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자쿠 Suzaku, 1997
1. 시간의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다
영화의 첫 장면은 어떤 과장된 드라마도 없이, 마치 오래전부터 우리를 기다려온 듯한 태도로 나라현 남부의 깊은 산속 마을로 발걸음을 이끈다. 초록이 포개지고 겹겹이 쌓인 숲의 입구를 통과하듯, 이야기는 일본의 전통 가옥 한켠, 어둑하지만 정겨운 부엌에서 조용히 숨을 고른다. 따끈한 김이 피어오르고, 누군가의 손길이 분주히 이어지는 그 순간들은 이 가족이 지닌 고요하지만 단단한 생명력을 미묘한 떨림으로 전한다.
근처에 작은 상점 하나 찾기 어려운 오지. 바닷생선은 트럭 장수가 와야 비로소 맛볼 수 있고, 사람들은 서로가 기른 토마토를 거리낌 없이 나누어 먹는다. 아이들은 큰 나무에 매달려 천진한 노랫소리를 흩뿌리고, 손바닥 위의 풍뎅이를 보물처럼 들여다본다. 이곳에서의 시간은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고요히 머무르는 데 가까워, 마음을 잠시 내려놓으면 금세 그 속도를 따라가게 된다.
<수자쿠>의 오프닝이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이것이 작위 없는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연출의 흔적을 지우고, 인물들 자체가 화면을 채우는 자연스러움. 이는 카와세 나오미가 비전문 배우를 과감히 기용한 선택에서 비롯된 것으로, 꾸밈없고 서툴기도 한 그들의 표정과 몸짓은 영화가 품은 서정의 온기를 한층 더 뜨겁게 만든다.
8mm 필름을 떠올리게 하는 거친 질감, 마사키 타무라 촬영감독이 포착한 부드러운 채도의 빛은 이 마을의 자연이 단지 배경에 머물지 않음을 선언한다. 아이들에게 자연은 경계 없는 놀이터이자 해방의 통로가 되고, 삶에 지친 어른들에게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는 유일한 피난처가 된다. 관객은 그 앞에서 어떤 강요도 없이, 다만 고요한 시선을 오래도록 얹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응시의 시간이 카와세 영화의 원형적 출발점이 된다. 이 풍경들은 단순한 ‘장면’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상실의 무게를 견뎌내게 할 조용한 예고편처럼 작동한다. 고요한 화면 속에 스며든 체온은 뜨겁고, 그 온기는 영화가 내딛을 첫걸음을 묵직하게 지탱해 준다. 이 순간들 자체가 이미 치유의 시작임을, 관객은 서서히 깨닫게 된다.
2. 시간의 흐름과 오지: 희망이 백지화된 자리에서 피어나는 서글픔
영화는 어느 날 문득, 15년이라는 시간을 가볍게 넘어선다. 그러나 그 ‘넘어섬’은 결코 가볍지 않다. 마을의 오랜 바람이 담긴 철도 사업이 무산된 날부터, 이 산골 마을의 시간은 어딘가에서 멈춘 듯 이어졌다. 터널의 입구는 여전히 땅속을 향해 깊게 입을 벌리고 있지만, 더 이상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 그 공허함이 마을의 희망이 어떻게 백지화되었는지를 침묵으로 증언한다.
15년의 세월 동안, 이 마을은 도시와의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오히려 정신적·경제적 고립의 골짜기로 더 깊이 미끄러져 내려간다. 터널 계획이 사라지면서 바깥과의 연결고리는 끊어지고, 인구 소멸의 시대가 가장 먼저 밀려드는 곳도 바로 이런 오지다. 아이들의 해맑은 노랫소리가 가늘어지는 자리에는 어느새 어른들의 한숨이 깃들고, 땅을 일구며 살아온 이들의 손바닥엔 시대의 변화를 견디는 고단함이 무겁게 내려앉는다.
카와세 나오미 감독은 이 변화를 한꺼번에 조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변화가 어떻게 일상의 가장 사소한 결까지 스며들어 균열을 만드는지, 그 조용한 파문을 집요하게 따라간다. 고도 경제 성장에서 비켜난 산골 사람들이 겪는 상실은 거창한 비극이 아니라, 매일의 삶을 조금씩 잠식하는 느린 통증에 가깝다. 미치루 아빠를 비롯한 마을 사람들 역시 철도 유치 문제를 두고 갈등에 휩싸인다. 언성이 높아지는 이유는 단지 ‘사업’이 실패했기 때문이 아니라, 생존을 붙들기 위한 마지막 끈이 이미 희미하게 풀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미치루 엄마가 생계를 위해 집을 떠나 에이스케의 가게에서 일하게 되는 대목은, 가족의 해체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일이 아님을 보여준다. 경제적 압박이라는 보이지 않는 독약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삶의 균형을 무너뜨리고 있었던 것이다.
카와세 나오미 감독은 시대적 격랑이라는 큰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그 격랑이 작은 공동체의 살결을 어떻게 건드리고, 결국 한 가족의 일상에 어떤 그림자를 드리우는지를 조용히 응시한다. 삶의 연대와 지속성에 대한 감독의 믿음이 장면마다 스며 있지만, 그 믿음만으로는 갈라진 마음을 붙잡아두지 못한다.
<수자쿠>가 보여주는 ‘오지’는 단순한 지리적 고립이 아니다. 희망이 사라진 뒤에야 비로소 드러나는, 남겨진 이들의 내면적 고립이다. 그 고립 속에서 인물들은 어쩔 수 없이 성숙해지고, 또 그 성숙이 서글픈 이별처럼 가슴에 남는다. 이것이야말로 카와세 영화가 건네는 가장 깊고도 뜨거운 정서의 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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