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성장, 비성장 그리고 반성장 사이에서 "반체제"의 의미
어쩌다 Degrowth (반성장)이 국내에 "탈성장"으로 번역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이 개념을 처음 소개한 이가 post-growth (탈설장), agrowth (비성장), degrowth (반성장)이라는 개념들이 서로 논쟁되어지며 "성장"을 "해로운 것"으로 정의하는 반성장 degrowth로 나아갔던 '개념사'에 무지했거나, 아니면 "경제성장은 해롭고 나쁜 것"이라는 이 비직관적 개념을 부담스러워 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덕분에 우리의 "탈성장 담론"은 저 개념들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반성장 degrowth이 정확히 지시하는 문제 - "성장을 필수"로하는 자본주의체제에 대한 '반체제 저항'으로의 성격은 플라스틱 컵과 빨대 대신 텀블러와 종이빨대로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는 부르주아 인텔리의 지성과 구분되지 않으며 이들간의 긴장은 제거된다. 반성장 degrowth에는 그린 뉴딜처럼 생산과정의 기초를 생태 에너지로 전환하고, 이 과정의 인프라 건설에 정부가 노동자들을 대규모로 직접고용하겠다는, 과거 케인즈주의 영광의 시대를 상징하는 "뉴-딜"의 생태적 버전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포함되지만, 우리의 "탈성장"은 이러한 급진성을 탈각시킨다. 그덕에 "계급투쟁"에 대해 한없이 말랑해지고 유연해진 한국의 운동진영에서 생태와 탈성장은 진보가 취할 수 있는 부담없는 주제로 쉽게 소비된다.
"성장은 해롭다"라는 "직관을 위배하는" 사실성은 "기술이 발전할수록 자본 수익성은 하락한다"라는 마르크스 "이윤율 저하의 경향적 법칙"이라는 비직관적 진실의 다른 버전이다. 원래 마르크스의 "기술발전" 개념에는 "성장"이 포함되지 않는다. 기술발전이란 필요한 사회적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더 적은 사회적 노동시간이 소요되도록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생산기술이 발전할수록 단위 노동은 보다 많은 생산수단을 운영할 수 있으며, 그를 통해 더 적은 노동이 필요생산에 소요된다. 기술발전을 통해 필요생산물을 더 적은 노동으로 생산할수록 인류는 물질적 생산 이외에 그 사회가 필요로하는 다양한 사회적 활동에 투여할 수 있는 사회적 노동시간을 확보하게 되고, 또는 개인들을 위한 보다 많은 "여가 시간"을 얻게 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인생 내내 우리 사회의 급속한 기술발전을 목도해 왔으면서도 내 가족을 포함한 공동체를 위해 할애할 수 있는 시간과 나 자신을 위한 여가시간이 늘어나는 것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오히려 "더 많은 노동시간"에 시달리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리의 "물질적 욕망"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특성 때문이다.
기술발전으로 필요생산에 더 적은 노동시간이 소요될 때, 이를 통해 발생한 "여분의 시간"을 공동체를 위한 사회적 활동과 개인들의 여가로 분배하는 것은 자연스럽고 정의롭다. 하지만 사적소유에 기초한 자본주의에서 사회적 노동의 분배는 이 "여분의 시간"을 사회적 약자들의 "실업"으로 현상한다. 자본주의에서 기술발전이 야기한 "여분의 시간"은 노동계급의 고통이 되고 이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서 기술발전이 창출한 "여분의 시간"은 제거되어야 한다. 자본주의에서 그 유일한 통로는 "성장"이다.
다른 한편, 필요생산물이 더 적은 노동에 의해, 따라서 상대적으로 더 많은 자본에 의해 생산될 때 산출물의 가치를 투하된 자본가치로 나누어 계산되는 이윤율은 하락하게 된다. 이 경우 자본이 동일한 생산규모를 계속 유지한다면 자본의 수익은 점차 감소할 수 밖에 없다. 자본이 보다 많은 수익을 얻기 위해서 자본은 노동이 자본으로 대체되는 속도 (마르크스는 이를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라고 표현했다) 보다 빠르게 "성장"해야 한다.
따라서 "성장"은 기술발전의 필연적 성질도 아니고 우리의 물질적 욕망이 야기하는, 이 욕망을 강제해야만 벗어날 수 있는 불가피한 굴레도 아니다. 이것은 "체제"에 의해 강제된, 이 체제의 구조적 속성이며 본질이다.
하지만 이 체제는 "성장"을 제거하고도 '어느정도는' 작동할 수 있다. 기술발전이 야기한 사회적 "여분의 시간"을 사회적 약자들에게 계속 "실업"으로 전가하는 것이다. 높은 실업률의 항상성은 노동계급의 임금협상력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킬 것이고 이를 통해 절약된 비용은 자본의 수익성 하락을 부분적으로 상쇄해줄 것이다. 또 다른 한편으로, 총생산의 증가를 억제한 가운데 대자본이 중소자본을 끊임없이 흡수하는 것이다. 이는 대자본의 입장에서 지속적으로 가중되는 이윤율 저하의 압박을 자기 자본 규모의 팽창을 통해 완화하는 방식이다. 모두다 성장하는 방식이 불가능하다면, 대자본만이 성장함으로써 수익성의 위기가 수익의 저하가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결국 자본주의 하에서 생태적 위기에 대응하는 "탈성장"의 우회는 극심한 양극화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결국 이 체제가 안정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 "성장"은 불가피하며, 이 불가피함에는 노동계급의 생존이 포함된다. 그렇기 때문에, 탈성장 post-growth이냐, 반성장 degrowth이냐는 질문은 그 자체로 문제의 본질을 보여주진 못한다. "성장없는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생존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성장은 "반체제"라는 자기 정체성 하에서만 진보적일 수 있다. "탈성장 담론"의 모호함으로 이 정체성의 질문을 피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