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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 알았던 영화 아홉 번째!

안개속의 풍경

by 달빛바람

개요 드라마 프랑스, 그리스, 이탈리아, 121분

개봉 1996년 09월 21일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 Theo Angelopoulos



1. Opening 오프닝

- 보울라와 알렉산더

이 영화는 남매인 듯 보이는 두 남녀아이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누나는 열두 살쯤 동생은 많아야 다섯 살 남짓으로 보인다. 누나는 동생에게 묻는다.

무서워?
- 아니, 안 무서워

밤은 깊었고 이 둘이 도착한 곳은 아테네 기차역이다. 기차직원은 익숙한 듯 그들을 보며 이렇게 말한다.

또 너희들이냐?
너희들은 밤마다 여기서 뭐 하는 거냐?

이 남매는 가출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하지만 그들은 독일행 기차를 타는데 실패하고 다시금 장면은 전환된다.
어둠 속에서 동생은 누나에게 묻는다.

우리 언제 떠나?
- 잠이나 자.

그 이야기 또 해줄래?
- 태초에 어둠이었다. 그다음에 빛이 있었다. 그리고 빛은 어둠에서 분리되었어. 그리고 바다로부터 땅이, 강이 호수가 만들어졌어. 그리고 산이 그런 다음 꽃과 나무들. 동물들 , 새들. 앗! 엄마다! 이 이야기는 절대 끝나지 않을 거야. 언제나 엄마가 와서 멈추게 되니까.

이 영화의 오프닝은 영화의 어린 두 주인공 보울라와 알렉산더를 소개함과 동시에 이 영화의 소재가 누나의 목소리로 발화되는 내면의 이야기를 다룬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둠은 서사의 시작이고 빛은 보호자의 개입이다. 보호자는 이 허구의 세계, 아이들의 상상의 장난을 멈추게 하는 침입자다. 마치 한창 놀이에 몰입했을 때 들려오는 “얘들아, 저녁 먹자!”는 엄마의 목소리처럼. 서사는 어른의 세계에 의해 끊겨버린다.

감독 테오 앙겔로풀로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아이들은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어요. 어른들은 이해하지 못하는 무언가를요. 그 기다림 속에 그리스의 역사와 유럽의 불안, 상처, 그리고 잃어버린 아버지의 부재가 숨어 있습니다.
(출처: Michel Ciment, Conversations with Theo Angelopoulos, Faber & Faber, 2001)

이 세계의 어둠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그것은 허구의 세계, 환상이 희망이 되고 이야기가 잉태되는 공간이다. 스크린의 어둠처럼. 거기서 빛이 탄생한다. 세계의 확장처럼.



2. 독일에 사는 아빠에게

아빠에게

우린 당신을 찾아가기로 한 걸 적어 보냅니다. 우린 당신을 본 적도 없지만 당신이 그립습니다. 우린 늘 당신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떠나버려서 엄마는 걱정하겠죠. 우린 마음속 깊이 엄마를 사랑하지만 엄마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해요. 우린 당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릅니다. (......)

만약 우리에게 답장을 보내시려면 기차소리에 실어 보내세요.
따당 따당 따당 따당

보울라가 쓴 편지는 마치 동화책의 빈 페이지에 덧대어진 고백처럼 읽힌다. 그들은 아버지의 얼굴도 모른다. 그저 존재하리라 믿는 것뿐. 그리고 그 믿음은 실체보다도 더 단단하게 아이들을 붙잡고 있는 희망이다. 처음에 실패했던 독일행 기차 타기에 겨우 성공한 남매. 허나 금방 검표원에게 걸려 하차당하고 만다. 경찰에 인계되어 삼촌에게 보내진 둘. 엄마의 오빠인 그는 반갑게 둘을 안아주지만 곧 당혹스러움과 곤란함을 드러낸다.

이 아이들 아버지가 독일에 있다는 건 그들의 엄마가 지어낸 거짓말이에요. 나는 이 아이들을 맡을 수 없어요.

이 아이들의 여정은 이렇게 싱겁게 실패로 끝나고 마는 걸까? 사실 아이들은 처음부터 부재하는 존재를 향해 가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믿음, 그리움, 기도와 같은 것이다. 하늘을 향한 편지처럼 도달하지 못하더라도 쓰는 행위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들은 길을 걷고 있고 그 길은 유럽의 역사 속을 통과하죠. 아버지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아도 그들은 끝까지 그를 향해 나아갑니다. 그것은 실체가 아닌 신화 혹은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Theo Angelopoulos, 인터뷰 – Sight & Sound, 1999)



3. 연극적 요소와 판타지

이 영화 속 이야기는 논리와 이성의 법칙을 뛰어넘어 하나의 사회 부조리극 같은 장면들로 구성되어 있다. 늘 날갯짓을 하는 갈매기라 불리는 사내. '로프에 목을 묶고는 뛰어내렸어요'라며 같은 말을 반복하는 이상한 여인. 갑작스럽게 내리는 눈으로 정물처럼 정지한 사람들. 그리고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 하나 인 하얀 말의 죽음. 그 뒤로는 결혼 연회라도 열리는지 사람들은 춤을 추고 결국 동생은 말의 죽음에 울음을 터뜨린다. 이때 관객은 갑작스레 일어난 상황에 당혹스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다. 허나 반복되는 이미지 속에 한 가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순수와 예술이 냉혹한 세상 속에서 죽어버렸고 사람들은 더 이상 음악과 연극과 환상을 환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연극 배우는 타다 남은 필름을 길에서 줍고는 이렇게 말한다.

안개 뒤에 저 멀리 나무가 안 보여?
- 아뇨
나도 안 보여. 농담이었어.

이 씁쓸한 대사는 이 영화의 정서를 요약한다. 예술은 농담처럼 외면당하고 그 속의 진실은 더 이상 공유되지 않는다. 안개는 현실을 덮는 베일이자, 믿음을 요구하는 풍경이다.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항상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었어요. 믿을 것인가, 아니면 포기할 것인가. 아이들이 아버지를 찾는 여정은 결국 '우리 안의 상실'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지를 묻는 여정입니다.
(출처: Cannes Interview, 1995)

필름 안의 허구의 세계. 안개속의 풍경을 믿는가 하는 문제. 그것은 마치 본적도 만난 적도 없는 아빠라는 존재를 믿는 것과도 같다. 예술은 결국 실체 없는 희망에 관한 것이고 만질 수 없는 영혼에 관한 것이니 말이다. 그리고 아이들의 세계, 즉 동심은 이성과 논리의 세계가 아닌 감각과 정서의 세계이다. 이렇게 예술과 동심은 이 영화에서 하나로 이어진다. 그래서 예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환영받지 못하는 세계에 갇힌 두 남매는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떠돌 수밖에 없다.



4. 전쟁과 폭력의 반대말 혹은 반대세계

비 내리는 밤, 지친 아이들은 도로 위에 서서 지나가는 차를 붙잡으려 손을 든다. 도로 위 그들을 지나치는 차들. 차를 세우려는 보울라의 손이 애처롭다. 마침내 대형 트럭이 그들 앞에 서고 그들은 단숨에 뛰어가 트럭에 올라탄다. 트럭기사는 처음엔 인정을 베푸는 듯 하지만 곧 더러운 욕망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다음 장면, 식당에 들어오는 하얀 닭은 앞서 죽어가던 하얀 말처럼 또 하나의 순수를 상징한다. 서빙을 하던 주인은 놀라 쳐다보고 기회를 넘보던 중년 남자는 살금살금 다가가 닭을 홱 낚아채간다. 한 생명은 욕망 앞에서 맥없이 잡혀가고 죽음을 당하지만 어느 누구 말리거나 걱정하는 이가 없다. 몹쓸 짓을 당한 보울라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침묵하고 아이는 홀로 피를 흘린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연극배우 오레스테스만은 그들의 곁에 머무른다. 그는 예술의 사도처럼, 허구를 믿는 마지막 인간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틀어주고 바닷가에서 잠시 꿈을 꾸게 해 준다.

예술은 기억의 형태입니다. 잊히지 않기 위해 연극을 하고, 영화를 찍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잊으려 하죠.
(Theo Angelopoulos, L'Humanité 인터뷰, 2000)

전쟁과 폭력의 반대말 혹은 반대세계는 무엇일까. 이 영화는 영화 내내 그것을 물어보는 듯하다. 오레스테스의 오토바이를 타고 해변에 도착한 셋은 음악을 틀어놓고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한껏 들뜬 마음은 오래가지 못한다. 보울라는 해변에 털썩 주저앉아 결국 울고 만다. 곪았던 상처는 엉뚱하게도 해맑은 행복 앞에서 터지기 마련이다. 오레스테스는 이 영화에서 소녀 보울라의 성장을 돕고 두 남매의 일시적 보호자로서 역할을 함을 동시에 모순적으로 더 이상 예술이 발 붙일 수 없는 현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첫사랑에 눈 뜬 아직은 그 열 뜬 마음의 정체조차 모르는 소녀에게 첫 이별의 상처를 선사하기도 한다.

어느 날 그들 셋은 검지가 잘린 거대한 손 모양의 조각상이 헬리콥터로 옮겨지는 것을 목격한다. 잘린 검지는 비극적 운명을, 헬리콥터는 거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일까? 앞서 언급하였듯 이 영화에는 한 번 보아서는 도저히 해석할 수 없는 상징들이 가득하다.

어쩌면 전쟁과 폭력의 반대편에 존재하는 세계는 비유와 상징으로 가득한 허구의 세계일지도 모른다. 예술과 음악이 주인공이 되는, 이성이 아닌 감성과 상상이 중심이 되는 세계. 짙은 안개 너머 보이지도 않고 손에 닿지도 않는 나무를 끝내 믿는 세계 말이다.



5. Ending 엔딩

이 영화는 오프닝과 같은 대사로 마무리한다. 국경을 넘는 작은 보트를 타며 누나는 동생에게 묻는다.

무서워?
- 아니, 무섭지 않아.

둘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어둠은 멈추었던 이야기가 이어지고 두 남매가 유일하게 안정감을 느끼는 공간이다. 하지만 곧 국경수비대의 빛이 그들을 비춘다. 앞서 엄마의 등장으로 방문에 비추던 빛이 떠오른다. 이야기는 중단되고 아이들은......

과연 이 두 남매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을까? 영화가 흐르는 내내 안쓰러움과 미안함이 조용히 마음속을 흘렀다. 거대한 기계 앞에 한 마리 연약한 생명처럼 서 있는 보울라는 그 자체로 차가운 문명과 인간 사이에 놓인 마지막 순수의 형상처럼 보인다. 이 영화 속 그리스는 마치 감독이 현재 그리스의 현실을 미리 들여다본 듯 우울하고, 절망적이며 바람 한 점에도 을씨년스러운 기운이 감돈다. 시가행진을 하는 군인들, 땅을 뒤집는 공사장 기계들, 그리고 그 뒤편에서 너덜너덜 찢긴 공연 벽보와 흩어지고 밀려나는 예술가들. 이 영화는 단지 두 아이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서서히 사라지는 세계를 향한 조용한 애도의 노래이며 망각과 상실 앞에 무릎을 꿇고 바치는 한 예술가의 기도이다. 그리고 그 모든 정서를 조용히 감싸 안는 것은 엘레니 카렌드로(Eleni Karaindrou)의 음악이다. 그녀의 오보에 선율은 마치 아이들의 가슴속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고요하고 쓸쓸하며 오래도록 귓가에 맴돈다. 9번 트랙, 메인 테마는 이렇게 속삭이는 듯하다.


“어둠이 왔어. 그리고 그 안에서 아이들은 아직 빛을 믿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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