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일도 인생이니까, 김신지
남편과 여유 시간이 생겼을 때 같이 즐겨보는 프로그램이 있다. 결혼을 하고 싶은 남, 녀가 나와서 5일간 함께 시간을 보내고 밖에서 만남을 이어갈지 선택하도록 진행된다. 최종 결정을 위해 제한된 시간 동안 여자가 혹은 남자가 선택하여 데이트하기도 하고, 때로는 랜덤으로 만남의 기회를 갖기도 한다. 자신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에게 각자의 방식대로 접근하는 참가자들의 선택을 지켜보며 응원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한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 상당히 고되고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 그리고 이 프로를 다 보고 남편과 함께 한 침대에 누우면 새삼스레 내 옆에 내가 사랑하고 날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감사하게 된다.
우리 부부의 열띤 대화를 이끈 한 참가자의 이야기다. 이 참가자는 첫날부터 호감이 가는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적극적으로 표현해서 그 사람과의 데이트를 이끌어 냈다. 첫 데이트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서로 선택을 이어가며 둘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최종선택하기 전 날 밤, 그 참가자는 상대방에게 데이트를 해보니 자신이 바라던 성향이 아니라 만남이 좀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몰입해서 보고 있던 나는 '에엥?!'하고 외쳤다. 그렇게 확신을 주고서 이렇게 나온다고?!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은 긴장해서 얼굴이 떨렸지만 차분하게 대답해 나갔다.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은 앞으로 대화하며 충분히 맞춰갈 수 있는 부분이고, 자신은 그 부분을 맞춰갈 의지가 있다고. 하지만 그 참가자의 마음은 완강했다. 자신이 기대했던 대로 행동하고 반응하지 않았던 순간들을 이야기하며 굉장히 서운하고 상처가 되었다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고 본다고 말했다. 아니 데이트를 그렇게 즐겁게 해 놓고선! 씩씩거리며 남편에게 묻었다.
"만약 저 사람이 내담자로 오면 어떻게 할 거야?!"
남편도 흥분하며 크게 반응할 줄 알았는데 날 쓰윽 쳐다보더니 차분하게 말했다.
"근데, 나는 저 사람 말이 이해가 돼. 우리는 제삼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보니까 답답할 수 있겠지만."
"이해가 된다고???"
"응. 저렇게 행동하는 이유가 분명 있을 테니까. 뭔가 이전 연애에서 받은 상처가 있겠지."
남편이 나처럼 인상을 찌푸리며 저 사람 이상하다고 말할 줄 알았는데, 약간 샐쭉한 기분이 되었다. 입을 삐쭉거리며 대체 뭐가 이해된다는 건지 속으로 툴툴거리다가 오늘 아침에 읽었던 김신지 작가의 평일도 인생이니까 구절이 갑자기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리가 현실에선 얼마나 쉽게 서로를 판단하고 마는지. 내가 보고 느낀 게 전부인 양, 상대방을 '그럴 만한' 전사(前史)도 없는 납작한 캐릭터로 여긴다."
이 문장에 밑줄을 치며 '앞으로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만을 보고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단정 짓지 말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야겠다.'라고 실천사항을 적었다. 24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다짐을 까먹어버린 거다. 맞다, 누구에게나 사정은 있는 거다. 무수히 다양한 일들을 겪고 그 시간이 켜켜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된 것처럼, 누구에게나 그런 과정이 있겠지. 참가자를 보며 너무 쉽게 씩씩거렸던 내 모습이 약간 부끄러워졌다.
김신지 작가는 책에서 외로운 우리가 조금 덜 외로워지는 방법이 있다면, 그건 상대도 나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잊지 않는 일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그래, 잊지 말아야지. 누구에게나 말 못 할 사정이 있고, 그 사람을 만든 자기만의 역사가 있는 법이다. 그런데 아마 이렇게 다짐해도 나는 금방 또 까먹을 거다. 이럴 거면 차라리 의지보다 상상력을 키우는 게 더 빠를 지도 모르겠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을 거다.'라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는, '왜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행동할까?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라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게 나한테 더 맞는 방법일 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