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도착

(1996년8월)

by 비마


S언론재단의 전문기자 연수생들은 모두 10명이었다. 목적지는 뉴욕주 북서쪽에 있는 씨라큐즈(Syracuse)라는 작은 도시였으나, 영어공부와 미국문화 체험을 위해 우선 워싱턴 근교에서 두 달간 각자 미국인 가정에서 민박을 하면서 시내 중심가에 있는 영어학원에 다니도록 계획이 짜여져 있었다. 영어학원은 ELS라는 곳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연수의 모든 과정을 책임지고 진행하는는 미국의 IIE (국제교육기관)라는 사설단체에서 마련한 것이었다.


함께 출국한 사람들은 중앙일보의 두 K차장을 비롯해, 조선일보의 K기자, 문화일보의 M기자, 세계일보의 K기자, 한겨레신문의 C기자, SBS의 K기자, MBC의 S기자와 KBS의 K PD등이었다.


모두들 각자의 계획을 갖고 있었다. 일년동안 골프만 치겠다는 사람들도 있었고, 영어를 완벽하게 익혀서 돌아오겠다는 사람, 모처럼 가족들에게 봉사를 할 기회를 얻었으니 가족과 여행을 많이 다니겠다는 사람등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가족과 함께 비행기를 탔고, 어떤 사람들은 혼자 먼저 가서 자리를 잡은 다음에 가족을 불러올 작정이었다. 가족없이 미국에서 혼자 생활할 사람은 나 혼자였다. 아내가 몸이 안좋은 데다 회사에 다니고 있어서 결국은 혼자서 1년을 생활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1996년 6월26일 오후2시쯤 연수생 일행은 워싱턴의 덜레스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IIE에서 페이지 볼드윈이라는 여자가 나와 있었고, 그녀의 안내로 우리는 일단 워싱턴 시내의 카알라일 (Carlyle Suite)이라는 작은 호텔에 짐을 풀었다. 볼드윈이라는 여자는 30대 초반의 호리호리한 몸매를 가진 미인이었는데, 얄미울 정도로 사무적이었는데도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쾌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우리가 3일동안 호텔에서 지내야 하며, 그 뒤에 미국인 가정에 하숙 (homestay)을 들어가게 된다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는 3일 동안의 일정표를 나눠주었다. 그 일정표에는 워싱턴 시내 관광, 국무부 방문, ELS 방문 등의 계획이 적혀있었다. 제법 신경써서 만든 일정이었다.


그러나, 자유시간이 많았으므로, 그 시간에 워싱턴 특파원 사무실에도 들러보고 아는 사람들도 찾아볼 작정이었다. 그래서 우선 특파원들에게 도착 보고를 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워싱턴 지국에 전화를 했으나, 자동응답기가 대답을 했다. 연합통신에서는 워싱턴에 두 명의 특파원을 두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 시내의 아메리칸 대학과 근교의 메릴랜드대학에 각각 1명씩을 보내 공부를 시키고 있었다. 그러니, 워싱턴에는 아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었던 셈이다.


저녁 5시쯤이 되자 졸리기 시작했다. 한국과의 시차가 13시간이었으니, 한국시간으로는 아침 6시였다. 14시간의 비행에서 쌓인 피로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정말 그렇게 달콤하게 자본 적은 드물 것이다. 그러나, 그 잠은 얼마 못가서 깰 수 밖에 없었다. 특파원 선배가 사무실에서 자동응답기를 듣고, 7시쯤 호텔로 전화를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 순간적으로 이상한 경험을 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렵지만 굳이 말하자면 강한 위기감이라고나 할까. 그런 느낌이 온 것은 의외였고, 나중에 생각해보면 신기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경험해본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방안의 풍경이 낯설었고, 이곳이 어딘지 또 내가 왜 이곳에 있는지 깨닫는 순간, 견디기 어려운 스트레스가 밀려온 것이다. 기대에 부풀어 미국연수를 온 첫날 이런 심리상태를 경험한 것이 별로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해왔고, 생소한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도 크게 느껴졌다.


아내와 아이들, 부모님등 나의 세계가 송두리째 없어져 버리고, 누구와도 끈이 없는 하나의 개체로만 존재하게 된 것이다. 처음 와 보는 곳에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개체로서 홀로 선다는 것은 역시 대단한 스트레스임에 틀림없다.


그것은 거의 일주일 동안 계속된 향수병의 시작이었다.


워싱턴 지국장인 J부장은 자기 집에서 저녁을 먹자고 했고, 30분쯤 뒤에 호텔로 와서 나를 데리고 갔다. J부장 집은 워싱턴 시내에서 가까운 메릴랜드 주에 있었다. 워싱턴 시내에는 주거지가 별로 없고, 있다해도 흑인들이 많이 사는 빈민가가 대부분이다. J부장이 사는 집은 백인들 중에서도 소득수준이 높은 층이 사는 동네였다. 넓은 앞 길에 차도 많이 다니지 않았고, 주위에 소음을 내는 빌딩도 없었다. 앞마당에 푸른 잔디가 곱게 덮여 있었고, 뒷문쪽 베란다에는 고기를 굽는 큰 버너도 놓여있었다.


한 눈에 여유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동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J부장 집에는 이미 S특파원, 그리고 연수생인 K씨와 J씨 가족 등이 와 있었다. 기술부에서 온 J는 돌아갈 날을 불과 두 달 남겨놓고 골프를 시작했지만, 이미 상당한 수준이라고 했고, 사회부에서 온 K는 1년 동안에 아메리칸 대학에서 석사학위 코스를 끝내고 조만간 학위를 받을 예정이라고 했다. 하긴, 미국은 넓은 땅에 골프장도 많고 골프채도 그리 비싸지 않았기 때문에 미국에 온 한국사람들은 대부분 골프를 치고 싶을 것이다.


K는 골프 대신에 공부만 했다고 하면서 “미국에 연수와서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나밖에 없을 것”이라고 은근히 자화자찬을 했으나, S특파원은 “미국에 와서 공부만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S특파원도 역시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 그도 골프에 대해 별로 좋지 않은 선입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저녁식사 자리에서는 여러 가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워싱턴 주변, 즉 메릴랜드 주와 버지니아 주에는 한국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한국인들이 경영하는 큰 수퍼마켓들도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음식점들도 여기 저기 많이 있다는 것이었다. 또 흑인들이 사는 아파트에 거주하는 J는 흑인지역이라 처음에는 위험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일년 가까이 살아본 결과, 상당히 안전한 지역이라고 말했다. 또 흑인 이웃들이 정도 많고, 쉽게 친해질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가장 귀담아 들었던 말은 두가지. 담배를 사는데도 차를 타고 5분 정도 가야할 정도로 생활반경이 넓다는 것과, 지도와 차만 가지면 어디든 찾아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나중에 차차 알게 되지만, 미국은 복잡한 대도시가 아니면 대부분 주거지역과 상가가 멀리 떨어져 있고 동네에 구멍가게 같은 것은 없다. 지역이 워낙 넓기 때문에 자동차는 생활필수품이었다. 자동차가 없으면 한 발도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차를 갖고 있기 때문에 대중교통수단은 별 의미가 없었다.


또 지역별로 지도가 워낙 잘 만들어져 있었기 때문에, 주소만 있으면 어디든 찾아가는 것이 아주 쉬웠다. 따라서 지도도 자동차와 함께 생활필수품이었다.


다음날은 연수생들이 단체로 워싱턴 시내를 돌아다녔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였으나, 그리 인상적인 도시는 아니었다. 부유한 사람들은 대부분 워싱턴 시 북쪽의 메릴랜드 주나 남쪽의 버지니아주에 살면서 워싱턴 시내로 출퇴근을 했다.


워싱턴 시내의 상주인구는 58만8천명이나, 워싱턴 근교에서 시내로 출퇴근하는 인구를 합하면 모두 2백만 정도이다. 메릴랜드주 남쪽과 버니지아주 북쪽 등을 합한 워싱턴 주변 (Metropolitan Area)의 전체 인구는 3백만이다.


워싱턴은 그리 인상적인 도시라고는 볼 수 없었다. 백악관을 비롯해, 국회의사당, 연방정부 건물등이 있긴 했지만, 시내에 자랑할만한 곳이라고는 스미소니언 박물관과 포토맥 강 밖에 없을 것 같았다. 거리는 깨끗해 보였으나, 역사가 짧은 탓인지 고풍스런 멋을 지닌 유럽스타일의 건축물은 별로 없었다. 또 낮에는 집없는 사람들 (homeless)이 어슬렁거리면서 동양인들에게 한 두 달러를 구걸하고 있었고 밤에는 혼자서 돌아다니기가 위험할 만큼 범죄율도 높다고 했다.


물론, 워싱턴은 미국 정치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차분히 이곳저곳을 보아두면 재미가 있을 것도 같았으나, 운전면허 취득이나 자동차 구입등 자질구레한 일들에 신경이 집중되다 보니, 그 유명한 도시를 차근차근 살펴볼 여유는 없었던 것 같다. 사실, 미국을 알기에 워싱턴보다 좋은 곳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92년에 올림픽 취재차 갔던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나, 파리, 모스크바등 유럽의 도시들처럼 매력있는 도시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다음날, 볼드윈은 한국의 기자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미국 국무부의 한국담당 부국장인 리챠드 크리스챤슨 (Richard Christenson)이라는 사람을 만나도록 주선을 했다.


국무부를 들어가는 데는 대단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다. 우선 공항의 검색기와 비슷한 쇠붙이 감지기를 통과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누구를 찾아왔는지 용건을 말하고, 여권을 맡겨야했다. 그리고도 한 20분 정도 로비에서 기다린 뒤에야 안내하는 사람을 따라 2층의 빈 회의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역시 미국의 대외정책을 전담하는 기관답게 철저한 보안검색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크리스챤슨은 국무부의 한국정책을 입안하는 실무자였는데, 평화봉사단의 일원으로 한국에서 생활했었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21세때 목포의 중고등학교에서 영어교사 생활을 했고, 한국여자와 결혼해서 살고 있다고 했다. 그는 주한 미국대사관에도 두 번이나 근무했었고, 북한에도 몇번 가본 사람이어서 한반도 문제에는 나름대로 일가견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영어를 전혀 쓰지 않고 비교적 유창한 한국말로 우리와 의사소통을 했다. 그것이 그가 미국의 입장에서 한국문제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덜 의식하게 만들었다. 즉, 생각했던 것보다 거부감이 덜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의 말을 경청함으로써 자신의 한국관련 정책 입안에 참고하려는 노력을 보여줄 만큼 사려가 깊었다. 그러나, 그런 태도의 이면에는 미국이 강대국으로서 남북한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오만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특히 한국민들의 반미감정이 어느 정도인지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보였다. 신문이나 방송보도로만은 알 수 없는 전반적인 한국의 분위기, 한국인들만이 알 수 있는 그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그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인 듯 싶었다.


내가 한국의 대미감정은 5.18때 미국정부가 전두환을 지지했다는 보도가 나간 뒤로 많이 악화돼 있다고 지적하자, 그는 “미국정부는 한국민이 자존심이 세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고 “그래도 한미관계는 잘 풀려나갈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 자리에서는 비자문제, 주한미군의 지위에 관한 SOFA (한미행정협정) 개정문제, 무역문제등 여러 가지 문제가 거론됐다. 그는 특히 자신이 7월12일에 주한 미국대사관에 부공사로 다시 부임해서 SOFA 개정문제를 매듭지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기자들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자신은 말을 많이 하지 않고 될 수 있는대로 기자들로부터 얘기를 들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것은 좋은 전략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그를 만나고 나왔을 때, 기사에 쓸만한 얘기를 별로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를 만난 뒷맛은 별로 개운치 않다. 크리스챤슨 자신은 한국에 대해 상당히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국말을 그렇게 잘하는 사람이 또 한국을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한국관련 정책을 입안하고 있다는 것이 왠지 미국을 더욱 경계하도록 만들었다. 강대국이란 역시 인재를 많이 보유하고 있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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