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Once
가을은 늘 사람을 뒤돌아보게 한다. 밤바람이 서늘해지고 길 위의 그림자가 조금 더 길어질 무렵이면, 나는 문득 한 편의 영화가 아닌 하나의 멜로디를 떠올린다. 존 카니 감독의 영화 〈원스〉. 낡은 기타 한 대, 고장 난 청소기, 그리고 그 사이에서 우연히 만난 두 사람. 그들의 사랑은 소유가 아닌 스침으로 남는다. 함께 걷던 시간이 짧았음에도 여운은 길고 노래는 단조로우나 진심은 깊다. 그것은 화려한 사랑의 서사가 아니라 어쩌면 우리가 매일 흘려보내는 일상 속 가장 조용하고 진실한 대화처럼 다가온다.
영화 속 남자와 여자는 가진 것이 거의 없다. 한 사람은 멈춰버린 꿈을 낡은 기타로 버텨내고 다른 한 사람은 생계를 위해 꽃을 팔며 음악에 대한 불씨를 놓지 않는다. 그들은 서로를 통해 노래를 만들고, 그 노래를 통해 잠시나마 삶의 방향을 되찾는다. 이 영화는 사랑이 꼭 이어져야만 빛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불씨 하나를 남긴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찬란한 노래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다.
한때, 나도 그런 노래의 한 구절 속에 살았던 적이 있다. 가진 것이 없다는 이유로 아직 든든한 직장을 얻지 못했다는 핑계로 사랑을 놓쳤다고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비겁했고 유치했을 뿐이다. 끝없는 자기 비하와 무의미한 자존심으로 그녀를 밀어냈다.
넌 정말 이기적이야. 내가 부끄럽니?
내가 집 앞에서 그녀에게 던졌던 그 말은 지금도 내 귓가를 떠돌고 있다. 그녀가 떠난 뒤, 내 좁은 원룸엔 그녀의 스타킹과 슬리퍼가 나의 구겨진 자존심처럼 남아 있었다.
그녀는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았다. 나는 그때 그것조차 기만이라 믿었다. 사랑의 끝에서도 누군가의 다정함을 의심하던 못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적막이 찾아왔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헤어짐의 순간까지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던 그녀의 품위를. 마지막까지 예의를 다했던 마음의 무게를. 내 비겁함이 그 마음을 덮고 있었음을. 그 깨달음은 늦었고 그래서 더 깊었다.
그 시절 나는 사랑을 증명하려고 애쓰기만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조건으로 감싸며 경제력과 사회적 안정으로 포장했다. 마치 사랑이란 삶의 성취에 따라 주어지는 보상이라도 되는 양. 하지만 사랑은 그런 논리로 증명되지 않는다. 〈원스〉의 노래들이 내게 알려준 건 그것이었다. 사랑은 정확한 음정과 박자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그 틈새의 떨림과 망설임, 그리고 숨결로 완성된다는 것.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은 지금 돌이켜보면 하나의 짧은 노래 같다. 전주도, 후렴도 엉성했지만 그 안에는 뜨거운 진심이 있었다. 나는 그 멜로디를 잊지 못한다. 그것은 여전히 내 일상의 배경음처럼 흐른다. 세탁기를 돌릴 때의 리듬, 카페 창가에 스며드는 햇살의 박자, 그리고 우연히 흘러나오는 영화 속 노래 〈Falling Slowly〉의 여운처럼.
영화 속 두 사람은 함께 앨범을 녹음하며 음악적 교감을 나누지만 결국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 결말이 전하는 건 단순한 쓸쓸함이 아니다. 그들은 함께 공유하고 교류한 순간을 통해 이미 서로의 삶을 변화시켰고 그 변화는 이별 이후에도 이어진다. 음악이 끝나도 멜로디는 남듯 사랑도 그렇게 잔향을 남긴다.
가을바람이 불면 사람들은 저마다의 노래를 품는다. 누군가는 이별의 노래를, 누군가는 아직 오지 않은 사랑의 노래를. 그러나 중요한 건 그 멜로디가 끝났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이다. 노래는 여운으로 남고 여운은 또 다른 시작을 부른다.
사랑은 결국, 나를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다. 그것이 비록 이별로 끝나더라도, 한때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면 이미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건 완벽해지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품은 채로도 타인을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일이다.
이제야 나는 알 것 같다. 사랑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며 끝이 아니라 변주이다. 그녀와 나의 이야기가 마침표로 끝났더라도 그 안에서 나는 여전히 배우고 있다. 삶은 언제나 다시 연주되는 노래처럼 다른 계절의 멜로디로 이어진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용히 생각한다. 이 노래가 끝나면
나는 이전과는 다른 멜로디로 나의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할 수 있으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