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조성모와 츄파춥스

To Heaven

by 달빛바람

계절의 냄새처럼, 어떤 노래는 특정한 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둔다. 찬 바람이 코끝을 스치고, 하늘이 조금씩 어둑해지는 저녁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노래가 있다.
내게 그것은 조성모의 〈To Heaven〉이다.

전주 몇 소절만 흘러나와도 혹은 오래된 예능 재방송 속에서 그의 얼굴이 조명에 비칠 때면 나는 한순간에 중학교 2학년의 가을로 되돌아간다. 마른 낙엽이 구르는 골목길, 페인트가 벗겨진 철봉, 그리고 그곳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던 여대생 누나.

그녀의 청아한 목소리는 그날 교실에 가득했던 냉기,
이명처럼 울리던 정적, 그리고 내 뺨을 스치던 불꽃같은 통증과 겹쳐졌다. 내 기억 속에서 음악은 언제나 가장 투명한 환상과 가장 축축한 현실을 꿰매는 실이었다. 그해 가을은 유독 길고, 이상하리만큼 불안했다. 사춘기의 문턱에서 나는 자주 길을 잃었다. 친구들의 웃음소리조차 나를 향한 조롱처럼 들리던 날들이었다. 학교 복도에는 늘 싸늘한 모욕의 공기가 감돌았고, 그 공기 속에서 나는 점점 말수가 줄었다.

그날, 선생님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 뺨을 때렸다.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귀 끝을 때리던 ‘짝’ 하는 파열음,
순간적으로 얼어붙은 교실의 정적, 그리고 볼 안쪽까지 화끈하게 번지던 열기만이 남아 있다. 엎어진 자존심, 깨진 신뢰, 휘청거리던 세계 속에서 나는 천천히 말을 잃었다.
말 대신 입 안에 돌멩이 하나를 품은 듯 아무것도 삼킬 수 없었다. 그때 내가 택한 유일한 언어는 ‘침묵’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침묵의 어둠을 깨고 들어온 건 뜻밖에도 ‘소리’였다. 골목 끝의 놀이터에서 가끔 마주치던 옆 동네 여대생 누나. 늘 얇은 카디건 차림에, 귀에는 늘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릴 때면 그녀는 세상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아이들에겐 그저 스쳐 가는 풍경이었겠지만 내게 그녀는 어딘가 부서질 듯 위태로운 존재였다. 가을 햇살이 옅게 깔린 오후에도 그녀의 실루엣은 항상 조금 어두웠다. 누나가 즐겨 부르던 노래가 바로 조성모의 〈To Heaven〉이었다. 그 목소리를 처음 들은 날, 나는 철봉에 매달려 있다가 손에 힘이 풀렸다. 유리잔의 끝을 손끝으로 문지르듯, 가늘고 떨리던 음색. 그 소리는 선생님의 손바닥이 만들어낸 내면의 진공(眞空)에 조심스레 틈을 내는 바늘구멍 같았다. 그 미세한 틈으로 스며든 공기가 내 폐를 간질였다. 그날 처음으로, 나는 숨을 다시 쉬었다.

가장 선명하게 남은 장면은 여전히 그날 저녁이다.
수업이 끝난 뒤, 나는 견딜 수 없는 공허함에 이끌려 교문을 뛰쳐나왔다. 해는 이미 기울고, 놀이터엔 아무도 없었다.
쇠 그네에 앉아 발끝으로 모래를 긁으며 나는 천천히 내 숨소리를 들었다. 그때, 입에 사탕을 문 누나가 다가왔다.
추파춥스였다.


“너도 하나 먹을래?”


그녀가 포장지를 벗겨 내밀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 들고 차마 입에 넣지 못했다. 목구멍에 돌덩이가 걸린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누나는 내 표정을 읽은 듯 조용히 웃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붉게 타오르는 노을 아래,
기차가 철길을 스치며 내는 쇳소리,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로 포개지던 그녀의 노랫소리. 그 목소리는 내 안의 상처를 치유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잠시 재웠다. 쓴맛에 마비된 혀를 잠시 속여준, 단 3분의 달콤함. 그 짧은 위안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때 나는 두 세계의 경계에 서 있었다. 선생님의 손바닥이 남긴 현실의 뜨거움과 누나의 목소리가 뿜어내던 환상의 냉기 사이.
하나는 벗어날 수 없는 삶이었고 다른 하나는 잠시 그 삶을 견디게 하는 일시적 마취제였다. 나는 그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철봉 위에서 무게중심을 잃지 않으려 버텼다. 그때 배운 것은 세상에 대한 인내가 아니라,
무너짐의 기술이었다.

시간이 흘러 어른이 된 나는 여전히 노래에 기대어 살아간다. 회식 코스로 노래방에 들어가 첫 곡으로 〈To Heaven〉을 예약한다. 스크린 속 젊은 조성모가 “괜찮아”라고 속삭일 때면 그 가을의 놀이터, 그네의 삐걱거림, 사탕의 달콤함, 그리고 누나의 미소가 되살아난다.

술이 몇 잔 더 들어가면 친구들이 “야, 또 그 노래야? 분위기 쳐진다!”라며 야유를 보낸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그들의 웃음소리 뒤로 흘러나오는 내 목소리는
이상하리만큼 덤덤하고, 동시에 따뜻하다. 이제 이 노래는 모욕의 상징이 아니라 오래된 슬픔의 파편이 되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누나의 투명함과 교실의 모욕감이 공존하던 시절. 그것은 환상의 절박함과 현실의 무게가 한데 뒤엉켜 있던 시간이었다. 추파춥스의 인공적인 단맛이 혀끝에서 녹듯 위로의 시간은 언제나 짧았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는 아마 그 짧은 3분을 위해 기꺼이 다시 껍질을 벗기고 다시 노래를 예약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본래 쓴맛과 단맛이 번갈아 입안에 맴도는 노래이다. 진짜 어른이 된다는 건 그 두 맛이 섞여 버린 혼탁함을 견디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리모컨을 쥔 채 다음 곡의 전주를 기다린다. 그 짧은 달콤함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나는 여전히 노래와 추파춥스 사이의 경계에서 천천히, 그러나 분명히 살아간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달빛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