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워싱턴 시내 한복판에 위치한 ELS라는 영어학원은 세계각국에서 학생들을 받아들였다. 한국에서 온 젊은 학생들도 꽤 많았고, 멕시코, 브라질, 콜롬비아, 프랑스, 아랍등지에서 온 많은 학생들이 그 학원에서 영어를 배웠다. 그들은 영어를 배우기 위해 그 학원에 온 것이다.
ELS는 그들에게 미국비자를 받는데 필요한 서류를 발급해주고, 그들을 받아들여 워싱턴 근교의 가정집에 그들을 숙박시켰다. 학생들은 한달에 1,200불이나 하는 학비 외에 한달에 700불씩 ELS를 통해 하숙집에 지불해야 했다. 미국인 가정에서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게 한다는 목적이었다. 그 학원은 학생들이 웬만한 수준에 오르면 그들이 미국의 대학이나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역시 미국의 위력을 실감케 하는 학원이었다. 그 많은 나라에서 젊은이들이 영어를 배우기 위해 이곳에 오다니! 한국에 있는 한국어 학원에 세계각국에서 젊은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러 오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멀고도 먼 얘기다. 한국의 힘이 세계각국에 미칠 때에만 가능한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학원의 수준은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우리 일행은 영어시험을 본 뒤 두 반으로 나뉘어져서 5명씩 수업을 받았다. A반의 담임을 맡은 데이빗이라는 선생은 씨라큐즈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지역신문에서 기자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사람이었다. 나이는 60대 초반. 그는 얼굴이 온통 수염으로 뒤덮인 사람이었는데, 의욕적으로 우리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문제는 정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가르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문법과 독해를 가르치고 있었다. 우리는 문법과 독해는 이미 상당한 수준이었으나, 듣기와 말하기가 부족한 상태였다. 그래서 수업방법을 바꿔달라고 했더니, 4시간의 수업중 1시간만 듣기를 시키는 것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학원의 목표는 우리들에게 정식 토플 (International Toefl) 시험이 아닌 학원에서 출제한 토플시험 (Institutional Toefl) 을 치도록 해서, 600점을 넘게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치밀었다. 95년에 한국에서 토플시험을 치렀던 나는 633점(677점 만점)을 받았었다.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에게 항의를 했더니, 나에게 토플성적표를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학원의 원장인 제인 터커맨은 그 성적표를 보더니 “당신은 여기에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솔직하게 말해준 점이 마음에 들었다. 보통은 ‘그래도 여기에서 공부하면 성적이 오를 것’이라던가, ‘이 점수도 그렇게 높은 점수가 아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예상했는데, 의외의 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듣기연습을 좀 더 많이 하도록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 다음부터는 듣기시간이 두시간 정도로 늘어났다.
그 뒤로 학원에서는 나를 ‘토플맨’이라고 불렀다. 토플맨. 조롱이 섞인 별명같기도 하고, 다른 사람들과 나를 구별하기 위한 별명같기도 해서 듣기가 거북했다. 그래서 학원 관계자에게 “그런 식으로 비웃지 말라”고 말했더니, “절대로 비웃는 것이 아니다”라고 변명했다. 아무튼 그 학원의 수준은 그 정도였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매우 따뜻했다. 제인 터커맨 원장은 나름대로 학원을 잘 꾸려가려고 애쓰는 모습이었고, 데이빗을 비롯한 강사들은 학생들에게 많은 관심을 보이고 나름대로 영어를 잘 가르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특히, 학생들에게 국제전화 카드를 팔고 아침에 커피를 만들어주는 빌(Bill)이라는 50대 중반의 남자는 무슨 요청을 하던지 귀챦아 하는 법이 없이 흔쾌히 도와주었다. 무던한 사람이었다.
또 강의시간이 끝나면 학생들을 포토맥강으로, 또는 볼링장으로, 또는 필라델피아로 안내했던 21세의 처녀는 두 달 뒤에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예정이라면서 돈을 마련하기 위해 ELS에서 알바를 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활달한 성격으로 학생들을 잘 이끌고 다녔다.
ELS에 다닌 지도 약 1주 정도 지났을 때, 나는 워싱턴 생활이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하고, 한시라도 빨리 씨라큐즈로 가서 정착을 하기로 작정했다. 그러나, 집안 일로 인해서 다시 약 3주간 한국으로 돌아가게 될 줄은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학원에서는 오전에 4시간의 수업을 하고 오후시간은 볼링이나 관광, 식사 등의 행사를 학생들을 위해서 준비했다.
어느날 근처의 이디오피아 식당에서 점심을 먹을 때였다. 금발의 굉장하다 싶을 정도의 미인이 내 앞자리에 앉았다. “어디에서 왔어요?” 그녀는 처음에는 내 말을 못 알아들었다. 세 번을 같은 질문을 한 뒤에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콜롬비아.” “이름이 뭐예요?” “에드나.” “콜롬비아에서는 무엇을 했어요?” 그녀는 그때부터 대답할 때마다 작은 사전을 열심히 찾아보았다. 영어를 한다고는 볼 수 없고, 영어와 협상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한참 사전을 뒤적거리고, 더듬거리며 외마디 단어들을 토해낸 뒤에야 나는 그녀가 미스 틴에이지 (teenage) 콜롬비아였으며, 텔레비젼 광고 (샴푸) 모델을 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콜롬비아에서 의상 다자이너를 하다가 남자친구를 따라 미국에 왔다고 했다. 남자친구는 미국 회사의 컨설턴트 (고객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콜롬비아를 아느냐고 물었다. 나는 "콜롬비아는 마약조직과 폭력으로 잘 알려진 나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녀는 안색이 변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콜롬비아는 아름다운 나라예요. (Columbia is a beautiful country.)" 나는 화를 내는 그녀에게 담담하게 말했다. "콜롬비아가 아름다운 나라라는 것은 당신 얼굴을 보니 알겠다. (I know it's a beautiful country when I see your face.)" 그녀는 그 말을 단번에 알아듣고는 피식 웃었다.
그 밖에도 브라질에서 치과의사를 하다가 온 20대 처녀도 있었고, 한국에서 배구선수를 했다는 키 185센티의 처녀도 있었다.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는 여학생이 많았다. 아랍사람들을 제외하면 대략 3대7정도의 남녀 비율이었던 것 같다.
눈에 띄었던 것은 아랍권에서 온 학생들은 모두 남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아랍문화권에서의 여성의 지위를 대강 짐작케 했다. 아랍 학생들은 약 10여명 정도 되는 것 같았는데, 학원에 고급 스포츠카를 몰고 오곤 했다. 그들은 떼를 지어 이곳 저곳 놀러다녔다. 그들은 오일달러의 위력을 유감없이 뽐내고 있었다.
일주일 쯤 지나자, 나의 하숙집에도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온 학생이 들어왔다. 나이가 20살도 채 안된 어린 학생이었는데, 내 옆방에서 기거했다. 그는 나와 같은 학원에 다니면서도 아침에 나와 함께 학원에 가기를 꺼려했다. 밥을 먹을 때에도 거의 말이 없어서 대단히 수줍은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가끔 저녁에 혼자서 큰 소리로 알지못할 아랍 노래를 부르는가 하면, 울기도 하는 것 같았다.
어느날 저녁에 하숙집 주인들과 나, 그리고 아랍 학생이 모여 식사를 할 때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무엇을 하느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으로 말하자면 내무부 차관이었다. 그는 자기 집에 차가 3대 있으며, 자신은 미국산 ‘크라운 빅토리아’라는 차를 몰고 다녔다고 말했다. 그 차는 포드 (Ford)의 고급차종이다. 하숙집 주인 부부도 그 말을 듣더니 약간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큰 집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청년이었는데, 미국에 와서 작은 방에서 하숙집 주인의 눈치를 보면서 살자니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결국, 일주일 만에 삼촌이라는 사람이 와서 그를 데려갔다. 그 삼촌이라는 사람은 주인부부에게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면서도 ‘미안하다’는 얘기를 수없이 했다.
보니는 그 학생을 보내면서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자기 집이 싫다고 나가는 사람이었으나, 그래도 일주일을 자기 집에 살도록 했으니 그 정도의 정은 들은 모양이었다. 보니는 정이 많은 할머니였다. 그녀는 나중에 나에게 그 아랍학생이 그동안 “우리 집에서 빨리 나가려고 무척 조바심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