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벚나무
우리 집에는 아이들 놀이방을 겸하는 서재가 있지만, 나는 거실에 놓인 상 앞에 앉아 일을 하고 공부를 하고 글을 쓴다. 한참 할 일을 하다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창밖으로 오래되고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묵묵히 서 있다. 2층인 우리 집에서는 나무의 가장 멋진 얼굴을 볼 수 있다. 우리 집보다 낮은 곳에서는 나무의 몸통을, 우리 집보다 높은 곳에서는 나무의 정수리만 겨우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층집 가든 뷰(garden view)의 묘미랄까.
처음 이 집을 보러 왔을 때 저 나무는 예쁜 벚나무였다. 봄날이면 벚나무가 바로 보이는 카페 창가 자리가 그렇게 인기라던데, 지난봄 친구가 바로 그 ‘스팟’에서 찍었다며 보여준 사진 속 벚나무만큼 우리 집 앞 벚나무도 멋진 모습이었다. 여러 번 이사 끝에 이제는 정착해야 할 집이라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고민하지 않고 만 하루 만에 계약금을 넣게 만든 여러 가지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한 달 후 이 집으로 이사 왔을 때 나무는 벚꽃이 다 져버린 뒤였다.
시월의 지금은, 그냥 나무다. 나무나 꽃에는 무지한 편이라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일 테지만 아무튼 지금은 그냥 나무다. 우리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도 저 나무가 벚나무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다. 누구도 묻지 않으며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 관심을 가져 봐야 ‘2층에서는 이렇게 큰 나무가 바로 보이는구나.’, ‘나무 위에 새가 놀러 와 앉아 쉬는 게 다 보이네.’ 정도의 생각을 하고 말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누구도 묻지 않은 우리 집 벚나무(내가 심은 것도 아니요, 내 것도 아닙니다만.)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솟아난다. ‘이 나무 멋지지 않아요? 이 나무가 봄에는 얼마나 예뻐질지 상상도 못 하겠죠? 지금은 저리 봬도 사실은 벚나무랍니다, 엄청 예뻐요!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 할 정도로 예쁜 분홍빛 벚나무를 저는 잘 알고 있답니다…….’
그러나 정작 벚나무는 평범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그 얼굴로 묵묵히 세 계절을 지나고 있다. 그는 구태여 자신을 대신해서 이야기해 줄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것 같은 담담한 얼굴이다. ‘평범해 보이는 내 얼굴도 나인걸요, 봄이면 잠깐 당신들의 눈에 예쁘게 보일 뿐, 나는 늘 여기에 있어요. 봄날이라고 내가 더 특별해지는 것은 아니지요…….’
벚나무의 겸손한 목소리를 들으며 늘 봄날이고만 싶은 나의 마음을 본다. 벚꽃을 피워내기 전까지 세 계절을 묵묵히 보내는 벚나무를 보며, 매일 눈에 보이는 성과를 바라는 조바심 내는 마음에 쫓기는 나를 본다. 벚나무도 제 몸에 달린 가지와 수많은 잎을 온전하게 달고 살아갈 수 없을 텐데, 나에게 ‘딸린’ 가지가 하나라도 꺾일까, 한 장의 잎이라도 떨어질까 어려운 마음에 갇힌 나를 본다. 벚나무는 그저 벚나무로서의 목생(木生)을 사는데, 나는 나의 모습이 멋지게 드러나지 않는 세 계절을 조바심으로 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 멋지지 않아요?’에는 ‘나 멋진 사람이죠?’라는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숨어 있다. ‘이 나무가 봄에는 얼마나 예쁜데요. 지금은 저리 봬도 사실은 벚나무라고요!’에는 ‘내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데요, 지금은 비록 눈에 띄는 성과가 없어 보일 지라도요.’라는 의기소침한 마음이 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안 갈 정도로 예쁜 분홍빛 벚나무랍니다.’는 역시 ‘제가 원래는 꽤 실력 있는 사람이거든요.’를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다. 말 잘하는 사람들이 자신 있게 자기를 드러내 보이고 박수갈채를 받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벚나무를 대변하듯 나를 이야기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인간이(내가) 이렇게 방황하는 동안, 사람들에게 그토록 자랑하고 싶어 했던 벚나무는 지금 시월의 얼굴을 하고 있다. 가을의 얼굴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의 속도로 매일, 조금씩 붉어지고 있다.
나도 그럴 것이다. 멋진 꽃을 피워내지 않는 계절에도 존재할 것이다. 그 계절에만 보일 수 있는 얼굴을 하고 꾸준한 하루를 보내며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나는 더 이상 나를 대변하지 않을 것이다. “원래는요, 더 멋지거든요.”가 아닌 “아무 것도 아니어 보여도, 저는 늘 멋지거든요.”하는 차분한 확신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