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1974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 ' 마치 하나의 잠언 같은 이 제목은 영화 안에서 남자 주인공 '알리'의 입을 통해 발화된다. 그는 모로코 이민자이고 이 말은 그의 연인 에미를 위로해 준다.(이 둘은 방금 사랑에 빠졌고 하룻밤을 같이 보냈다.) 하지만 이 제목은 이민자인 '알리'가 서툴게 독일어로 번역한 말로 문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제목은 그 자체로 두 주인공이 놓인 기존 질서에 맞지 않은, 상식적으로 틀린 상황을 대변하며 동시에 의미심장하지만 서툰 항변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는 여 주인공 에미가 비를 피해 낯선 바(bar) 안으로 들어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마치 아주 낯선 곳에 와 있는 듯 눈치를 살피고 그곳의 분위기는 그녀의 등장으로 잠시 멈춘 듯하다. 이때 그녀에게 다가가 춤을 청하는 인물이 '알리'이다.
이 장면은 둘의 역전된 관계를 보여준다. 사실 낯선 곳(나라)에 와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은 에미가 아니라 알리이다. 허나 아랍인들의 쉼터처럼 보이는 이 바(bar) 안에서 그녀는 마치 이방인처럼 무언의 놀림감이 되고 따가운 눈총을 받는다. 이렇듯 이 영화는 첫 장면에서 누구나 이방인이 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이 영화는 더글라스 서크가 1955년에 만든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원작은 1950년대 미국을 배경으로 모든 게 풍요로웠던 시대 각기 다른 신분의 남녀가 만나 갈등을 빚는 사랑 이야기이다. 중상층 백인 유부녀와 흑인 정원사를 이 영화는 노년의 여성 청소부와 20년 연하의 이주민 흑인 남성으로 바꾸었다. 시대는 히틀러의 잔재가 남아있던 2차 대전 이후이다. (에미의 입을 빌어 히틀러가 언급된다.)
영화 속 공간은 어쩐지 인공적이고 카메라는 멀리 떨어져 공간 안 인물을 프레임 안에 가두거나 소외시킨다.
눈에 띄는 원색의 소품들과 함께 프레임 안에 위치한 인물은 마치 하나의 정물처럼 보인다. 색감은 화려하고 구도는 특이하여 한껏 예술적인 취향을 드러내지만 정작 화면 속 인물들의 정서는 쉬이 와닿지 않는다. 그래서 관객은 두 주인공에 감정이입되기보다는 객관적인 관찰자로 남게 된다.
이야기는 단순하지만 독특한 미장센과 과잉된 형식을 이용한 것은 더글라스 서크와 닮았지만 동시에 무척 다르다. 더글라스 서크가 스타일의 과장됨과 형식의 인공미를 통해 이야기의 환상성을 드러내고 현실감을 높였다면 파스빈더는 반대로 과잉된 형식미를 통해 관객과 등장인물 간의 동일시를 철저히 막고 배우들을 정물처럼 위치시키고 이미지의 정지를 통해 개개인이 아닌 집단의 날 선 시선을 보여준다.
각 개인은 다양한 말을 하며 혐오의 말을 던지지만 차별적 시선은 동일한 화면구도와 정지된 이미지를 통해 집단적인 에너지를 갖는다. 마치 공포영화 속 이미지처럼 시선의 폭력은 날카롭고 그 시선을 드러내는 감독의 의도는 신랄하게 느껴진다.
이 영화는 1막과 2막으로 구성되어 정확히 두 주인공이 슈타인 호수로 여행을 다녀오기 전과 후로 나뉜다. 여행을 다녀온 후 어쩐 일인지 주변인들의 태도는 한결 부드러워져 있다. 아들 브루노 또한 자신이 부순 티브이값을 편지와 함께 보내고 직접 찾아와 사과한다. 이웃들 또한 에미에게 이것저것 부탁을 하며 노골적인 차별의 시선을 거두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것은 본인들의 실속을 차리기 위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관계의 균열은 오히려 둘의 내부에서 시작된다. 알리는 아랍 전통음식인 쿠스쿠스를 찾지만 에미는 '독일에서는 그런 건 안 먹어요.... 난 쿠스쿠스가 싫어요.'라고 말한다. 알리는 쿠스쿠스를 먹기 위해 바(bar) 여주인을 찾아가고 여주인은 익숙한 듯 그를 맞이한다.
다소 갑작스러운 상황변화. 둘 관계의 위기는 사실 예견된 것이지만 감독은 결정적인 균열의 시작이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음을 드러낸다. 사실 '쿠스쿠스'는 단지 하나의 변명에 불가한 것이다. 사랑은 신뢰의 문제이지만 또한 이해의 영역이기도 하다. 차별과 무시는 친절한 무지에서 오기도 하는 것이다. 에미는 알리를 정말 사랑하지만 모로코에 대해 모르며 그의 문화와 관습에 무지하다. 이것은 그를 동료들에게 자랑하는 장면에서 알 수 있다.
또한 이어지는 폭력성은 에미가 직장동료들과 계단에서 대화하는 장면에서도 드러난다. 자신과 같은 혹은 자신보다 못난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며 그녀는 다시 동료들의 편에 서게 된다.
이 영화의 엔딩은 앞서 언급한 더글라스 서크의 <천국이 허락한 모든 것>과 닮았지만 그 정서는 무척 다르다. <천국이...>은 파자마 차림으로 무력하게 누워있는 론과 그를 간호하는 캐리의 모습을 통해 남성주의적 시선을 유지한 채 사회적 터부를 해피엔딩으로 봉합한 것으로 읽힌다. 하지만 <불안은...> 은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과 함께 알리가 외국인 노동자라는 차가운 현실을 다시금 깨닫게 만든다
그런데 이 커플을 관찰하는 우리는 왜 끝내 불안감을 떨쳐내지 못하는가? 그것은 우리가 애써 피하려고 한 질문 때문일 것이다. '당신은 그럼 저들과 무엇이 다른가? 그저 침묵하는 방관자일 뿐 아닌가?' 하는 질문 말이다.
침묵은 기존질서를 유지시키는데 일조한다. 이제 위 영화 속 이웃 같은 노골적인 차별의 시선은 많이 사라졌지만 에미 같은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더욱 많아졌으니 우리는 스스로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
이 영화가 이 시대에도 여전히 힘이 센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감독은 이 영화에 출연도 하였는데 바로 개차반 사위 '유겐'이 그이다.
그리고 이 영화 남주인공과는 연인사이였다.
(알리 역을 한 배우는 끝이 좋지 못하였다 한다.)
뭐랄까 괴팍하고 폭력적인 성격에 불꽃같이 예술혼을 불사르다 살다 간 것을 보면 김수영 시인이 떠오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