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하숙집

(1996년)

by 비마

하숙집의 선택은 가장 신경이 쓰였던 문제였다. ELS라는 영어학원에서 먼 곳이면 통학하는데 상당히 불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또 아무래도 내 집에서 살 때보다는 마음이 편하지 못할 것이라고 미리 각오해야 했다. 지금도 그것이 미국의 생활영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됐는 지 확신할 수 없다. 오히려 필요없는 절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하숙집에 들어가기 전날 해리 매틀즈 (Harry Mattles)라는 집주인과 통화를 했을 때만 해도 하숙집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 집주인이 별로 호의적인 것 같지 않았고, 지하철 역까지도 버스를 타고 가야한다는 말에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결국은 ELS에서 지정한 그 집으로 들어갈 수 밖에 없었다. IIE에서도 그 집으로 들어가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고 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래도, ELS로부터 받은 집주인의 서류를 보고 약간은 위안이 됐다. 나이가 60이 넘은 사람이어서 젊은 사람보다는 어느정도 외국사람들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숙집은 버지니아주의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라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모건코트 (Morgan Court) 라는 이름의 한적한 타운하우스 (town house)였다. 타운하우스는 한국의 연립주택과 비슷한 공동주택양식인데, 지상 2층 지하1층의 집들이 각자 번호를 달고 40-50채 정도 모여있었다. 이런 집들은 중앙냉난방식이지만, 아파트와 달리 단독주택의 잇점을 살리고 있었다. 나중에 안 일인데, 미국에는 이같은 형식의 집들이 아파트보다 더 흔한 주거양식이 돼 있었다.


집주인 해리는 뚱뚱하고 키가 큰 거구의 남자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살펴보았지만, 그 얼굴에서 악한 기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도 조용조용히 그리고 천천히 했기 때문에 그의 성격이 급하지 않다는 것을 금새 알 수 있었다. 그는 자기 소유의 배달차로 식료품을 각 체인점에 배달하는 사람이었다. 배달차라는 것은 흰색의 작은 트럭이었는데 냉동차처럼 운전석 뒤의 짐칸이 밀폐된 상자로 돼 있었다. 이런 차들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특히 우편배달부들도 이런 차로 편지들을 배달하러 다녔다.


여주인은 59세의 보니 매틀즈 할머니. 그녀는 할머니라는 명칭이 어울리지 않게 아직도 직장에 다녔다. 그녀의 직장은 의회였다.


내가 워싱턴에서 공부하고 있는 회사 후배인 K와 함께 지도를 보고 그 집을 찾아갔을 때, 집에는 해리만 있었다. 그는 내 방을 보여주고는 “아내가 돌아올 때까지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서 멋적게 웃었다. 보니 매틀즈 할머니가 돌아온 뒤, 나는 대충 짐을 풀어서 정리를 해 놓은 뒤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 메뉴는 스튜 (stew)라는 것이었는데, 양고기, 감자, 양파등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해리는 나에게 맛이 어떻느냐고 물으면서, 자기가 요리를 했다고 말했다. 미국에서는 남자가 저녁 요리를 하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 같았다. 물론, 한국에서도 요즘은 요리를 하는 남편들이 많이 있다고 들었지만, 미국에서는 요리는 여자의 할 일이라는 관념은 전혀 없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식사를 하면서 주인 부부는 나에게 조심스럽게 한두가지 주문을 했다. 그 여주인은 나에게 한가지 사항만을 요구했다. 즉, 저녁을 먹고 들어올 때에는 반드시 사전에 전화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기 명함을 주었다. 그녀는 미국 하원의 행정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나는 그 요구사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지켰다. 그들이 나를 위해서 신경써서 요리를 하는데 내가 사전 통보도 없이 다른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면 기분이 나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해리는 자기는 아무 주문도 하지 않겠다면서도 “당신이 성인이니까 알아서 잘 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왠지 그 말이 더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해리의 요구사항은 철저하게 지키지 못한 것 같다. 밤 11시에 주인 부부가 다 잠들었을 만한 시간에 집에 들어간 적도 많고, 마지막날 밤에는 거의 새벽 1시가 다 돼서 들어갔기 때문이다.


해리는 그러나 마음씨가 좋은 사람이었다. 한 번은 내가 차에 열쇠를 꽂아두고 차 문을 잠궜다고 말하니까, 다음날 아침 내가 일어나기 전에 벌써 자동차 서비스에 연락해서 차 열쇠를 빼놓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가 놀라는 모습을 보고 웃는 것이었다.


내 방은 2층에 있었다. 현관문을 열고 집안에 들어가면 오른쪽에 부엌이 있고 맞은 편은 커다란 거실이었다. 그리고, 왼쪽의 좁은 층계를 따라 올라가면 침실 3개와 목욕탕 하나가 있었다. 내 방은 원래 집주인의 딸이 쓰던 방이었다.


딸의 사진을 계속 그 방에 걸어놓고 있었는데, 상당한 미인이었다. 내가 당신딸이 미인이라고 말해주자 해리는 무표정하게 그저 “고맙다”고만 말했다. 보니는 “내 딸은 지금 결혼해서 다른 주에서 살고 있다”면서 미소를 지었다. 해리는 딸 얘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였다. 왜 그랬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추측컨대, 사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만 14세인 아들이 하나 있었는데 고등학생이었다. 나는 처음에 그가 손자인줄 잘못 알고 “당신 손자냐”고 물었다가 해리의 얼굴이 약간 붉어지는 것을 봐야했다. 그는 겸연쩍게 웃으면서 “내 친구들이 나를 만나면 ‘손자’ 잘 있으냐고 놀린다”고 말했다. 그 아들은 며칠 뒤에 잠시 그 집에 다니러 온 자기 사촌과 함께 다른 주에 있는 친척집으로 여행을 떠났다.


둘째날 저녁을 함께 먹을 때 해리는 갑자기 “앞으로 저녁식사를 할 때에는 주제를 한가지씩 정해서 대화를 나누자”고 제의했다. 나의 영어 연습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해리의 아들과 그 사촌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것이 그들에게 부담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는 “그러면, 저 아이들 밥 먹다가 소화에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러나, 그 말을 해놓고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해리는 나의 입장을 생각해서 그렇게까지 배려한 것인데, 내가 한마디로 그것도 농담처럼 거절을 해버린 것이다. 잠시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뎌야 했다. 그것이 하숙집에서 주인한테 한 유일한 실수였다.


그 집에서 잠을 자던 첫날은 정말 다시 한국으로 돌아갔으면 하고 간절하게 바랬다. 빈 방에 혼자 누워 있으려니 갑자기 기분이 이상해졌기 때문이다. 차라리 한국에서 처자식과 함께 지내는 것이 일 년동안 미국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나은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 때가 향수병의 정점이었다. 그래서, 아내에게 보고싶다는 긴 편지를 써야했다.


그 방은 약 2, 3평 정도 넓이의 작은 방이고 침대와 옷장, 라디오 1대, 그리고 거울이 있었다. 옷장 옆에 붙어있는 거울은 아래 위로 길쭉한 타원형이었는데, 테두리가 온통 소라껍질로 장식이 돼 있어서 여자가 쓰던 거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장대 옆의 침대는 침대로도 쓸 수 있고, ‘ㅗ’자 처럼 생긴 큰 등받이를 3개 받쳐 놓으면 소파로도 쓸 수 있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가져보는 나만의 작은 공간이었다. 방에 누워 있으려니, 앞으로 미국에서 일 년동안 살 일이 아득했다. 도대체 내가 뭘 하러 이곳까지 와 있을까하고 몇 번이나 되물었다. 정말 이럴 필요까지 있었는가. 미국을 알고 미국에서 공부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한 일인가.


다음날, 매틀즈 부부는 친절하게도 나를 차에 태워서 버스타는 곳을 가리켜 주고, 지하철 역인 ‘펜타곤’까지 가서 지하철 타는 법도 가르쳐 주었다. 펜타곤은 미국 국방성의 다른 별명인데, 비밀이 많을 국방성 지하에 지하철 역을 만들어놓고,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도록 한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세계 최대의 오피스 빌딩인 국방성에 근무하는 많은 사람들의 출퇴근 편의를 위해 그곳에 지하철 역을 만든 것이 아닌가하고 추측만 할 뿐이었다.


하숙집에서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ELS 학원까지 가는데는 약 45분이 걸렸다. 그런데, 그 버스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약 1시간마다 다니고 심지어 어느 시간대에는 2시간 간격으로 다녔기 때문에 휴일에 워싱턴 시내로 나가는 것이 무척이나 불편했다. 워싱턴과 교외를 연결하는 대중교통은 한국에 비교하면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버스 요금은 1달러45센트나 되는데도 운전사도 불친절할 뿐만 아니라, 거스름돈도 주지 않아서 항상 잔돈을 준비해서 다녀야 했다. 한 번은 거스름돈을 줄 것으로 생각하고 운전사에게 5달러를 주었으나, 그는 “거스름돈은 원래 운전사가 주는 것이 아니고, 승객이 잔돈을 준비해서 타야한다”고 말할 뿐이었다. 할 수 없이 5달러를 그냥 요금통에 넣고 말았다. 그러자 내 뒤에서 버스에 올라탄 한 흑인은 운전기사에서 웃으며 "나는 돈 안내도 되지 않나?"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역시 흑인인 운전기사는 인상을 찌푸렸고, 그 승객은 돈을 내야했다. 나는 속으로 분통이 터졌다. 휴일이었기 때문에 다음 버스를 타려면 1시간을 더 기다려야 했고, 잔돈을 바꿀 방법도 없어서 그냥 그 버스를 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버스는 펜타곤 즉, 미국 국방성역까지 운행되고 있었다. 세계최대의 오피스빌딩이라는 국방성 건물 지하에는 지하철 역이 있고, 민간인들이 별로 귀챦은 검색을 받지 않고 국방성 지하의 지하철역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지하철은 워싱턴 시내의 어느 곳이던 갈 수 있도록 연결이 돼 있었다.


버스의 배차시간 간격이 너무나 길었던 탓에 빨리 운전면허를 따고, 차를 사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 버스나 택시등 대중교통이 이처럼 엉망으로 돼 있는 것은 약간 의외였다. 차가 없으면 거의 발이 묶이도록 돼 있는 사회였다. 이같은 대중교통 제도는 합리적인 사회라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경험한 불합리한 제도였다.


미국에 비하면 한국의 대중교통수단은 거의 완벽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지하철, 버스, 택시등으로 무장이 돼 있어서, 굳이 차를 갖고 다니지 않아도 생활하는데 그리 큰 불편을 느끼지는 않는다. 한국은 오히려 차를 갖고 다니면 더 불편하게 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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