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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나는 혜성님 Oct 05. 2023

북한에서 남프랑스까지

아버지와의 마지막 통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셨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날따라 이상하게도 그 전화를 받고 싶었다. 하던 일을 멈추고 전화기를 들었는데 북한가족 소식을 자주 전해주는 고향 언니의 부재중 전화였다. 부녀간의 영혼으로 맺어진 연결의 끈이라도 있는 것일까? 그날 밤 이상한 꿈을 꿨다. 북에서 친하게 지냈던 사촌들과 삼촌 엄마와 그리고 내가 벌레 먹은 고목나무를 커다란 톱으로 세 동강으로 자르고 있었다. 외할머니가 갑자기 나타나 “너희들 왜 이런 짓 하느냐! 나무를 자르면 안 되잖아” 하며 슬픈 얼굴로 울고 계셨다. 외할머니가 돌아가 시기전까지 사시던 집이 있다. 현재는 사촌들이 삼촌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 집의 대들보가 휘어져 있고 할머니가 화난 얼굴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간밤 꿈자리가 뒤숭숭했던 차에 북한과 자주 연락을 주고받는 고향 언니의 부재중 전화를 확인하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떨리는 손으로 뛰는 가슴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보이스 톡을 걸었다. 고향 언니는 북의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얼른 북한 국경으로 전화를 해 보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를 남겨줬다. 전화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헤어진 지 어언 십수 년이 되었지만, 백 년이 지나 만났어도 단번에 알아봤을 것 같았다. 의심의 여지없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나의 결혼과 아이 출산 여부 등등 간단한 안부를 묻고 놀라지 말라고 하며 나를 진정시켰다.


"아버지 소식이에요?" 내가 먼저 물었다. 엄마는 놀라면서 어떻게 알았냐고 했다. 일 년 전에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고 했을 때부터 오늘을 예상했던 것 같다고 했다. 아버지는 나 때문에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나의 할아버지)를'간첩’으로 잃고, 평생을 정치적인 멍에를 메고 살아오다 보니 심장이 참 약했다. 멀리서 군용 트럭만 나타나도 하얗게 질려서 패닉에 빠지곤 했다.


한 번은 아버지와 손을 잡고 오룡천 강가로 강낚시하러 가는 길이었다. 2작업반에서 오룡천으로 가는 길 양옆에 백 살구나무가 가로수로 가득 심어져 있었다. 5월 말에서 6월 초로 넘어가는 시기였는데 백살구가 너무나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아버지에게 백살구 하나만 먹자고 따달라고 했다. 아버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우리 같은 사람들은 공공재를 함부로 만지면 큰일 난다고 먹고 싶어도 그냥 참으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은 백살구 한 알 따먹으면 그깟 살구 한 알 먹고 싶어서 따 먹은 거지만, 우리 같은 정치범 가족은 다르다. 평범한 사람들은 금덩이를 훔치고 우린 기껏 쇳덩이를 훔쳤었어도 나라나 당에서 볼 땐 쇳덩이를 훔친 정치범 가족을 더 나쁘게 본다. 당과 조국의 안위를 해치기 위해서라는 죄목이 붙으면 백살구 한 알도 정치범으로 엮기 충분한 구실이라고 했다. 바닥에 떨어져 나뒹구는 노랗게 익혀 달콤한 향을 내뿜는 백살구를 지르밟으며 강가로 향했다. 그러면서 늘 행동도 조심하고, 말도 조심하라고 했다. 10명 중 7명은 당이나 청년동맹에서 우리를 감시하라고 붙여준 밀정일 거고, 대부분은 친한 사람으로 너의 곁에 붙어 있을 거다. 사회에서도 학교에서도 아무도 누구도 믿지 말고 속에 품은 얘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했다.


평생을 그렇게 가슴을 졸이며 애달프며 살아왔을 텐데…

큰 딸이 월남을 했다니, 둘째 딸은 월남도주하다 잡혀서 정치범 수용소로 갔다니. 아버지가 제명에 살 수 있었을까? 동생이 정치범으로 잡혀가던 날 아버지는 보위지도원의 소환을 받았다. 보위부로 가는 길에 주머니에 주먹만 한 아편 뭉치를 숨겼다. 보위지도원의 심문을 받다가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아버지는 가지고 있던 아편을 엿가락을 씹듯 전부 씹어 삼켜버렸다.


성치 않은 노쇠한 몸에 다량의 아편을 삼켰으니 몸이 견뎌내지 못했고 그대로 뇌출혈을 일으켰다.

쓰러져 거품을 물고 있는 아버지를 쇠달구지에 싫어 엄마가 있는 집에 돌려보냈다. 엄마의 지극정성 간호로 조금 기운을 차리나 싶었다. 그 후 몇 번 나와 통화도 했었다. 마지막으로 통화를 했을 때였다. 평소엔 무덤덤한 아버지가 내 이름을 다정하게 불렀다.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딸이 곁에 있을 때 살뜰히 챙겨주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고, 이렇게 빨리 헤어질 줄 몰랐다고 미안하다고 했다. 부모걱정하지 말고 너만 행복하게 살아라. 너만 행복하면 우린 다 된다. 그 통화가 마지막이었다. 그 통화를 마치면서 마음이 참 이상했다. 어쩌면 내가 오늘의 소식을 오래전에 예상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부고를 들었는데 이상하리 만치 마음이 쉽게 진정 됐고 의외로 담담했다. 헤어진 지 오래되어 내 마음이 그리움을 이긴 걸까? 그날은 차분하게 진정된 마음으로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식구들과 저녁식사도 하고 평소처럼 대화도 나눴다.


한 2주쯤 흘러 인적 드문 남프랑스 시골길을 운전하면서 가로등을 바라봤다. 가로등에는 날파리떼와 나비 떼들이 원을 지으며 빙글빙글 돌면서 날고 있었다. 벌레들조차 밝은 불빛에 날아들면서 자유롭게 사는데, 아버지는 왜 그토록 두려움에 떨고 살았을까? 평생을 도둑처럼 숨어서 사셨을까? 아버지 삶에 대한 수많은 질문들이 떠 올랐다. 자유로운 세상 한 귀퉁이라도 보고 가셨으면 이렇게 가슴이 아프지 않을 텐데..


아버지의 다음생이 있다면 좀 더 자유로운 곳에서 태어나길..

북한에서만은 다시는 태어나지 말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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