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당 오준호 후보의 "주권화폐 공약"을 보고...
기본소득당 오준호 후보가 대선 공약으로 "주권 화폐"를 내놨다.
"주권화폐란 국가가 창조하는 화폐를 말합니다. 지금은 민간은행이 부채에 기반해 경제에 필요한 화폐를 창조하는 신용화폐 체제입니다. 신용화폐 체제에서 국가는 조세 수입액을 넘어 추가로 필요한 재정을 국채를 발행해, 다시 말해 국가부채를 늘리는 방식으로 조달합니다. "
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지금은 민간은행이 부채에 기반해 경제에 필요한 화폐를 창조하는 신용화폐 체제"는 맞는 말이다. 예를들어, 민간은행이 나에게 1000만원 대출해주면 (윽... 해줄까?), 은행은 내 통장 계좌에 1000만원을 입력해준다. 나에게 1000만원을 대출해주기 위해 은행은 사실 한푼도 필요없다. 놀랍게도 화폐는 이렇게 창출된다. 이걸 "신용창조"라고 한다. 그런데 이 화폐를 내가 "5만원짜리로 빵봉지에 담아주세요"라고 요청하면 은행에선 군말없이 군밤처럼 담아준다. 이건 분명 한국은행에서 찍은 5만원권, 국정화폐다. 은행은 자신이 보유한 국정화폐보다 많은 돈을 대출해줌으로써 화폐를 창조하지만, 어쨌든 요구하면 그 화폐를 "국정화폐"로 내주어야 한다. 모조리 한꺼번에 이걸 요청하지 않으니, 한푼도 없이 화폐를 창출할 수 있을 뿐이다.
신용화폐 체제를 비판하고 주권화폐가 필요하다고 하는걸보니… 새로 돈을 찍겠다는건 아니고 아마 상업은행의 "신용창조 행위"를 못하게 하려나보다. 그럼 은행이 대출은 안해주나? 아닐것 같다. 유일한 방법은 시중민간은행을 국유화하는 것이다. 참으로 바람직하다. (진짜다.) 내가 보기엔 "주권화폐"란 시중 민간은행의 국가인수다. 이걸 왜 '주권화폐'라고 말하는건지 알 수가 없다.
아마 여기에 정부 재정에 필요한 화폐를 국채 발행없이 "찍어서 조달하겠다"는게 더해졌기 때문에 뭔가 새롭고 거창하게 "주권 화폐"라고 이름 붙인 것 같다. 그런데 사실 이건 그냥 하면 된다. 경제학자들이 게거품을 무는 "부채의 화폐화"라는 방법이다. 정부가 채권을 발행하고, 중앙은행이 "직접 인수"하면 된다. 이 때 국채는 그냥 "기재부가 한국은행에서 한국은행권 가져감"이라는 국가 부처간 서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서류가 많아 진다고 나라가 빚에 넘어갈리 없다. 국가 부처간 인수증에 불과하니 말이다. 미국은 FED의 국채 직접 인수를 법으로 금지하고 채권시장을 거쳐야 하지만, 한국은 법적으로 직접인수가 가능하다.
그럼 "주권 화폐"라는 거창한 이름은 당췌 무엇인가?!
기본소득의 재원을 걍 찍어서 마련하겠다라는 의미 밖에는 없다.
그리고 이건… 기본소득과 MMT의 결합이다.
기본소득을 주장하는 사람도 여러종류가 있겠고 (나도 기본적으로는 기본소득론자다), MMT도 논자들에 따라 범위가 다양하지만, 이런 방식은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화폐를 "사회적 노동시간의 표현 형태", 즉 가치형태로 정의한다.
이건 화폐가 신용형태가 아닌 상품의 한 형태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 발행이 어떻게 이루어지건, 어떤 형식을 이루건, 화폐는 그 사회의 사회적 노동시간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본주의를 포함한 모든 사회는 그 사회 노동력을 그 사회의 필요한 생산에 분배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전의 신분제 사회에서는 '출신 신분'으로 개인의 사회적 노동이 결정되었다. 자본주의에서 이 사회적 노동의 분배는 "화폐"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건 자본주의가 하나의 경제체제로써 기능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따라서 화폐는 언제든지 생산물에 대한 권리가 되고, 노동자에게는 "노동에 대한 명령"으로 작동한다. 하지만 자본주의에서 화폐는 또한 노동시간의 표현 그 이상으로 사회적 기능을 지닌다. 화폐는 노동과 생산물 뿐 아니라 부동산과 채권, 주식 같은 "자산"을 매개한다. 자산은 생산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산시장을 뺑뺑이 돌며 화폐는 "자산의 가격을 올린다."
이 자산가격 상승과 우리가 흔히 두려워하는 "인플레이션"은 구별할 필요가 있다. 돈이 생산을 매개하지 않고 자산을 매개할 때 자산가격은 오르지만 생산물의 가격은 오르지 않는다. 2008년 이후 천문학적인 화폐량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부동산, 주식가격은 미친듯이 오르지만 물가는 참으로 착하게 최근까지 안정되었더랬다. 피케티가 빵! 뜬 이유다. 생산된 부가가치에 의해 분배된 소득에 비해 자산가치의 상승으로 발생한 자산 분배의 격차가 압도적으로 크다!
이 체제의 위기는 위 스토리가 지닌 모순 때문이다. 화폐는 "생산의 증식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러니 뭐… 국가가 막 찍어도 상관없다.
그런데 말이다… 그럼 마르크스 노동가치론의 화폐론은? 그땐 맞고 지금은 틀리냐?
아니다. 여전히 맞다. 여전히 화폐는 노동력을 분배해야 하고, 화폐는 따라서 지금도 "노동에 대한 명령이다".
지금 화폐는 "생산의 증식을 반영하지 않는다" 하지만 "노동에 대한 명령이다".
인플레이션 같은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화폐는 여전히 명령이고, 노동자에게 생명이지만, 생산되지 않은 명령, 찍어낸만큼 어딘가에서 비축된 힘으로 존재할 그 명령이 근거없이 우리의 노동을 명령하길 기다린다.
하루아침에 주식으로, 코인으로, 돈 벼락을 맞는 놈은 결국 가진 놈이지만, 아무나 가질 수 있게 하는게 평등이 아니다. 그렇게 "노동을 명령할" "화폐"를 쥐어줘선 안되는 것이다. 그것은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기본소득이 변혁의 기획이기 위해선 "마법의 제도"라는 환상을 버려야 한다. 새로운 체제의 목표를 설정하고 이행의 경로에서 기본소득을 배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