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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의 체온, 그리고 마음의 잔상

영화 her

by 달빛바람

글의 체온, 그리고 마음의 잔상


​고등학교 시절, 옆 학교 여학생을 짝사랑하던 단짝 친구를 위해 연애편지를 써주던 특별한 기억이 있다. 흰 종이 위에 잉크가 스며들 듯, 친구의 마음을 내 문장 속에 옮겨 담으면서 묘한 기분을 느꼈다. 친구는 그 편지를 받아 들고 얼굴 가득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때부터 줄곧 이런 질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 설렘은 과연 친구 자신의 것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다듬고 완성한 문장이 만들어낸 감정의 형태에 반응한 것은 아니었을까? 글이라는 것이 마음을 전달하는 다리인 동시에 타인의 진심을 잠시 빌려와 옷을 입히는 장치라는 것을 그때 처음 깨달았다. 종이 위를 스치던 내 손끝의 떨림, 문장과 문장 사이로 스며들던 친구의 망설임,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나 자신의 복잡한 마음이 뒤섞인 채로 가슴에 남았다.


​대학 시절에는 글의 무게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당시 사귀던 여자친구에게 회사에 제출할 무단결근 사유서를 대신 써 달라는 부탁을 받았을 때였다. 나는 마치 한 편의 짧은 심리극을 연출하는 작가와 같았다. 직장 상사에게 보여주고 싶은 가장 합리적이고 책임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문장 속에 공들여 만들어내는 동안 나는 아주 잠깐이나마 그녀의 하루와 삶의 맥락 속으로 스며들었다. 누군가의 소소한 일상, 그 속에 섞인 작은 변명과 진실을 글로 옮기는 일이 이렇게까지 마음을 무겁게 만들 줄 몰랐다. 글은 단순한 정보의 전달을 넘어 마음의 미세한 잔상을 남기고 타인의 시선이나 판단을 아주 살짝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느꼈다.


​가장 긴 시간 동안 몰두했던 경험은 한 기업 CEO의 자서전 대필 작업이었다. 몇 달에 걸쳐 그의 방대한 삶을 내 언어와 시선으로 재구성하면서 나는 깊은 혼란에 빠졌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것이 진정한 '그'의 이야기인지 아니면 내 생각과 감각으로 재해석되어 이미 다른 형태로 변형된 그의 삶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그의 기억, 그가 했던 말, 인생의 선택과 후회의 순간들이 내 손끝을 통과하는 순간 형태를 바꾸고 내 고유한 감각이 마치 잉크처럼 배어들었다. 자서전이라는 글은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는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글을 쓰는 매 순간마다 살아있는 어떤 존재를 새롭게 빚어내는 행위이다. 그래서 완벽하게 '의뢰인 본인만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대필은 불가능했다. 글 속의 '그'는 늘 나를 한 번 통과했고, 나만의 흔적을 담은 그림자를 필연적으로 동반했다.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14년 ​영화 <Her> 속 주인공 시어도어를 볼 때마다 나는 이 모든 경험들을 떠올린다. 그는 타인을 대신해 사랑과 화해의 편지를 써주며 문장으로 복잡한 감정의 실타래를 풀어낸다. 그의 말끝이 만들어내는 문장에도,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에도, 오직 의뢰인의 순수한 진심만이 담겨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장면은 대필이라는 행위가 단순히 요청받은 마음을 전달하는 임무가 아님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신의 손끝으로 '번역'하고, 그 과정에서 글쓴이 자신의 숨결과 체온을 불어넣는 창조적인 일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인공지능(AI)이라는 새로운 대필의 주체와 마주하게 된다. AI는 인간의 복잡한 문체와 감정의 뉘앙스를 놀라울 정도로 모사하며, 효율적이고 매끄러운 문장을 순식간에 만들어낸다. 윤리적 고민이나 감정의 소유권 같은 인간적인 흔적 없이 글은 오직 결과물로서 완벽하게 제시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손끝으로 전해지던 문장의 떨림, 불완전하지만 뜨거웠던 인간적인 긴장감, 그리고 글을 읽으며 마음이 움직이던 따스한 순간들을 그리워한다. AI가 아무리 완벽하게 문장을 조립해낼 수 있다 하더라도 내 마음과 맞닿아 생겨난 '순간의 체온'은 끝내 재현해낼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글을 대신 쓴다는 것의 근본적인 무게, 손끝으로 전이되는 마음의 불완전한 온도, 그리고 번역된 감정의 미묘한 그림자—이 모든 것이 글과 나, 글과 타인을 이어주는 가장 인간적인 연결고리라고 생각한다. 조금 서툴고, 때로는 어색하며, 불완전할지라도, 내 손끝을 거쳐 완성된 글에는 나라는 통로를 통과한 '마음의 체온'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많은 대필 경험과 영화 <Her>, 그리고 인공지능(AI)의 등장을 지켜보며 깨달은 진실은 단 하나이다. 사람의 마음을 깊이 건드리는 글은 문장의 완벽한 완성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글을 빚어낸 이의 불완전하더라도 뜨거운 '숨결'과 살아있는 '체온' 속에서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글이란 쓰는 자의 손끝에서 흘러나와 읽는 이의 눈을 따라 심연으로 스며들며, 그 마음과 체온마저 변화시키는 생명력 있는 교감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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