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님이 왜 나만 따라와?
바람결이 제법 차가워진 가을밤이다. 다섯 살 조카의 고사리손을 잡고 동네 공원을 걷고 있었다. 유난히 크고 환한 보름달이 마치 우리를 위해 띄워놓은 무대 조명처럼 따라오는 듯했다. 한참을 말없이 걷던 녀석이 문득 내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물었다.
"삼촌, 저기 달님은 왜 자꾸 나만 따라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10년 넘게 교단에서 아이들을 만나온 나이지만, 이토록 순수한 질문 앞에서는 언제나 무장해제가 된다. '지구가 돌고, 달은 멀리 있으니까...' 같은 메마른 사실을 이 순간 입에 올릴 수는 없었다. 과학적 사실을 아는 40대 어른의 뇌와, 그저 이 순간의 경이로움을 함께 느끼고픈 삼촌의 마음이 잠시 충돌했다. 나는 그저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어주었다. "글쎄, OO이가 좋아서 그런가 봐. 우리가 어디 가는지 궁금한가 보지." 조카는 "그런가?" 하더니 금세 "달님, 나랑 같이 가!" 하며 앞서 뛰어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왜 나만 따라와?" 하던 그 맑은 눈빛이 마음에 남았다. AI가 그림을 그리고 스마트폰이 1초 만에 세상의 모든 답을 찾아주는 2025년. 이렇게 빠르고 명확한 사실의 홍수 속에서, 우리는 아이의 불투명하고 여린 동심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우리는 종종 '동심'을 '환상'과 같은 말로 오해한다. 크리스마스이브, 아이가 잠든 사이 몰래 선물을 머리맡에 놓아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마음.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아이의 동심이 아니라, '순수한 아이'를 보고 싶은 어른의 욕망을 지키는 일일지도 모른다. 환상은 언젠가 옅어지고, 산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그날, 아이가 느낄 공허함과 작은 배신감. 우리는 그것을 앞서 상상한다. 어쩌면 우리가 그토록 지키려 했던 것은 단단한 동심이 아니라 언젠가 깨어질 어른의 기대감이 아니었을까. 동심의 진짜 모습은 '무엇을 믿게 하느냐'가 아니라, 아이가 상상하고 느끼는 그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이 오래된 질문 앞에서, 나는 늘 스티븐 스필버그의 <E.T.>를 떠올린다. 이 영화의 마법은 단지 외계인이 자전거를 타고 하늘을 날아서가 아니다. 그 중심에는 부모의 빈자리 속, 외로움을 느끼던 소년 엘리엇이 있다. 그는 숲에서 길 잃은 낯선 존재, E.T. 를 만난다. 중요한 것은 어른들과 아이들의 극명한 반응 차이이다. 어른들에게 E.T. 는 분석해야 할 대상이거나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협일 뿐이다. 그들은 번쩍이는 손전등과 서늘한 금속 탐지기로 아이의 세계를 침범한다. 아이의 진지한 만남은 '유치한 상상'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엘리엇과 어린 여동생 거티는 다르다. 그들은 E.T. 를 두려워하지도, 분석하지도 않는다. 그저 초콜릿 볼을 건네고, 자신의 장난감을 보여주며 친구로 받아들인다. E.T. 가 아플 때 엘리엇도 아프고, E.T. 가 슬퍼하면 엘리엇도 슬픔을 느낀다. 둘은 온전히 감정을 나눈다. 영화가 보여주는 진짜 기적은 외계인의 존재 그 자체가 아니다. 아이들이 그 낯선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소통하며 어른들의 불신과 위협에 맞서 지켜낸 '연대'이다. 자전거가 보름달을 가로지르며 날아오르는 그 눈부신 순간은, 바로 그 동심의 연대가 이뤄낸 어른들의 논리를 뛰어넘은 가장 위대한 승리의 장면이다.
영화 속 어른들의 모습이 부끄럽게도 10년 전 나의 모습과 겹쳐 보일 때가 있다. 초등학교 1학년을 처음 가르쳤던 해의 나는 꽤 오만했다. 아이의 엉뚱한 상상을 '틀린 것'으로 바로잡아 주는 것이 교사의 중요한 역할이라 믿었다.
"선생님, 어제 유튜브에서 봤는데, 용이 진짜 있어요. 불 뿜는 거 봤어요!"
"제 그림자도 아파요? 제가 넘어지면 그림자도 같이 아야 해요?"
그때마다 나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 그건 용이 아니고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거야. 진짜가 아니란다."
"그림자는 빛이 막혀서 생기는 거고, 감정이 없어서 아픔을 못 느껴. 그냥 까만 모양일 뿐이야."
하지만 그렇게 사실을 말해줄수록 아이들은 내 앞에서 질문을 멈췄다. 반짝이던 눈은 "아, 그렇구나..." 하며 시들해졌다. 10년의 시간은 그것이 나의 가장 서툰 실수였음을 깨닫게 했다. 아이의 세계는 사실이나 연기로 보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두 가지가 아이와의 진정한 소통을 가로막는다.
이제 우리는 '교사'나 '연기자' 대신, 그저 '첫 번째 관객'이 되어야 한다. 아이의 이야기 속으로 한 걸음 들어가,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질문을 던져보는 거다.
"그래? 용이 불을 뿜었어? 와, 엄청 뜨거웠겠다. 색깔은 어땠어?"
"그림자가 아야 했구나. 그럼 우리 OO이가 호~ 해줘야겠네. 그림자는 뭐라고 해?"
아이의 눈을 마주하고,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궁금해하며 들어주는 것. 그것이 바로 동심을 지키는 방법이다. 사실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느낀 경이로움과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아이가 상상한 존재가 사실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아이가 느끼는 그 경험과 감정을 100% 인정하는 것. 아이의 마음 안에서 그것은 이미 진짜이니까.
그렇다면 이토록 엉뚱해 보이는 상상을 지켜주는 일이, 이 시대에 왜 그토록 중요할까? 그것은 결국 '창의성'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영화의 역사를 돌아보면 스크린의 발전은 단순히 테크놀로지의 승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누군가의 무한하고 때로는 무모한 상상력을 기어이 스크린에 구현해 내는 지난한 과정이었다. 달에 가고 싶다는 꿈, E.T.처럼 자전거를 타고 달을 가로지르고 싶다는 그 불가능한 마음이 기술을 끌어당기고 시대를 움직였다.
AI가 인간보다 더 정확하게 계산하고 완벽하게 실행해 내는 시대가 와도 그 모든 기술을 움직일 첫 번째 '질문'과 '씨앗'은 인간의 가슴, 즉 동심에서 나온다. "만약 그림자도 아프다면 어떨까?"라는 엉뚱하지만 자유로운 상상 말이다. 그리고 그 여린 씨앗을 지키는 일이야말로 선생이 가르칠 수 없는 오직 부모만이 해낼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역할이다. 나는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지식을 전할 수는 있다. 하지만 상상할 용기와 자신의 세계를 믿을 자신감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는 '가장 충실한 관객'의 인정 어린 시선 속에서만 자라난다.
가을밤 저 보름달처럼 아이의 동심도 어둠 속에서 스스로 은은하게 빛난다. 어른은 그 빛을 만들어내는 원천이 될 필요가 없다. 아이가 가져온 반짝이는 조각들을 함께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하는 가장 든든한 '첫 번째 관객'이 되어주자. "산타는 있어!"라고 단언하며 연기하기보다 “올해는 산타에게 어떤 선물을 받고 싶어? 왜 그게 갖고 싶은지 우리 편지로 써볼까?”라고 다정하게 물어보는 것이 좋다.
이렇게 진심으로 쌓아 올린 공감의 시간은 훗날 아이가 산타의 진실을 알게 되는 날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내 엉뚱한 상상을 부모가(혹은 삼촌이) 진심으로 존중해 주었구나’라는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더 큰 사랑과 신뢰의 뿌리가 된다.
그날 밤, 조카의 손을 잡고 공원을 걸으며 생각했다. "달님이 왜 나만 따라와?" 묻는 그 마음에 정답 대신 미소로, 질문으로 답해주는 어른이 되어보자고. 그것이 이 빠르고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아이의 '진짜 동심'을 지켜주는 가장 빛나는 방법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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