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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았던 영화 여덟 번째!

벤허 (Ben-hur,1959)

by 달빛바람



위대한 대서사시 ‘벤허’

1. 메살라 vs 벤허

이 영화는 주 예수의 탄생 그리고 두 오랜 친구의 만남으로 시작한다. 어릴 적 함께 웃고 달렸던 로마인 메살라(스티븐 보이드)는 오랜 세월 로마에서 수련을 마치고 이제 유대 땅 나사렛의 군사령관이 되어 돌아온다. 벤허(찰턴 헤스턴)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고 두 사람은 오랜만에 포옹을 나눈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않는다. 둘은 이제 피할 수 없는 길목에서 서로를 마주해야 하는 운명에 놓여 있다. 메살라는 자신의 처지를 도와달라며 벤허에게 그렇지 않으면 동족이 몰살당할 것이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미친 세상이야. 올바른 것은 하나뿐이지. 옛 친구에 대한 의리. 우리는 서로를 신뢰해야 해. 그런 뜻에서 건배.

벤허는 마지못해 잔을 부딪친다. 오래된 우정은 이 순간 권력과 정의의 무게 앞에서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뒤로 메살라는 벤허의 어머니, 그리고 그를 오랫동안 흠모해 온 여동생을 만난다. 평화로웠던 가족의 공간에 냉랭한 긴장감이 스며든다. 하지만 곧 메살라는 자신의 처지와 벤허의 신념이 완전히 어긋났음을 깨닫는다. 그는 벤허에게 거침없이 요구한다.

날 돕든지 아님 내게 맞서든지 선택을 하게. 동지가 아니면 적이야!

이에 벤허는 동족을 배신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단호히 대답한다.

선택을 해야 한다면 난 적이 되겠어.

이 한마디로 갈등은 점화되고 두 사람의 운명은 서로를 등지기 시작한다.

로마 군단의 행진은 위압적인 위엄과 함께 시작된다. 수천 명의 엑스트라와 거대한 세트를 통해 재현된 장면은 고대 예루살렘의 생생한 분위기와 로마의 군사력을 압도적으로 그려낸다. 벤허와 그의 여동생은 건물 옥상에서 행진을 바라보던 중 실수로 기왓장을 떨어뜨린다. 로마 군은 이를 유대인의 공격으로 오해하고 곧장 벤허의 집을 습격한다. 그들은 아무런 설명도 듣지 않은 채 벤허와 가족들을 포박해 끌고 간다.

실수였어. 제발, 여자들만은 풀어줘.

벤허는 메살라에게 간절히 애원한다. 그러나 메살라는 그 모든 절규를 외면한 채 차갑게 돌아선다. 이제 둘 사이에는 다시는 건널 수 없는 강이 생긴 것이다.


2. 거대한 함대 그리고 노예들

이 영화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장면 중 하나는 압도적인 바다 위의 전투,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거대한 함대 장면이다. 고대 로마 해군의 갤리선이 열을 지어 나아가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엄청난 무게를 지닌다. 특히 갤리선 아래층, 노예들이 배의 심장처럼 끊임없이 노를 젓는 모습은 인간의 육체가 어떻게 국가의 무기가 되는지를 끔찍하리만치 생생하게 보여준다. 영화 속에서 묘사되는 이 거대한 함대는 40척 이상의 갤리선을 동원하여 촬영되었으며 이탈리아의 티레니아 해 인근에서 실제 바다 위에서 로케이션 촬영이 진행되었다. 세트 제작에는 무려 300명의 장인이 동원되어 고대 로마 해군 함선의 구조와 장식을 고증에 따라 재현해 냈다. 주요 전함들은 길이 약 45미터, 높이 약 15미터에 달하는 대형 목조 구조물로 제작되었으며 내부의 노예실과 상부 갑판, 지휘 공간까지 정밀하게 구현되었다. 그 위에서 촬영된 해상 전투 장면은 실제 바다 위에서 수주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특수효과가 아닌 실물 배와 실제 인력을 통해 구현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CG 스펙터클과는 또 다른 질감의 현실감을 전달한다. 영화는 한 함선에 약 200명의 노예가 탑승해 북소리와 구령에 맞추어 일정한 리듬으로 노를 젓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속력! 전속력!’이라는 구호와 함께 타악기의 박자가 거칠어질수록 노예들의 얼굴에는 공포와 고통이 뒤엉킨다. 그들은 그 어떤 기계보다 정밀하게 작동하는 피와 살의 톱니바퀴였다. 매시간 30명씩 교대하며 쉬지 않고 움직이는 노예들의 묘사는 단지 서사적 장치가 아니라 고대 로마제국의 권력 시스템이 어떻게 인간의 생명을 소모품으로 만들었는지를 시각적으로 고발하는 순간이다. 남루한 옷차림과 벗겨진 등껍질 위로는 채찍 자국이 얼룩져 있고 눈빛은 이미 삶을 떠난 자처럼 텅 비어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도 한 사람 벤허는 꺾이지 않는다. 바다를 헤집고 나아가는 노예선 내부의 어둠은 그가 빠져나가야 할 삶의 미로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전투 도중 선박이 공격받아 난파되는 위기 속에서 함대 지휘관 퀸터스를 구한다. 그 순간은 단순한 영웅적 구조 행위를 넘어 운명이 방향을 틀기 시작하는 분기점이 된다. 지옥처럼 불타오르던 해상 전투의 소용돌이 속에서 벤허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노예라는 지위에서 해방될 수 있는 단초를 얻는다. 찰턴 헤스턴의 표정 속에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끝내 포기하지 않은 자만이 보여줄 수 있는 단단한 의지가 담겨 있다.

이 영화의 바다 장면은 단지 전투와 함선이라는 물리적 규모의 과시가 아니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인간이 어떻게 다시 빛을 향해 노를 젓는지를 보여주는 정신의 항해이기도 하다. 오늘날의 디지털 해상전도 그 웅장함 앞에서는 한발 물러서야 할 만큼 이 고전적 장면은 여전히 시대를 초월하는 진동으로 가슴을 울린다.




3. 기묘한 운명

기구한 운명이 제게 새로운 삶과 새 가족과 새아버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머물게 되었고 떠나게 될지도 모르지만 제가 어디에 있더라도 아리우스의 아들로서 이 반지를 낄 것이며 감사한 마음으로 살겠습니다.

벤허는 운명의 장난인지 이제 로마군의 편에 서게 되었다. 자신을 노예신세에서 자유의 몸으로 만들어준 은인에게 감사함과 충성을 다질 수밖에 없는 신세지만 그의 한쪽 가슴에는 자신의 민족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한이 자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을 설득하는 메살라에게 이렇게 외친 적이 있다.

내가 경고하지! 로마는 신을 모욕하고 내 민족, 내 나라를 억압하고 있어. 하지만 영원히는 아니지. 로마가 멸망하는 그날 자유의 함성은 온 세상에 울려 퍼질 거야!

그는 자기 집으로 돌아온다. 몇 년 사이 몰라보게 황폐해진 집에 남아있던 건 자신의 옛 집사와 그의 딸 에스더이다.


4. 비밀과 거짓말

벤허는 이제 위엄을 갖춘 모습으로 메살라 앞에 다시 선다. 옛 친구 앞에서 그는 더 이상 나약한 유대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자존과 상처를 지닌 채 고요히 분노를 품고 돌아온 사자다. 그는 단호히 요구한다. 감옥에 갇힌 어머니와 여동생을 당장 석방하라고. 그러나 세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지하 감옥에서의 네 해, 그 긴 시간 동안 살아남은 자는 없으리라 사람들은 속삭인다. 기적처럼 살아남은 그들. 하지만 운명은 그들에게 또 다른 잔혹한 시련을 안겨준다. 감옥에서 나온 모녀의 몸에는 이미 치유할 수 없는 병이 깃들어 있었다. 세상은 그 병을 문둥병이라 불렀고 하늘이 내린 형벌이라 하여 천형병으로 두려워했다. 그들의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망가졌고 햇빛을 보지 못한 눈은 점점 어두워졌다.

여기서 운명의 아이러니는 다시 한번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벤허가 노예선에 실리지 않았다면 그토록 인생을 뒤바꿔준 지휘관과의 만남도 없었을 것이고 반대로 그들이 한센병에 걸리지 않았다면 지하 감옥이라는 무덤에서 끝내 살아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잔혹하게도 필연처럼 얽혀 있다.

그들은 이제 벤허의 연인이 된 에스더에게 마지막 자존심을 내보인다. 자신들을 만난 사실을 벤허에게 알리지 말아 달라고. 남겨진 사랑과 체면의 끝자락에서 애원하듯 당부하는 두 사람의 목소리에 에스더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벤허에게 거짓말한다. 감옥에서 이미 그들이 죽는 걸 보았노라고.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그러나 그 거짓은 단지 거짓이 아니었다. 그 속엔 벤허의 마음속에서 메살라에 대한 증오가 더 커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이 있었고 언젠가 그가 이 모든 고통을 내려놓고 로마로 떠나기를 바라는 깊고 조용한 사랑이 숨어 있었다. 허나 그 순간 에스더는 알지 못했다. 이 간절한 비밀과 거짓말이 결국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올지를.


5. 전차 경주

이 영화의 백미, 그리고 전설로 남은 장면은 누가 뭐래도 전차 경주이다. 4마리의 말이 이끄는 전차를 타고 트랙을 미친 듯한 속도로 질주하는 장면은 단순한 볼거리를 넘어 스크린을 뚫고 관객의 심장을 쥐고 흔드는 듯한 전율을 선사한다. 고대 로마의 광활한 경기장의 열기와 함성은 마치 필름 너머로 솟구쳐 오는 듯하다. 당시 할리우드 영화의 스케일이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실감케 하는 이 장면은 영화 전체를 집약하는 상징이자 기술적 정점이기도 하다.

이 장면을 위해 제작진은 무려 18 에이커(약 73,000㎡)에 달하는 거대한 전차 경기장을 이탈리아 친치타(Cinecittà) 스튜디오 부지에 직접 건설했다. 트랙의 길이는 약 460미터, 폭은 30미터에 달했으며 실제 로마 시대의 경기장과 같은 구조를 구현하기 위해 약 100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 이 전차 장면을 촬영하는 데만 꼬박 5주가 소요되었고 15,000명에 달하는 엑스트라와 78마리의 말이 동원되었다. 이는 당시 영화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였으며 1959년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수치였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이 장면 대부분이 스턴트맨이 아닌 실제 배우들이 참여해 촬영되었다는 사실이다. 찰턴 헤스턴은 자신이 몰던 백색 말의 전차를 직접 조종했으며 촬영 내내 말과 트랙, 그리고 카메라 앵글 사이에서 실감 나는 스피드를 조율했다. 수십 대의 카메라가 경기장을 둘러싸고 포진해 있었고 관객석을 촬영하기 위해 고공에서 내려다보는 크레인 샷과 장시간 이동 촬영이 동원되었다. 그 덕에 전차가 회전하는 곡선 구간에서 발생하는 말발굽의 불꽃과 모래의 튀김, 그리고 전차끼리 부딪히며 깨지는 파편까지 생생하게 포착된다. 속도감과 긴장감은 이 장면의 뼈대를 이루지만 그 속에 깃든 인물 간의 갈등은 또 하나의 서사이다. 메살라의 비열함과 비정함은 경주가 진행될수록 더욱 도드라지고 그가 몰고 있는 흑색 말들은 찰턴 헤스턴의 백색 말들과 뚜렷한 대조를 이루며 마치 검은 파도와 하얀 포말의 격돌처럼 느껴진다. 진흙과 피, 그리고 철마의 쇳소리로 얼룩진 이 장면은 단지 승패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과 복수, 그리고 정의를 향한 질주였다.

‘벤허’의 전차 경주 장면은 단지 기술적 위업이나 시각적 스펙터클로만 평가되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라는 예술이 무엇을 재현할 수 있고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증명해 낸 역사적인 장면이다. 전차의 바퀴가 모래 위를 긁고 지나가며 남긴 흔적은 스크린을 넘어 오늘날까지도 영화사의 뇌리에 깊은 자국으로 새겨져 있다.

6. 복수 이후의 깨달음

이 영화는 표면적으로는 복수극의 궤도를 따라 달려가지만, 그 종착지는 전혀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화면을 가득 메운 황량한 사막과 피투성이의 전차 경기장, 그리고 그 위를 지나가는 인간의 증오와 집착은 처음엔 뚜렷한 방향을 향해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야기가 깊어질수록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 물줄기는 결국 자신이 쏘아 올린 화살에 찔려 쓰러지는 자아의 그림자였음을.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종교적 색채는 분명 짙고도 선명하다. 예수가 등장하는 순간, 영화는 복수의 복선을 뛰어넘어 용서라는 무게 있는 주제를 담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결코 억지스럽거나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 종교적 상징성은 삶과 고통, 용서와 구원의 보편적인 진실을 조용히 밀어 올린다.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칼날은 결국 바깥을 벨 수 없고, 돌고 돌아 자기 자신의 영혼을 깊이 찌르게 된다는 진실. 그 단순하면서도 끔찍한 원리를 이 영화는 슬픔으로, 고요로, 빛으로 그려낸다.

복수는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불씨처럼 작고 그러나 내면을 송두리째 태워버리는 어둠의 불꽃이었다. 복수를 완수하고 난 뒤의 벤허는 마치 갑옷을 벗고 맨몸으로 광야에 선 듯한 눈빛을 띤다. 그가 찾던 정의는 이미 무너진 폐허 속에 있었고 그토록 붙잡고자 했던 분노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부서진 모래알처럼 손 틈 사이로 흘러내렸다.

달라진 건 결국 마음이었다. 분노로 닫혀 있던 마음이 누군가의 손길, 말 한마디, 그리고 십자가 위의 침묵을 통해 천천히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복수는 어쩌면 단지 인간이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였고 그 너머에서야 비로소 벤허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만난다. 이 영화가 건네는 마지막 메시지는 그래서 더욱 진하게 마음속에 스며든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상처받고 그 상처가 곧 칼이 되어 누군가를 겨누기도 한다. 그러나 진정한 구원은 누군가를 무너뜨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껴안는 데서 비로소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웅변이 아니라 침묵으로 가르쳐준다. 그리고 그 침묵이 우리 안에 남은 칼날의 흔적을 천천히 녹여낸다.


제목만 알았던 영화 여덟 번째!


사실 남의 불행 앞에는 이말이 떠오르지만,

"Before you embark on a journey of revenge, dig two graves."

"복수의 여정을 떠나기 전에 무덤 두 개를 파라."

(미국 원주민 격언)


하지만 정작 내 일이 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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