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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니 Jun 07. 2023

비 내리는 숲에서 행복을 만나다

이런,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잔뜩 찌푸려있는 하늘이 의심스러워 집을 나서기 직전 다시 한번 날씨를 확인했었다. 우려와 달리 오후 늦게서야 비소식이 있어 다행이다 싶었는데 불과 10분 남짓한 사이 일기예보가 날 배신할 줄이야. 그래도 혹시나 해서 비닐 우의를 배낭에 챙겨 넣은 게 이리도 든든할 줄 몰랐다. 조금만 일찍 비가 왔어도 그냥 집으로 돌아갔을 지만 이미 버스를 한번 타고 내려 환승할 다음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일회용이지만 제법 쓸만한 비옷도 있겠다 빗속에 그 길을 혼자 걸으면 오히려 더 멋질 거란 다소 낭만적인 생각이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게 한다. 가방에서 모자를 꺼내 눌러쓰고 근처 제법 큰 가로수 밑으로 뛰어 들어간다. 간만에 우산 없이 맞아보는 소나기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 대공원을 찾고 있다. 무신론자이긴 하지만 그곳 숲 깊숙이 자리 잡은 한 고찰에서 불공을 드리기 위함이 표면적인 명분이다. 그러나 그건 핑계일 뿐 사실 사찰로 향하는 울창한 숲 길을 걷기 위해 매 번 집을 나선다는 게 솔직한 내 심정이다. 절은 그저 숲 길을 열심히 은 대가로 주어진 보너스이자 그 길의 근사한 반환점 역할을 해준다. 처음 이곳을 알게 된 이후 중독성 강한 마약처럼 숲은 나를 매번 다시 불러들이게 만들고 있다.



아름다운 숲을 품고 있는 도심 속 공원은 쉼터와 산림욕장, 등산로등이 잘 정비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덕분에 나 같은 겁보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혼자 맘껏 숲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숲에 도착하면 일단 두 팔을 벌려 상쾌한 그 내음을 양껏 들이마시고 대신 내 속의 묵은 찌꺼기들을 뱉어낸다. 새소리, 바람 소리, 물소리, 내 발자국 소리에 집중하며 한참을 걷다 살짝 지겨워지면 휴대폰 속 저장된 음악을 듣는다. 숲에서 들으면 모든 노래가 왜 그리 다 명곡처럼 들리는지 때때로 가슴이 찌릿해지기도 한다. 그리 짧은 거리는 아니지만 심심할 틈은 없다. 매번 올 때마다 조금씩 달라져 있는 숲의 모습을 숨은 그림 찾기 하듯 하나씩 발견해 가며 글이 될만한 풍경은 사진에 담는다. 그동안 꽉 차버린 마음의 방들도 다음 맞이할 손님들을 위해 깨끗이 정리해 비워나간다. 집 밖만 나오면 수시로 허기가 지는 내 위장을 위해 잔뜩 챙겨 들고 간 간식과 커피도 사이사이 열심히 먹어줘야 한다.



호젓한 숲길을 이런저런 상념에 젖어 걷다 보면 어느새 절에 이르게 된다. 주머니 속 지폐를 한 장 꺼내 부처님께 바치며 사이비 신자이지만 소원을 빌어본다. 평일 조용한 법당에서 부처님과 가까이 마주한 그 시간은 내게 말로 다 할 수 없는 평정을 가져다준다. 짧은 불공을 마치고 절을 나와 되돌아오는 길, 제일 기다려지는 순서가 하나 남아 있다. 집에 있는 재료들로 대충 만든 것이지만 내겐 그 무엇보다 맛있는 도시락이 날 기다리고 있다. 처음엔 도시락통을 꺼내 혼자 먹는 게 좀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테이블 하나를 오롯이 차지한 채 여유롭게 혼밥을 즐긴다. 그렇게 3시간가량의 소풍을 끝마친 후 한결 평온해진 마음으로 버스에 오른다. 그리고 2주가 지나면 다시 그곳에 가고 싶어 온몸이 쑤시기 시작한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얼른 비 옷을 꺼내 몸에 걸친다. 공원 입구에 들어서니 벌써부터 냄새가 장난이 아니다. 습기를 잔뜩 머금은 숲은 일 년 중 가장 그 향이 진할 시기에 접어들었다. 비를 최대한 빨아들인 흙이 풍겨내는 초여름날의 숲 내음은 세상 어느 것보다 사람맘을 설레게 만든다. 코를 연신 벌렁거리며 내 안에 그것들을 잔뜩 채워 넣는다. 머릿속에 행복이란 단어가 일초의 망설임도 없이 떠오른다. 비옷 위로 떨어지는 빗소리가 참 듣기 좋다. 토닥토닥 내리는 비가 마치 내 어깨를 두드리며 그간 애썼다 위로를 건네주는 듯하다.   





빗줄기가 서서히 가늘어진다 싶더니 급기야 멈춰버린다. 맘먹고 우중 산책을 실컷 즐기려는데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운동화가 더 이상 젖진 않아 법당에 들어갈 때 양말까지 벗어야 하는 일은 피할 수 있어 다행이다. 무엇보다 출출하던 참이라 뭐든 먹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빗속에 우산도 없이 뭘 들고 먹는다는 건 다소 보기 민망할 것 같아 참았었다. 뿌연 안갯속 살짝 가리어진 고요한 숲을 홀로 거닐며 커피와 빵을 먹는 지금, 행복이란 단어가 또다시 내게 빼꼼 고개를 내민다.



뱃속에 무언가가 좀 들어가니 오히려 더 많이 넣어달라 아우성이다. 도시락을 꺼내 먹던 테이블과 의자도 어차피 젖어 앉지도 못할 테니 내친김에 걸으며 점심을 먹기로 한다. 오늘의 메뉴는 주먹밥이다. 비닐 랩에다 야무지게 싸왔기에 들고 다니며 먹기에 딱이다. 준비한 두 개를 다 먹고 보온병의 따뜻한 커피까지 마시고 나니 기분 좋은 포만감에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이 기분, 이 행복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느끼기 위해 일부러 아껴가며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2시간 가까이 한 번도 쉬지 않고 걷고 있지만 오늘따라 이 길이 너무 짧게만 여겨진다.





아쉽지만 어느새 반환점이 보이기 시작한다. 반쯤 젖은 운동화를 벗고 법당으로 들어가 절을 올린다. 그리고 그대로 자리에 앉아 천천히 부처님이 앉아 있는 쪽을 바라본다. 엉터리 신도라 뉘신지 알 수 없는 두 분의 보살님을 양 옆에 두고 가운데 부처님이 자리하고 있다. 세 분 모두 쌍둥이마냥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가늘게 뜬 실 눈과 통통한 볼살, 자그마한 입술로 살짝 머금은 미소는 보기에 따라 날 비웃는 듯도, 꾸짖는 듯도 때론 흐뭇하게 바라보는 듯도 하다. 모든 게 다 내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이제껏 한 번도 세 분이 동시에 날 보고 웃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모두 날 보고 웃음을 꾹 참는 듯한 개구진 얼굴들이시다. 그 모습에 나 역시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다.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 풍경 소리, 은은한 숲냄새,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세 분의 미소와 나의 행복한 웃음만이 아무도 없는 이 고요한 법당 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산을 내려오는 길, 쉬지 않고 계속 걷기만 했더니 평소보단 살짝 피곤하긴 하다. 하지만 몸과 달리 마음은 오히려 생생하다. 이 비가 숲뿐 아니라 내게도 생명력을 더 해준 듯하다. 오늘 받은 이 기운으로 앞으로 2주는 씩씩하게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그 기운이 점점 희미 해질 때쯤 난 다시 도시락을 싸고 커피를 내려 이곳을 찾을 테다. 이제 곧 장마가 시작될 텐데 다음 소풍을 위해 조금 튼튼한 비옷을 하나 장만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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