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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특별한 밤을 위해 치얼스!

사이드웨이 Sideways

by 달빛바람

8월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9월의 한낮은 여전히 숨 막히게 뜨겁지만, 해가 저물면 공기는 달라진다. 피부 위로 스치는 바람은 서늘하고 낮 동안 쌓였던 열기는 천천히 풀려나간다. 여름밤은 그렇게 낮의 고단함을 덮어주며 우리를 조금은 나른하고 조금은 느슨한 시간 속으로 초대한다.

이런 여름밤에 나는 종종 와인을 떠올린다. 꼭 고급 와인이 아니더라도 좋다. 편의점에서 사 온 싸구려 와인도 소중한 사람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이다. 중요한 건 그 순간의 반짝임이다. 여름밤은 평범한 술잔조차 은밀한 빛을 띠게 한다. 누군가와 마주 앉아 건네는 잔의 부딪힘은 단순한 음주가 아니라 그 순간을 특별하게 만드는 의식이다. 오늘을 아끼지 않고 마음을 꺼내는 행위, 그것이야말로 가장 값진 보물이다.

영화 사이드웨이의 주인공 마일스는 ‘1961년 산 샤토 슈발 블랑’이라는 귀한 와인을 집안 한 구석에 아껴둔다. 결혼 10주년, 아주 특별한 날을 위해 남겨둔 보물이었다. 그러나 그 와인은 끝내 열리지 못한 채 쓸쓸히 남는다. 삶은 언제나 우리가 정해둔 특별한 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엇갈리며, 미처 준비되지 않은 채 끝나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마일스의 와인은 결국 햄버거 가게에서 홀로 비밀스럽게 열리며 그토록 아끼던 가치는 허무하게 사라지고 만다. 우리도 종종 그런 보물을 간직한다. 책장에 꽂아둔 다이어리 한 권, ‘언젠가 써야지’ 하며 미뤄둔 편지지, 특별한 날에만 꺼내려고 아껴둔 향수나 셔츠 한 벌. 하지만 삶은 늘 특별한 날보다 사소한 순간으로 채워진다. 특별한 날은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올지 몰라도 사소한 순간들은 매일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렇다면 진정 특별한 건 무엇일까? 정작 특별한 순간은 따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특별하게 대할 용기를 내는 바로 그때 생겨나는 것이다.

여름밤은 그 용기를 내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더 이상 기다릴 필요가 없다. 땀과 피로가 엉겨 붙은 하루를 지나온 당신이 지금 잔을 든다면 그 순간은 이미 특별하다. 친구와의 허물없는 웃음, 연인과의 침묵 속 눈빛, 가족과 나누는 사소한 이야기. 거창한 축하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오늘 하루 잘 버텼다!”라는 단순한 위로도 충분하다. 그 순간의 건배는 비밀스러운 축복처럼 우리 삶을 환하게 밝힌다.

사실 건배란, 단순히 술잔을 부딪히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나는 지금 당신과 이 순간을 함께한다.’는 다짐이다. 내 옆의 사람을 향해 잔을 들어 올리는 행위에는 나눔의 용기가 담겨 있다. 침묵과 고독으로 가득한 현대의 일상에서 서로의 잔을 마주친다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인간이고, 여전히 누군가를 필요로 하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 무엇보다 소중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기록하는 방식이다.


영화 속 주인공 마일스가 ‘특별한 순간에 마시고 싶었다’고 말했을 때, 마야는 담담히 대답한다.

그 와인을 따는 순간이 특별한 순간이에요.

짧은 이 한마디는 와인을 넘어 삶 전체를 비추는 통찰처럼 다가온다. 우리는 종종 눈앞의 순간을 과소평가한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마음을 감추고, 더 화려한 날, 더 빛나는 순간에 쓰겠다며 아껴둔다. 그러나 그 순간은 오지 않거나 너무 늦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며 수많은 마음을 미룬다. 고백, 감사, 혹은 “괜찮다”는 짧은 위로조차 내일로 미룬다. 하지만 내일은 결코 보장되지 않는다. 그렇게 미뤄둔 말들은 굳어버린 채 잊히거나 때를 놓친 후회의 그림자로 남는다. 아껴둔 보물이 제때 꺼내지지 못한 채 빛을 잃어가는 것처럼. 그래서 여름밤의 ‘치얼스’는 우리에게 필요한 작은 용기이다. 오늘의 웃음을 아끼지 말고, 지금의 기쁨을 숨기지 말라는 신호이다. 소소한 행복을 특별하게 만드는 건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꺼내는 우리의 마음이다. 건배는 상대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잔을 들어 올리며 이렇게 말하는 셈이다. “이 순간, 우리는 충분히 특별하다.”

한 병의 와인이 오래 묵혀진다고 해서 반드시 더 값져지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때 열리지 못하면 가장 빛나는 순간을 놓칠 뿐이다. 여름밤의 치얼스는 바로 그 ‘제때의 열림’을 상징한다. 여름은 짧고, 청춘은 덧없으며, 사랑은 불확실하다. 하지만 그 불확실함 속에서 우리는 잔을 부딪히며 그 순간을 붙잡는다. 그 순간이 모여 우리의 인생을 만든다.

이제 가을의 문턱에 서 있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무엇을 아껴두고 있는가? 언젠가 꺼내려했던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 혹시 아직도 타이밍을 기다리며 그 귀한 마음을 숨겨두고 있지는 않은가? 그렇다면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다. 여름밤의 공기는 당신의 망설임을 덮어주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는 당신의 마음을 열어줄 것이다.

이 영화의 교훈은 이것일 것이다. 눈앞의 소중함을 잡는 용기, 그리고 솔직하게 숨겨둔 마음 한 조각을 내보이는 과감성. 인생의 길은 그렇게 용기 있게 뻗은 한 걸음으로 다른 풍경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니 이제는 미루지 말자. 여름밤의 시원한 바람 아래, 당신의 소중한 사람과 잔을 들어 올려라. 건배의 순간은 삶의 불완전함을 잠시 잊게 하고 사소한 오늘을 빛나는 보물로 바꾼다. 아무리 비싸고 귀한 와인이라도 열지 않으면 단지 병 속에 갇힌 액체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꺼내든 마음 한 조각은 세상에서 가장 값진 빛이 된다.


이 여름, 당신의 특별한 밤을 위해 치얼스!


짧은 소회
-거창한 목표를 품고 시작한 모임은 아니었다. 단지 글을 나누고, 가볍게 이야기를 섞자는 마음으로 작은 채팅방을 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소박한 공간은 곧 서로의 마음이 머무는 작은 정원처럼 변해갔다. 누군가는 누군가의 글에 하트를 눌러주고, 또 다른 이는 따뜻한 한 줄의 댓글로 하루를 밝히곤 했다. 그렇게 겹겹이 쌓인 공감과 온기가 어느 순간 하나의 프로젝트가 되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뜨겁고 숨 막히던 여름날조차 함께하니 훨씬 견딜 만했다. 지쳐 쓰러질 것 같은 순간에도 누군가의 진심 어린 격려 한마디, 예상치 못한 칭찬 한 줄이 펜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그 작고 소중한 마음들이야말로 우리가 여기 모인 이유일 것이다.

이제 우리만의 작은 결실이 세상 어딘가의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닿기를, 그들의 하루에 아주 작은 바람 한 줄기라도 되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 바라며, 우리는 이번 여름의 계절을 마무리한다. 한때의 기록이자 또 다른 시작을 품은 여름의 글들, 그 뜨거움과 서늘한 여운을 남긴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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