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다 부수고 나서야 들리는 소리

영화 <데몰리션>

by 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미국 100분

개봉 2016년 07월 13일

감독 장 마크 발레 Jean Marc Vallee


1. 상실의 충격이 빚어낸 방어적 마비


때로 같은 자세로 오랜 시간 있지도 않았는데 종아리에 쥐가 날 때가 있다. 거의 어제와 똑같은 하루였고 아플 이유가 없는데, 근육을 파고드는 꽤 깊은 통증은 실존적인 불안을 야기한다. 이러다 평생 제대로 걷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이 고통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닌지, 혹은 삶의 중요한 순간에 불쑥 나타나 내 생을 망쳐버리는 것은 아닌지 두려워하게 된다. 하지만 신체의 통증은 늘 정직한 신호이다. 그것은 현재의 상태가 위험하다는 긴박한 비보가 적힌 편지와 같다. 우리는 그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정말로 위태로운 상황은 정확히 그 반대일 때 찾아온다. 매를 맞고도 아프지 않을 때, 삶의 거대한 폭풍이 들이닥쳤는데도 아무런 감각이 없을 때, 그때 우리의 일상은 지반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영화 속 주인공 데이비스는 단 한 순간의 사고로 아내를 잃었다. 그러나 그는 며칠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평소와 다름없이 출근한다. 사람들은 그가 슬픔을 억누르는 강인함을 지녔다고 착각하지만, 실상 그는 예상치 못한 비극에 강타당해 자극을 수용하는 감각 계통이 일시에 멈춰버린 것이다. 사고의 충격이 너무나 커서 자아가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감정의 스위치를 꺼버린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쥐가 나서 다리가 마비된 것처럼 느껴질 때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리의 기능부터 점검한다. 움직여보고 뛰어보며 자신의 통제권이 살아있는지 확인하려 애쓴다. 데이비스도 마찬가지다. 그는 이 생경한 무감각 앞에서 자신의 사회적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체크하기에 급급하다. 회사 일을 챙기고 그래프를 분석하고 스케줄을 관리하며, 자신이 여전히 유능한 기계임을 증명하려 한다. 정작 자신의 내면이 함몰되었다는 사실조차 지각하지 못한 채 말이다.


사람은 부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기계가 아니다. 외상이 나타나지 않을 때, 마치 머리를 심하게 부딪혔는데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걸을 수 있을 때가 훨씬 더 위험하다. 그때 세상은 마치 두꺼운 어항 속 풍경처럼 낯설게 다가온다. 그는 고백한다. "모든 것이 은유처럼 보여." 영화는 1인칭 시점을 견지하면서도 몽환적인 도피에 빠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현실적인 사물들의 질감을 통해, 내면의 붕괴를 인지하지 못하는 자아의 상태를 역설적으로 드러낸다.



2.껍데기를 뚫고 들어가는 집요한 자아 분석


그는 정해진 루틴대로 행동하려 하지만 마음의 균열은 조금씩 밖으로 새어 나온다. 그 균열은 기차의 비상 제어장치를 당기거나, 자판기 회사에 항의를 가장한 내밀한 고백을 투고하는 식의 돌발 행동으로 나타난다. 그는 지금 자신에게 진짜 필요한 결핍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우리 역시 그럴 때가 있다. 하루가 멀쩡하게 흘러가고 일상적인 행위를 지속하고 있는데도, 문득 내가 선 좌표가 어긋나 있고 세상이 이질적으로 보일 때 말이다. 마음 가는 대로 도시를 헤매던 데이비스는 마침내 자신의 속을 들여다보듯 망가진 냉장고와 컴퓨터를 조각조각 분해하기 시작한다.


그는 말한다.

"난 태풍에 뿌리 뽑힌 나무. 아니 나무를 뿌리 뽑은 태풍."

지금 그의 내면적 지반은 완전히 함몰되어 무엇을 잃었는지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태이다. 그래서 그는 더욱 기기의 작동 원리와 구조에 집착한다. 껍데기가 아니라 그 안에서 작동하는 실질적인 원인과 고장의 배후를 파헤치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것을 해체해 놓을 뿐, 그것을 다시 결합할 능력은 갖고 있지 않다. 아니, 어쩌면 예전과 같은 구조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함을 직감했기에 결합을 거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자신이 점점 상식 밖으로 벗어나고 있음을 인지하면서도 멈추지 않는다. 그 파괴적인 해체만이 자신을 둘러싼 무감각의 벽을 뚫고 들어가는 유일한 탐구 방식이기 때문이다.



3. 삶의 길에서 어긋난 영혼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을 '일관성 있고 합리적인 존재'로 규정하려는 강력한 본능을 지닌다. 데이비스가 신봉하던 세계는 모니터 위의 숫자와 명확한 결과값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안온한 일상을 보장해주었으며, 스스로를 통제력이 강한 자아로 인식하게 했다. 어릴 적 남들보다 빨리 뛰는 것이 소원이었던 소년은 마침내 그 사회적 속도에 안착했다고 믿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한 순간의 사고가 이 모든 체계를 앗아가는 순간, 그가 믿어온 '긍정적 자아상'과 실제 일어난 '비극적 사건' 사이에 거대한 충돌이 발생한다. 보통의 경우라면 이 지점에서 분노와 슬픔이 분출되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일상이 통제권 안에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방어 기제를 가동한다. 하지만 생의 박동은 늘 은폐를 뚫고 솟구치며, 억눌린 감정은 엉뚱한 창구를 통해 분출된다. 자판기 회사 상담원 캐런과의 기묘한 연대는 그렇게 시작된다. 새벽 2시, 전혀 모르는 타인에게 자신의 밑바닥을 털어놓는 행위는 타자에게 자신의 상처를 투사해 보려는 시도이다. 데이비스는 마치 객관적인 보고서를 쓰듯 자신의 사연을 보냈지만, 그 건조함 속에는 '나를 발견해달라'는 비명이 숨어 있었다. 그 신호를 알아본 것은 캐런 역시 사회적 정상성에서 이탈한 채 내면의 소음을 달고 사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마약 없이는 일상을 버티지 못하는 캐런과 너무 일찍 삶의 냉소에 닿아버린 그의 아들 크리스.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튕겨 나가 내면의 노이즈가 상수가 되어버린 이들은 마치 특정 주파수로 동료를 식별하는 돌고래들처럼 서로를 알아본다. 크리스는 보호자처럼 구는 어른들보다 자신처럼 이상 행동을 일삼는 데이비스에게서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들은 서로의 부서진 틈을 통해 연결되며, 그 비정상적인 유대 속에서 비로소 가식 없는 생의 민낯을 마주하게 된다.



4. 통과의례: 다시 태어나기 위해 '시작'하는 파괴


그는 철거 현장에 자진해 나가 발바닥에 대못이 박히고서야 비로소 "아프다"고 절규한다. 마비되었던 신경이 되살아나고 온몸의 감각이 생생해질 때, 그때야 비로소 아내의 죽음이라는 거대한 사건이 지연된 후폭풍처럼 그를 덮친다. 그리고 캐런에게 닥친 비극적 상황을 목격하고서야 그는 거울을 보듯 자신의 상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된다. 무너짐과 부서짐, 처절한 자기 파괴와 비명 없이는 우리는 진정한 이별의 입구에 들어설 수 없다. 그동안 그가 행해온 모든 해체는 사실 그 고통스러운 진실로 나아가기 위한 처절한 준비 과정이었던 셈이다.


영화 제목인 '데몰리션(Demolition)'은 단순히 허무는 행위가 아니라 새로운 건축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전제 조건이다. 낡은 자아의 집을 완전히 허물어뜨리는 그 뜨거운 통증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가장 정직한 통과의례이다. 우리는 완전히 바닥까지 무너져 내린 연후에야 비로소 그 폐허 위에서 이전과는 다른 삶을 '시작'할 자격을 얻는다. 엉엉 울고, 소리를 지르고, 남겨진 것들을 조각내어 확인하는 이 처절한 과정은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나를 짓누르던 무거운 껍질을 벗겨내고, 생의 한복판으로 다시 걸어 들어가는 가장 역동적인 '시작'의 다른 이름이다. 무너짐은 곧 새로운 지도를 그리기 위한 첫 번째 선을 긋는 행위이며, 이 잔인한 통과의례를 마친 뒤에야 비로소 우리는 진짜 생을 향해 첫발을 내디딜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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