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잔뜩 찌푸려있는 하늘이 의심스러워 집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번 날씨를 확인했었다. 우려와 달리 오후 늦게서야 비소식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불과 10분 남짓한 사이 일기예보가 날 배신할 줄이야. 그래도 혹시나 해서 비닐 우의를 배낭에 챙겨 넣은 게 이리도 든든할 줄 몰랐다. 조금만 일찍 비가 왔어도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테지만 이미 버스를 한번 타고 내려 환승할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일회용이지만 제법 쓸만한 비옷도 있겠다 빗속에 그 길을 혼자 걸으면 오히려 더 멋질 거란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 근처 제법 큰 가로수 밑으로 뛰어 들어간다. 간만에 우산 없이 맞아보는 소나기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 대공원을 찾고 있다.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그곳 숲 깊숙이 자리 잡은 한 고찰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함이 표면적인 명분이다. 그러나 그건 핑계일 뿐 사실 사찰로 향하는 울창한 숲 길을 걷기 위해 매 번 집을 나선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절은 그저 숲 길을 열심히 걸은 대가로 주어진 보너스이자 그 길의 근사한 반환점 역할을 해준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이후 중독성 강한 마약처럼 숲은 나를 매번 다시 불러들이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숲을 품고 있는 도심 속 공원은 쉼터와 산림욕장, 등산로등이 잘 정비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덕분에 나 같은 겁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혼자 맘껏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숲에 도착하면 일단 두 팔을 벌려 상쾌한 그 내음을 양껏 들이마시고 대신 내 속의 묵은 찌꺼기들을 뱉어낸다.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내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며 한참을 걷다 살짝 지겨워지면 휴대폰 속 저장된 음악을 듣는다. 숲에서 들으면 모든 노래가 왜 그리 다 명곡처럼 들리는지 때때로 가슴이 찌릿해지기도 한다.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심심할 틈은 없다. 매번 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는 숲의 모습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하나씩 발견해 가며 글이 될만한 풍경은 사진에 담는다. 그동안 꽉 차버린 마음의 방들도 다음 맞이할 손님들을 위해 깨끗이 정리해 비워나간다. 집 밖만 나오면 수시로 허기가 지는 내 위장을 위해 잔뜩 챙겨 들고 간 간식과 커피도 사이사이 열심히 먹어줘야 한다.
호젓한 숲길을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걷다 보면 어느새 절에 이르게 된다. 주머니 속 지폐를 한 장 꺼내 부처님께 바치며 사이비 신자이지만 소원을 빌어본다. 평일 조용한 법당에서 부처님과 가까이 마주한 그 시간은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정을 가져다준다. 짧은 불공을 마치고 절을 나와 되돌아오는 길, 제일 기다려지는 순서가 하나 남아 있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대충 만든 것이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맛있는 도시락이 날 기다리고 있다. 처음엔 도시락통을 꺼내 혼자 먹는 게 좀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테이블 하나를 오롯이 차지한 채 여유롭게 혼밥을 즐긴다. 그렇게 3시간가량의 소풍을 끝마친 후 한결 평온해진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2주가 지나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어 온몸이 쑤시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른 비 옷을 꺼내 몸에 걸친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숲은 일 년 중 가장 그 향이 진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비를 최대한 빨아들인 흙이 풍겨내는 초여름날의 숲 내음은 세상 어느 것보다 사람맘을 설레게 만든다. 코를 연신 벌렁거리며 내 안에 그것들을 잔뜩 채워 넣는다. 머릿속에 행복이란 단어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떠오른다. 비옷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참 듣기 좋다. 토닥토닥 내리는 비가 마치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간 애썼다 위로를 건네주는 듯하다.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진다 싶더니 급기야 멈춰버린다. 맘먹고 우중 산책을 실컷 즐기려는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운동화가 더 이상 젖진 않아 법당에 들어갈 때 양말까지 벗어야 하는 일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무엇보다 출출하던 참이라 뭐든 먹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빗속에 우산도 없이 뭘 들고 먹는다는 건 다소 보기 민망할 것 같아 참았었다. 뿌연 안갯속 살짝 가리어진 고요한 숲을 홀로 거닐며 커피와 빵을 먹는 지금, 행복이란 단어가 또다시 내게 빼꼼 고개를 내민다.
뱃속에 무언가가 좀 들어가니 오히려 더 많이 넣어달라 아우성이다. 도시락을 꺼내 먹던 테이블과 의자도 어차피 젖어 앉지도 못할 테니 내친김에 걸으며 점심을 먹기로 한다. 오늘의 메뉴는 주먹밥이다. 비닐 랩에다 야무지게 싸왔기에 들고 다니며 먹기에 딱이다. 준비한 두 개를 다 먹고 보온병의 따뜻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기분 좋은 포만감에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이 기분,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기 위해 일부러 아껴가며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2시간 가까이 한 번도 쉬지 않고 걷고 있지만 오늘따라 이 길이 너무 짧게만 여겨진다.
아쉽지만 어느새 반환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쯤 젖은 운동화를 벗고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올린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천천히 부처님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본다. 엉터리 신도라 뉘신지 알 수 없는 두 분의 보살님을 양 옆에 두고 가운데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다. 세 분 모두 쌍둥이마냥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가늘게 뜬 실 눈과 통통한 볼살, 자그마한 입술로 살짝 머금은 미소는 보기에 따라 날 비웃는 듯도, 꾸짖는 듯도 때론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도 하다. 모든 게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제껏 한 번도 세 분이 동시에 날 보고 웃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모두 날 보고 웃음을 꾹 참는 듯한 개구진 얼굴들이시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풍경 소리, 은은한 숲냄새,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세 분의 미소와 나의 행복한 웃음만이 아무도 없는 이 고요한 법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쉬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더니 평소보단 살짝 피곤하긴 하다. 하지만 몸과 달리 마음은 오히려 생생하다. 이 비가 숲뿐 아니라 내게도 생명력을 더 해준 듯하다. 오늘 받은 이 기운으로 앞으로 2주는 씩씩하게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운이 점점 희미 해질 때쯤 난 다시 도시락을 싸고 커피를 내려 이곳을 찾을 테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다음 소풍을 위해 조금 튼튼한 비옷을 하나 장만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