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트 한마당 (1)
예전에 내가 금융관련 잡지(은행계, 새행원) 등에 썼던 글을 발표하고서 복사를 하고 그것을 스크랩해 두었는데 세월이 지나가니 복사잉크가 날아가서 글씨가 흐릿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그냥 두면 영원히 사라질 것 같아 내 소중한 지난날의 ‘꾸민 이야기 솜씨’를 계속 간직하고 싶어 밴쿠버에서 발간되는 주간지 ‘투데이즈머니(구 U-레이디)’ 에 재생해 보았다. 이를 다시 ‘브런치’에 올린다. 배경이 1980년대 초, 중반이므로 현재 상황과 일부 불일치하는 점이 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필자 주]
K은행 R지점 계산 계 행원 강성규는 밤 10시 30분이 넘어서야 일일 계산을 마감할 수 있었다. 더듬거리는 주산실력에다 오늘따라 유난히 각 계에서 잘못 작성한 차·대변전표가 몇 건이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일이 각 전표를 대조하고 난 후에 비로소 그는 그 날 거래의 총 대차변금액을 일치시킬 수 있었다.
사무실이 있는 을지로에서 하숙집이 있는 안양까지 가기는 좀 늦은 시각이었다. 몸도 피곤하고, 어차피 12시나 넘어 하숙집 문을 두드리기가 미안해서 그는 아예 숙직실에서 자야겠구나 생각했다.
세상에서 제일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등을 기대 젖히고 그는 버릇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흘이나 세탁하지 못해 냄새가 나는 양말을 신은 두발을 책상 위에 올렸다. 역시 버릇처럼 상념에 빠져 들었다. 못해 먹겠군. 대학 철학과 출신이 주판알과 무슨 인연이람. 담당교수 말대로 학교에서 조교로나 남을 것을---.
K은행에 입행한 지도 벌써 6개월을 넘겼다. 삶의 존재와 허무를 논하고, 그저 돈 벌레처럼 돈만 따지는 사람들을 비웃던 학창시절이 그리웠다. 은행원이라니.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어 보이는 샤일록의 후예, 상종 못할 이기주의자들. 가난한 철학과 학생에게 비춰진 은행원의 모습은 그랬다. 그러나 군에서 제대하고 4학년에 복학하였을 때 그는 삶의 존재와 허무만을 논할 수 없었다. 그의 앞에는 빵을 얻기 위해 가야 할 장소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가난한 소작농인 부모님께 더 이상 부담을 드릴 수 없었다.
그러나 대학까지 나온 중견행원을 주판이나 놓게 하는 계산 계에 배치한 상사의 처사에 분통이 터졌다. 주판을 한번도 다뤄본 적 없다고 하니 상사인 차장이 누군 처음부터 주판을 튕기면서 태어났느냐며 눈을 부라렸다. 까짓 남도 하는 데 나라고 못할 소냐 하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 탈이었다.
따르르릉---
그때였다. 정적을 깨고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인근 Q지점에서 온 당직점검 릴레이전화이거니 했다. 그는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안녕하세요? 이젠 제법 봄이죠?”
가늘고 여린 여자 음성이었다. 이런 밑도 끝도 없이. 그러면서도 그는 응답했다.
“3월이니까요. 누구시죠?”
“이름 모를 소녀예요”
누구야. 이 여자. 보통예금 계 미스 N같기도 하고 서무계 노처녀 G같기도 하고.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간혹 숙직을 하다 보면 늦은 밤에 다방 여종업원들이나 술집여자들이 아무 전화번호나 돌리면서 장난전화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장난에 응해줄 기분이 아니었다.
“이봐요. 이름 모를 소녀인지 아가씨인지. 실수한 듯 한데. 전화 잘 못 걸었어.”
상대가 그렇고 그런 여자려니 해서 그는 숫제 반말이었다.
“사람이 인간이 아닌 이상 실수할 수도 있겠죠. 전화 받는 아저씨는 그런 실수한 적 없으세요?”
“사람이 인간? 신이 아닌 --- 이겠지.”
“미안해요. 말이 빠져서 이가 헛 나왔나 봐요. 용서해 주시려면 해 주시고, 말려면 마세요. 밑져야 본전이니까요.”
“참 맹랑한 아가씨네. 못 당하겠어.”
그렇게 토닥토닥 둘은 한 시간여나 장난끼 섞인 대화를 이어갔다. 상대방은 가끔 숨을 몰아 쉬었다. 숨이 가쁜 모양이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응수를 했다. 꽤 재미있는 여자라고 생각했다.
무엇 하는 여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녀는 아무 번호나 돌려 장난질하는 그런 여자였다. 숙직을 자주하는 용역직원에 의하면 일단 이름을 가르쳐 주면 밤이나 낮이나 전화질을 하는 데 그게 지겨워 전근 갔다느니 퇴직했다느니 둘러대면 지점장이나 차장에게 전화를 하는 판에 혼이 난 행원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했다.
그런 말만 들을 때는 또라이 같은 여자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3개월 가까이 그녀와 통화했다. 생각보다 아는 것이 많은 듯했다.
“사랑도 오래되면 변하나 봐요.”
“왜?”
“10년 동안 연애해서 결혼한 선배언니가 있었는데요.”
“그래서?”
“애 둘 낳고 남자가 바람을 피우기 시작했다나 봐요. 그 때문에 한바탕 싸우던 언니는 어느 날 화가 나서 남편의 구두를 화장실 변기통에 집어넣었대요. 우습잖아요?”
“구두가 뭔 죄래?”
“그 구두를 신고 딴 여자에게 간다고 미워서 그랬다나 요.”
“웃겨.”
“연애를 할 때 상상해본 결혼생활은 초콜릿처럼 달콤했겠죠?”
“그럴지도 모르지.”
“순간이란 영원을 향한 연속이지만, 상태의 연속은 아닌가 봐요.”
“무슨 말이야. 쉽게 말해. 쉬이입게---“
“이를 테면 환의의 순간에서 계속되는 것은 순간이라는 짧은 시간뿐이지 환희라는 상태의 연속이 아니라는 말이에요.”
“어렵다아—뭔 말인지. 너 철학 책 읽니?”
“그러니까 아저씨도 순간의 괴로움을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지 마시고 열심히 사시라는 거예요. 대학에서 철학 전공하셨다면서요? 아저씨는 은행원이면서도 돈 세고 주판 놓으시는 게 부끄럽고 자신이 속물 스럽다고 생각하시지만 아저씨가 공부하신 철학은 책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주판알 속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가름대 위는 만들어질 때부터 다섯의 값을 가지고 가름대 아래는 각각 하나의 값을 가지지만 아무 불편도 하지 않고 열심히 숫자를 계산하잖아요. 다른 이의 가치가 나보다 높다고 불평만 하지 마시고 그냥 순간순간을 열심히 사시라는 거죠. 아셨죠?”
“어이. 이름 모를 소녀야. 너 누구냐?”
“하나의 값을 가진 주판알이요. 그래도 열심히 살아요. 순간순간을 보석처럼 귀하게 생각하면서.”
“도대체 몇 살이나 되었길래 선생님 같은 이야기를 해?”
“열일곱이에요. 영원히 열 일곱일 거구요.”
‘니 맘대로 영원히 열일곱이냐? 그래. 마음은 그렇겠지. 아무 번호나 돌려 장난전화하며 재미있어 하는 열일곱. 그게 재미있어? 장난전화.”
“장난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알리고 싶었어요. 그것이 슬픈 순간이든, 기쁜 순간이든.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바빴어요. 저더러 철이 없다느니 미쳤다느니 하며 제 애기 들어주지 않았어요.”
그녀는 별안간 끼적끼적 울기 시작했다. 강성규는 더럭 겁이 났다. 3개월 동안이나 통화했는데 여전히 그는 그녀의 성도 이름도, 심지어는 전화번호도 모르고 있었다. 항상 그녀가 일방적으로 전화해 올 뿐이었다. 그것도 늦은 밤시간에. 강성규는 이제 그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싫증이 나기도 하고 더 이상 할 얘기도 별로 없는 편인데 요즘은 부쩍 그녀가 울기를 잘하고 신경질적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뭐 이 아가씨 애인이라도 되나. 투정을 받아주게. 그는 낮에는 전화교환원에게 밤에는 숙직원에게 신신당부했다. 전화가 오면 그녀에게 직장을 그만두었다고 말해 달라고.
한 달이 지났다. 그사이 전화가 두어 번 오다가 말았다. 그는 차츰 그녀를 잊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점건물내의 지하다방 잘 아는 종업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떤 여자가 그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누구 같아요?”
“모르겠네요. 50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던데. 이름 모를 소녀 때문에 왔다고 하면 아신다던 데요?”
의아하기도 하고 호기심도 생겨 후다닥 지하실로 내려갔다. 깨끗하게 늙어가는 듯한 초로의 부인이 그를 맞았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누구신지요?”
“이름 모를 소녀가 내 딸이라오. 선천성 심장판막증으로 병원에 오래 입원해 있었는데 한달 전 수술을 하고나서 는 그만---열 일곱 밖에 안되었는데---저 세상으로 갔어요. 늘 찾아주는 친구도 없는 싸늘한 병원침대에서 외롭게 지내던 그 애가 성규씨 덕택으로 재미있고 행복했던 순간들을 가지게 되어 고마웠다고 꼭 전해달라고 해서---“
말을 잇지 못하는 소녀의 어머니를 보며, 강성규는 졸렬하고 못난 자신에 대한 치솟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