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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닥복닥한 명절 되세요.”

by 마른틈

“마른틈씨는 명절에 어디, 본가 가?”

“하하 네, 가야죠”


혼자일 때는 이랬고,


“마른틈씨는 시댁이 어디야?”

“부산이요~”

“어휴 장거리 이동 힘들겠네, 이번에 가지?”

“네~ 다녀와야죠”


결혼하고서는 이랬다.


다 거짓말이다.



가족과 친지들과 함께한 명절이 언제냐고 묻는다면 아주 거슬러 올라가 20년은 더 전으로 기억을 더듬어야 한다. 그때 나의 엄마는 여전히 생과 사를 오가는 고통 속에 살았지만, 그럼에도 남편과 그 가족에게 도리를 다하려 애쓰는 순종적이고 헌신적인 아내이자 며느리였다.

아빠는 손이 귀한 집안에서 예쁨을 독차지하던 막내아들이었고, 집안의 하나뿐인 아들에게 쏠리던 시어머니의 무한한 애정은 불현듯 그를 빼앗아 간 며느리를 향한 화가 되어 돌아오곤 했다. 그 시대라면 으레 있던 일이었다. 그러니 명절마다 아픈 몸을 쥐어짜 내내 불려 다니며 머슴처럼 일하던 엄마는 그 기간이 끝나면 특히 더 오래 앓아누웠다. 하여 그 꼴로는 친정조차 갈 수 없는 거라 애석한 마음을 이고 덤덤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친가는 정읍에 있었다. 지금이라고 그 모습이 딱히 도시답진 않겠으나, 그 당시에는 정말 시골 중의 시골이 따로 없었다. 내비게이션은커녕 고속도로조차 지금처럼 반듯하고 예쁘게 다듬어져 있지 않던 시절. 조수석에 앉은 엄마가 전도를 펼쳐 인간 내비게이터가 되어 아빠의 운전을 도왔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어렸던 나는 특히나 멀미에 취약해 삼십 분도 채 되기 전에 기절해버리곤 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멀미에는 면역이 없는지라 조금 길어지는 운전 길이라면 어김없이 멀미약을 단단히 챙겨야 한다. 체감상 일고여덟 시간의 꽉 막힌 귀성길 끝에 고단히 잠들었다 깨어나면, 몽롱한 정신에도 까무룩 저물어가는 해가 저 너머 들녘에 간신히 걸려있는 꼴이 퍽 아름답게 느껴지곤 했다.

선선한 가을바람을 타고 소의 배설물 냄새가 들이닥치면 무방비하고 천진하던 얼굴이 왈칵 일그러져서는, 엄지와 검지손가락으로 코를 움켜쥐곤 갖은 엄살을 다 떠는 것이랴. “마른틈이, 까까 먹고 잡냐잉ㅡ”하는 소리에 볼이 발긋해진 내가 할머니의 커다란 손을 꼭 잡고 읍내로 나가려면 덩그러니 놓인 정류장을 향해 이십 분을 걸어야 했다. 매일 딱 한 대뿐인 그 마을버스는 한 시간에 한 번씩 정류장을 두드리며 순행했다.


할머니 집은 사극에서나 볼 법한 초가집이었다. 기다란 기역자 모양의 볏짚 지붕이 이어져 있었고, 짝문이 세 개, 외짝문이 하나 있었다. 문살에는 창호지를 발라 간신히 바람만을 막았으며, 그마저도 고리 하나로 걸어 잠그는 허술하기 짝이 없는 형태였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이들이 장난으로도 훌쩍 넘어 다닐 만큼 물색없는 사립문 하나가 전부였다. 어차피 법 없이도 살던 시절, 순박한 시골 마을의 노부부라면 그땐 다 그렇게 살았을 테다.

다만 밤마다 마렵던 소피를 내내 참아내다 도저히 못 버티겠을 즈음이면, 나는 새벽까지 일하던 엄마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먹여야 했던 것이다. 할머니 집에서 오십 보쯤 걸어 나가야 닿는 뒷간은 어린 여자애 혼자 나서기엔 너무 멀고도 무서운 곳이었다.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 코를 찌르는 소똥 냄새와 정체 모를 짐승의 울음소리가 머리털을 쭈뼛 서게 했다. 게다가 불 하나 켜지지 않는 푸세식 화장실은 자칫 발이라도 헛디디면 그 깊은 구멍에 빠져 똥독에 올라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떨게 했다. 고단했을 어미의 마음도 모른 채 철없을 아이의 마음은 그랬다.


그렇게 볼일을 보고 난 뒤 엄마 손을 붙잡고 돌아오면, 진녹색의 담요 위에서 빨갛고 파란 화투패를 들고 신이 나 떠드는 어른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그 틈에 섞여 즐겁게 웃던 아빠와 그들에게 마실 것과 과일, 마른안주 따위의 입가심거리를 끊임없이 내오는 엄마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쩐지 호기심이 동해 부뚜막으로 향하면, 엄마와 할머니는 앉을 틈도 없이 아궁이에 불을 때며 다가오는 아침을 준비하고 있었다. “내 새끼 왔냐”며 반겨주는 할머니와 눈이 마주쳐 속없이 웃으려면, “여기 왜 들어왔어, 얼른 나가. 너는 이런데 들어오지 마”라고 짐짓 엄하게 말하는 엄마에 멈칫하곤 했다.

그땐 고된 노동을 이어야 했던 그곳에 단 한순간이라도 딸자식을 들이고 싶지 않던 엄마의 마음을 몰랐다. 그래서 내내 모두에게 친절하고 순종적이던 엄마가 나에게만 단호하게 구는 것이 퍽 서운해, 방으로 돌아와 무거운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서러운 눈물 자국을 찍어내며 잠이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고 있다. 쾌쾌한 연탄 내와 함께 뽀얀 김을 내며 보글보글 끓던 소고기뭇국, 그리고 그것을 끓이기 위해 아궁이에 넣은 나무와 짚 따위의 땔감이 퍼석퍼석 가을 공기와 함께 타들어 가는 냄새. 뺨을 스치는 서늘한 새벽공기를 맞으며 졸린 눈을 비비던 기억. 그 모든 것들이 얼마쯤 아늑하고 그립게만 여겨지는 것은, 그리 단호하게도 부뚜막 출입을 막아섰던 엄마의 희생 덕분이라는 것을.

부모님이 이혼하고 나는 외가와 친가 어느 쪽에도 가지 않게 되었다. 정확히는 이혼하기 전, 그 사이가 냉랭하던 한두 해 전부터 그랬다. 아빠와는 연락이 끊기다시피 하여 살았으니 갈 이유가 없었으며, 엄마는 아픈 데다 이혼까지 한 본인의 불쌍한 처지를 친정에 알리고 싶지 않다며 그들과 연락을 스스로 끊어버렸다.

명절이 지나고 나면 학교에서는 언제나 뻔한 이야기들이 화두에 올랐다. 친척 어르신들께 얼마의 용돈을 받았는지, 무슨 전을 부쳤는지, 가족들과 함께 어디를 다녀왔는지 같은 것들. 허나 나의 명절은 상 조용하고 얼마쯤 심심했다. 적막이 감도는 어두운 집안에서 누워있는 엄마를 얼마간 바라보다가, 이내 컴퓨터 게임 따위나 하며 시간을 죽이는 것이 전부였다. 그래서 나는 늘 친구들의 대화에 낄 수 없었다.


그러나 물보다 진한 것이 피라 했던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나는 어찌어찌 단 한 번씩은 명절을 맞아 친가와 외가에 가게 되었다. 물론 그 두 번의 경험 모두 내가 겁도 없이 혼자 찾아간 일이었다.

아, 아빠는 없었다. 그리고 친할아버지는 왕래가 없던 기간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퍽 다정한 노부부라 여겼거늘, 그 마음속에 어떤 응어리가 맺혀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스스로 그 생을 마감하셨다고 했다.

홀로 남은 할머니를 모신 사당의 친가든, 그 지난한 마음에 스스로 연락을 끊었던 엄마의 친정이든, 어느 곳도 나에게 고향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나는 두 번의 경험을 통해 깨달았다. 그들은 나를 꽤나 반가워했으나, 딱 그만큼의 거리가 여전히 나를 손님으로 머물게 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바뀐다는데, 아무래도 그들 또한 내가 마냥 편할 수는 없는 거겠지. 이해한다.


그리하여 나는 다가오는 명절이면 의례적으로 들어오는 “명절에 어디 가?”라는 질문에 한때는 퍽 순수하고 솔직하게도 “아니요, 안 가요 사정이 있어서요”라고 대답했던 것이나, 이것이 ‘평범’ 하지 않다는 것을 자각한 이후로는 “네, 본가 다녀와야죠”라며 눈 하나 깜짝 않고 거짓말을 할 수 있게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엄마는 나를 내내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해 마지않는다. 그리하여 나는 그녀가 건네는 사죄를 모른 척 받아주고 싶다가도, 그 마음의 도량이 간장 종지만도 못한 것이라 때때로 참을 수 없게 화가 치밀지 않겠나. 해서 나는 여전히 싹수가 없고, 제멋대로인 딸이다.


결혼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명절에 이동하지 않는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에는 퍽 거리낌이 없으나, 그의 사정을 말하는 일은 그가 허락하였음에도 얼마쯤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분명한 것은, 그 또한 가족에게 가진 결핍과 상처가 존재하는 인간이라는 것이다. 다만 그는 나보다 훨씬 온건한 방식으로 그들과의 거리 두기를 선언하였던 것이니, 명절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빌어 내려가지 않는 것은 언제나 그의 몫이다. 나는 그 옆에서 “한번 가야 하는데… 오빠 회사가 요즘 너무 바쁘네요. 연말에 한 번 내려갈게요~”라며 거들면 그뿐이다.

물론 여전히 명절만 되면 치솟는 이혼율에, 그 속사정으로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고부갈등, 고된 명절 노동이 당연시되는 이 나라에서 남편이 공인하여 명절에 노는 며느리라니. 꽤나 달콤하고도 날로 먹는 입지가 아닐 수 없다. "이런 데 들어오지 마"라던 엄마의 말을 이렇게 듣게 될 줄은 나도 몰랐던거지.

허나 처음 시어머니를 마주하던 순간부터 나는 그녀에게 엄마보다 훨씬 가까운 심리적 거리감을 가지고 말았으니 자못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심지어 남편이 권유한 일정 거리 밖에서만 그 부모님을 마주해야 했던 나는, 어른을 대하는 것마저 서툴러서 꽤 오래도록 뚝딱이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살랑살랑 애교도 떨고 종종 안부를 챙겨 묻는 정도의 귀염은 떨 수 있게 된 것이다. 나는 희한하게 술을 마시면 어머님 생각이 불쑥불쑥 나곤 하는데, 문득 생각난 마음에 전화해 알랑방귀를 뀌고 있으니 그 모습을 보던 우리 집 하숙생이 난데없이 놀라 엄지를 척 치켜세우는 것이다.


하여간에 나의 생에 명절이란 것은 언제나 이렇게 조용하고, 심심하려는가 싶다. 한때는 그 마음이 사무치게 외롭기도 으나, 이제는 그마저도 덤덤히 받아들이고 살아가야겠지. 이 시기만 되면 그가 나의 엄마에게 무엇을 보낼 건지, 식사를 할 것인지 등의 여부를 조심스럽게 물어오지만 그 마음에 무거운 돌덩이만 들어찬 나는 그저 흐리게 웃을 뿐이다.


나는 비가 온다고 파전에 막걸리를 먹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유독 이쯤에는 전이 그렇게 먹고 싶다. 그래서 모임 약속이 있어도, 배달 음식을 시켜도 전을 주문한다. 전통시장에 가서도 평소에는 짚지도 않을 오색의 전들을 담아 온다. 그렇게 먹는 전들은 사실 별로 맛이 없다.


아무래도, 직접 부쳐 오순도순 다 함께 먹는 그 맛일 수는 없는 거겠지.


나는 특별히 동네방네 명절 인사를 챙기는 성실한 사람도 못되지만, 그래도 애정하는 이들에게 명절 인사를 건넬 때면 꼭 이 말을 덧붙인다.


그리하여 당신들에게도,


복닥복닥한 명절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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