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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제르 Aug 25. 2023

달리 갈 곳 없는 '여기'에서 잘 살아볼 3가지 과제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인생을 잘 살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지금 인생의 목표가 없어요. 왜 사는지 모르겠는데 죽을 수는 없으니까 그냥 사는 거예요. 모든 게 무덤덤하고 재미도 없어요." 나의 내담자는 상담을 시작한 첫 한 달 동안 인생의 목표와 재미에 대해 푸념했다.


  글쎄, 모든 사람들이 자신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인생의 목표는 무엇이며 목표대로 잘 살고 있는지 그렇게 자주 따져보고 되새기며 살아가지는 않는다. 적어도 나의 내담자는 수시로 그의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어쩌면 그도 20여 년을 별생각 없이,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수준에서 무던하게 살아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목적지가 없어 외롭고 재미를 찾을 수 없어 우울하다. 함께 손잡고 달려갈 이가 없으니 목표를 모르고, 우울하니 아무것에서도 재미를 못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내담자에게 몇 가지 과제를 내주기로 했다. 


  첫 번째, 인생이 아닌 하루를 살아보자는 것이다. 인생이라고 하기엔 거창하고, 오늘 하루라고 하면 그럭저럭 살아볼 만한 시간이다. 인생을 잘 살아야지, 하면 막연하고 대단한 일을 이루어야 할 것만 같다. 부담스럽다. 해결되지 못한 채 남아있는 과제들로 괴롭다. 그러나 오늘 하루 정도는 나에게 최고까지는 아니더라도 좋은 시간을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달라진다. 


  얼마 전 읽은 은유 작가의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의 관련 부분을 발췌하여 본다. "저한테 '잘 사는 일'은 하루를 잘 보내는 일입니다. '인생'을 잘 사는 건 어려운데 '하루'를 잘 보내는 건 해볼 만하죠. 아침에 일어나서 밥 먹고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 한 편을 초고라도 완성하고, 아이들 먹을 닭볶음탕이라도 한 냄비 가득 만들어놓고, 카페 가서 거품 곱게 내려진 카푸치노를 마시면서 책 두어 시간 읽다가 산책하고, 저녁에 친구 만나서 생맥주 한잔 하면서 수다 떨고, 잠들기 전 한 시간이라도 책상 앞에 앉아 오전에 쓴 원고를 퇴고한 날. 이런 날이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하루예요. '오늘 하루 잘 살았으면 내일도 살 수 있다.' 이렇게 기운을 내는 거죠(264쪽)".  


  신형철은 <인생의 역사>에서 필립 라킨의 시 <나날들>을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일생이란 결국 하루하루가 모여서 만들어지는 것인데, 왜 살고 나서 돌아보면 그 많은 날은 가뭇없고 속절없는가, 왜 우리는 그 나날들을 '충분히' 살아내지 못하는가. 시간을 사는 인간의 이런 종적 결함이 원통해서 눈물이 났던 것일까.". 그러나 "나날들이 아니라면 우리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지금은 곧 여기일 뿐'이라는 뜻이고, 거꾸로 말하면, '여기에서의 지금' 외의 다른 시간은 우리에게 허락되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단 한 번의 인생, 그 인생의 하루하루를 사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는 것. 다른 대안이 있는가? ("어디에서 살 수 있을까?").... '젠장, 이 나날들뿐이야, 대안은 없어.' 해수면이 상승하듯 시간이 흐르고 수몰 지구처럼 과거는 가라앉는다는 것을 실감하는 때에, 주어진 나날들을 백 퍼센트로 살아내지 못하는 우리 인간의 종적 결함을 실감하는 때에 이런 시를 읽는 것은 유용한 일이다. 기왕이면 그런 때나 그렇지 않은 때나, 그러니까 365일 내내 음미해도 좋을 것이다. 우리에게 매년 주어지는 365개의 나날들, 그것들 외에 또 어디에서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다시 말하면, 어차피 달리 갈 곳도 없는 '여기', 거부할 수도 없는 '지금'을 일단 충분히 살아내 보자는 것이다.


  두 번째, 그 하루 중 나의 감정들을 time stamp 앱을 활용하여 기록해 보는 것이다. 긍정적인 감정도, 부정적인 감정도 느낄 수 없다는 내담자에게 어떤 감정이든 올라오는 대로 잠시 멈추고, 그때의 감정을 찍어 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기록된 감정은 피트니스 센터에서 찍힌 뿌듯함일 수도 있고, 스터디카페에서 찍힌 지루함일 수도, 집 앞 카페에서 친구들과의 만남에서 찍힌 즐거움일 수도 있다. 지금-여기(here-and-now)에서의 감정들을 기록해 보면, 생각보다 많은 감정들이 그를 거쳐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날만 하더라도 그가 모든 일이 재미없다고 말한 건 거짓이었다. 실제로 그에게 '거짓말'이라는 말은 쓰지 않았지만 그가 좋아하는 심리학 용어로, 이러한 생각이야말로 '비합리적 사고'였음을 알려 주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공부하는 이야기를 하다 껄껄 소리 내서 웃지 않았느냐. 지난날을 돌아보면 암울하게 느껴질지 모르나 이렇게 하루에 한 번이라도 웃는 순간들이 있었는데 기억에 남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고. 그가 소리 내어 웃는데 썼던 얼굴의 근육들이 아직 다 펴지기 전에 그의 감정에 직면시켰다. 그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정말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며 스마트폰을 꺼내 첫 감정 스탬프를 남겼다.


  세 번째로, 다시 채워 넣는 것도 중요하다. 다시채움(replenishment)은 에너지가 아주 소진되기 전에 미리 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 특별히 신경 써서 관리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부러 틈틈의 재미를 찾는다는 점에서 조금 더 의식하고 스스로를 챙겨 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처한 상황에서 내가 느끼기에 좋은 것을 적합한 타이밍에 챙겨 넣어주는 것. 다시 채울 수도 있고 미리 채워 넣을 수도 있다. 


  나의 경우에는 다른 글에서도 자주 언급하였지만, 커피가 그렇다. 저녁형 인간은 여느 때처럼 아침 6시에 아기에게 깨움 당해 거실로 나오면 카페에서 나올법한 음악을 틀고, 믹스 카페라테를 탄다. 첫째를 등원시키고 둘째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계절과 상관없이 아이스 카페라테를 사들고 온다. 바쁜 아침 둘째의 양말을 짝짝이로 신겨 나올지언정 커피의 맛을 온전하게 음미하기 위해 이를 닦는다. 어쩌다 자유시간이 주어지면 실패하지 않을 커피 맛집을 찾아간다. 달리 갈 곳도 없는 육아 상황에서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틈틈이 챙겨 흘려 넣어 주기만 해도 나를 살뜰히 챙기는듯한 기분이 든다.  


  이런 커피형 아니 저녁형 인간인 나를 보며 남편은 대단한 자기애를 가졌다고 한다. 그러나 인생을 놓고 보면 '아침-커피-두 잔'만큼 가성비 좋은 리츄얼도 없을걸. 아무튼 대단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로 뚫린 틈을 꾸준히 메우고 기우는 노력을 한다면 그런 노력이 아주 없을 때보다는 분명 나으리라.


  종합해 보면 하루를 잘 살되 깨어 있으며 스스로를 돌보는 일을 하라는 것이다. 대단하지 않고 소소하며 사치스럽지 않고 소박한 과제이지 않은가? 그가 어떤 2주를 보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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