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훗날 우리 Us and Them
1. 눈(雪)과 춘절(春節)
과거의 사랑은 늘 우리를 멈칫하게 하고 망설이게 한다. 인사를 할까? 날 알아볼까? 아님 그냥 모른 척 지나가는 게 나을까?
영화 속 남녀 주인공은 긴 시간의 격차를 두고 비행기 안에서 재회한 모양이다. 비즈니스 석에 앉은 남자는 이코노미 석을 자꾸 뒤돌아본다. 드디어 그녀도 그를 알아보았다. 어쩌면 그저 어색한 눈인사만 하고 헤어졌을 그들. 재회의 시간을 연장시키는 것은 다름 아닌 눈이다. 이륙은 폭설로 연기되고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하룻밤 호텔에서 머물러야 한다.
이 영화는 다름 아닌 유예된 시간 속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영화이다.
그들이 처음 만났던 곳은 기차 안이었다. 그때에도 여자의 곤란함을 남자가 해결해 주었다. 그리고 지금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춘절(春節)이었다. 그때도 기차는 눈 때문에 멈추어섰고 차창 밖 사슴이 그림처럼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자의 눈짓에 우르르 기차 밖으로 내린 일행들.
눈으로 이어진 샤오샤오와 린젠칭은 친구가 되고 매해 춘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의 이야기는 눈과 춘절로 이어진다.
2. 현재와 과거의 대화
그들의 과거이야기는 자맥질하는 사람처럼 자꾸 현재로 되돌아온다. 대부분의 영화가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를 호출하는 것과 달리 이 영화는 똑바로 흘러가는 과거가 유예된 시간 속 현재로 돌아오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영화 속 현재는 뿌연 과거 같고 과거는 화사한 현재 같다. 과거는 컬러로 현재는 흑백으로 처리되어 있다. 과거는 아름답게 포장되어 기억되고 현재는 막연하게 결말을 알 수 없기 때문인 걸까? 도돌이표 마냥 자꾸 현재로 회귀하는 이야기는 관객들에게 한숨 돌릴 쉼표 역할을 함과 동시에 이 이야기가 이미 이별이 예정된 사랑 이야기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구조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로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랑이야기가 누군가의 회상으로 진행되는데 반해 이 영화는 따로 화자를 설정하지 않고 남, 녀의 시점을 두루 균형 있게 보여준다. 이때 유예된 시간 속의 현재는 흘러가는 과거로 인해 점점 색이 채워지고 생생해진다. 우리는 과거를 기승전결의 이야기로 정리함으로써 현재 시간의 완결성을 얻을 수 있다.
3-1. 사랑
빌어먹을 2007년
망할 놈의 2007년
2007년은 행복한 사람들의 해야
비참한 사람들은 더 비참해지기만 했어
-샤오샤오
틀렸어.
비참한 사람 둘이 있으면 행복해지잖아.
-린젠칭
샤오샤오와 린젠칭은 서로를 껴안고 울음을 삼키고 신나게 새해 카운팅을 외치고 그렇게 서로의 마음과 몸을 확인한다. 그리고... 여자는 사라진다.
호텔에서 과거 이야기를 하는 남자. 과거의 추억은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그들은 깔깔 웃다가도 어색한 침묵에 휩싸인다.
......
그 이후 린젠칭은 어려움에 처하고 샤오샤오는 그 해 춘절에 홀로 고향인 야오장(姚江)을 방문하여 린젠칭의 아버지와 친지를 만나 선의의 거짓말을 한다. 샤오샤오와 린젠칭은 동향(同鄕)이지만 그곳에는 린젠칭이 방문할 친지나 가족이 없다. 다만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았던 집만이 남아있다.
젠칭은 별일 없지?
-린젠칭의 아버지
아버지는 나쁜 예감이 자꾸 든다. 베이징 남자와 결혼하던 것이 꿈이었던 샤오샤오는 이때 결심했던 걸까? 둘은 샤오샤오의 용기 있는 고백에 드디어 연인이 된다.
나 같은 여자 놓치면 평생 후회한다.
-샤오샤오
둘은 어느 연인들처럼 달콤한 추억을 쌓는다. 하나가 아니라 이제 둘이기에 힘겨운 타행살이도 견딜만하다.
3-2 이별
달콤한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저 뜨거웠던 만큼 서툴렀고 서로에게 짐이 되기 싫은 마음에 더욱 허세를 떨고 심술을 부렸다. 초라해지기는 싫었고 거짓말을 들킨 만큼 비참했고 배려해 주는 만큼 못난 나에게 화가 났다. 우리는 꼭 사랑이 식어서 상대가 싫어져서 헤어지는 건 아니다. 표류하는 배처럼 상대가 비극에 휩쓸려갈 때 그 옆에 멍하니 서있는 내 모습이 싫어 도망가기도 한다.
우린 헤어지면 다신 보지 말자!
-샤오샤오
이게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지는 중요치 않다. 누구의 잘못이든 상황은 나빠질 대로 나빠졌다. 항상 행복은 찰나처럼 지나가고 비극은 연쇄추돌사고처럼 연이어 터진다. 그리고 관계의 종지부를 찍는 것은 팽팽한 긴장감이 아니라 느슨한 무관심이다. 어느 쪽이 먼저 손을 놓았는지 중요치 않다. 누군가는 등을 돌렸고 누군가는 도망쳐 갔다. 그렇게 이별이 온 것뿐이다.
3-3 사랑보다 힘센 청춘의 기억
그때 그들은 똑같이 젊었고 무모했으며 그리고 가난했다.
택시 타면 밥 두 끼가 날아가.
-샤오샤오
가진 것이 없었기에 용감했고
무모한 만큼 불안했으며
치열했던 만큼 상처받았다.
그때 담배 냄새나던 골방에서 나누었던 치기 어린 시간들. 들떴던 만큼 한숨과 눈물도 많았던 순간들.
이 영화의 정서를 가득 채우는 것은 만남과 이별로 인한 사랑의 정한(情恨)만은 아니다. 그 안에는 청춘의 열정과 좌절과 상처와 분노가 있다. 사랑의 들뜬 열망은 쉬이 가라앉지만 청춘의 기억은 힘이 세기에 둘은 서로를 잊지 못한다.
4. 우리와 그들 Us and Them
- 제목의 의미
다시 현재. 무의미한 가정을 하는 둘. 그때 그랬다면 우리는 영원히 함께 했을까? 때때로 우리는 한순간 과거로 휙 날아가기도 한다. 그때의 들떴던 마음. 스물넷의 네가 지금 눈앞에 있다. 남자는 여자의 손을 잡고 뛴다. 하지만 그 열기는 채 피워 오르기도 전에 현실의 벽에 막혀 쉬이 꺼지고 만다.
우리는 과거의 우리가 아니다. 그때 '우리'는 이미 과거 이야기 속의 '그들'이 되었다. 우리는 그들이 될 수 없다. 아침은 곧 올 것이고 비행기는 이제 뜰 것이다.
5. 제대로 된 이별
그들은 비행기 대신 자동차를 탄다. 하지만 춘절 연휴라 도로는 막히고 그들은 더 연장된 시간을 부여받는다. 그 시간 속에서 샤오샤오는 속내를 고백한다.
젠칭 I miss you
- 나도 네가 그리웠어.
아니 내가 널 놓쳤다고.
... ...
난 항상 널 사랑했어.
시간이 지나 도로는 뚫렸고 유예된 시간은 지났다. 하얀 설원을 헤치고 검은 도로 위 자동차가 달린다. 시간은 빠르고 이제 더 연장할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이제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언제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현재를 살아갈 수 있을까? 과거를 올바르게 받아들이지 못하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병들게 하고 우리를 지치고 늙게 한다.
마지막으로 여자는 남자에게 다가서며 말한다.
그땐 서둘러 떠났는데 이번엔 제대로 작별인사하자.
린젠칭 잘 가!
- 팡 샤오샤오, 잘 가!
우리가 제대로 된 이별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자꾸 현재로 되돌아오는 이유와 같다. 그녀는 린젠칭과 제대로 이별함으로써 현재를 다시 살아갈 힘을 얻었다. 제대로 된 이별은 과거의 나와 화해하는 것이며, 과거의 너를 깨끗이 보내겠다는 포즈이다. 과거의 비겁했던 나와 화해하고, 상처 주었던 너를 떠나보낸다. 나를 괴롭혔던 기억과의 화해는 제대로 된 '타인'과의 이별로 가능하다. 이 영화의 이별이 겨울 찬바람처럼 시리지 않은 이유이다.
그 이후 린젠칭은 부치지 못했던 편지를 샤오샤오에게 보낸다. 이제 기억은 더 이상 짐이 아니다.
눈 올 때마다 생각나는 사랑 이야기 네 번째!
원작소설 <춘절, 귀가> 작가이자 이 영화의 감독
유약영(류뤄잉, 劉若英, Liu Ruo Ying, Rene Liu)
https://kr.rti.org.tw/radio/programMessageView/programId/18/id/5272
# 춘절 : 춘절(春節)은 음력 정월 초하룻날(음력 1월 1일)로, 중국 국경절인 궈칭제(国庆节)와 함께 중국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대한민국의 음력설에 해당하는 명절이다. 원래명칭은 춘절이 아닌 정단이었지만, 신해혁명 이후로 명칭을 바꾼 것이다. 중국은 물론 대만, 홍콩을 비롯한 중화권, 중국의 영향을 받은 일부 동남아시아 국가(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베트남 등)에서도 치르는 명절이다. (나무위키)
#야오장(姚江): 중국 저장(浙江)성 주지(諸暨)시 야오장(姚江) Yaojiang Tow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