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 때는 나도 걔가 첫 애다 보니 학원 보내지 않는 교육방식에 있어 이것저것 우왕좌왕하는 일이 많았었다. 또래 엄마랑 친한 사람도 많이 없었다. 더욱이 학원을 보내지 않는 집은 눈을 씻고 찾아보려야 찾아볼 수가 없어 나의 엄마표 공부 방식에 대해 누군가의 조언이나 도움을 얻는 쪽은 아예 일찍 감치 접었다. 내가 뭘 알아본다고 해도 부족한 정보력과 인맥, 경제력 등의 문제로 솔직히 그냥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였다. 결국 아이 수준에 맞지 않는 교재나 인강의 선택으로 지름길을 놔두고 빙 돌아가는 일이 허다했다. 하지만 둘째 때는 첫애 때 몸소 겪은 소중한 경험과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나름 노하우라는 것을 갖게 되었다. 교재는 뭘 보면 좋은 지 인강은 어떤 쌤이 우리 애랑 잘 맞는지 등등 큰애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큰애가 고3 때는 학교에서 대부분의 과목이 교과서 대신 ebs 교재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지금은 조금 낮아졌다지만 아무래도 ebs연계 비중이 높으니깐 그런 것 같았다. 내신 시험까지 범위가 ebs 교재로 주어지는 것도 있으니 이래저래 고3들에겐 제2의 교과서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몇 번씩 다시 문제를 풀어야 해서 나하고 남편이 지우개로 여러 번 전에 푼 것을 지워주곤 했다. 특히 국어 독서 영역이나 영어 독해 영역은 빈 여백에 지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거나 줄 치고 표시하는 게 많아 한번만 풀어도 책이 많이 지저분해졌다. 아무리 깨끗이 지운다 해도 연필 흔적이 남아있어서 큰애가 혹시 전에 쓴 답을 눈 빠지게 쳐다보고 찾아낸 후 제대로 안 풀고 그대로 체크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5개의 선지 모두에 똑같이 정답 표시를 해놓은 후 다시 지우는 방식이었다. 그래서 2번째로 문제집을 풀 때는 너저분한 상태로 공부해야 했지만 큰애는 별 말이 없었다. 고3 때는 교재값이 많이 들어 똑같은 걸 2개 사기가 좀 그랬다. 큰애와 같이 공부하다 느낀 건데 영어나 국어 같은 경우는 ebs 교재가 다른 교재보다 가격도 저렴할 뿐 아니라 문제들도 좋은 것 같아 지금 딸애랑 공부할 때도 사용하고 있다.
딸애 방학이 시작되고 학기 중보다 좀 더 많은 시간을 공부에 할애하다 보니 봄부터 보던 국어문제집이 어느새 다 풀려가고 있었다. 새 교재가 필요한데 생각했던 것은 모두 절판이 된 상태였다. 혹시나 해서 중고서적을 찾아보니 책 상태에 따라 다양하게 가격이 책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완전히 새것은 없고 모두 사용한 흔적이 있는 것들이어서 딸애가 사용하기에 좀 찝찝한 감도 있었다. 게다가 배송비까지 따로 들어 선뜻 내키지가 않았다. 찾을 수만 있음 중고라도 새책으로 구입하는 게 나은 것 같았다. 그래서 나보다는 더 온라인 쇼핑에 능숙한 남편에게 다른 온라인 서점 중고샵에서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잠시 후 남편이 중고 새책을 찾았다고 나를 불렸다. 그것도 6권에 만천 원... 내가 한 군데 서점에서 검색해봤을 때는 그렇게 싼 것도 없을뿐더러 다 사용 흔적이 조금씩 남아 있어서 의아해했다. 남편은 온라인 서점이 아니라 당근에서 찾아봤단다. 6과목이나 필요 없고 국어 문학과 독서 영역만 필요해서 남편이 보여주는 휴대폰 속 사진을 보니 정말 올해 발행된 새 책이었다.
"완전히 새책이라고 하더라고. 다 구매하면 만천 원이고 낱개 구매하면 한 권에 3천 원. 집에서 자전거 타고 후딱 갔다 오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이건 내가 찾던 교재가 아닌데. 그리고 사회영역 이런 건 다 필요도 없고"
저렴한 가격에 새 책을 찾아 아쉽기는 했지만 남편은 좀 더 찾아보기로 했다.
6권이면 4만 원도 넘게 들었을 건데 하나도 풀지 않은 새 책을 그렇게 싸게 파는 것이 놀라웠다. 책 주인도 지금 고3 학생 같은데 어떻게 그렇게 문제 하나 풀지 않고 1학기를 보냈는지... 분명히 교재 풀어오는 것도 학교에서 과제나 수행평가로 주어 졌을 건데 어떻게 다 무시할 수가 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부모들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거니 군소리 않고 사줬을 텐데. 게다가 이젠 2학기용 교재를 또 사줘야 한다. 더 놀라운 건 지금 서점에서 팔고 있는 2022학년도 수능 연계 교재들이 하나도 훼손 안된 완전 새것의 상태로 당근에 올라온 것들이 너무 많다는 거다. 1학기가 끝났으니 더 이상은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2학기 땐 다른 교재로 학교에서 수업을 한다지만 연계 교재들이기에 수능 치는 날까지 풀고 또 풀어야 하는 교재들이다. 요즘 고3에게 있어선 이게 당연한 현상인지 내가 충격받은 게 더 이상한 일인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자취 생활을 하고 있는 큰애가 보고 싶어 졌다. 난 항상 큰애가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당근에 올라와 있는 그 많은 새 교재들과 여러 번 풀고 지워 너저분했던 큰 애 책을 비교해보니 우리 아이만큼 순하고 착실한 애도 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드디어 원하던 교재를 찾았다. 3천 원으로 흥정하고 남편이 집 근처에서 책을 받아왔다. 남편 말이 한 아주머니가 공부 안 하는 자기 아들이 보던 책이라고 들고 왔단다. 문제를 하나도 안 풀었다고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책을 얼른 펼쳐보니 정말 손 하나 되지 않은 새책의 상태였다. 책 앞부분에 학교에서 내어준 프린트물 여러 장들이 긴 시간 동안 꽂혀 있었다. 교재를 보고 빈칸을 채우는 과제인 것 같았는데 초등학생 같은 글씨체로 채우다 만 프린트 물을 보니 진짜 공부하기 싫었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래도 이 교재가 부모에 의해 당근에 올려진 걸 보면 이 집 아들은 부모랑 사이가 괜찮은 거 같다. 그러니 책 다 봐서 학교에서 버리고 왔다는 둥의 거짓말 없이 책을 처분해라고 부모에게 넘겼겠지. 게다가 부모 역시 쿨하게 그런 아들의 모습을 인정하고 당근에다 책을 올린 거고. 솔직히 고3 때 아이 성적이 안 좋아지면 부모와 자녀 사이가 나빠지기 쉽다. 나 역시 속으로 몇 번을 다짐했는지 모른다. 만약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오더라도 아이와 사이 틀어지는 일은 절대 만들지 말자고. 하지만 지독스럽게 공부 안 하는 고3 자녀를 지켜봐야 하는 그리고 하나도 풀지 않은 교재들을 당근에 내놓는 부모의 씁쓸한 심정을 나중에 요놈들이 나이 들어서라도 알기나 할까?
큰애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서 2, 3학년만 코로나 백신 우선접종을 하는데 접종받겠다고 신청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일단 잘했다고 대답하고는 왜 너희들은 학교에서 접종을 해주냐고 물었더니 자기도 잘은 모르지만 아마 2학기 때부터 초등학교에 실습을 나가야 해서인 거 같단다. 교대에 재수 없이 한방에 합격해줘 안 그래도 고마운데 덕분에 백신까지 우선 접종받을 수 있다니 정말 흐뭇했다. 잠시 후 큰애에게 당근에서 교재 구매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너 공부 안 한다고 계속 생각했는데 당근에 올라온 교재들 보니 그래도 나름 공부 열심히 한 거더만"
무슨 소릴 하려고 그러는가 내 얘기 열심히 듣던 큰애는 엄마가 자기의 노고를 알아줘서 기뻤는지 한 톤 올라간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열심히 공부했다니깐..."
둘이서 한참을 웃으며 떠들며 얘기했다.
"근데 국어 수능점수는 왜 그렇게 나왔을까?"
큰애가 수능에서 역대급 최악의 국어성적을 받은 것이 생각나 무심결에 나온 말이다. 여기서 큰애가 잠시 조용해진다. 난 급하게 공부 열심히 해줘서 고맙다는 말로 통화를 마무리하며 고3 을 열심히 보내준 아이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