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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 영쓴이 Jan 03. 2021

마흔의 물건(物件)

여전히 할 일을 해내고 있지만: 전자레인지




 시끌시끌 주방에서 난리가 났다.

 보글보글 끓어오는 하얀 주전자가 날렵한 맵씨를 뽐내며 말했다.

  “ 난 정말 소중해. 이 집 아이들이 먹을 보리차는 무조건 내가 만들어야 해. 이 집주인은 꼭 물을 끓여먹는다고.”

어수룩한 표정으로 주황색 눈을 껌벅이며 냉장고가 대답한다.

“ 난 자그마치 십 년이나 함께 했어. 하루에도 몇 번씩, 제일 많이 나를 만져주는 걸.”

“아니야, 나야말로 우리 주인이 제일 좋아하는 물건이지.” 새된 목소리가 한쪽에서 들려왔다.

“나를 칭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손님이 오면 항상 나 덕분에 설거지가 편해졌다며 자랑하더라고.” 식기세척기의 목소리였다.


 어디선가 "웅웅웅~ 덜덜덜~ "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누구 소리지?”

  “ 어디서 나는 소리야?”

 모두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정적이 찾아온 그때 누군가가 말문을 열었다.

  “ 나는 이제 곧 너희와 헤어질 것 같아.”


 하얗던 피부가 누르스름 변해버린 전자레인지는 흉한 몰골 때문에 주방 안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다용도실로 이사를 갔다. 여전히 음식을 데우는 데에는 할 일을 다해내고 있지만, 단지 그의 늙어버린 외모 때문에  더 이상 사랑받지 못하는 까닭이다.




  이 전자레인지는 나의 애증의 물건이다.

 새로이 이사한 집,  필요 없거나 오래된 가전제품은 버리고 새로 사기로 했었다. 이건 버리고 저건 새로 사고 집을 휘이 둘러보며 목록을 작성하다 너와 마주쳤다. 기능이 멀쩡해 버리기는 아깝고, 오랫동안 베란다에서 햇빛을 쬔 탓에 변색되어 외양은 보기 싫은 모습이었던 이 전자레인지.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정은 다용도실로 치워버리는 것이었다.


 내 나이 이제 마흔이다.

 여전히 난 무엇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아직도 난 가벼운 말에도 상처 받는 폭신폭신한 여린 마음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매일 거울 속에서 다용도실로 쫓겨가야 할 것 같은 시든 외모와 마주한다. 로션을 처덕처덕해도 돌아오지 않는 주름, 인공적 시술이 절실해 보이는 기미, 주름 잡힌 똥뱃살.

나도 영락없이 너처럼 관리 안된 모습이다.

 처음 우리 집에서 너와 만났을 때의 첫 만남, 새하얗게 빛나는 너의 모습이 내 머릿속에 기억되어 있다. 그러하기에 여전히 묵묵히 제 할 일을 다해내는 그 모습이 더 안타깝다. 내가 너의 멋졌던 모습을 기억하며 애잔하게 바라보고, 아직은 쓸 만한 너의 기능을 아까워하듯...


 누군가도 나의 쓸만함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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