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런디피티

2020. 5.7

by conair

'세런디피티(serendipity)'는 뜻밖의 행운을 가리키는 말이다. 노벨의 다이너마이트, 플레밍의 페니실린, 스펜서 실버의 포스트잇 등이 세런디피티의 대표적인 예다. 영국의 18세기 문필가였던 호레이스 월폴이 만든 이 단어는 '세렌디프의 세 왕자'라는 동화에서 유래되었다. 세렌디프는 스리랑카의 옛 이름인데, 전설의 보물을 찾아 떠난 세 왕자가 보물은 찾지 못하고 그 대신 우연히 지혜와 용기를 얻는다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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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이야기는 대충 이렇습니다. 어느 날, 세 왕자는 낙타를 잃어버린 한 아프리카인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 세 왕자는 마치 본적이라도 있는 것처럼 그 낙타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겁니다. 낙타를 훔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저리 세세히 알랴 여긴 그 아프리카인은 세 왕자들을 관가에 고발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잃어버렸다던 낙타를 찾게 되었고, 왕자들은 무죄로 풀려납니다. 도대체 본 적도 없는 낙타를 어떻게 정확히 알 수 있었냐는 질문에 세 왕자는 이렇게 답하죠.

“왼쪽 길섶의 풀만 뜯어먹은 걸로 보아 오른쪽 눈이 먼 낙타요, 풀이 듬성듬성 뜯긴 걸 보면 이가 빠진 낙타요, 발자국이 다르니 한쪽 다리를 저는 낙타요, 한쪽 길가에는 개미들이 다른 쪽에는 벌이 우글대니 기름과 꿀을 실은 낙타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정재찬, 2020)

어린 시절 뉴튼이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도 뒷 뜰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는 것을 수도 없이 보았는데 왜 나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깨닫지 못했는지 자책하면서 앞으로는 모든 현상을 의문을 가지고 관찰해야겠다고 어린 생각을 했었다. 혹, 감나무 아래 누워서 홍시를 받아먹지 않아서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닐까? 더 어린 생각도 했다.


살면서 깨닫게 되었다. 100일 동안 감나무 아래 누워 감이 떨어지는 것을 두 눈 부릅뜨고 지켜보더라도 내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우연히 발견할 세렌디피티는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나는 케임브리지대학 재학 시절에 데카르트의 기계적 철학, 피에르 가생디가 부활시킨 원자론, 로버트 보일의 책을 통한 화학적 지식, 헨리 모어의 허미티지즘 전통을 배운 아이작 뉴튼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연한 뜻밖의 발견은 전문지식을 갖추고 부단히 노력하며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이들에게 찾아온다고 해서, 많은 전문가들은 세렌디피티의 법칙을 '준비된 자에게 찾아오는 우연'이라고 부른다.


나의 대학 동기 중 한 명은 완전한 아침형 인간이다. 그에 반해 나는 저녁형 인간이다. 대학시절 나는 결혼한 누나 집에서 기거를 했는데, 그 친구는 걸어서 갈 수 있는 윗동네에서 자취를 했다. 친구 집에 놀러 가면 9시가 되면 돌아와야 했다. 좀 더 놀고 싶어도 9시쯤 되면 하염없이 하품을 하며 졸려하는 친구 집에 더 머물 수가 없었다. 등교를 하기 위해 누나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있으면 ‘익수야 학교 가자’라는 소리가 대문 밖에서 들린다. 아침형 인간이다. 도대체 몇 시에 일어나길래 혼자 밥을 해서 차려 먹으면서 저렇게 일찍 오는지 늘 궁금했었다. 내가 왜 이 친구 이야기를 여기서 하는가 하면 이 친구가 ‘seredipity’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아침형 인간 내 친구는 영주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데, 그 덕분에 소백산은 내가 가장 많이 가 본 산이 되었다. 주로 삼가동 코스와 초암사 코스를 번갈아 가면서 비로봉과 국망봉을 올랐다. 희방사 코스도 몇 차례 이용했다. 가장 많이 이용한 코스는 삼가동에서 비로사를 거쳐 비로봉으로 가는 코스다. 올라가는 데 3시간 정도 걸린다. 일 년에 서너 차례는 친구 집을 베이스 켐프로 하고 놀다가 온다. 무작정 간다. 일이 있다고 해도 간다. 몸이 안 좋다고 해도 간다. 일단 가면 환대다. 그래서 기를 쓰고 간다. 혼자가 아니라 보통 5명이 떼 지어 간다. 이렇게 허락도 안 받고 마구잡이로 갈 수 있는 것은 실상은 내 친구의 부인 때문이다. 친구보다 친구의 부인이 더 우리를 반겨준다. 아침형 친구가 결혼을 참 잘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친구가 몇 년 전 전원주택을 마련했다. 20여 가구가 모여 사는 전원주택 단지에서 산다. 미적 감각이 뛰어난 부인 때문인지 전원주택은 외관부터가 모던하면서도 기품이 있다. 실내는 2층으로 되어 있는데 2층에서는 대형스크린으로 영화도 볼 수 있다. 대문이 없는 집 입구 한 귀퉁이에 나무 푯말이 하나 있다. ‘Serendipity’라는 영어 단어를 거기서 처음 보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처음에 그것의 의미를 몰랐다.


어느 여행객이 가난한 나라를 여행하다가 자신이 직접 만든 공예품을 팔고 있는 여인에게 값싼 물건을 하나 사고 100불을 주었다. 100불이면 그 여인의 한 달 수입 정도가 되는 액수이다. 그 여인은 힐끗 고개를 들어 이방인 여행객을 보더니 짐을 정리해 집으로 돌아갔다. 아마도 굶주리고 있는 아이나, 가족을 위해 서둘러 짐을 챙겼을 게다. 그 여인에게 그 이방인 여행객은 ‘세렌디피티’가 아니었을까?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런 이야기를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내 형편없는 기억력에 의하면 한국의 오드리 햅번 김혜자 씨가 아프리카 봉사활동 후 쓴 책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에서 읽은 것이다.


나도 언젠가 이와 같은 세렌디피티를 꼭 여행지에서 해 보아야지 생각만 하고 있다. 참 얕은 생각이다. ‘항상 어디서나 누군가에게 세렌디피티가 되도록 노력이나 하시오’라고 누군가 내게 속삭인다.


매력적인 입술을 가지려면

친절한 말을 하라.

사랑스런 눈을 가지려면

사람들 속에서 좋은 것을 발견하라.

날씬한 몸매를 원하면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눠주라.

아름다운 머릿결을 가지려면

하루에 한 번 아이로 하여금 그 머릿결을 어루만지게 하라.

균형 잡힌 걸음걸이를 유지하려면

당신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며 걸으라.

물건뿐 아니라 사람도

새로워져야 하고, 재발견해야 하며, 활기를 불어넣어야 한다.

어떤 사람도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당신 역시 팔 끝에 손을 갖고 있음을 기억하라.

나이를 먹으면서 당신은 알게 될 것이다.

당신이 두 개의 손을 갖고 있음을,

한 손은 당신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 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꽃으로도 때리지 마라>(김혜자,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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