요 팀장님. 육중환이 말을 더듬는다. 이런데서 이러시면... 그 순간에도 장난기가 발동한 육중환.
지금 장난할 때가 아니에요. 이테라는 막무가내로 육중환의 가슴을 더듬었다. 총지갑이 비었다. 육형사님 총 어디 있어요. 어디 있냐구요.
총이요? 육중환이 자신의 총지갑에 손을 가져간다. 아뿔싸. 육중환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셨다,
막아야 해요. 지수는 장중경을 죽이려는 거에요. 그 뒤엔... 작전차량 문을 열고 뛰쳐나가는 이테라. 육중환과 주승우가 황급히 이테라를 쫒아 나간다.

# 같은 시간. 이테라가 총지갑에 손을 가져간 바로 그 순간이다. 두 개의 총구가 장중경을 향해 있다. 국정원 저격수다. 특수부대 출신의 전문가들이다. 방아쇠를 당길 순간만 호시탐탐 노리는 저격수들. 두 개의 포인트를 확보한 것은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기 때문이다. 장중경을 동이 트기 전에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조준경을 통과한 이들의 시선이 닿는 곳은 지수였다. 지수가 미동을 할 때 순간순간 장중경이 보이긴 하지만 방아쇠를 당기기엔 위험했다.

알파. 장애물 때문에 시야 확보가 어렵다. 두 저격수는 무전으로 교신을 하고 있었다. 장애물은 지수를 의미했다.
오메가. 여기도 마찬가지다. 각이 나오지 않는다. 이 정도면 각을 넓혀도 마찬가지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하다.
알파. 내가 장애물을 맡겠다. 타깃을 맡아라.
오메가. 카피. 쓰리에 쏴라.
원, 투... 알파는 지수의 종아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작전차량을 달려나간 이테라의 시야에 지수가 들어오는 순간 세발의 총성이 울렸다. 알파가 쏜 총알은 정확히 지수의 오른쪽 무릅을 관통했다. 털썩. 지수는 주저 앉았다. 그의 머리에서 피가 콸콸 흘러 아스팔트위를 적셨다. 장경주가 쏜 총알은 정확히 지수의 왼쪽 관자놀이로 들어가 오른쪽 관자놀이를 뚫고 나왔다. 차창 밖으로 내뿜은 담배연기는 방아쇠를 당기라는 장중경의 신호였다. 눈 앞에서 아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모습을 본 차지창은 넋이 나간 맹수처럼 장경주에게 달려들었다. 네 번째 총성은 정확히 차지창의 심장을 관통했다. 거구는 거목처럼 쓰려졌다. 오메가의 총알은 장중경의 이마를 스쳐지나가 S600 운전석 뒤편 문짝을 뚫고 아스팔트에 박혔다. 장중경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다섯번째, 여섯번째... 총성이 잇따라 울렸다. 장중경은 뜨거운 무엇인가가 자신의 목을 관통하는 것을 느꼈다. 장중경의 차가 난사당하는 것을 본 장경주는 총알이 날아온 방향으로 권총을 몇발 쏘고는 컨테이너 더미를 향해 뛰었다.
몇시간 전. 지수대와 주승우가 평택항으로 출발할 채비를 하고 있을 무렵이다. 주승우의 핸드폰이 울린다. 모르는 번호다.
여보세요. 주승우는 어두운 지하실 계단을 내려오듯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주승우 기자시죠. 지하실 저쪽에서 성큼 걸어오는 목소리. 모르는 음성이다.
대통령 비서실장입니다.
이 순간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면... 음성파일, 차이나게이트, 황병서, 장중경, 테러, 대한일보 기사 등 대통령 비서실장이 자신에게 전화했을 이유들을 주승우는 떠올렸다. 방금전 확인할 때만 해도 대한일보 기사는 뜨지 않은 상태였다. 그 사이 기사가 뜬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네. 말씀하십시오.
주 기자님. 장중경 의원의 음성파일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연락드렸습니다.
기사는 아직 나가지 않았구나. 주승우는 생각했다.
네. 말씀하십시오.
주 기자님. 시간이 없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네.
대한일보도 보도자제를 약속했습니다. 주 기자님도 음성파일에 관한 보도를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실장의 음성은 단호했다.
명령으로 들리는군요.
어찌 생각하시든 상관없습니다.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국가 비상사태입니다.
청와대 비상사태가 아니구요?
음성파일이 공개되면 황병서 일당을 일망타진할 수 없습니다. 일단 황병서 일당을 소탕한 뒤 사태를 정리해서 국민들에게 밝히는 게 순서입니다.
열두시간 후면 수만면의 사람들이 경평축구를 보러 서울 스테디움에 몰려들 것입니다. 그들을 볼모로 황병서가 무슨 짓을 할 지도 모르는 데 자신이 폭탄 구덩이로 들어간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다는 게 국민을 위한 것이란 말입니까.
기자님 말씀대로 우리에겐 열두시간이 있습니다. 그 사이 이 사태를 진압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위험해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
장담할 수 있을까요? .
주 기자님. 대한민국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정정하겠습니다. 정부에 그런 의지가 있을까요.
뭔가 단단히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정부는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승우는 잠시 생각했다. 여섯시까지입니다. 그 때까지 해결하지 못하면 모든 전말을 밝힐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한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민영우 시장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걱정 안하셔도 됩니다. 박 시장과는 이미 통화를 했습니다.
믿어도 되겠습니까.
저를, 아니 대한민국 정부를 믿으십시오.
저는 민영우 시장을 말씀드린 겁니다.

5장: 경평축구(4-4/5)...대한민국 정부

# 세발의 총성이 연달아 울리고 뒤따라 한발의 총성이 평택항 새벽 안개를 갈랐다. 총알이 목표한 현장은 참혹했다. 지수는 두개골이 깨져 뇌가 아스팔트 바닥에 흩어졌다. 악 소리도 못하고 숨을 거둔 장중경은 차마 눈을 감지 못했다. 장중경의 운전기사 김태곤은 겁에 질려 핸들에 고개를 묻었다. 사시나무처럼 떠는 통에 그가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뒤 편 차 옆에 널부러진 건 차지창 사장이다. 장경주가 배에 대고 총을 쏴 창자가 쏟아졌다. 이테라와 주승우, 육중환 세 사람은 참혹한 광경에 한동안 말을 잃었다.

지수 말을 듣는 게 아니었어요. 이테라는 지수의 죽음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했다. 장중경의 자백을 유도하겠다는 지수의 말에 넘어간 자신이 한심했다. 지수는 강태우 사장을 죽인 살인범이었다.
그 쪽 잘못이 아닙니다. 주승우는 이테라를 위로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테라의 잘못이 아니라는 이유는 생각이 나지 않았다. 모두 그저 어리둥절한 상태였다.
우리 말고 누군가 더 있습니다. 넋이 나간 표정은 육중환도 마찬가지였다.
그 게 무슨 말이에요?
장중경을 쏜 건 지수가 아닙니다. 육중환은 점퍼 안주머니에서 탄창을 꺼냈다. 지수가 쥔 총엔 총알이 없었던 것이다.
이테라는 지수의 손에 쥐어진 육중환의 총을 집어들었다. 역시 약실이 비어 있었다. 그렇다면... 컨테이너 쪽을 응시한다.
장중경의 입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이겠죠. 국정원쪽 요원들일 겁니다. 얼어죽을... 주승우는 비서실장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국정원이 왜죠?
장중경이 살아있으면 정권의 무능이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니까요.
그렇다고 여당 실세를 죽인단 말이에요?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으니까요.
... 주승우의 말과 동시에 이테라와 육중환은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주승우도 마찬가지다.
장경주 차장이 위험해요. 장중경을 죽여야 했다면 장경주도 죽여야겠죠. 이테라는 장경주 검사가 달아난 방향을 응시했다.
주승우와 이테라, 육중환 세사람은 장경주의 그림자를 쫒았다. 미로 같은 컨테이너 숲 속에서 그림자는 보일 듯 사라졌다. 장경주는 없고 그림자만 있는 듯 했다. 세 사람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다 다시 한 점에서 다시 만났다. 다시 흩어졌다 만나고를 반복했다. 그림자는 매번 보일 듯 사라졌다. 컨테이너 미로 속에서 장경주를 쫒는 건 셋 뿐이 아니었다. 장경주가 컨테이너 박스를 돌았다. 뒷 모습을 본 건 주승우였다. 따라 돌았던 장경주의 그림자가 사라지지 않고 주춤한다. 쫒아간 주승우가 마주한 건 장경주의 총구였다.
위험합니다.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와 장경주를 관통할 지 모를 상황이었다. 주승우는 장경주를 에워싼 주변을 살폈다.
아 씨발. 이 새끼 봐라. 총구멍을 보니까 무서운가 보지? 대갈통에 바람 구멍 한번 내줄까? 장경주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눈은 초점이 반 쯤 풀렸다. 주승우를 내리 깔아보는 그의 눈빛. 두려움이 가득했다.
장경주 차장. 당신이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주승우는 한쪽 손을 내밀며 장경주 쪽으로 한 발 다가섰다. 각을 좁히기 위해서다. 총알이 날아올 길목을 막은 것이다. 스스로 방패가 됐다.
무슨 개수작이야. 움직이지마. 씨발. 한 발만 더 움직이면... 장경주를 둘러싼 컨테이너 위에서 그림자 하나가 지나갔다.
일단 제 말을 들으십시오. 저격수들이 지금 당신을 노리고 있습니다. 장중경 의원을 죽인 자들 말입니다.
아버지를 죽인 건 너희들이잖아. 씨발. 장경주의 손이 떨린다. 손목에 힘이 풀렸다. 총구는 땅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장경주 차장. 장중경 의원을 죽여서 득을 볼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장중경 의원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 누군지. 머리 좋으시니까 무슨 말인지 아실겁니다.
장경주 차장의 눈동자가 흔들린다. 겁에 질려 눈믈이 글썽거린다.
감 잡으셨습니까. 이제 총을 내리고 제 쪽으로 오십시오. 제게 총을 겨누면 당신을 죽이려는 자들에게 좋은 빌미를 주는 겁니다.
씨발 이판사판이야. 다시 주승우에게 총을 겨누는 장경주. 어차피 모든 게 끝났어. 눈을 무릅뜬다. 흔들리던 눈동자는 주승우의 심장에 고정됐다. 손가락에 서서히 힘이 들어간다. 컨테이너 박스 위를 지나가는 거대한 그림자.
제길... 체념하는 주승우. 눈을 감는다. 방아쇠가 당겨진다. 탕. 한 발의 총성. 이렇게 끝이 나는구나. 아득해진다.
털썩. 주저않는 소리가 난다. 눈을 뜬다. 눈 앞에 쓰러져 있는 육중환. 그림자의 주인공이다. 그림자는 호시탐탐 장경주를 노렸다. 방아쇠가 당겨지는 것을 보고 몸을 날렸다. 주승우와 장경주의 눈이 마주친다. 광기 들린 장경주의 표정. 다시 울리는 한발의 총성. 퍽. 장경주의 뒤통수가 터져버렸다. 이마에 피가 흐른다. 털썩. 무릅을 꿇고 주저 않는다. 땅바닥에 고꾸라진다.
주승우는 멍하니 눈 앞의 장면을 응시했다. 순식간에 벌어져버린 일들에 생각이 멈춰버린 것 같다.
씨발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꺼요. 아득한 곳에서 들리는 육중환의 목소리. 주승우의 시선이 처참하게 쓰러진 장경주에서 소리가 난 곳으로 옮겨진다. 고통에 일그러진 육중환의 얼굴.
육 형사님?
계속 그렇게 서 있기만 할꺼냐고. 배를 욺켜쥐고 있다. 손가락 사이로 붉은 피가 흐른다.
아. 꿈인지 생시인지. 이승인지 저승인지. 주승우는 애써 정신을 가다듬는다. 초점이 잡히자 눈에 들어오는 육중환. 황급히 다가가 육중환을 무릅에 받친다.
육 형사님. 이테라가 두 사람의 모습을 발견했다. 다가와 육중환의 코와 목에 손가락을 대 본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제가 죽기라도 한 줄 아신겁니까. 육중환의 눈이 이테라와 마주친다. 저는 괜찮습니다. 이 몸이 조그만 쇳 조각 하나 박혔다고 쉽게 어떻게 되진 않습니다.
일단 응급조치부터 해야해요 전화를 건다. 그들의 옆에 널부러진 장경주 차장이 눈에 들어왔다. 결국 장 검사까지...
막지 못했습니다. 눈 앞에 있는 데 어쩔 방법이 없었습니다. 몸을 날려서라도 막았어야 했는데.
그쪽 말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 놈들을 잡아야 합니다. 육중환이 다시 눈을 떴다.
육 형사님부터...
저는 괜찮으니 그 놈들부터 쫒으세요.
안됩니다. 주승우다.
네?
벌써 이 곳을 떴을 겁니다. 우리가 상대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주승우는 그쪽이 아니라 우리라고 했다. 이테라는 자존심이 강한 여자였다. 자존심이 강한 경찰였다.
지금 저 뿐 아니라 수사대를 무시한 거 아세요? 이테라가 발끈했다.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을 건드린 거라구요.
저들은 우리를 잘 아는 데 우리는 저들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우리를 빤히 보고 있는 데 우리는 저들의 그림자도 본 적이 없습니다. 쫒을 수도 쫒아서도 안되는 상황입니다. 일단 여기서 멈춰야 합니다. 다행히 우리쪽엔 저들에 대한 단서가 남았습니다.
이테라는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주승우의 말에 틀림이 없었다. 총알 말이군요. 이테라는 육중환의 배와 장중경의 이마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것을 관통했을 총알이 박혀있을 만한 지점을 머릿속으로 그렸다. 아마 추적이 안될 총을 썼을 꺼에요.
상관없습니다. 대한민국 공권력의 레이다에 걸리지 않을 총알을 쓸 수 있는 곳은 한 곳 뿐이니까요. 우리는 그 곳이 어디인지 이미 알고 있구요
후훗.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이테라의 얼굴에 야릇한 미소가 번진다.
그 게 어디죠? 육중환이 다시 눈을 떴다. 궁금한 건 못찾지만, 못참는 성격이다.
대한민국 정부요. 주승우와 이테라는 서로를 쳐다봤다.

5장: 경평축구(4-5/5)...김한솔 그리고 김태송

# 광화문 주승우의 레지던스. 늦여름 새벽 여명이 침실 브라인드 틈새를 비집고 들어온다. 힘을 다 쓴 얇은 여명이 이테라의 얼굴을 비춘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섹스는 처음이었다. 이테라에게 팔베개를 내준 주승우는 마침내 부진을 떠나보냈다. 그 품에 테라가 들어왔다. 주승우는 테라의 머리를 쓸어넘긴다. 여명이 비춘 테라의 얼굴은 한없이 평화로운 아기천사였다. 이마에 입을 밎춘다. 이테라는 고개를 들어 그 입에 입을 맞춘다. 두 사람은 한번 더 서로를 꼭 끌어안았다. 또 사랑을 나누었다.

우리, 배고프지 않아요? 격려한 사랑을 나누고 이테라는 허기를 느꼈다. 냉장고로 다가가 먹을 것을 찾았다. 자신의 셔츠를 걸친 이테라가 주승우는 한없이 사랑스러웠다. 그쪽이 아니라 우리라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집에서는 도통 뭘 먹질 않아서. 냉장고에 아무 것도 없어요. 주승우가 다가와 냉동실 문을 연다. 라면 몇개 있는데 끓일까요?
네. 그럼 아이스맨이 끓여주는 라면 한번 먹어볼까요? 기대할께요. 침대로 돌아와 그대로 엎어지는 이테라. 얼굴을 침대에 파 묻는다. 에너지 게이지가 제로였다. 돌아 누워 주승우를 본다. 그는 라면 냄비에 물을 맞추고 있다. 손가락을 넣어 손가락 마디 한개를 확인한다. 섬세한 성격이다. 그런데 라면을 왜 냉동실에 넣어뒀어요? 별 것도 아닌 게 왠지 궁금했다.
글쎄요. 별 이유는 없어요. 달리 넣어둘 곳도 없고. 가스레인지 불을 켠다. 이테라 쪽을 본다. 냉동 숙성 라면이 더 맛있을 것 같기도 하고. 후훗. 말이 싱겁다. 라면 싱겁게 먹어요? 저는 스프를 좀 덜넣고 먹는 편인데. 계란은 안넣고...
저도 싱겁게 먹어요. 계란도 역시 안넣고. 우리 라면 먹는 취향이 똑같네요. 실은 고춧가루를 풀고 계란은 두 개를 넣어야 라면이라며 육중환과 수영을 타박했던 게 이테라의 취향이었다.
잠시후 침대용 간이상을 들고 주승우가 침대로 왔다.
공주님, 라면 대령입니다. 노랑색 양은 냄비에 보글보글 끓는 라면이 제법 먹음직스러웠다.
와. 맛있겠는데요. 그냥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물도 적당히 맞춰졌고, 살짝 국물 밖으로 꼬뜰꼬들한 면발이 고개를 내밀었다.
라면을 끓일 때도 골든타임이 있어요. 그 시간을 정확히 맞춰야 라면이죠. 자주 젓가락으로 면발을 들어줘 공기와 접촉하는 량을 늘려야 면이 찰지게 되구요. 라면에 계란을 넣는 건 면느님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라면 하나 끓여갖고 와서는 온갖 주접을 떤다.
김치 없어요? 김치 없는 라면이야 말로 면느님에 대한 불충 아니에요? 이테라가 한 젓갈 가득 입에 넣으려다 젓가락을 놓는다. 왠지 김치가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이 엄습한다. 냉장고를 열었을 때 그가 본 것은 스파클링 워터 몇병이 전부였다. 남자 혼자 사는 집에 김치 냉장고가 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없어요. 불길한 예감은 왜 틀린 적이 없는 걸까. 제가 나가서 금방 사올께요. 1층 편의점에 뽀끔 김치라도 주승우는 짐짓 귀여운 척을 했다.
그냥 먹어요. 라면은 그냥 먹어야 해요. 김치의 매운 맛이 들어가면 라면 본연의 맛과 식감을 느낄 수 없잖아요. 그럼 그럼요. 이테라는 한 젓가락 가득 퍼서 면치기의 진수를 보였다. 속으론 김치 없는 라면은 치즈 없는 피자라고 생각했다.

YTN 긴급 속보입니다. 청와대 춘추관 주성돈 기자 연결합니다. 주승우와 이테라의 시선이 일시에 TV로 향했다. 앵커도 청와대 긴급 브리핑에 우왕좌왕 하는 기색이다. 그럴만 했다. 발표자가 대통령이었다. 새벽 시간 대통령이 직접 나서 브리핑을 하는 경우는 없었다. 주승우와 이테라는 앵커의 멘트에 시선을 집중했다. 두 사람 모두 입에는 라면이 한가득이었다.
주성돈 기자.
네. 주성돈입니다.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입니다. 잠시후 제 뒤편에서 대통령이 긴급 브리핑을 합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긴급 기자회견을 하는 건 이번 정부 들어서는 처음인 것 같은데요. 브리핑 내용이 무엇인지 더욱 궁금해집니다.
네. 그건 지금 파악중인데요. 아직 청와대 기자단도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대변인실에서 기자단에 보낸 단체 문자엔 '30분 후 대통령 긴급 기자회견'으로만 돼 있었습니다. 대변인실과 청와대 비서실 등은 그 이후 개별 접촉이 전혀 안되는 상황입니다. 정황상 상당히 긴박한 상황인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 걸 누가 모르나. 라면을 아구적 씹는 이테라. 안그래요? 주승우를 본다. 주승우의 시선을 여전히 TV에 박혀있다.
그렇군요. 화면으로 보이는 춘추관에도 상당한 긴장감이 흐르는 것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앵커의 말에 주성돈 기자도 달리 할 말이 없다. 우물쭈물 한다.
주 기자. 지금 이 시점에서 대통령이 긴급 기자회견을 할 만한 사건이 뭐가 있을까요. 오늘은 특히 잠실 서울 스테디움에서 경평축구 개막식이 치러지는 날 아닙니까. 평화협정을 기념한 행사이고, 무엇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참석하기로 하면서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데요. 앵커는 차차 평상심을 찾아간다. 멘트가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맞습니다. 1년 전 오늘은 바로 북미 평화협정이 체결된 날입니다. 당시 이를 기념해 협정 체결 1년이 되는 해부터 경평축구를 개최키로 남북이 합의했습니다. 경평축구는 일제 강점기였던 1929년 민족화합을 위해 시작된 축구경기입니다. 아시는 것처럼 축구가 국민화합에 끼치는 영향력을 막강한데요. 경평축구 열기가 고조되자 일제의 탄압으로 2년만에 중단됐었습니다. 경평축구를 부활 시킨 건 바로 민영우 서울시장입니다. 민 시장은 서울-평양간 문화교류 차원에서 경평축구의 부활을 추진했고, 2015년엔 이를 위해 평양 방문을 통일부와 논의했었습니다. 당시 박근혜 정권은 이를 민영우 시장의 대선전략으로 간주, 방북 허가를 내주지 않았었구요. 이후 북미 평화협정 당시 민 시장의 제안으로 경평축구 대회를 재개하는 내용이 논의가 됐습니다.
민영우 시장에게는 의미가 남다르겠군요.
맞습니다. 오늘 개막식에도 우리측에선 대통령과 민영우 시장이, 북측에선 김정은 위원장과 최룡해 부위원장이 참석을 합니다. 북한 공산당내 서열 1,2위가 모두 평양을 비운다는 것은 김정은 의원장이 북핵 협상후 체제 안정을 대내외에 알리기 위한 포석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습니다.
주성돈 기자. 말씀하시는 순간 대통령이 곧 입실을 하실 것 같습니다. 화면상으로는 대변인과 비서실장, 안보실장이 눈에 보이네요. 이 총리와 국정원장도 입실을 하셨군요.
네. 지금 막 대통령이 단상에 올랐습니다. 일단 브피핑 들어보시죠. 주성돈 기자가 화면에서 빠지고 카메라는 단상위 대통령을 클로즈업했다. 대통령의 얼굴에선 긴장감이 역력하다. 토끼눈으로 봐선 밤을 뜬 눈으로 지새운 것 같다.
국민 여러분.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의 말은 단호하고 빨랐다. 저는 지금 중대한 발표를 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섰습니다. 카메라 후레쉬가 사방에서 터졌다.
저희 정보당국은 오늘 새벽 4시께 서울 모처에서 전 북한 총정치국장 황병서 일당을 일망타진했습니다. 황병서 일당은 한달전쯤 입국했으며 테러를 모의해 온 것으로 정보당국은 파악하고 있습니다. 정보당국과 군 특수부대 1개 중대가 급파됐으며 진압 과정에서 황병서를 비롯, 현장에 있던 테러 일당 여섯명은 모두 사살됐습니다. 이들은 오늘 열리는 경평축구 개막식을 타깃으로 테러를 모의해온 것으로 정보당국은 보고 있습니다. 저희 정부는 테러 잔당 세력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염두해 두고 추가적인 정보 파악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브리핑룸은 일순간 술렁였다. 새벽잠을 설치고 나와서 멍했던 기자들은 테러 모의란 말에 눈의 번쩍 띄였다. 대통령의 짧은 발표가 끝나자 기자들은 서로 질문하기 바빴다. 예상치 못했던 데다 충격적인 발표 내용에 기자들은 손은 번쩍 들고 있으면서도 막상 대통령에게 어떤 질문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한겨레 최충훈 기자입니다. 너무 엄청난 내용이어서 어리둥절 한데요. 대통령님. 오늘 경평축구 대회. 예정대로 열리는 건가요? 이 점을 국민들이 가장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최충훈 기자는 콧등으로 밀려내려온 안경을 손가락으로 밀어올렸다. 대통령의 얼굴이 또렷이 눈에 들에 왔다. 대통령의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다.
물론입니다. 경평축구 개막식은 예정대로 진행됩니다.
중앙일보 주가연 기자입니다. 황병서 일당을 일망타진 했다고는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것 아닌가요.
축구장 인근 보안에는 문제가 없다고 확답을 드릴 수 있습니다. 축구장을 중심으로 반경 1km 이내엔 개미 한마리까지 철저하게 확인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진압 현장에서 테러에 쓰일 것으로 보이는 무기들은 모두 수거가 된 상태입니다. 국민 여러분. 저를 믿고 오늘 행사는 마음껏 즐기셔도 됩니다. 저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오늘 현장에 예정대로 참석한다는 사실이 안전을 보장하는 거 아니겠습니까.
jtbc 엄석태 기자입니다. 테러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핵심을 찌른 질문이다.
김정은 위원장과 최룡해 부위원장을 겨냥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황병서는 전 총정치국장으로 북핵 개발을 주도했던 인물입니다. 북핵 문제가 대화 국면에 접어들었던 2018년 초, 총정치국장에서 해임되고 자취를 감췄었습니다. 여러 정황상, 황병서의 당시 해임은 김정은 위원장이 군부의 반발을 고려한 선제 조치였습니다. 황병서 입장에선 북핵 개발 1등 공신에서 갑자기 팽 당한 것입니다.
동아일보 장충수 기자입니다. 황병서 일당의 입국이 한달전 쯤이라고 하셨습니다. 맞습니까. 순간 대통령의 얼굴이 굳었다. 뒤에 도열한 참모들을 쳐다본다. 비서실장과 눈을 맞춘다.
네. 맞습니다.
소탕까지 한 달이란 시간이 걸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황병서 일당이 어떻게 입국할 수 있었는 지도 궁금합니다.
황병서 일당의 정확한 입국 경로는 저희 정보당국도 파악중입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번 소탕 작전은 한미, 한중 정보당국간 긴밀한 협조 아래 이뤄진 것입니다.
황병서 일당의 입국 사실을 우리 정보당국은 모르고 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됩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희 정부는 황병서 입국 당시부터 미국, 중국쪽 정보라인과 긴밀한 공조 체제를 가동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은 준비된 생수를 한 모금 마신다. 꼴깍. 삼키는 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무거운 춘추관의 공기를 뚫는다.
SBS 피용회 기자입니다. 잔당 세력 가능성을 언급하셨습니다. 정확히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대통령은 다시 한번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저희 정보당국은 김태송이란 인물의 행적을 추적중입니다. 대통령이 김태송이란 이름을 언급하자 주승우의 눈이 커졌다. 김태송은 나이 27세, 외교관 신분으로 중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인물입니다. 대통령의 말이 이어졌다.
김태송이란 인물이 테러 잔당 세력 중 한명이란 말씀이신가요. 그렇다면 이번 테러 모의가 중국쪽과 관련됐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그 것은 말씀 드릴 단계가 아닙니다. 저희 정보당국은 현재 김태송이 김한솔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김한솔이란 이름이 나오자 브리핑룸이 또 한번 술렁였다.
김한솔이라면 김정남의 장남, 그 김한솔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jtbc 엄석태기자였다.
맞습니다. 2017년 암살당한 김정남의 장남입니다.
김한솔은 삼촌 김일성-김정은-김정남-김한솔로 이어지는 백투혈통의 직계 장손이다. 아버지 김정남이 김정일의 눈 밖에 나면서 왕좌에서 멀어진 불운의 황태자다. 삼촌 김정은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이자, 자신의 왕좌를 빼앗은 정적인 것이다. 2017년 김정남 암살 당시 탈북자 지원단체로 알려진 천리마민방위의 보호 아래 자취를 감췄었다. 김한솔이 관련됐다면 이번 테러 모의는 단순한 복수극 이상이 될 수 있다. 북한 정권 교체로 이어지는 거대한 밑그림의 일부일 수 있다는 것이다.
김한솔같은 인물이 어떻게 버젓이 주한 중국대사관에서 근무할 수 있는 겁니까. 정부가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게 도무지... 엄석태 기자가 질문을 이어갔다.
지금 저희도 정보를 파악중입니다.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김태송이 김한솔이 맞다면 철저한 신분 세탁이 이뤄졌다는 것입니다. 페이스오프를 포함해서 말입니다.
중국 정부의 도움 없이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대통령은 이 질문을 받고 즉답을 하지 않았다. 잠시 생각하더니 입을 여는 대통령.
물론 거대한 힘의 조직적인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하지만 그 힘의 실체를 중국이라고 특정할 단계는 아닙니다. 이번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여러 경로를 통해 저희도 정보를 파악중입니다.
주체가 미국 등 다른 국가의 정부일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는 겁니까. 엄석태 기자는 집요했다.
말씀드린 대로 대답을 드릴 수 있는 단계가 아닙니다.
김한솔을 보호하고 있는 천리마민방위는 겉으론 탈북자 지원을 위한 인도적 단체지만 김정은 체제 전복을 위한 정치적 조직이다. 북미 2차 회담이 열렸던 기간인 2019년 3월1일 유튜브를 통해 북한 임시정부 수립을 선포했었다. 임시정부 이름은 자유조선이었다. 당시 동영상은 종로 탑골공원에서 찍혔다.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김태송이 김한솔일 가능성을 언급한 후 미디어의 초점을 김태송에게 모아졌다.중국 대사관은 정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침묵모드에 돌입했다. 걸려오는 전화도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 김태송의 얼굴과 인상착의가 온라인 상에 도배됐다. 네티즌 수사대는 SNS에 떠도는 김태송의 조각들을 맞춰 그의 행적을 재구성했다. 자연히 김한솔이 재조명됐다. 김한솔은 2017년 아버지 김정남 피살 뒤 미디어에서 자취를 감췄다. 자유조선의 보호 아래 유튜브 방송을 통해 건재함을 알린 직후였다. 자유조선이란 단체의 당시 이름은 천리마민방위였다.

5장: 경평축구(5-1/5)...그날 밤

# 아내 살해에 대한 유죄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인 구노는 식당에서 아침 식사를 하던 도중 TV에 나오는 김태송의 얼굴을 보고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의 기억은 8월31일 밤 지정선 위원장이 살해되던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갔다. 자신이 마기란을 취한 사실을 알게 된 지정선. 분노의 늪에 빠져 달려들던 그의 표정이 전광석화처럼 지나갔다. 그 뒤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김태송의 얼굴. 구노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식당 바닥에 쓰러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에 놀란 수감자들이 구노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구노의 이마에 선 핏대는 이내 터져 피를 뿜을 듯 했다. 몰려든 사람과 그들의 웅성임이 실재인지 환상인지 구노에겐 모호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아득히 그는 그날밤으로 돌아갔다.

감히 네까짓게 내 것을 탐해? 구노의 눈 앞에는 화가난 지정선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지정선이 멱살을 어찌나 세게 잡았던 지 이내 숨이 막혀버릴 것 같았다. 마기란의 전화를 받고 지정선 노조위원장은 한 걸음에 구노에게 달려갔다. 술동무를 하던 김정택도 돌아간 상태였다. 구노는 쓸쓸히 정규직 전환 대상에서 탈락한 시름을 폭음으로 달래고 있었다.
제 것을 빼앗기고 나니 눈알이 뒤집혀? 헤헤. 구노는 그런 상황에서 지정선을 조롱했다. 술에 취해 제몸 하나 가눌 기운이 없었지만 지정선의 얼굴을 보자 정신은 오히려 또렷해졌다.
그런데 말이야. 애초에 너도 네 것이란 게 아무것도 없는 놈이잖아. 마기란도 널 잠시 이용하는 거잖아. 내 말이 틀려? 구노의 조롱은 비수처럼 날아와 지정선의 심장에 꽂혔다. 날카로워 처음엔 통증조차 없는 칼날이었다. 쓱 베고 지나간 자리에서 잠시후 피가 맺혔다. 정곡을 찔린 지정선은 숨이 막혔다. 말이 막혔다. 피눈물이 나 눈앞이 막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 주먹을 휘두르는 것 뿐이었다. 지정선은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주먹을 날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쓰러진 구노의 멱살을 잡고 다시 일으켜 세우고선 또 주먹을 휘둘렀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구노는 웃음을 지었다. 입꼬리가 올라가면서 새빨갛게 물든 이빨들 사이로 피가 주룩 흘렀다.
웃어? 구노의 조롱은 지정선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자신과 구노의 사이에 경계가 됐던 일말의 우월감이 무너지자 견딜 수 없는 자괴감이 밀려왔다. 지정선은 눈이 뒤집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여전히 주먹을 날리는 것 뿐이었다. 퍽 퍽 퍽 퍽... 주먹 소리가 날 때마다 구노의 몸은 점점 낮아졌다. 변하지 않는 것은 입가에 지어진 야릇한 미소였다. 지정선은 구노를 때릴 수록 점점더 화가 치밀었다. 주먹으로 풀 일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지정선의 눈에 기둥에 기대놓은 쇠파이프가 들어왔다. 뚜벅뚜벅 걸어가 파이프를 손에 쥐고는 다시 구노에게 달려든다. 쇠파이프로 흠씬 두들겨 맞으면서도 구노의 치켜올라간 입꼬리가 내려오질 않는다. 모든 것을 체념한 구노는 더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다. 심지어 맞다가 죽어도 사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더 맞았는지 정신이 아득해진다. 순간. 툭 치는 소리가 나더니 지정선이 구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 앞으로 기관차가 스르륵 지나간다. 두 개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구노는 정신을 잃는다.
기관차에 치여 쓰러지면서 왼족 발목이 잘려나간 지정선의 뒤로 검은 옷을 입은 두 남자가 서 있다. 지정선은 잘린 발목에서 피가 쏟아지는 와중에도 두 남자가 자신에게 위협적이란 것을 직감했다. 몸을 일으켜 세우던 지정선은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다시 경정비고 바닥에 꼬를 박고 쓰러졌다. 구노에게 얼마나 주먹질을 해댔는지 그순간 잘려나간 발목보다 땅을 짚은 손이 더 아팠다. 일어서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된 지정선은 기기 시작했다. 그 것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검은 옷의 두 사내에게서 일단은 멀어져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정비고 바닥에 묻은 검은 기름이 피범벅과 뒤섞이며 지정선의 하얀 셔츠를 검붉게 물들였다. 쓱...쓱... 바닥을 기는 소리가 경정비고 안의 정적을 깨면서 허공에 퍼졌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검은 가죽 장갑을 낀 강석호가 한걸음을 떼면서 말했다.
제가 합니다. 김태송이었다. 검은 가죽 블루종 점퍼에 검은 가죽 장갑을 끼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검은 모자에 가리웠던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평소와는 다른 날카로운 눈빛. 살기를 띄고 있다. 김태송의 단호함에 강석호는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바닥을 기면서 지정선은 죽음을 직감했다. 이유가 뭘까. 저승 사자의 그림자를 느끼며 지정선은 생각했다.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등 뒤의 두 남자는 누구일까. 그들은 왜 지금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일까. 복잡한 생각을 하는 가운데 죽음의 그림자는 바로 등뒤로 왔다. 김태송은 지정선의 목을 단숨에 비틀었다. 어찌나 세게 비틀었던지 바닥쪽을 봤던 지정선의 얼굴이 정비고 천정쪽으로 틀어졌다. 감지못한 눈은 김태송을 본다. 특수 훈련으로 단련된 김태송이지만 죽음의 순간을 맞이한 사람의 눈빛은 소름이 끼쳤다. 김태송은 다시 얼굴을 비틀어 바닥으로 쳐박았다.
강석호는 적쟎이 놀란 표정이다. 자신이 알던 김태송, 아니 김한솔을 철부지 황태자였다. 왕의 눈 밖에 난 아버지 때문에 일찌감치 해외생활을 전전했지마 그 덕에 오히려 풍족한 삶을 누렸다. 청바지와 햄버거, 락에 익숙했다. 멀어진 왕좌는 자유분방함에 익숙해진 김한솔에게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때문에 삼촌 김정은도 조카 김한솔을 위협의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난 3년간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눈앞의 김한솔은 특수훈련을 받은 전사가 아닌가.
이 꼴을 본다면 총파업 따위는 이제 엄두를 못내겠죠. 두 손을 털면서 김태송이 말했다.
단정은 이릅니다. 강석호는 전사가 됐지만 천재 물리학자였다. 문뜩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는 생각을 했다.
그 게 무슨 말이오?
사람들은 이 광경을 원한 관계에 의한 살인정도로 생각할 겁니다. 노조 간부이기 때문에 살해를 당했다고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아까 제가 김 동지를 저지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저 자가 혼자 있을 때 죽였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메시지를 남기면 될 것 아니오.
그 건 안됩니다. 메시지는 암시적이어야 합니다. 총파업을 왜 막으려고 했는 지 수사를 하고 나서게 되면 대업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막연하지만 강력한 공포로 사람들을 몰아 넣어야 합니다.
뭐가 그리 복잡하오. 김태송은 담배를 꺼내 물었다.
한솔 동지. 자중하셔야 합니다. 이 건 왕좌가 걸린 과업입니다. 강석호는 김태송을 한솔 동지라고 했다.
그럼 이제 어쩐단 말이오. 죽은 자를 다시 살릴 수도 없는 게 아니오.
계획했던 대로 부위원장까지 처리를 해야할 것 같습니다. 위원장에 이어 부위원장까지 처참하게 죽게 되면 증거가 없어도 파업은 실질적인 공포가 될 것입니다. 엄두를 못낼 것이란 말입니다. 강석호의 표정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왜 황 동지가 강 동지를 신임하는 지 이제 알 것 같소. 김한솔은 담배 연기를 허공에 내뿜으며 미소를 지었다.
한솔 동지. 한 가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석호는 조심스러운 표정이었다.
뭘 말이오. 물어보시오. 담배를 정비고 바닥에 떨어뜨리고는 비벼 끈다.
자유조선 말입니다.
자유조선이 어떻다는거요. 담배 한개비를 꺼내 또 문다.
자유조선은 북한의 정권교체를 위한 단체다. 김정남 피살 당시 천리마민방위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식적으로 첫 모습을 드러냈었다. 2019년 하노이 북미 회담 당시 주 스페인 북한 대사관을 침입하면서 활동을 본격화 했다. 미국 정부는 북핵 문제가 타결되지 않을 경우 김정은을 참수하고 정권을 교체하기 위해 이 조직을 줄곧 지원해왔다.
왜 미제의 편이 되신겁니까. 강석호는 신중하지만 단호한 표정이었다.
미제의 편이라. 허공을 보는 김한솔. 내 편 네 편이 뭐요. 내게 도움이 되면 내 편이 아니겠소. 강 동지와 황 동지는 왜 중국의 편이 된거요.
중국은 북조선의 전통적인 혈맹 아닙니까.
강 동지, 생각보다 순진한 면이 있소. 혈맹이 어디 있소. 중국도 우리도 서로 필요했던 거 아니오. 시진핑이 김정은을 혈맹동지로 생각한다고 착각하는 건 아니지요? 진짜 혈맹이라면 우리가 뭘 하려는 지 뻔히 알면서 열차에 폭탄 설치하는 것을 중국이 도왔겠느냔 말이오. 중국 눈에 우리는 그저 미제를 막는 방패에 불과한 것 아니겠소. 나는 원수를 죽이기 위해 지금 그 미제가 필요한 거고.
김정남 동지를 김정은이 죽였다고 확신하십니까? 강석호의 말 한 마디는 경정비고의 공기를 무겁게 눌렀다. 목이 비틀어져 죽은 지정선의 시체 때문이 아니었다. 아버지 김정남을 삼촌 김정은이 죽였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 아니었던가.
그 게 무슨 말이오?
김정은이 김정남 동지를 암살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럴 것이라는 정황만이 남아 있을 뿐입니다.

5장: 경평축구(5-2/5)...리버스: 폭탄을 실은 열차

# 오전 9시 여의도 극회의사당 인근 한강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자욱한 미세먼지에 가려 주변이 아득하다. 두 남자가 강변을 향해 서 있다. 양복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노년의 신사와 사파리 차림의 젊은 남자. 젊은 남자는 담배를 꺼내 문다. 강변의 바람 탓에 성냥에 좀처럼 불이 붙지 않는다. 노년의 신사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 붉을 당긴다. 불쪽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파리의 남자. 주승우다.

주 기자 생각이 맞았소. 김태송이 바로 김한솔입니다. 오늘 새벽 평택기지에서 미국발 수송기 한 대가 떴습니다. 김한솔이 그 편에 탄 것으로 저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새벽에 평택기자로 들어가는 차량에 김한솔이 타고 있었다는 사실을 국정원이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주 기자는 어떻게 김태송이 김한솔이란 것을 아신 겁니까. 금테 안경을 낀 노신사는 나이가 훨씬 위인데도 정중한 말투였다.
고등하교 때 한솔회란 학생회 간부 모임이 있었습니다. 그 써클 이름이 다른 말로 태송당이었습니다.
그랬군요. 허허. 노신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는 것을.
때로는 등잔 밑이 가장 어두운 법이니까요. 누구나 알 수 있는 퍼즐이 때론 가장 풀기 어려운 거 아니겠습니까. 모두 쉬운 해법을 두고 어려운 길을 찾기 마련이니까요. 주승우는 깊이 담배연기를 빨았다.
맞습니다. 중국조차 김한솔 관련해선 미국에 감쪽같이 속은 것 같습니다. 미국은 철저하게 중국인 김태송이란 인물을 창조했던 겁니다. 그의 유년시절부터의 모든 일상이 철저하게 새로 만들어졌습니다.
중국 대사관에 김한솔을 심어 놓은 건 신의 한 수 같습니다. 참으로 대담하고 무서운... 미국 말입니다. 담배는 이미 필터만 남을 정도로 짧아졌다.
패권국가 아닙니까.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장중경 장경주 부자의 일은 차이나게이트 비리에 얼룩진 파국으로 결론지을 생각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취재를 하지 않기로 한 약속을 지켜주셨으면 합니다. 모든 게 국익을 위한 선택이 아닙니까. 금테안경 너머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실장님께서 약속을 지키셨으니 물론 저도.
김태송에 대해 알아봐 달라는 부탁은 청와대 입장에서도 큰 도움이 됐습니다. 김한솔이 미국의 비호 아래 있다는 사실은 그간 미궁에 빠져 있던 여러 문제들을 푸는 열쇄가 될 것입니다.
실장님께 여쭤볼 게 있습니다. 주승우는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뭐든 물어보십시오.
김한솔은 황병서와 지속적으로 접촉 했었습니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네. 지수대가 차이나게이트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둘의 접촉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그랬군요 그렇다면 질문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미국이 황병서의 테러 모의를 알고 있었냐는 게 아닙니까. 노신사는 주승우의 의중을 꿰뜷어 봤다.
맞습니다. 바로 그 질문입니다.
제가 지금부터 하는 말은 주 기자님께 선물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습니다. 주 기자님께서 제 말을 들으실 지 결정하셔야 합니다. 안 듣는 것이 주 기자님께 나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기자의 호기심을 자극해 놓고 들을 지 말 지는 본인이 결정하라는 것이었다. 상자를 앞에둔 판도라가 되라는 말이다.
판도라의 상자라면 열겠습니다. 가장 밑바닥에 희망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으니까요. 주승우는 마지막 남은 담배를 물었다. 담뱃갑을 꼬깃꼬깃 꾸겨 주머니에 다시 넣었다.
청와대는 이번 테러 모의를 미국과 중국의 암묵적인 공모로 보고 있습니다. 노신사의 입에서 나온 말은 충격적이었다.
암묵적인 공모라구요?
네. 단정은 아직 이릅니다. 청와대는 비공식적인 정보 라인을 통해 이 문제를 철저하게 조사할 생각입니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공식적으로 발표하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과 중국 당국 모두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과에 따라서는 저희만 궁지에 몰리고 한미일 동맹이나 중국과의 관계만 악화될 수 있으니까요.
암묵적인 공모란 표현을 쓰신 데엔 이유가 있는 것 같군요.
물론입니다. 서로가 무엇을 할 것인지를 알고 필요에 따라 이용했을 뿐 결코 공모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란 의미입니다.
이해관계가 서로 맞는 부분이 있었고, 그 점에 대해 협력했다는 의미로 해석하겠습니다.
정확합니다.
이해관계가 교차된 부분은 김정은 제거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또 하나요?
VIP도 미국의 타깃이었던 것 같습니다.
VIP라면 대통령 아닙니까. 미국이 왜... 주승우는 스스로 한 질문의 꼬리에서 해답의 머리를 봤다. 평화협정 후 김정은이 미중 양국의 적이 된 것은 알만한 사실이었다. 중국은 미국의 힘을 빌어 개방에 나선 김정은이 눈엣 가시였다. 미국 쪽에서도 김정은이 달가운 상대는 아니었다. 동해쪽 원산항을 개항하긴 했지만 갈마지구 개발 외엔 미국이 발을 디딜 곳이 많지 않았다. 중국과 접한 남포지구는 중국이 모든 이권을 독점한 상태였다. 트럼프식 자본주의 쪽으로 까치발을 디디긴 했지만 중심축인 왼발은 여전히 중국쪽에 두고 있는, 김정은의 피봇전략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은 왜 미국의 타깃이 된 것일까.
대한민국은 여전히 미국의 동맹이지만 중국 쪽으로 많이 기울고 있다는 사실에 미국은 상당한 경계심을 품고 있습니다. 주승우의 머릿속에서 이런 저런 생각이 꼬리를 물 때 쯤 노신사는 정곡을 찌르고 들어왔다. 북미 평화협정 이후 한중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됐다.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답방형태로 시진핑이 방한을 했던 건 한중 관계의 발전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정치 이벤트였다. 평화협정 후 1년간 한중 무역도 30% 가량 늘었다. 민영우 서울시장의 1조원 규모 지하철 수입은 양국 경제협력 관계가 발전하는 가운데 찍힌 방점인 셈이다.
개방된 북한은 트럼프의 성에 차지 않고, 중국쪽으로 기운 대한민국엔 화가 났다는 거군요.
맞습니다. 최근 CIA가 평화협정 후 한반도 역학관계의 변화에 대한 보고서를 백악관에 전달한 게 있는 데 제목이 뭔지 아십니까?
무엇입니까? 주승우와 노신사의 눈빛이 마주쳤다.
'리버스'입니다. 알.이.브이.이.알.에스.이. REVERSE 말입니다.
리버스. 뒤집다란 뜻이 아닌가. 남과 북의 역할 뒤바뀜은 문정민 교수와의 설전에서 주승우 자신이 주장했던 내용이었다. 남과 북이 뒤집힌다는 의미 아닙니까. 주승우는 자신의 전망이 적중했다는 현실이 서글펐다.
정확합니다. 노신사는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 것이 미국이 분석한 현재 한반도의 상황입니다. 중국도 비슷한 판단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이 미국쪽으로 간만큼, 우리를 자기쪽으로 당겨야 균형이 맞을 테니까요.
김한솔이 미국의 손에 있는 것은 의외였습니다. 중국도 리버스를 예상했다면 처음부터 김정은을 제거하고 김한솔을 왕좌에 앉히려고 했을텐데요. 김정남을 줄곧 중국이 비호하고 있었으니 김한솔도 친중 성향일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청와대도 그 점에 주목을 했었습니다. 정보라인을 통해 관련 정보들에 상당히 접근을 했었구요.
관련 정보들이요?
2017년 김정남 암살 직후 김한솔의 신병을 확보하는 과정에서 미중 정보기관들간에 적잖은 유혈 충돌이 있었습니다. 미중 양국이 말레이시아 정부를 압박해 철저히 보도가 통제됐지만 말입니다.
결국 CIA와 중국 국가안전부간의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를 했다는 말이군요.
네. 김한솔이 중국보다 미국을 원했던 것도 있었지만 어쨌든 미국이 첩보전에서 중국을 따돌린 셈입니다. 그런데 이 점이 김한솔 입장에선 비극의 시작일 수도 있습니다. 노신사는 금테안경을 고쳐쓰며 주승우를 응시했다.
김한솔에게 비극이라구요.
김정남 암살 주범이 미국이라면 말입니다.
김정남을 미국이 죽였다는 말씀이신가요?
김정남 암살 직전 중국은 김정은 참수작전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김정은을 제거하고 백두혈통 직계장자인 김정남을 옹립해 친중정권을 세우자는 것이었죠. 김정은이 미사일 발사시험으로 미국을 자극하고 있던 시기지만 그 것은 어디까지나 쇼고 실제론 북한이 미국과의 대화를 원한다는 사실을 중국도 알고 있었으니까요.
북한에 친중정권이 들어서는 것을 막기 위해 김정남을 제거했다는 말씀이군요.
그런 정황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것까지 지금 밝힐 수는 없지만.
역시 무서운 놈들이군요. 그 정도는 미국이 한반도에서의 우위를 점하기 위해 했던 수많은 모의 중 하나에 불과할테니 말입니다.
정확합니다.
그런데 실장님.
말씀하십시오.
오늘 경평축구대회는 안전한 것일까요?
물론입니다. 황병서 일당은 모두 사살됐고, 축구장 시설은 이중삼중으로 안전을 확인했습니다. 대통령님 말씀대로 본인의 참석이 안전을 보장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그럴텐데. 미국까지 음모했던 테러라면 이렇게 싱겁게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 순간 울리는 주승우의 핸드폰. 이테라다.
네. 주승우는 이테라의 말을 한참 듣고는 통화를 마쳤다. 구노가 지정선 위원장 살해 현장에서 김한솔과 강석호를 본 사실을 기억했다고 진술한 것이다. 김한솔과 황병서, 테러, 그리고 지하철... 몇 개의 연관된 이름과 단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실장님. 주승우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네. 주 기자.
VIP가 축구를 관람하는 장소가 GBC타워지요?
네. 현대차 글로벌비즈니스센터 전망대가 맞습니다. 경호와 안전 문제를 감안해 잠실 스테디움에선 개막식 행사만 하고 관람은 GBC타워에서 하게 됩니다.
그 곳입니다.
그 곳이라뇨.
테러의 타깃말입니다.
그 게 무슨 말입니까. 현대차 타워는 물론 삼성역 인근도 샅샅히 조사를 했습니다. 100% 안전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럴테죠. 그 곳엔 처음부터 폭탄이 없었으니까요.
주 기자. 알아듣기 쉽게 말씀을 해주십시오.
서울시가 수입한 중국산 지하철. 오늘 운행을 시작하는 거 맞죠?
네. 민영우 시장이 9시 테이프 컷팅을 하고 축구장으로 오기로 돼 있습니다. 지금쯤 1호차가 군자 차량기지를 출발 했겠네요. 행사가 9시니까 말입니다.
지하철이 폭탄입니다. 그 중국산 지하철 말입니다. 주승우는 급히 시계를 보았다. 9시30분을 지나는 분침. 군자차량기지를 출발한 지하철이 삼성역을 향해 질주하고 있을 것이다. 지하철이 삼성역에 도착해 폭탄이 터지면 폭발력이 굴뚝 역할을 하는 GBC타워에 집중되고, 빌딩이 붕괴될 것이다. 이 것이 바로 테러의 각본이었다. 황병서 일당이 일망타진되는 것도 각본에 있던 것일까.
주승우는 시선을 돌렸다. 삼성역 GBC타워 꼭대기 첨탑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작가의 이전글[김창익 칼럼] 이재웅에 대한 변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