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그 아이를 모른다

영화 <용순>

by 달빛바람

​서울 중심 동네 상가 3층, 낡은 칠판 앞에서 15년을 보냈다. 그동안 나는 아이들의 견적을 뽑는 법을 익혔다. 시험지 여백에 남긴 낙서나 부모의 목소리 톤만으로도 녀석의 미래를 대략 짐작했다. 그건 통찰이라기보다, 복잡한 타인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선택한 일종의 게으름이었다. 중1 승우 역시 내 시야 안에서 늘 같은 자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존재감 없이 교실 구석을 채우는 ‘중하위권’의 소음 없는 배경.


​그 화요일 오후, 교실을 가로지른 날카로운 파찰음은 내 견고한 세계를 찢어버렸다. 문법 문제를 풀던 승우가 갑자기 옆자리 아이의 멱살을 잡고 바닥으로 메쳤다. 달려간 내 가슴팍에는 묵직한 내신 문제집이 날아와 박혔다.


​“X발, 니가 뭔데! 니들이 뭘 아는데!”


​승우는 울지 않았다. 대신 눈이 터질 듯 충혈된 채 씩씩거렸다. 녀석의 손등에 솟은 핏줄을 보며 나는 당혹감보다 불쾌감을 먼저 느꼈다. 평온한 수업 시간을 망쳐놓은 이 '오류'를 어떻게 빨리 수습할지가 우선이었다. 복도로 끌려 나가는 승우의 등 뒤에 나는 '문제아'라는 딱지를 붙였다.


​승우 아버지는 공사장의 소음 속에 짧게 답했다. “애 엄마랑 얘기하세요.” 이어 연결된 어머니의 음성은 한국어의 경계 밖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는 그 메마른 목소리 너머로, 공통의 언어가 부딪히지 못한 채 바닥으로 툭툭 떨어지는 적막한 식탁이 보였다.
​어머니가 영어로 보내온 메시지에는 내가 지워버린 교실의 뒷면이 적혀 있었다. 승우는 엄마의 서툰 한국어를 흉내 내는 아이들의 비아냥을 매일 삼키고 있었다. 멱살을 잡혔던 아이는 승우를 '외국인 노동자 자식'이라 불렀고, 승우는 그 말에 대항할 논리적인 단어를 찾지 못해 제 몸을 던졌다. 녀석의 주먹질은 말로 뱉지 못한 것들을 향한 몸부림이었다.


​상담실에서 마주 앉은 승우는 여전히 굳어 있었다. 나는 거창한 사과 대신 햄버거와 콜라를 밀어 놓았다. 녀석은 한참을 노려보다가 빵을 씹기 시작했다. 꾸역꾸역 음식물을 삼키던 승우의 고개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콜라 캔 위로 굵은 눈물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았지만, 나는 그저 창밖을 보았다. 거기엔 어떤 극적인 화해나 깨달음도 없었다. 햄버거 기름 냄새와 눅눅한 울음소리가 뒤섞인, 비릿한 현실만이 있었다.

​신준 감독의 영화 <용순>(2017)을 다시 꺼내 본 건, 승우를 이해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녀석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무력감 때문이었다. 영화 속 용순은 뜨거운 여름날, 목적지도 없이 운동장을 달린다. 몽골에서 온 새엄마를 향해 독설을 퍼붓고 가짜 임신 소동을 벌이며 주변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사람들은 묻는다. 왜 그러냐고. 하지만 영화는 친절한 답을 내놓는 대신 뙤약볕 아래 운동장을 돌며 뿜어내는 거친 숨소리와 지면을 박차는 닳은 운동화의 고무 탄내에만 카메라를 밀착한다.


​승우와 용순은 다르다. 용순의 질주가 뜨거운 여름의 발산이라면, 승우의 주먹은 좁은 교실 안에서 응축된 폭발이었다. 용순의 종아리 근육이 생존을 위해 단단해졌다면, 승우의 눈물은 자신을 보호할 최소한의 무기도 갖지 못한 아이의 무너짐이었다. 나는 이 둘을 억지로 잇지 않기로 했다. 영화는 영화고, 승우는 승우다. 영화는 세련된 미장센으로 갈등을 빗소리에 씻어내기도 하지만, 내 앞의 승우는 여전히 단어 외우기를 지루해하고 친구들과 서먹한 채로 남아 있다.


​다만, 용순의 질주를 지켜보며 내가 느낀 건 '오만'에 대한 자각이었다. 나는 학원이라는 공간이 매끄럽게 돌아가도록 이물질을 걸러내는 사람이었다. 아이들의 속사정은 기계 작동을 방해하는 불순물일 뿐이었다. 승우의 멱살이나 용순의 가짜 임신 소동은 그 정교한 매뉴얼 위에 던져진 짱돌 같은 것이었다. 시스템은 잠시 멈췄지만, 그 덕에 나는 소음 뒤에 숨겨진 아이들의 숨소리를 비로소 들었다.
​사건 이후에도 승우는 여전하다. 성적은 제자리걸음이고, 숙제는 가끔 밀린다. 가끔 내 교무실 책상에 와서 말없이 멍하니 앉아 있다가 갈 뿐이다. 그러다 가방에서 과자 하나를 꺼내 책상 모서리에 놓고 일어선다.


​“야, 저번에 준 거 아직 다 안 먹었어.”


내 말에 승우는 대답 대신 가방끈을 고쳐 매며 툭 뱉었다.


“아, 그냥 드세요. 맛있는 거예요.”


그게 전부였다. 녀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로 사라졌다.


​세상에는 끝내 번역되지 않는 진심이 있다. 나는 이제 승우에게 영어를 가르칠 때, 정답을 맞혔는지보다 그 아이가 삼키고 있을 '침묵의 온도'를 생각하려 애쓴다. 하지만 그것도 나의 착각일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승우를 모른다. 녀석이 왜 내 책상에 사탕을 놓는지, 그날 왜 하필 내 가슴에 문제집을 던졌는지, 정말로 녀석의 슬픔을 이해했는지도 확신할 수 없다.


​용순이 달리고 난 뒤의 운동장에 흙먼지만 남듯, 내 교실에도 여전히 요약되지 않는 소음들이 떠돌 뿐이다. 나는 오늘도 칠판 앞에 서서 목적지 없이 달리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본다. 그 닳은 운동화 뒤축에 묻은 흙탕물이 내 안경 너머로 흐릿하게 번진다. 나는 그저 내 안경을 한 번 더 닦을 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하나의 계절이 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